예수께서 지난 저녁의 소나기로 아주 깨끗하게 씻긴 정원으로 나오신다. 그리고 작은 화초들 위에 몸을 구부리고 계신 어머니를 발견하신다. 예수께서는 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어머니께로 가신다. 그분들의 입맞춤은 얼마나 즐거운가! 예수께서는 어머니의 어깨를 왼팔로 끌어안으시고 끌어당기시어 이마의 머리가 나기 시작하는 부분에 입맞추시고 나서 어머니가 뺨에 입맞추시도록 몸을 굽히신다. 그러나 이 행위의 우아함을 완성하는 것은 입맞춤을 하시며 바라보시는 눈길이다. 예수의 밉맞춤은 완전히 사랑으로 뭉쳐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위엄있고 보호자다운 무엇이 들어 있다. 그리고 마리아의 입맞춤은 온전히 사랑이면서 동시에 온전히 공경이다. 이 입맞춤에서는 예수께서 연세가 더 많으신 것 같고, 마리아는 아버지나 훨씬 나이 많은 오빠에게 아침인사의 입맞춤을 받는 나이 어린 소녀와 같으시다.
“어머니의 화초들이 엊저녁의 우박과 밤에 분 바람으로 많이 상했습니까?”하고 예수께서 물으신다.
“아무 손해도 없었습니다. 선생님. 그렇지만 나뭇잎들은 좀 헝클어졌습니다”하고 마리아보다 먼저 베드로의 좀 쉰 목소리가 대답한다.
예수께서는 머리를 쳐들어 시몬 베드로를 보신다. 베드로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속옷바람으로 무화과나무 윗쪽에 뒤틀린 가지들을 바로잡으려고 애를 쓰고있다. “벌써 일을 하느냐?”
“어이구! 저희 어부들은 물고기들처럼 잡니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이 저희를 가만두기만 하면 잡니다. 그것이 습관이랍니다. 오늘 아침 새벽에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고 저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몬아, 어머님이 벌써 일어나셨다. 빨리 가자! 가서 네 투박한 손으로 어머님을 도와드려라’ 하고요. 저는 바람이 몹시 분 지난 밤에 어머님이 당신 꽃들을 걱정하셨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야! 저는 여자들을 알거든요! ‥‥ 제 아내는 폭풍우가 있을 때면 침대에 마치 그물에 든 고기들같이 몸을 뒤척입니다. 그의 화초를 생각하는 것입니다‥‥가엾게두! 어떤 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남편이 호수에서 풍랑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는 이보다 덜 불안해하지. 틀림없어’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옳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착한 아내이니까요. 제 아내는 어머니를‥‥ 이제 그만 입다물어라. 베드로야.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불평을 하는 것은 좋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을 조심성없이 알리는 것도 좋지 않다. 아시겠습니까 선생님! 우둔한 제 머리에도 선생님의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웃으시며 대답하신다. “네가 다 말해버렸으니 내가 할 일은 네 말을 인정하는 것뿐이고, 네 정원사로서의 지식을 감탄하는 일뿐이다.”
“베드로는 끌러졌던 포도나무 햇가지들을 벌써 모두 다시 잡아맸단다” 하고 마리아가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열매가 너무 많이 달린 배나무를 층층으로 자르고, 한쪽으로만 자란 석류나무 밑으로 밧줄을 돌려 동여맸단다.”
“그렇구 말구요! 이 나무는 늙은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습니다. 제멋대로 기울어지거든요. 그놈을 돛을 정리하듯 정리하고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옳은 것은 중용(中庸)에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무게에 눌려 부러지지 않게 이리로 오너라. 이 돌대가리야’ 하고요. 이제는 무화과나무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기심으로 그러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의 입맛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싱싱한 무화과에다 따끈한 빵! 아! 안티파스 자신도 이런 맛있는 식사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심조심 다루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지는 첫사랑 고백을 하는 소녀의 마음처럼 부드럽거든요. 그리고 저는 무거운데 제일 맛있는 무화과들은 맨 꼭대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들은 이 아침 첫햇살에 벌써 말랐습니다. 맛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 이 총각, 우두커니 서서 나를 쳐다보지만 말고 잠을 깨고, 그 바구니를 주게!”
작업장에서 나오는 요한은 복종하여 자기도 큰 무화과나무에 기어올라간다.
두 어부가 나무에서 내려올 때에 열성당원 시몬과 요셉과 가리옷의 유다도 작업장에서 나왔다.
마리아는 신선한 빵을 가져오신다. 둥글고 작은 검은 빵이다. 베드로는 그의 고기칼로 빵들을 가르고 무화과들도 위로 해서 갈라 예수께 드린 다음 마리아께도 드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준다. 그들은 공기를 맑게 한 어제 비로 아름다워지고 맑은 아침해로 빛나는 시원한 정원에서 맛있게 식사를 한다. 베드로가 말한다.”선생님, 오늘이 금요일이고‥‥ 내일이 안식일인데요‥‥.”
“다 아는 사실 아닌가?” 하고 가리옷 사람이 지적한다.
“그렇지, 하지만 선생님께서 무슨 뜻인지 알고 계셔‥‥.”
“안다. 오늘 저녁 네가 배를 매어둔 호수로 가서 가파르나움으로 가자. 내일 그곳에서 말하겠다.”
베드로는 몹시 기뻐한다.
토마, 안드레아, 야고보,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유다 타대오가 떼를 지어 들어온다. 분명히 다른데 가서 잔 모양이다. 서로 인사를 나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여기 모여 있자. 그러면 새 제자가 또 한 사람 올 것이다. 어머니, 오세요.”
예수를 둘러싸고 어떤 사람은 바위에, 어떤 사람은 걸상에 앉는다. 예수께서는 집에 기대어 놓여 있는 편편한 돌에 앉으셨다. 예수 곁에는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 요한은 바로 가까이 땅바닥에 앉아 있는 것이 더 좋아서 예수의 발앞에 앉아 있다. 예수께서는 늘 그러시는 것과 같이 조용히 그리고 위엄있게 말씀하신다.
“사도직 교육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겠느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자 보아라. 겨울에는 땅이 죽은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씨앗들이 활동하고 수액(樹液)은 습기에서 영양을 얻어 땅속의 잎들을-뿌리를 이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부풀게 해서, 꽃철이 되었을 때 땅위에 꽃을 피우기 위하여 많은 저장을 해둔다. 너희들도 메마르고, 헐벗고 거칠은 겨울땅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들 위로 씨뿌리는 사람이 지나가면서 씨를 뿌렸고, 너희 곁으로는 경작하는 사람이 지나가면서 이 땅과 같이 단단하고 울퉁울퉁한 땅에 심어진 너희들의 나무 줄기 둘레로 땅을 깊이 파해쳐서, 장차 맺을 열매들을 든든하게 하기 위하여 구름과 공기를 통하여 영양분을 뿌리에까지 내려갈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너희들은 하느님의 일에서 열매를 맺겠다는 착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씨를 받고 삽질를 받아들였다.
나는 사도직 교육을 또 초목들을 때리고 넘어뜨려서 사람들이 무익한 폭력이라고 판단한 저 뇌우에 비교하겠다. 그 뇌우가 얼마나 좋은 일을 했나 보아라. 오늘은 공기가 맑고, 소나기가 먼지를 가라앉혔고 모든 것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태양은 어제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빛살이 맑아지고 시원해진 공기층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기 때문에 열을 나게 하는 저 뜨거운 기운은 없어졌다. 푸른 잎들과 초목들도 사람들과 같이 고통이 덜어졌다. 그것은 깨끗함과 맑음이 기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대조(對照)들까지도 더 정확한 지식과 더 분명한 명백에 이르는 데 소용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악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조라는 것은 여러 가지 종류의 구름이 일으키는 뇌우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리고 그 구름들은 쓸 데 없는 언짢은 기분과 조그마한 질투들과 몽롱한 교만으로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쌓이지 않느냐? 그러다가 은총의 바람이 와서 그 언짠은 기분들을 깨끗하게 하여 다시 맑게 만들어 놓는다.
사도직 교육은 또한 오늘 아침 베드로가 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던 일과 비슷하다. 즉 경향과 필요에 따라서 다시 일으키고, 다시 붙잡아 매고, 버티어 주고, 풀어주고 하여 너희를 하느님을 섬기는 데 ‘강한 자’들이 되게하는 것이다. 그릇된 생각은 바로 잡아주어야 하고, 육체의 요구를 억제해야 하고, 약한 것을 붙들어주어야 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성벽(性癖)들을 조절해야 하고 속박과 소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너희들은 자유롭고 강해야 한다. 그들이 태어난 산꼭대기를 버리고 점점 더 높이 날아 올라갈 생각밖에 안하는 독수리들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나는 것이고, 정은 산꼭대기와 같은 것이다.
너희들 중의 한 사람은 오늘 슬프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진리와 진리를 따르는 그의 아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죽음에 가까이 가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을 닫는 것보다도 더하게 진리에 대하여 적의를 품은 마음을 가지고. 그렇지만 불의의 사람이 자신을 하느님보다 더 높다고 주장하면서 어제 내가 말한 것과 같은 ‘나가시오’ 하는 말을 그에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꼭 닫힌 그의 마음과 꽉 다물어진 그의 입술은 아직도 ‘너를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라’ 하는 말을 하지 못한다. 너희들에게 말하는 나나 그의 아들도 그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겠다고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오너라, 그리고 너와 함께 선생님도 오시라고 해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집에서 당신을 위한 하인을 선택하셔서 주님의 말씀과의 혈연 관계보다 더 고상한 친척 관계를 만들어 주신 데 대해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 바란다’고.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의 이익을 위하여, 또 그의 아들은 한층 더 복잡한 동기로 그에게서 적의를 덜 품을 말들을 듣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아들은 울지 말기 바란다. 그는 내가 그의 아버지에 대하여 원한도 업신여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게는 연민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왔다 그리고 기다려야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기다렸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아이고! 왜 오지 않았어?’ 하고 내게 말하지 않게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그 아들에게 마음이 원한을 품고 꼭 닫혀 있으면 모든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설득하려고 왔다. 나는 또 가정에 칼로 섬유다발을 갈라놓는 것 같은 분열이 있는 것을 괴로워하는 착한 사람을 위로해 주기 위하여 왔다‥‥그러나 이 아들과 이 착한 어머니는 내가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 바란다. 나는 그의 믿음이 빗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이 이 시간까지 머물러 있었던 점에 충실한 나이먹은 믿는 이의 성실성을 존중한다. 그와 같은 사람이 이스라엘에 대단히 많이 있다‥‥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들보다는 이교도들에게서 더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다. 인류는 구세주에 대한 사상을 왜곡하여 구세주의 초자연적인 왕권을 인간적인 주권이라는 보잘 것 없는 사상으로 전락시켰다. 나는 히브리지상주의의 단단한 껍질을 쪼개고 뚫고 들어가고 상처를 내서 그안에까지 이르러 히브리지상주의의 혼이 있는 그곳에 새로운 율법의 풍요함을 갖다주어야 한다.
오! 시나이산에서 받은 율법이라는 생명을 구성하는 핵 주위에 돋아난 이스라엘은 정말이지 점점 더 섬유가 많아지고 단단해진 과육을 가지고, 바깥쪽으로는 아무것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싹조차도 돋아나지 못하게 하는 껍질이 덮여 있는 괴물 같은 실과와 같이 되었다. 그러나 영원하신 분께서는 하나이시요, 3위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새로운 나무를 창조하실 때가 왔다고 판단하셨다. 나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히브리지상주의가 그리스도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구멍을 파고 뚫고 스며들어가 핵심에까지 들어가서 그것을 내 사랑으로 가열되어 깨어나고, 부풀어 오르고, 싹이 트고, 자라고 자라고 또 자라서 완전하고 영원하고 하느님에게서 온 종교인 그리스도교라는 강력한 나무가 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이지 히브리지상주의는 백에 하나꼴로밖에는 뚫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내게 주기도 원치 않는 저 이스라엘 사람을 하느님께 버림받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바이다. 자기를 낳아준 살과 피에 물리침을 받는 것을 괴로워하는 살과 피 때문에 울지 말아라. 나는 이런 말도 하겠다. 영 때문에도 울지 말아라. 네 고통은 다른 무엇보다도 네 영과 그의 영을 위하여, 즉 네 아버지이면서 이해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그 아버지의 영의 이익이 되도록 힘쓰고 있다. 나는 또 이렇게 덧붙이겠다. 네 아버지에게보다 하느님께 더 속해 있는 것을 꺼려하지 말아라. 너희 모두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보다 더 높으시다. 나는 이 세상의 방식대로 혈육을 결합시키려고 오지 않고 영적으로 또한 천상적으로 결합시키려고 왔다. 그러므로 나는 살과 피인 것을 분리시켜,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높은 데까지 올라갈 수 있는 영들을 데려다가 하늘의 종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강자들’을 불러서 한층 더 강하게 만들려고 왔다. 그것은 온화한 사람들의 군대가 ‘강자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형제들에게는 온화하고 자기 자신의 자아와 혈연의 자아에 대하여는 강한 사람의 군대 말이다.
사촌, 울지 말아라. 분명히 말하지만, 네 고통은 너의 어떤 말뿐 아니라 나의 어떤 말보다도 네 아버지와 네 형제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대하여 더 많은 작용을 하고 있다. 편견이 가로막고 있는 곳에는 말이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은총은 들어간다. 희생은 은총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다.
정말 잘들 들어두어라. 내가 어떤 사람을 하느님께로 부를 때에는 이 부름에 응하는 순종보다 더 고결한 순종은 없다. 그리고 부름에 대한 우리의 충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반항하겠는지 계산하느라고 머뭇거리지도 말고 응해야 한다.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기 위해서도 머뭇거려서는 안된다. 너희들은 이 영웅적인 행위에 대하여 보상을 받을 것이다. 보상은 너희들의 것일 뿐 아니라,너희들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부르짖음과 더불어 이별하는 사람들, 너희들을 배은망덕하는 아들이라고 비난하고, 그들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너희들이 반역자인 것처럼 저주하기 때문에 뺨을 때리는 것보다도 더 심하게 너희를 때리는 말을 하는 그 사람들의 것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반역자가 아니라‥‥ 성인들이다.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첫째 원수는 그들의 가족이다. 사랑과 사랑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초자연적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초자연의 주인을 그 주인의 하인들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부모를 하느님을 통하여 사랑할 것이지 하느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그만두시고, 일어나셔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잘 참지 못하는 사촌 곁으로 가신다. 예수께서는 그를 쓰다듬으신다. “유다야‥‥ 나는 내 사명을 따르기 위해 내 어머니를 떠났다. 이것으로 네 행동의 성실성에 대한 주저를 일체 물리쳐야 한다. 만일 그것이 좋은 행위가 아니었더라면, 결국 나 하나밖에 없는 내 어머니에 대하여 그렇게 할 수가 있었겠느냐?”
유다는 예수의 손을 잡아서 자기 얼굴로 가져가며 머리로 동의한다는 표를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처럼, 알패오 아저씨가 나를 나자렛에서 가장 분별있는 소년이라고 생각하시던 때와 같이 우리 둘이서만 가자. 노인에게 금빛깔나는 이 아름다운 포도송이들을 갖다 드리자. 내가 아저씨를 저버리고 아저씨께 적의를 품고 있는 줄로 믿지 않으시게 하자. 네 어머니도 야고보도 이것을 기뻐할 것이다. 나는 아저씨에게 내일 가파르나움에 갈 것인데 당신의 아들은 온전히 아저씨의 것이라고 말씀드리겠다. 노인들은 어린아이들 같단 말이다. 노인들은 샘이 많아. 노인들은 항상 사람들이 그들을 소흘히 한다고 생각한다. 노인들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정원에 남겨두신 채 사라지신다. 제자들은 예수 때문에 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생긴 고통과 몰이해의 폭로로 말을 잃고 있다. 마리아는 예수를 문까지 배웅하셨는데, 이제는 괴로운 한숨을 지으시며 돌아오신다.
–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