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 사제에 대한 순명(順命)은 절대로 필요하다. 이 순명이 없으면 신심생활로 매진하겠다는 모든 노력이 헛일이다. 그 영혼의 진보를 바랄 수 없을 것이다. 도리어 순명이 있으면 복자 가파소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 영혼에게는 지옥도 연옥도 없고 오직 하늘나라가 있을 뿐이다. 이 순명이라 함은 고해 사제가 권하는 모든 사정에 솔직하게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고해 사제가 말리는 모든 사정을 즉시 솔직하게 중지하는 단순한 마음씨 그것이다.

  물론 고해할 때 고해 사제로부터 들은 권면대로 실행한다는 것은 하루에 되는 일은 아니다. 오랜 시간과 은총의 문제가 요구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영혼의 노력과 순명하는 것을 보시고 성총을 더 주실 것이다. 하루에 성인이 되는 사람은 없다. 고해 사제도 그런 사정을 잘 알고 마음을 쓴다. 그러므로 오랜 동안에 차츰 효과가 나타나게 되고, 고해자 자신도 참된 기쁨을 느낄 날이 올 것을 단단히 믿고, 비록 몇 번이나 같은 죄에 빠질지라도 실망하지 말 것이다. 그 사람이 참으로 자기의 결점을 고쳐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아시는 성 필립보 네리가 사음죄를 습관적으로 범하는 청년을 위해서 1년 이상을 친절과 노력을 다하셨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잊지 않았을 것이다. 죄에 빠졌을 때는 즉시 고해하러 오라고 권하는 말씀에 솔직하게 순명하고 충실하게 그것을 지켜, 그는 종래의 타성에서 벗어나 정결의 모범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고해 사제의 권면을 즉시 실행할 수 없다고 하여 실망하지 말고, 겸손을 다하여 새로운 결심을 세워야 한다.

  가장 유명한 성인들의 일생이 또한 이와 같았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약한 인간이었던 까닭에 우리와 같은 경우를 당했고, 그 경우에는 겸손을 다하여 새로운 결심을 세워 고해 사제를 신뢰하고 존중했던 것이다.
  고해 사제에게 순명을 잘하는 영혼들은 양심을 숨김 없이 고해 사제에게 드러내 보이며, 아무런 꾸밈도 없는 마음씨를, 또한 흑막으로 가리우지 않은 마음을 그대로 신부 앞에 펼쳐 보인다. 그들은 신부가 잘 몰랐으리라는 의심을 조금도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이 잘 설명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코 걱정한다든지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신부가 ‘이렇게 하시오’ ‘저것은 하지 마시오’하는 한 마디에 아주 안심하게 된다. 그러니까 항상 신부를 믿고, 신부께 순종하며 또한 순명하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이런 영혼들이야말로 고해 사제들의 단조롭고 답답한 직무의 영적 휴식처가 된다. 아르스의 거룩한 주임신부가 말씀하신 것처럼 이러한 영혼이 없으면 고해 사제는 고해소에 앉아 있을 기력이 없을 것이다.
  영혼이 이 정도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하루에 될 일이 아니다. 의지가 굳세고 꺾이지 않는 정신으로 풍부한 영혼이라도 여러 달, 여러 주간이라는 시일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혹시 어느 정도 착한 지향을 가졌어도 이기심에 사로잡혀 자기의 그릇된 사고에 집착하는 영혼의 경우에는 시일의 장단을 논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영혼은 날마다 고해하고 고해 사제의 분부를 듣는다 해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영혼은 자신의 마음을 고해 사제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을 단순한 마음으로 하지 않고, 가끔 신부와의 타협점을 발견해 보려고 애쓰며, 마음의 만족을 얻기 위해 긴 설명을 듣고자 하며, 또한 신부의 말씀의 논거를 어디까지나 요구하려 한다.
  어느 부인이 자기 남편에 대해서 교만한 마음으로 반항하고 때때로 말다툼을 하여 불안을 끼치며, 말 대답을 잘해 불화를 잘 일으키는 사정을 고해하러 왔다. 고해 사제는 인내심과 겸손을 단단히 갖고 아내되는 입장에서 남편을 대해야 한다고, 그리고 여성의 미덕은 온순과 겸손이니 아무쪼록 그 방면에 노력하라고 권하면서 말하기를, ‘어쨌든 남편은 가정에서 아버지입니다.’라고 하니까, 부인은 ‘네, 신부님! 여성은 가정의 어머니가 아닙니까?’라고 반문한다.
  “남편은 가정에서 임금이 되어야 합니다.”
  “네, 신부님! 여성은 가정의 여왕이 되어야지요.”
  “남편은 가정의 관(冠)이 되어야 합니다.”
  “네, 신부님! 여성은 그 관 위에 있는 금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교만하고도 완고한 고해자에게는 아무런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나쁜 습관을 계속하기 위해 자기 잘못을 어디까지나 합리화하려고 고해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고해 사제에 대해 존경심과 애덕을 가져야 한다. 즉 고해 사제는 자기에게 맡기는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고 숨질 때까지 그것을 지킬 절대 의무가 있음과 같이 고해자도 고해할 때 들은 사정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고해 사제와 고해자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는 고해성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므로 주의 깊게 취급해야 한다. 고해 사제가 고해자에게 권하는 말씀은 마치 신부가 그 영혼에게 한 방울 한 방울 부어주는 약물과 같으므로 그것을 세상살이 이야기의 재료로 삼는다든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고해 사제는 고해에서 들은 일이나 고해자에게서 질문받고 대답한 사정이나, 어떤 말이라도 누설하지 못하는 법이다. 고해자도 역시 자기의 고해 사제에게 말한 것, 신부로부터 들은 것을 입 밖에 내서는 안된다. 만일 함부로 입 밖에 내면 매우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첫째, 듣는 사람이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신부가 말하려고 하지 않은 것까지 말하도록 만들 수 있다. 둘째, 영혼 지도상 큰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 신부는 고해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지도할 의무가 있다. 셋째,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만을 목적으로 삼는 고해 사제에 대한 애덕을 해칠 수 있다. 넷째,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고 질투할 원인이 되거나, 또는 자기 마음이 더러워서 고해의 신성함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좋지 못한 의심을 더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고해의 비밀에 관한 것을 함부로 지껄여서 고해 사제와 아울러 고해성사에 대한 존경을 해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고해 사제의 말씀과 권면과 질문을 말할 떄의 사정과 달리 말하여 거짓말하는 죄를 범할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큰 책임을 지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해할 때 들은 것은 절대로 입 밖에 내어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자기 고해 사제의 말을 운운하는 것은 가령 그 신부를 칭찬하는 말일지라도 조심해야 한다. 고해 사제는 고해석에 앉은 그대로 남겨두어야지, 그를 다른 장소로 데리고 나올 필요가 없다. 고해 사제를 참으로 우리 영혼의 훌륭한 지도자로 생각한다면 그 신부의 권면을 충실히 실행해야 한다. 우리 쪽에서 그다지 좋지 못한 지도자라고 생각되면 우리에게 맞는 다른 고해 사제를 찾을 일이요, 또한 찾아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교만이나 불순한 마음으로 더 좋은 고해 사제를 찾으려고 이 신부, 저 신부를 찾아다니는 것은 고해 사제들을 괴롭히는 원인이 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하여 자기의 나쁜 습관과 결점을 언제든지 고치지 않고 공연히 고해 사제들만 괴롭혀, 신부들에게 비상한 인내와 고통을 겪게 한다.
  이러한 사실로 수녀원에서 나와 타락해버린 어느 수녀원장에 대해 파리의 대주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자매는 천사같이 순박하면서도 마귀같이 교만했다”라고 했다. 이 수녀는 고해 사제를 항상 못 믿어하고 자신을 변명하려고 애쓰는 그런 사람들의 본보기였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주장을 변호해줄 변호사를 발견하기 위해 자기의 전 재산을 허비하는 것을 아끼지 않는 자와 같고, 또는 자기를 친절하게 속이는 의사를 찾느라 병을 고치지 못하는 환자와도 같다.

  고해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존경을 다해야 한다. 보통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또 한 가지 의무는 고해 사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우리들이 받는 많은 은혜를 보아서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고해 사제일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데 무슨 보수나 갚음을 바라지 않고, 자기의 이익이나 편리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우리 영혼만을 위해 희생할 뿐이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고해 사제가 우리에게 희망하는 점은 자기 권면에 충실히 순명해 달라는 것뿐이다. 보수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것이므로 우리에게 희망하는 또 한 가지는 살아 있을 동안이나 죽은 다음에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었으면 하는 점이다. 그들은 남을 돕다가 자신은 지옥에 떨어질까봐 항상 무서워하여, 우리의 기도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고해 사제에게 항상 순명할 의무와 존경하고 감사하며 그를 위해 기도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고해 사제와 세속적으로 친밀할 필요는 없다. 고해 사제와의 관계에 무슨 불편한 마음이나 기우는 마음이 있게 되면 즉시 그것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초성적(超性的) 고해성사가 세속적 또는 인간적인 어떤 감정과 혼동되어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