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마귀, 무언의 마귀란 것은 곧 음란함의 마귀, 사음의 마귀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
  사음죄란 무엇인가? 하느님의 제6계와 제9계가 금하는 모든 죄를 말한다.
  음란함은 매우 큰 죄로서 하느님이나 사람 앞에서 가장 추잡하고도 가증스런 죄악이다. 이 죄를 범한 사람은 짐승의 세계로 떨어져도 시원치 않다. 이 죄는 다른 많은 죄를 덩달아 범하게 하는 원인이 되어, 현재나 미래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벌을 받는다.
  성서는 이 음란의 죄는 가장 추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극도로 악한 범죄요, 가장 싫고 꺼리는 행위이므로 들먹이기조차 거북한 추잡하고도 무서운 죄악이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런 죄를 범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교부들도 이구동성으로 지옥으로 제일 많이 떨어지는 영혼은 사음죄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하기를 마귀는 교만으로 지옥에 떨어졌고, 사람은 사음으로 지옥을 채운다고 했다. 성 알퐁소는 지옥에 빠지는 신자는 대개 사음죄 때문이요, 적어도 사음죄 아니고는 지옥에 빠지는 사람이 없다고 극단적으로 말했다.
  어째서 그러할까? 중요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음란함의 죄는 매우 범하기 쉬운 죄요, 둘째는 이 죄는 매우 고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 범하기 쉬운가 하면 사음이 죄가 되는 불결한 행위일 뿐 아니라 그 극단에 이르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쁜 눈짓, 고약한 책, 추잡한 노래, 더러운 몸짓, 악한 이야기, 방탕한 교제와 연애뿐 아니라 마음으로 즐기는 것까지 모두 사음죄가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죄는 고치기 어려운가? 이 죄를 한번 범하게 되면 자연히 계속해서 범할 쾌락에 빠지게 되고, 그 횟수가 거듭될수록 고칠래야 고치기 어려운 관습의 사슬로 스스로 자기 몸을 묶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죄로 떨어지는 사람이야말로 불행하다!
  그런데 고해가 어째서 이 무서운 사슬을 끊는 데 효력이 없을까? 그 고해가 바른 고해였다면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되겠지만 바로 여기에 벙어리 마귀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이 마귀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사람의 입을 막고 죄를 고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죄를 바로 고해하면 의심 없이 사함을 받고, 또한 음란의 악한 야욕을 차츰 눌러 이길 수가 있다. 왜냐하면 고해는 악한 야욕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무언의 마귀는 어둠을 좋아한다. 그러나 고해는 빛을 가져오고, 이 빛으로 마귀를 쫓으며 죄인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죄가 얼마나 더럽고 고약한 것인가를 알게 해준다.
  마귀는 있는 힘을 다하여 바른 고해를 못하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이 꾐에 걸려든 사람은 대개 모고해를 하기 시작하고, 한번 모고해를 하면 그 다음은 계속해서 모고해, 모령성체까지 하게 된다. 하느님은 이런 죄인을 아주 버리시지는 않지만, 음란함의 죄의 버릇이 든 사람은 스스로 하느님을 멀리하고, 하느님을 생각지도 않으려 하고, 점점 죄가 깊어지면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사음은 참혹한 죽음의 어머니라고 불리운다.
  어느 성인이 말하기를 “부정한 생활은 부정한 죽음을 부르나니 그 이유는 흔히 음란의 버릇이 든 사람은 임종 때도 고해를 잘 하지 않으려 하며, 죄를 통회하여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못하여 고해하기를 꺼리고, 해봐야 모고해를 하여 스스로 하늘나라를 잃고 지옥으로 떨어진다.” 라고 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른바 종교개혁가라는 마르틴 루터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였다. 그는 불결한 사랑 때문에 수도원에서 나왔고, 모교를 떠나 이교를 세워 신자들에게 매우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마침내 그 불결한 사람들 속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밤 루터는 애인 가타리나와 함께 어떤 여관 창문 곁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타리나는 맑고 푸르고 드높은 하늘에 무수한 별이 반짝이고 있는 것을 쳐다보고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 못해 그에게, “마르틴! 저 하늘을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루터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오 가타리나! 하늘은 곱고 아름답지만 우리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이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자기가 죄악에서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그는 잠깐 그 여관에 머무르다가 거기서 무서운 실망 끝에 죽고 말았다 한다.
  불결한 생활은 불행한 죽음을 부른다!
  또 다른 종교개혁가라던 칼빈의 상속자이며 다른 종교의 기둥이라고 불리우던 테오도르 베사가 중병에 걸렸을 때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이 그를 방문했다. 성인은 열심히 그가 다른 종교를 버리고 카톨릭으로 돌아오도록 권하고 갖은 수단을 다했다. 테오도르는 성인의 따듯한 권유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때때로 깊은 한숨만 쉴 따름이었다.
  할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성인이 그에게 물으니 테오도르는 겨우 윗몸을 일으키더니 옆에 숨겨놓은 침대의 휘장을 잡아당기며 그곳에 있던 여성을 가리키면서 “제가 회개하여 영혼의 구함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저 여성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며 또 다시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보라! 이런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래도 죄악에서 떠나지 못한다.
  또 무서운 다른 이야기 한 가지를 들어보자.
  어떤 읍내 향락과 허영에 빠져 춤에 미친 계집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두어 차례 회개하라는 권면도 받았지만 교만한 마음으로 그것을 비웃을 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명랑하고, 재빠르고, 활달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했다. 어머니는 여러 사내가 딸의 곁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고 매우 만족하며 그 중에서 좋은 사윗감을 골라 결혼만 시키면 딸도 침착해지리라 생각하고 딸의 방탕한 생활을 마음대로 하라고 맡겨두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천박한 생각으로 딸의 참된 행복을 그르치는 어머니들이 적지 않다. 도대체 그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중병에 걸렸다. 간병하러 온 이웃집 착한 부인이 신부를 청해 갖은 성사를 받고 임종 준비를 하라고 권했더니 그 딸은 고집을 피우며 말하기를, “무엇이라고요? 이렇게 젊고 아름다움 제가 죽을 것 같습니까? 저는 안 죽으렵니다. 어떻게든 저는 죽지 않아요.”라며 자신만만했다.
  결국 신부가 와서 매우 위중하니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라고 권했다.
  “죽다니요? 제가 죽어요? 저는 살고 싶은데요. 저는 죽기 싫습니다!”라고 그녀는 대답한다.
  그래도 신부는 열심과 인내로써 구너하는데, 점점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흐려짐을 깨달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용을 쓰며 맹수처럼 소리지르기를, “아, 저는 아무래도 죽을 것이니까! 마귀야, 네가 와서… 네가 내 영혼을 가지고 가라…”고 말하더니, 홑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실망하면서 그만 숨지고 말았다.
  아, 참으로 불결한 생활은 불행한 죽음을 가져온다!
  또 한가지 실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어떤 신사가 자기 집에 나쁜 계집을 데려다 놓고 함께 살았다. 친구들이 그 계집을 쫓아내라고 권해도 그는 항상 거절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두 남녀는 갈라지지 않으면 안될 일이 생겼다.
  그 불쌍한 신사가 중병에 걸려 거의 임종에 다다르게 되었다. 신부가 오고 마지막 성사를 베풀 준비가 되었다. 신부는 간곡하게 권하여 선종하도록 노력했다.
  신부의 열심과 간곡한 권면에 못이겨 그 신사는 아주 회개하는 것처럼 신부에게, “신부님! 기쁜 마음으로 당신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나쁜 생활을 청산하고 올바른 고해를 해서 선종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신부는 너무나 반가워서, “아, 그렇습니까! 착한 신자들과 같이 당신도 최후 성사를 다 잘 받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예, 신부님이 주시면 기쁘게 다 잘 받겠습니다.”라고 그는 태연히 말한다.
  “그러나 요전까지 같이 지내던 그 여성을 아주 버리지 않으면 당신은 성사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신부가 따지니, “오, 신부님! 그것은 안될 말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딱 자른다.
  “어째서 안돼요? 할 마음만 있으면 안될 일이 아닌데요. 당신이 선종하고 싶다면 그 여자를 버리지 않고는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신부도 강경하게 말했다.
  “늘 같은 말입니다. 안됩니다. 그 여성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아무래도 죽을 모양인데, 죽는 마당에는 그 여자와 아무래도 헤어져야 할 것 아닌가요? 잘 생각해보세요!”
  “안됩니다. 신부님! 그것만은 못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로는 당신 죄를 사해줄 수가 없소. 다른 성사도 줄 수 없고, 당신은 하늘나라를 잃고 지옥으로 가는 수밖에 없소.”
  “안됩니다. 신부님!”
  “여보시오. 안된다, 안된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명예를 좀 생각해보시오. 기절한 그대로 죽으면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무어라고 하겠나요?”
  “안됩니다. 안돼요!” 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그 소리만 중얼거리다가 끝내 그 여자를 곁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여자를 끌어안은 채 죽고 말았다.
  아! 불결한 생활은 불행한 죽음을 가져온다!
  참으로 무섭지 않느냐? 그러나 무슨 죄든지 떠나려면 떠날 수 있는 것이요, 떠나기 싫으면 할 수 없는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사람이 부정한 여성의 집을 드나드는 습관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말렸지만, 그는 늘 할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여느 때처럼 그 여자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뜻밖에 몽둥이로 얻어맞았다.
  그는 그 날부터 이상하게도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전에는 절대로 할 수 없다던 것이 이제는 절대로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할 수 없다던 것을 몽둥이로 변화시킨 것이라고 성인은 말했다. 절대로 안된다는 것도 몽둥이로는 되거늘, 하물며 무슨 죄든지 떠날 수 없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소리요,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란 점도 우리는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