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면서
예수고난회 영성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청빈, 기도, 참회고행, 고독, 고난기억이다. 이들 가운데 ‘참회고행’에 대해 말할 때,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참회’라는 용어 대신에 ‘참회고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를 먼저 말해야 될 것 같다. 지금까지 우리가 참회라고 했던 것은 라틴어 Paenitentia 번역한 것이었는데, 1989년 번역된 교회법에서는 이 단어를 참회고행이라 번역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하느님의 법률에 의하여 각자 나름대로 참회고행을 하여야 하지만, 모든 신자들이 어떤 공동적인 참회고행의 실행으로 서로 결합되도록 참회고행의 날이 규정 된다”(교회법 제1249조). 교회법에서 이처럼 참회라는 용어 대신 참회고행이라는 용어로 고쳐 사용하기로 한 것은 ‘참회’라는 내적인 면과 ‘고행’이라는 외적인 면을 모두 강조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생각한다.
1.1 참회고행이란
참회고행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떤 것들을 연상하게 되는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죄, 보속, 눈물, 고통, 죽음, 십자가, 노고, 복종, 포기, 희생, 편태 등이라 생각된다. 이런 의미들을 포함한 참회고행은 한때 그리스도교 신앙생활 전반과 수도생활 그리고 영적인 저술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참회고행이라는 말을 꺼내면 구닥다리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람, 괴팍한 무엇인가에 집착해 있는 사람 혹은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기쁨을 얻는 사람 등으로 취급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대인들이 참회고행을 회피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참회고행 없이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온전한 영성생활도 할 수 없다. 왜냐면,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이란 하느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고통을 받고 죽으셨으며, 그로부터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 믿음 위에서 살며, 자신들도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참회고행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더 잘 자라고 우리 삶에서 더 잘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은총 안에서 하는 내외적인 여러 가지 단련”이라고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다.
1.2 참회고행이 필요한 이유
참회고행을 해야 하는 이유를 구약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죄를 범한 후 하느님의 의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예레 36, 9; 요나 3, 5), 주님께 은혜를 청하기 위해(2사무 12, 16); 단식으로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레위 16, 30-31); 하느님 대전에 자신을 낮추고 야훼 하느님께 머리를 돌리기 위해(다니 9, 3); 하느님의 일을 보다 긴밀하게 이해하거나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탈출 34, 28); 하느님의 백성에 속해있다는 표시로서(레위 23, 29); 성화와 완덕의 수단과 표징으로(유딧 8, 6), 의인의 참회고행으로 공동체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신명 9, 9; 출애 19, 14) 참회고행을 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육신을 취하셨으며, 죄의 권세와 맞서 싸우시고 당신의 삶과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죄의 권세를 이기셨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다. 그분이 선포하신 하늘나라는 회개, 즉 전적이고 진실한 쇄신과 변화된 삶을 통해서만 들어 갈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회개했음을 마음으로 뿐만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참회고행은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의 육신을 제어하고 육신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인 참회고행을 실천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것이다.
참회고행의 이러한 의미를 받아들여 바오로 6세 교황께서 1966년 발표하신 사도헌장 Paenitemini에서는 참회고행의 동기와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참회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구원행위에 우리를 깊이 일치시키는 끈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과 속죄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②거룩한 교회의 지체들이 지니고 있는 흠은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회개와 쇄신은 내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외적이고 또한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③교회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세상 재화의 올바른 사용을 제시하여 주고 세상의 성화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동시에 천상 본향을 향하여 순례하고 있는 자녀들이 세상과 자신을 잃게 하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보호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1.3 참회고행의 목표
참회고행은 인간 성화를 위해 나아가는 하나의 길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새 인간의 형성을 위한 신앙생활에 있어 없어선 안 되는 참회고행의 필요성을 상기하면서 항구하게 참회고행을 실천해 가는 것이다. 모든 참회고행의 목표는 바오로 사도께서 묘사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놓은 것이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립 2, 6). 이러한 무無의 경지야말로 우리가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는 상태이다. 이는 하느님께 온전히 마음을 열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죽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과 구속 사업에 동참하는 생활이다.
1.4 은총 안에서 하는 단련
‘참회고행’은 사람 힘이 자라는 데까지 무리를 하여 자기 몸을 단련하는 신체적인 노력 만인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기 힘만으로는 할 수 없으며,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깊이 체험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참회고행은 우리들의 마음을 쪼개는 결과를 가져와야 하는데, 그것은 참회고행자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을 지닐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은총이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노력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참회고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참회고행을 하는 것이며, 자신의 용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자신을 단련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2. 예수고난회와 참회고행
2.1 십자가의 성 바오로
바오로 다네이(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살았던 17-18세기에는 참회고행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하였고 권장하기까지 했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오로 다네이가 했던 참회고행에 대해서는 찰스 알메라스가 쓴 <십자가의 성 바오로>에 아주 잘 묘사되어있다: 바오로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인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말발굽으로 만든 고행기구를 사용하여 부모들을 놀라게 했다. 청년시절에는 벽돌을 베게삼아 잤고 한 밤중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은 보통이었으며, 목마를 때마다 몰래 준비해 놓은 조롱박에서 초와 쓸개를 마시면서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고자 했다(pp.16-17).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모자에 넝마를 달고 거리를 배회하였다. 넝마는 바람에 펄럭거렸고 아이들은 웃으며 뒤를 따라 다녔다. 부인들도 문간에 서서 웃어댔다. 하지만 바오로는 예수님을 위해 수모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p.18)
그가 26세(1720년) 되던 어느 날,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나서 쓴 글에는 그가 참회고행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잠기게 되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기도에 잠겨 있을 때 나는 하느님의 손에 들려있는 채찍을 보았는데 이 채찍은 고행기구들과 같이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사랑이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바로 그때 주님이 나를 매우 높은 관상의 경지로 들어 올리셨고, 내 영혼은 하느님이 바로 이 채찍으로 응징하심을 그러나 사랑으로 응징하심을 깨닫게 되었다”(p.31). 이런 영적인 체험을 한 후 바오로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전파하는 수도회를 설립하리라고 결심했다.
가티나라 주교로부터 은수자로 살 것을 허락받은 바오로는 가스뗄라쪼의 성 챨스 성당의 구석진 제의방에서 40일 피정을 시작했다. 이때 바오로는 물과 빵만을 먹었고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면서 기도에 전념하였고,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를 위한 회칙을 썼다. 피정 후 바오로는 성 스테파노 경당에서 홀로 생활했는데, 이때 성 찰스 성당에서 사순절 강론을 할 허락을 얻게 되었다. 바오로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한 손에는 십자가를 다른 손에는 종을 들고 카스텔라쪼를 돌아다녔다. 어떤 때는 목에 밧줄을 매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모으기도 했다.
바오로의 참회고행은 그가 사제품을 받고 몬떼 아르젠따리오에 살면서 순회설교(미시오Missio)를 할 때에도 그대로 계속되었다: “바오로는 겉옷을 벗어 자신의 어깨를 드러내고 날카로운 쇳날이 달린 편태나 죄수용 쇠사슬로 피가 나도록 때리기도 했다 … 청중들이 자신들의 죄를 통회하며 슬피 우는 동안 바오로는 십자가 밑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쉬었다. 그런 다음 다시 설교를 시작했는데 그의 격조는 이전과는 아주 다르게 이어나갔다. 어떤 때는 바오로가 진짜 가시관을 쓰고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단상에 나와서 자신을 심하게 채찍질하기도 했다. 거룩한 분노에 사로 잡혀서 단상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기도 했다”(pp. 94-95).
바오로의 참회고행의 삶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의 임종 순간을 찰스 알메라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 순간 성인은 마치 그 혼자만이 볼 수 있는 사람에게 하듯이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밧줄을 목에 감고 병 때문에 입지 못했던 수도복을 입혀 달라고 하였다. 이 일을 마치자 그의 생명은 조용히 꺼져갔다”(위의 책, p. 257)
2.2 회헌과 관구규범에 나타난 참회고행
창립자께서 마지막으로 쓰신 1775년 회헌 제35장에는 “회헌에 규정된 단식 이외에도 매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에는 다른 통상적인 기도와 함께 시편 50편과 129편을 통회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바치면서 자발적인 편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의 성탄일부터 공현 팔부까지 그리고 부활절부터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까지는 이를 행하지 않는다. 대림절 첫 날부터 성탄까지 그리고 사순절의 모든 월요일에도 자발적인 편태가 있어야 한다. 만일 축일이 그날과 겹치면 변경할 것이다. 또한 교회와 수도회 그리고 사람들의 곤란한 시기에 이런 참회고행을 명하는 일은 장상의 재량에 맡긴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런 창립자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1984년도에 개정한 회헌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에 대한 관상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끊임없는 회개와 참회고행을 우리에게 촉구한다”(56항), “우리 창설자의 참회고행의 정신에 따라, 우리 공동체들은 참회고행의 외적 행위가 생활 자체의 일부분이 되게 한다. 이런 행위는 진실한 것이어야 하므로, 지역의 문화와 정신과 조화되어야 한다”(58항). 그리고 참회고행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금요일의 단식과 금육 그리고 최소한 1주일에 2일의 금육을 말하고 있다(59항 참조).
한국 관구의 규범 2항에는 “우리는 우리의 고유 사명 및 카리스마의 본질적 요소,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기억에 대한 증진, 청빈, 기도, 참회고행 그리고 고독의 정신에 충실해야 한다”라고만 나와 있고 참회고행의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회헌을 그대로 따르려는 마음을 표시하고 있다.
3. 여러 가지 참회고행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으며, 그분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 없이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에 잠길 수 없다.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십자가의 성 바오로께서는 “만일 여러분의 아픔이 잘못된 것에서 기인한다면 가볍게 참회고행을 하십시오. 여러분이 좀 더 자신을 잘 판별하도록 여러분 자신에게 자유를 허락하십시오. 하느님이 주신 참회고행을 육신이 행할 때 그것은 진실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참회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이런 정신에 따라 우리는 매일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자세뿐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신비에 더욱 깊이 들어가기 위한 참회고행을 능동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3.1 순 명
(수도생활 안에서) 순명의 교회법적인 의미는 “합법적 장상이 고유한 회헌에 따라 하느님의 대행자로서 명령할 때 의지의 복종을 의무 지운다”(제601조)이다. 그러나 영성적인 측면에서의 순명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순명의 정신을 생활화해야 할 것이며, 일상생활 안에서의 순명은 나의 뜻이 아니라 상대방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삶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막의 교부인 뽀에멘 아빠스는 “인간의 뜻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서 있는 놋쇠 벽이다”라고 되풀이 하셨다. 우리들은 자신의 뜻을 주장함으로써 우리와 우리의 깊은 자아 사이에, 우리와 우리 마음 사이에,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벽을 쌓는다. 이와 같은 벽을 세우는 것은 우리들 모두가 저마다의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욕구는 그의 존재의 뿌리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자신의 참 인격과 참 뜻 안에서 찾아지는 하느님과 끊임없이 일치되게 도와주지만, 우리를 항상 하느님께로만 이끄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욕구는 가끔가다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우리가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방해하며, 우리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이 욕구를 포기하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나 뽀에멘 아빠스가 말했던 그 놋쇠 벽을 무너뜨리는 일을 시작한 것이며, 자기 존재의 보다 깊은 곳에 자리한 참된 욕구를 식별하려는 생활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카 22, 42).
바오로 다네이는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믿음의 유혹을 당할 때마다 하느님의 손길과 그분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기를 바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러분의 영혼에서 위안이 없어졌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깊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하느님께 순명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즐거움이 아닌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찾으면서 사랑의 무한한 바다에 여러분 자신을 내맡기십시오.”
찰스 알메라스도 바오로 다네이가 추구했던 참회고행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승복하심을 명확히 한 것은 게쎄마니 동산에서였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승복함은 고통을 받아들임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승복은 성성의 전부이며 이에 이르는 첩경이다… 바오로의 성성의 비밀은 본질적으로 그의 단식과 철야기도, 고행과 참회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통의 온전한 수용과 하느님의 뜻에의 일치이다. 그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열어 보인 길은 ‘포기의 길’이었다.”(pp.260-262)
3.2 침 묵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이기 위해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며, 성령께서 자기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그 내적말씀에 민감히 반응하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침묵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주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그 말씀에 대한 증인이 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찬미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을 하느님을 거스르고 형제들을 부당하게 대하는 수단으로 삼을 때가 많다. 따라서 진정한 우리들의 관계를 위해서는 침묵이 반드시 요구되며, 이런 침묵을 통해 우리는 미리 생각하고 심사숙고 하면서 진심어린 대화를 시작 할 수 있는 것이다. 침묵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텅 비어지고 부드럽게 되며 그 무엇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은 내적인 평화 안에 머무르게 된다. 침묵은 그 자체로 기도이며, 침묵하고 있는 사람 주위에는 평화와 고요의 자리가 마련되어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게 된다.
젊었던 바오로가 여러 가지 모욕적인 대접을 받았을 때 침묵하였던 것을 보면, 침묵이 그의 내적인 힘의 원천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바오로가 자신의 고해신부로부터 영성체를 거부당하고 그가 기도하는 것을 방해받으며,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는 보속을 받았을 때에도 그는 “악마는 결코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 할 것이다. 이 사람이 네게 필요한 고해신부이며 그는 너를 겸손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침묵했다. 더 나아가 마음 속에 품었던 수도회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고 오해를 받을 때에도 그는 침묵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다: “가장 순수한 믿음과 거룩한 사랑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매순간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필요한 고통, 시험, 시련을 끊임없이 겪어내는 방법을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제가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침묵과 희망 안에서 그 같은 고통을 견디어내는 법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3.3 단 식 (금육)
단식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 온 고행 가운데 가장 오래된 방법 중의 하나이며, 예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40일을 단식하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유혹하는 사탄을 만나셨다. 단식을 통해 우리는 다른 욕구들로 인해 속박되어 있던 우리 안의 활력이 해방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즉 단식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위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힘을 받았으며, 그 힘의 원천은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단식은 사람을 배고프게 만드는데, 이 배고픔의 목적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영적 굶주림, 즉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예민한 응답을 하도록 한다. 음식에 대한 굶주림이 영적인 굶주림이라는 빈자리를 마련하고, 그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명확하게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뿐만이 아니라 여러 종교에서도 영성훈련을 목적으로 단식을 장려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 또한 단식을 한다. 그러나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단식과 절제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령의 사랑 가득한 숨결을 통해 여러분의 보잘 것 없음을 하느님의 자비 안으로 던져버리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여러분에게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이런 방법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그 어떤 피조물도 방해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에 대해 굶주리고, 그분께 매혹되고, 그분을 갈망하면서 온전히 사랑 속에서 용해되십시오.”
3.4 일상생활 속에서의 참회고행
바오로의 참회고행을 보며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니까’ 혹은 ‘성인이니까’라며 우리의 삶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밀어 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바오로 다네이는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크고 작은 불편함과 괴로움, 고통들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았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오로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슬펐습니다. 아무런 자세한 이야기가 없어 더욱 서운하였습니다. 소식을 듣고 곧바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찬양하였습니다. 어머니, 슬픔을 거두십시오. 그리고 기뻐하십시오. 아버님은 하늘나라에 계실 것입니다… ” 참회고행에 대한 바오로의 태도는 영웅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생활의 평범한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가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말씀을 토대로 한 일일 기도 묵상집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에는 이러한 바오로 다네이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자신을 참회고행으로 괴롭힘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십자가를 받아들이십시오. 그 같은 참회고행이 크나큰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플 때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보내신 참회고행에 만족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에게 부과한 그 어떤 것보다 훨씬 좋은 것입니다.” 이 외에도 자신의 계획이 갑자기 변경되었을 때의 혼란, 실수했을 때의 부끄러움, 모욕을 당했을 때 나는 화, 자신의 약함이 드러났을 때의 씁쓸함, 누구에겐가 불평불만을 말하고 싶을 때 등. 바오로 다네이는 이런 일들을 접할 때마다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께로 돌리라고 권고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 여러분의 고통과 기쁘지 않은 다른 일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것들로 만족하고 다른 참회고행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이런 것들이 더욱 더 하느님을 기쁘게 합니다”.
4. 마치면서
우리의 삶이 빛과 어둠이 교차되며 이루어지듯이, 신앙생활 특히 영성생활에서도 우리의 욕구를 그대로 따르는 것과 욕구를 거슬러 생활하려는 것이 조화를 이루며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 주변은 젊음과 건강, 편리함과 편안함, 밝고 산뜻하며 화끈한 것, 돈이 되는 것, 오감을 자극하는 것에 열광하고 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할 수 있고,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절제와 극기, 참회와 보속, 고행과 고통에 대해 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것을 미리 예견해서일까?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사십 여 년 전 “영성수련에 있어서 극기 금욕으로 표현되는 참회고행의 실천은, 그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 적지 않게 반대 받는 분야가 되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이나 노고를 도외시하고 보다 편한 삶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자신다운 것, 즉 보다 성장하기 위하여 진리와 신앙, 자비, 애덕, 활기 그리고 희생을 보존하기 위해 어려움을 감당할 줄 하는 것,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겪어 나가야 할 과제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고난회’라는 수도회 이름이 무겁게만 다가오는 이 시대에, ‘고난회의 동반자회원’으로 살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자세로 고통을 대하고 있는가? 고통이 좋아 쫓아다니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고통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거부해야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며, 우리가 “그분의 정신을 살고 있다”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고통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니셨고, 당신 스스로 참회와 고통의 삶을 사셨던 고난회의 창립자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삶과 정신을 다시 삶 속에 되살리기 위해 수도자와 동반자 회원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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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예수고난회의 회칙과 회헌
십자가의 성 바오로, 찰스 알메라스(박태원 역), 예수고난회, 2002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 베넷 켈리(예수고난회), 도서출판 두손, 2000
사랑의 학교, 앙드레 루프(이미림 역), 분도출판사, 1987
“참회고행의 의미”, 송열섭, 사목 158(1992년 3월), pp. 79-89
“극기”, 김승혜, 한국가톨릭대사전 2, pp.1037-1040
“참회”. 나기정, 한국가톨릭대사전 10, pp. 8048-8050
– 방교원 사비오 CP : 2007년 9월 예수고난회 동반자회 교육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