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미디어 시대의 성교육 기초과정 10주를 수강한 사제직을 지망하는 가톨릭 신학생이 “사랑과 책임 연구소”에 보낸 글입니다.  깊이 있게 읽어봐야 할 내용이 많은 글입니다. 꼼꼼하게 읽어주세요.

 


 

우연한 계기로 교수님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교수님의 특강을 듣고 나서 교수님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수님 수업의 수강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9월부터 12월까지 수업이 있었다.

매주 월요일! 월요일은 사목실습을 하던 내가 일주일에 하루 쉴 수 있는 날이었다. 나는 너무 기쁜 마음으로 수강 신청을 하였고, 두 시간 강의를 듣기 위해 00에서 수원까지 매주 왕복을 해야 했다. 매번 쉬운 걸음은 아니었다. 귀찮아서가 아니다. 아팠기 때문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줄곧 아픔을 느껴야만 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비참한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아팠다. 대중 매체를 의식 없이 받아들였던 결과 방황했던 내 모습이 보여서 아팠다. 중학교 때까지 성경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있었다. 하지만 첫 날밤까지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는 것이 남자의 로망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언제부턴가 달라져있는 내 성에 대한 인식을 발견했다. 흔히 말하는 처녀(아다)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야말로 남자의 로망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친구들의 영웅담을 부러워했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대중문화 안에 담겨있는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희생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사고가 방탕하게 변화하던 시기에 ‘성인식’이라는 노래의 안무를 연습하던 나를 발견했다. 춤을 소화하기 위해 가사를 외우고 분위기와 눈빛을 몸에 익혔다. 뮤직 비디오를 백번은 돌려봤었다. 그렇게 내 의식 안에 장면 하나하나,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자리 잡았다. 자연스럽게 처녀막이 터지는 성관계에 대한 동경을 품은 것이다.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대면하면서 강의를 들어야 했다.

두 번째로 아팠던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온갖 경쟁에 부추김을 당하고 있는 아이들이다. 살아남기 위해 공부해야 된다고 주입당하는 아이들이다. 이미 꿈을 꾸는 것조차 힘든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취업을 목표로 대학에 다니는 취업준비생들만 봐도 마음이 먹먹하고 안타까운데, 우리 청소년들은 미래가 더 어둡다. 경쟁에 몰리고 자본에 몰려서 점점 갈 곳이 없어진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유일한 출구는 핸드폰, 인터넷, TV여서 더 절망스럽다. 매체들이 그려가는 청사진들이 더 어둡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청소년들이 즐겨 따라 추는 춤은 ‘위아래’이다. 보기 민망한 수준의 노랫말과 안무다. 이를 우리 본당 5살 꼬마 아이도 신부님 앞에서 춤 솜씨를 뽐낸다. 부모님 몇 분과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어쩔 수 없다고 하신다.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친구들과 어울리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신다.

마지막으로 아팠던 이유는 어른들 때문이다. 지각있는 어른들, 덕망 높은 어른들, 존경받는 어른들. 모두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다. 자본의 논리에 마취되어 있는 상태이다. 죄의식도 없다. 스스로 방어 기제를 발휘하여 정당화시킨지 오래다.

그래서 저질스런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 한다. 음란물에 나올 법한 춤을 만들어 가르친다. 입에 담지 못할 가사들을 써서 전달해준다. 결정적으로 딸 나이 되는 아이들을 상대로 노출을 예술로 둔갑시킨다. 먼 훗날 자신들이 벌인 일들을 돌아볼 때 자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가리어진 진실들이 밝혀질 때, 자신이 파괴시킨 생명에 대한 가치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그 모습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괴로운 마음이 든다.

성의 본질은 생명이다. 쾌락이 아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라. 아직 눈을 뜨지 못해 몸의 감촉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는 그 자그마하고 위대한 생명력! 그 생명은 사랑의 산물이지 쾌락의 산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루카 18,19) 그런데 자본과 성이 밀접히 결합된 이 세상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착한 가격’, ‘착한 몸매’ 이런 서글픈 광고가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진다. 어떻게 가격이 착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인간의 몸매가 착할 수가 있을까? 자본과 성이 밀접히 결합된 이 세태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문화라는 이름으로 남성미, 여성미를 상품화하는 자본의 장난들,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일들을 즐겁게 포장하는 그 일들에 대한 분석을 끝났다. 더 이상 아파만 하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 아픔은 치유해야 한다. 곪아 썩어 문드러지게 방치하면 병든다.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다.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한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 나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이들이 보는 드라마가 무엇인지, 즐겨듣는 음악이 무엇인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드라마가 조장하고 있는 성 윤리에 대해서 그 노래가 담고 있는 가치관에 대해서 따져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보는 드라마, 우리 아이들이 듣는 음악들이 아이의 미래를 좌우한다면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알려야 한다. 부모님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친구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아이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요즘 보는 드라마는 무엇인지, 요즘 하고 있는 게임은 무엇인지, 요즘 좋아하는 연예인은 누구인지 너무 쉽게 꺼내놓을 수 있다. 그렇게 관심사만 묻고 끝내서는 안 된다. 침묵은 암묵적 동의라고 했다. 그 드라마가, 그 게임이, 그 음악들이 나에게, 각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 있도록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나에게 큰 용기가 필요하다. 아이들은 고리타분하다고, 잔소리 같다고 거부할 수도 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피곤한 사람이 될 것이다. 사실 그런 이미지가 되는 것은 상당히 두렵다.

그러나 분명 나는 알고 있다. 아이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한다면 좋은 목자일 수 없다.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십자가 아래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외치고 있다. 예수님을 모욕하고 비난하고 멸시하고 심지어 죽이라는 말들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결함 없는 그분의 사랑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비난을 받으면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천상 군대를 불러 한방에 물리칠 수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죽음을 물리치는 유일한 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강한 것이 사랑임을 알려주셔야 했기 때문이다. 주님 저에게도 당신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진실을 알리고 사랑하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비난받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매스미디어가 조작하는 죽음의 문화가 뿌리 뻗는 이 세상에서 나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바로 이것이다. 미움을 받아가면서도 끝까지 진실을 외칠 수 있는 사랑! 죽음의 문화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물리쳤던 그 사랑을 따르는 길이다. 기꺼이 사랑을 선택하는 목자가 되길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린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저의 사랑에는 결함이 많습니다. 결함이 없는 당신 사랑의 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죽음의 문화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저의 사랑을 채워주소서.

 

– 미디어 시대의 성교육 기초과정 10주를 마친 가톨릭 신학생의 고백
– 사랑과 책임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