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성사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
일곱 가지 성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펼치시는 표지이며 도구들이다. 교회는 가시적이며 동시에 영적이고, 교계적 사회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다. 교회는 ‘하나’이지만 인간적, 신적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신앙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구원의 성사이고, 하느님과 인간이 이루는 친교의 표지이자 도구이다.
거룩하시며 또 거룩하게 하시는 그분의 인성이 이루신 구원의 업적은 교회의 성사들 안에서 드러나고 작용하는 구원의 성사이다. 그리스어 mysterion은 라틴어로 ‘신비’(mysterium)와 ‘성사’(sacramentum)라는 두 가지 말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의 신비이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이 의미하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간직하고 이를 나눈다. 이러한 유비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성사’라고 부른다. 사람들 사이의 친교는 하느님과의 일치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또한 인류 일치의 성사이기도 하다. 이 일치는 교회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창조에서 예시되고, 구약에서 준비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활동으로 세워지고, 구속을 위한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실현된 교회는 성령 강림을 통하여 구원의 신비로서 드러났다. 교회는 지상으로부터 구원된 모든 이의 모임으로서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가톨릭 교리서 774~780)
교회나 교회 어떤 대표자들이 자신을 낙담시켰고 자기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일 주일이 멀다하고 저를 찾아 옵니다. 이 상처입은 그리스도인들은 때로는 슬픔에 잠기기도 하지만, 그분들이 겪는 보다 잦은 반응은 분노입니다. 그분들은 저를 포함한 어떤 사제나 주교도 교회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합니다. 그것은 그분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고통스럽습니다. 아마도 교회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진실일 것입니다.
저는 교회로부터 상처를 가장 자주 받는 사람은 다름아닌 교황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황은 언제나 모든 방향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비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공격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불평도 있는 것입니다.
교황으로부터 본당 신자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에게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교회가 우리를 그렇게도 자주 낙담시킬 수 있는 걸까? 그러면서도 여전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일 수 있는 것일까?”
분명히 사랑에 넘치는 구세주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대변하시는 분들이 우리를 보다 잘 돌보아 주시리라는 기대는 정당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어느 정도 그와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매우 다른 것을 기술하는데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교회”라는 단어는 다른 무엇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건물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회중 교회”(the Congregational Church) 처럼 어느 특정 종파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본당이나 교구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지역 교회와 문제가 있습니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그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전세계 그리스도인 모두를 의미할 수 있으며 “가톨릭 교회”의 일원인 전세계 가톨릭 신자 모두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가톨릭”이라는 단어는 “우주 전체로부터 유래한”이라는 의미의 그리이스어 kata holos 로부터 유래했으며 “공번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가톨릭 교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어나는 혼동의 또다른 요인은 그 구성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문제입니다.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떤 신문은 가톨릭 신자의 54%가 이런 저런 문제에 대해 주교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보도합니다. 그러한 백분율은 어떻게 도출된 수치일까요?
“교회”란 무엇인가?
우선, 교회는 성 바오로 사도께서 매우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의미합니다.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우리가 그분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에페소, 5:29-30).
“그분은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골로사이, 1:18).
깊이 있는 영적인 방식으로 그 모든 지체들이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가시적(可視的)인 교회 뒤에는 영적인 실재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체의 활력의 근원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지만 교회 자신은 교회 구성원을 은총 상태에 있는 사람들로만 국한시킬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종교개혁 시기에 정의되었습니다. 어떤 개혁가들은 은총 상태에 있는 구성원들만이 교회 구성원이라 주장했습니다. 가톨릭 교회 주교들은 성인(聖人)들의 교회 개념을 거부했습니다. 죄중에 있는 사람은 교회 구성원이 된다고 해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교회 구성원입니다. 그들은 앓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안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단순히 은총 상태를 잃는다고 해서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교회”라고 말할 때, 그것은 주교들과 교황과 책임이 있는 다른 모든 이들, 즉 성직자, 수도자, 활동적인 평신도, 본당 평의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등이 이끄는 볼 수 있는 외적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어떤 이들은 “나는 교회에서 일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일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들은 “성모 병원에서요.”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이 그분들에게는“교회”입니다.
“나는 교회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너무 인색하답니다.” 교회가 상서원이나 교구 사무실이나 본당을 의미합니까? 사람들이 “교회”가 그들을 실망시켰다고 말할 때 당신이 마음에 두려 하는 일련의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교회가 자신을 실망시켰다고 말할 때,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교회는 본당이나 교구, 심지어 교구의 주교를 의미합니다. 그분들은 미국에 있는 교회, 또는 가장 용납할 수 없는 표현인 “아메리칸 교회” (the American Church) 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여러분은 “아메리칸 가톨릭 교회”를 발견하셨을는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스스로 독립적인 작은 교회들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뉴욕 할렘에는 “성모 마리아의 신비로운 장미 독립 가톨릭 교회” (St. Mary’s Mystical Rose Independent Catholic Church) 라 부르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 주장하는 한편 자기가 직접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스위스 근위병이 지키는 로마를 개입시키지 않겠다고 결정한 어느 적극적인 성직자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실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아메리칸 교회”에 속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쩌다 보니 미국 땅에 있게 된 가톨릭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도데체“아메리칸”교회의 수장이 누구란 말입니까?)
때때로 어떤 이들은 가톨릭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와 “정통 가톨릭 교회”나 “구(舊) 가톨릭 교회”를 시작합니다. 어떤 이가 5년 이내에 미국에 있는 가톨릭 교회에 분열이 일어나 그 단체를 ‘아메리칸 가톨릭 교회’라 부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저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 되었건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가 나를 실망시켰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본당, 교구, 가톨릭 학교, 교회내 기관, 가톨릭 출판사들, 주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이는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제나 수도자들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으며 그분들도 교회에 대한 오랜 봉사 생활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적법한 불평이나 짜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교회는 그분들이 거부나 무시를 당했거나 면직이나 오해를 받았던 곳을 의미합니다.
저는 수도생활을 한 지 45년이 되었습니다만, 저도 교회 특정 부분에 자주 분노하였다고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상처받을 가능성은 엄청나며 더 깊이 교회 일에 개입할수록 그 가능성은 더 커집니다. 예를 들어,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교회를 방문하여 실제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내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찾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자신의 전 생애를 수도 성소를 사는데 바칠지도 모릅니다. 몇 년간은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지나갑니다. 그분들은 사람들의 감사를 받는다거나 적어도 열심히 일하거나 과업을 성취할 기회를 부여받습니다. 그후 그분들의 “후견인”이 교체됩니다. 새로운 지도자들이 부임하며 “옛 후견인”의 사람들은 거추장스러워집니다. 그분들이 해온 일에 대한 경의나 개인적인 인정이 거의 없습니다. 그분들이 해온 일에 대해 하느님께서 별로 존중하지 않으신다는 느낌이 몰려 옵니다.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지혜롭지 못하게도 그분들은 교황 이하 교회 전체나 하느님에 분노합니다. 그것은 참담한 느낌입니다. 저는 압니다.
범위가 더 적을는지는 모르지만 그와 똑같은 일이 충실한 본당 신자들과 교회 구성원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기 희생에 이르기까지 베푸셨습니다. 그분들은 상처를 입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베푸셨지만 새로운 사목자나 관장이 부임하면서 그분들의 존재는 완전히 잊혀집니다. 그분들은 하느님께서 이러한 일을 하시지 않았음을 알고는 있지만, 감정적으로 그분들은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그러한 감정의 메아리를 히브리인들과 맞서는 예언자들의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와 요한의 글에서 듣습니다.
아마도 이 모든 체험들 중 최악은 교회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오류를 가르침으로써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엇나가는 경우일 것입니다. 헌신적으로 자신의 자녀를 종교 교육기관에 보내기는 했지만 그 학교가 교회와 복음의 가르침을 크게 결여하였거나 교묘히 그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부모님들로부터 저는 그러한 쓰라린 불평을 들어 왔습니다. 교회 당국에 호소하는 적법한 불평에 대해 부적절한 답변을 받으면서 상처에 또다시 모욕이 가해집니다. 드물지 않게 교회 당국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가 우리를 실망시켰다는 느낌이 일어납니다.
통계 조사원들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질문합니다.
“당신은 가톨릭 신자입니까?”
제가 칠드런스 빌리지 담당 신부로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는 한 소년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에게 세례와 첫영성체 준비를 시키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 이야기는 자기 사촌이 할렘에 있는 가톨릭 청년 센터 마당에서 농구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자신도 가톨릭 신자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전화 통계 조사원이 고용한 대학생들은 “당신은 가톨릭 신자세요?”라고 질문합니다. 만일 당신이 “네.”라고 답한다면 그들은 “피임에 대한 교황의 가르침에 동의하시나요?”라고 묻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니오.”라 답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탈자들이 교황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백분율을 차지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이 교회를 지지하는 가톨릭 신자들인지 아니면 한번도 교회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저의 집안에는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있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하느님이 여성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여성이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학교 교사들은 치료가, 그것도 장기 치료가 필요합니다.
누군가 “나는 가톨릭 교회의 일원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필 도나휴같은 이야기꾼들이 “나는 가톨릭 신자요.”라고 말한다거나 마돈나같이 신성을 모욕하는 엔터네이너가 “나는 가톨릭 신자요.” 라 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이 한때 활동적인 구성원이었지만 더이상 그렇지 못한 가톨릭 교회를 이용해 먹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공공 활동으로써 분명히 교회를 공격하고 있고 교회와 교회의 설립자 모두에게 신성 모욕을 가하고 있습니다.
왜 교회는 우리를 낙담에 빠뜨리는가?
보다 명료하게 생각해 보자면 교회 지도자들이 우리를 실망시킨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우리에게 낙담을 안겨 주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 천주 구세주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마음에 새겨 두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에 분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에 더 이상 나가지 않을 거에요. 하느님은 저를 실망시켰어요.”
하느님은 당신을 실망시키시지 않았습니다. 괴팍한 토마스 모어, 사무적인 매리 수녀, 짓궃은 그린치 수사가 당신에게 실망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당신을 낙담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도 실망을 드렸습니다.
교회가 우리에게 실망을 주는 이유는 교회가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원죄를 지닌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저는 전례 안에 성사가 원래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는 교회 생활의 일면(당신이 죄중에 있는 사제로부터 성사를 영한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유효한 성사입니다)이나 성인들의 천상 교회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떤 책들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인지를 확증해주는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주셨고 성령의 인도로 전수되는 교회의 사도적 가르침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부분은 교회의 인간적인 면입니다만 교회의 인간적인 면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선(善)도 행합니다. 동시에 인간적인 면은 당신의 마음을 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평생동안 교회를 위해 일해 왔습니다. 몇 년 전 저는 소년 복사를 시작한 지 50년 주년을 기념하였습니다. 저는 소년 복사였을 때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는 제가 하지도 않은 일로 인해 부당한 꾸지람을 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약 25년간 가톨릭 학교에 다녔고 몇몇 저의 선생님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에게 상처를 준 분들보다 더 많은 분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알고 지내온 사제와 주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상처를 준 이들은 단 몇몇 사람이었지만 제게 도움을 주셨던 분은 그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저는 수도 공동체들로부터 상처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그들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교회를 대표하는 분들이 저에게 상처를 줄 때, 하느님께서 자신을 실망시켰다고 느끼는 사람과 똑같은 분노 반응이 저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납니다.
현대에 교회로부터 지독하게 상처받은 분들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매우 놀라실 것입니다.
경이로운 오상의 사제, 파드레 비오 성인은 교황청의 명에 의해 수십 년간 가택 연금 상태나 다름없는 조치를 받았습니다. 오상을 받으셨을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파드레 비오 성인은 산 지오반니 로툰도라는 작은 마을에 살면서 결코 그곳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결코. 여러 해동안 성인은 공적으로 미사를 드리도록 인가받지 못했습니다.
현재 복자 청원 중인 카푸친 프란치스꼬회 사제, 솔라누스 케이시는 전 생애 동안 한 번도 고해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일생을 통털어 실제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한 두 번뿐이었습니다. 수도회 당국자들이 그분이 충분히 똑똑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그분은 수도회 선거에서 한 번도 투표를 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땅에서 사신 카푸친 프란치스꼬 회원들 중 가장 위한 분이셨을 그분께서는 설교를 하거나 고해를 들을 수 있는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분께서 이러한 전적으로 부당한 모욕에 대해 결코 분노를 드러내지 않으셨음을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장차 그분을 성인으로 선언할 이유가 될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 보면서 우리는 현재 교회 박사로 존경받는 성 알퐁소 리구리오께서 자신이 세운 수도회인 구속주회를 떠나셔야 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알퐁소 리구리오 성인은 자신이 주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황령에서는 미사를 드리는 것이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성녀 쟌 다르크는 뷰봐 교구 주교와 11명의 신학자들의 명에 따라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루엥에 있는 감옥탑 한 켠에는 쟌 다르크 성녀를 죽음으로 이끈 사형 선고 칙령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켠에는 화형이 있은지 20년 후 성녀 쟌 다르크의 혐의를 사면하여 복권하면서 성녀에게 사형을 판결한 사람들을 질책하는 교황 칙서가 놓여져 있습니다. 성녀 쟌 다르크는 교황에게 상고했지만 지역 주교는 이러한 상고를 존중하지 않았고 결국 주교 스스로 교계적 문책을 자초하였습니다.
교황들조차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에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한 친구는 교황께서 죽음을 반기셨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재임 기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온갖 어려움에 가득 찼고 교회가 광대한 혼돈 상태에 빠진 시기였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돌아가셨을 때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분을 위해 드려진 위령미사 강론에서 어느 주교는 “바오로여, 우리는 당신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믿기 어려운 사연
30년간 교회로부터 지독히 상처받은 어느 주교님의 믿기 어려운 사연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분은 뉴욕에서 사셨던 보나벤춰 브로드릭 주교입니다. 그분은 1940년부터 1943년까지 뉴욕 대교구 수도회 담당 주교로 봉직하셨습니다. 브로드릭 주교는 당신 생의 대부분을 뉴욕 업스테이트에서 가솔린 주유소를 운영하면서 생계를 이어 나가셨습니다. 최신형 주유소가 생기기 이전에는 기름 탱크가 가득 찰 때 자동적으로 급유가 멈추도록 펌프 노즐 끝에 묘하게 생긴 작은 장치를 달아 사용하였습니다. 보나벤춰 브로드릭 주교가 바로 그 부속 장치를 발명하여 특허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로부터 얻는 수입 일부를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그러한 이야기를 재구성하려면 미국이 쿠바를 점령하였던 스페인 미국 전쟁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미국인 브로드릭 신부를 쿠바 하바나 보좌 주교로 임명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브로드릭 주교는 쿠바로 내려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쿠바인들은 자신들의 지역에 미국 주교가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분은 다시 뉴욕으로 되돌아왔으나 보좌주교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교구는 그분에게 일거리를 구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분은 교황청을 위한 연례 ‘베드로 기금 모금’사업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이 그러한 직무를 맡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일거리를 잃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분은 주교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스캔달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기다리세요.”
그래서 그분은 기다렸습니다.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결국 그분은 가솔린 주유소를 열었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후, 프란시스 스펠만 대주교가 뉴욕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교황 비오 12세께서 스펠만 추기경에게 브로드릭 주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셨다 합니다. 대교구에서는 브로드릭 주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으나, 결국 업스테이트 어느 동네에 위치한 오래된 주소를 발견했습니다. 스펠만 대주교는 그 주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은 가솔린 주유소였습니다. 대주교는 차에서 내려 주유소에서 일하는 소년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주유소를 운영하는 분이 누구시니?”
소년이 대답하였습니다.
“브로드릭 박사요.”
대주교는 그분이 어디에서 사시는지 물었습니다. 소년은 근처에 있는 작은 집을 가리켰습니다. 얼마 후 추기경이 될 스펠만 대주교가 그 집 초인종을 누르자, 작업바지를 입은 훨씬 나이 지긋한 노인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브로드릭 주교님이십니까?”
노인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저는 스펠만 대주교입니다. 제가 주교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랬습니다
“어서 들어 오세요. 저는 당신을 30년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펠만 추기경은 그분을 뉴욕 대교구 수도회 담당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저는 교회로부터 그렇게까지 심하게 상처받은 분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저는 브로드릭 주교에 대한 시복청원을 할 수 있는지 조사하여 그분을 ‘인내하는 이들’의 수호 성인으로 올리는 일을 누군가가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분을 묘사하는 성화에는 백합 대신 작은 장치가 달린 가스 펌프 노즐을 들고 있는 주교의 모습을 그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떻게 우리에게 실망을 줄 수 있을까?
질문은 명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 답은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분들은 어떠셨습니까? 사도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들을 가장 필요로 하실 때 주님을 실망에 빠뜨리지 않았습니까?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분들을 성스러운 대표자들로 성별하신 바로 그 날에 그분들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사제들은 매년 성 목요일을 가톨릭 사제직 기념일로 지냅니다. 그날은 첫 사제들이 예수님께 지극한 상처를 드렸음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 초저녁에 그분들은 신약의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그날 늦은 저녁에 그분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해주지 않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교회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교회는 불쌍한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듯이 교회는 영원한 생명 안에서 한점의 결점이나 한결 주름도 없는 흠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에페소, 5:25-27)
교회는 원죄를 지닌 거의 십 억에 이르는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그것은 엄청난 양의 원죄입니다. 그리고 이들 십 억의 신자들은 매우 특별한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매우 특별한 악행도 저지릅니다. 만일 가톨릭 교회가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당신은 가장 위대한 성인들과 최악질의 불량배와 죄인들 모두가 같은 교회 안에 있을 거라 예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시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일부 근본주의 교회들은 자신이 성인들의 교회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몰몬교인들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일성도 교회라고 부릅니다. 저는 비행기를 타고 솔트 레이크 씨티로 여행하고 있었는데, 제 옆 좌석에는 한 남자가 몰몬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깔끔한 정장 차림의 신사였습니다. 그는 점심으로 얼음탄 스카치 양주를 주문했는데 그것은 몰몬교인이라면 절대 금기시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그런 몰몬교인을 “잭 몰몬” (Jack Mormon) 이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흥미로운 어구입니다. 우리도 그 어구를 빌려와야 겠습니다.
왜냐라면 너무도 많은 “잭 가톨릭 신자들” (Jack Catholics) 을 도처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완벽하게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의 세계가 동시에 공존합니다.
저는 우둔한 예수회원과 혼동에 빠진 도미니꼬회원, 오만한 카푸친회원과 부유한 프란치스꼬회원, 그리고 작은 어린이들을 인내하지 못하는 살레시오회원들을 보아 왔습니다. 저는 전혀 자비롭지 못한 자비의 수녀회원과 인정사정 보지 않는 애덕 선교회원과 어리석은 지혜의 수녀회원들을 보았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쇄신을 향해서 아직도 아주 먼 거리를 가야 하는 쇄신의 프란치스꼬회원입니다.
어느날 어떤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안에서 무엇이 쇄신되셨습니까?”
저는 답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를 방문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곳이 공산주의자들은 기도하게 되지만 고위 성직자들은 기도하지 않는 도시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느 정도 혼동에 빠져 있으며 드물지 않게는 고심하면서 울기보다는 웃어 넘기는 것이 훨씬 나을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삶을 속속들이 모두 헤아려 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삶이란 퍼즐의 중요한 조각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삶이란 신비로운 것입니다.
말일(末日) 죄인들의 교회
저는 가톨릭 교회를 ‘말일 죄인들의 교회’ (The Church of Latter Day Sinners) 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장해야 할 바입니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느끼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지미 스웨거트는 한동안 그러한 교회를 주도하다가 중도에 그만 두었습니다. 아마도 영적 유익이 넘치고 넘친 나머지 밑바닥이 떨어져 나가버렸을 것입니다. 그의 교회 성원들은 모두 자신이 성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인이 아닌 것이 오히려 좋을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인들을 구하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오, 9:13).
지미는 불명예스러운 스캔들이 있은 후 자신을 참회자로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현명하다면 그들은 모두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죄인이라 고백할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성인으로 시성될 것이 거의 분명한 몇몇 분들과 개인적인 친교를 쌓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죄인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의 이러한 보잘 것 없는 죄인들이 상처받을 것이고 서로 상처를 줄 것임을 예상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을 실망하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가정을 포기하고 사막에 가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듯이, 교회로 인해 실망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를 떠나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한 번도 상처받은 적이 없는 분 혹시 계십니까?
『하느님의 도성』(City of God) 에서 성 아우구스띠노께서는 현명하게도 이렇게 관찰하셨습니다. ‘아무리 가정이라 하더라도 그곳은 안전한 장소가 아니며 그곳에서조차 친구를 가장한 적으로부터 또는 줄곧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적으로 돌변한 자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착한 사람들은 상심(傷心)하게 된다.’ 만일 우리 모두가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인류를 포기하려 한다면 우리는 멀리 떨어진 다른 행성으로 이사가야 할 것입니다.
(St. Augustine, City of God, book XIX, chap. 5, ed. : Vernon Bourke (New York: Doubleday, 1958), 44.)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교회 안의 사람들, 심지어 교회 당국으로부터도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때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침착을 찾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받는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는 좋은 원칙입니다. 찬찬히 산책을 하면서 침착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아일랜드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벼게로부터 충고를 얻어라.” 이말은 문제가 생겨 고민하는 경우 우선 잠부터 자두라는 의미입니다. 진정이 되고 침착을 찾은 후 스스로 질문해 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나의 문제인가? 내가 유한한 인간으로부터 너무 기대를 많이 가졌던 것은 아닐까? 나는 적법하게 희망할 수 있는 것을 교회 안에서 찾고 있는가?”
그 답변은 아마도 “그렇다.”일 것입니다. 그것은 논리적이고 정당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적으로 친절하고 충실한 응대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조차 당신이 세우신 교회 안에서 그러한 응대를 발견하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보아 오신 바와 같이 교회는 언제나 약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회로부터 상처받을 때 우리는“교회”가 매우 일관적이지 못할 수 있다는 문제를 알게 됩니다. 교회 안의 사람들은 어느 날에는 상냥하다가도 다음 날에는 쌀쌀맞을 수 있습니다. 한 날 한 본당에서조차 지극히 자선적일 수도 지독히 불친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 저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교회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교회 구성원들에 지나치게 의지함으로 인해 하느님과 그분의 아드님께 충분한 의탁을 드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여러분도 아다시피,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서 매우 긍정적인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위해 일하며 그것은 매우 긍정적인 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은 가톨릭 학교에 나가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의 어떤 위원회나 운동의 일원이었고 그것은 그들 일생에서 가장 긍정적인 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단꿈같은 신혼여행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사라져 버립니다.
교회의 특정 부분에 지나치게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 자신의 의탁을 드리십시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던 성인 – 십자가의 성 요한
십자가의 성요한은 갈멜회의 신비가입니다. 이 선량한 양반은 언제나 어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분은 매우 영민하고 지극히 영적이며 신실하였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인도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개혁 갈멜회 수사 수련원을 설립하였습니다. 데레사 성녀께서 그곳을 보러 오셨을 때 곳곳에 십자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성녀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많은 십자가가 있네요. 몇몇 십자가는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성녀는 매우 단도직입적이었고 십자가의 성 요한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습니다. 이미 십자가의 성요한은 데레사 성녀의 개혁을 수행하면서 매우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갈멜회의 오래된 정규적 생활방식을 준수하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체포되어 수도원에 투옥되었고 수도원 식당에서 너무도 심하게 구타당하여 무덤에까지 그 흉터를 지니고 갔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성녀 데레사의 명으로 새 공동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녀께서 돌아가시자 형제 수사들은 그분을 공동체로부터 몰아내려 하였습니다. 성녀 데레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구하러 올 수 없었습니다.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성 요한은 수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주셨습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하느님과 그대 홀로 사는 것처럼 살아 가십시오. 다른 어떤 것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오가는 어떤 것에도 관여하지 마십시오. 큰 기대를 갖지 마십시오. 단지 당신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기도하십시오. ”
너무 심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안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아주 깊은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동료 회원들이 그분을 ‘멍청하다’는 이유로 이 위대한 교회 박사를 공동체로부터 쫓아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침통한 사람으로 살다가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멍청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수도회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이외에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수도원에는 수련장으로서 십자가의 성 요한이 수련시킨 젊은 수사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들에게 영성 생활에 대해 가르쳤지만 아무도 성인을 변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교회 또는 그분에게 중요한 교회 일부분이 그분을 낙담에 빠지게 했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조용히 평화 속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위대한 저술과 평신도에 대한 사목 상담으로 삶의 마지막 과업에 분주하셨습니다. 동료 수사들 중 아무도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St. John of the Cross, Points of Love: The Complete Works of St. John of the Cross, trans. E. Allison Peers, vol. 3 : (Westminster, Md.: Newman Bookshop, 1946), 256.)
가장 오해받고 있는 분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프란치스꼬와 그 수도 형제들의 행복한 모습을 담은 그림들에 친숙합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성 프란치스꼬는 당신의 말년을 유배생활이나 다름없이 살았습니다. 그분에게는 거의 동반자가 없었고, 수도회는 코르토나의 엘리아라는 사람이 관장하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엘리아는 성 프란치스꼬의 최악의 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엘리아는 프란치스칸으로 죽지도 않았습니다.
성 프란치스꼬는 당신의 비젼을 진정으로 공유하는 사람이 거의 없음으로 인해 고통받았습니다. 그분의 경탄할만한 모범대로 살 수 없었던 어떤 추종자들은 어리석은 합리화로 빠져 들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광신주의로 빠져 들어 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 프란치스꼬의 메시지 일부분을 강조하여 어느 부분을 택하였고 다른 이들은 또 다른 부분을 택하였습니다. 결국 거의 모든 이들이 성 프란치스꼬를 저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성인께서 돌아가셨을 때 성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기는 하였습니다. 관용과 오만, 감상성(感傷性)과 광신주의 사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들은 -성인은 자신을 매우 단순한 자로 보고 있음에도- 이 거룩한 분을 실제로 결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과 성 프란치스꼬로부터, 우리는 교회의 어느 특정 부분에 지나치게 기대서는 안되며 하느님께 신뢰를 두어야 함을 배웁니다.
만일 당신이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면 가만히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원죄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내가 잊고 있었던 걸까? 교회는 바다 속으로 던져진 거대한 그물이라는 사실을 내가 잊었던 것은 아닐까? 교회 안에서 때에 따라 최선의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최악의 구성원들도 본다는 것을 내가 잊고 있었던 걸까?”
교회를 달리 바라보기 시작하십시오. 성직자로부터 박해받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성 프란치스꼬는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그 후 주님이 거룩한 로마교회의 관습을 따라 생활하는 사제들에 대한 큰 신앙심을 주셨고 또한 지금도 주시기에, 만일 그분들이 나를 학대한다 해도 그분들이 받은 품(品) 때문에 나는 그분들에게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가 솔로몬이 가졌던 그 정도의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고, 속화된 불쌍한 어떤 사제 들을 만난다 해도, 그분들의 뜻을 벗어나 그들이 거주하는 본당에서 설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과 또 다른 사제들을 마치 나의 주인인 듯이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존경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분들 안에서 나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 뵙고, 그분들이 나의 주인이므로 그분들 안에서 죄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제 자신들도 성체를 영하고 사제들만이 다른 이들에게 분배하는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극히 높으신 아드님을 내 육신의 눈으 로 결코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The Testament of St. Francis: Omnibus of Sources, ed. : Marion Habig (Chicago: Franciscan Herald Press, 1988), 67.)
언제 자리를 옮겨갈 것인가?
때때로 사람들은 제게 와서 이야기합니다. “저는 저의 본당을 참을 수 없어요. 신부님 강론 내용은 진정으로 가톨릭 신앙의 참된 가르침이 아니더군요.” 슬픈 일이지만, 이러한 경우는 오늘날에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과거 교회 역사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헨리 8세 치하 시절 가톨릭 교회에 충실한 영국 주교는 30명 중 단 한명 뿐이었다는 사실(史實)만 보더라도, 여러분이 나가시는 가톨릭 교회에서 참된 가톨릭 가르침을 들을 수 없는 경우는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에게 묻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답합니다.
“당신이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면 운전하십시오. 만일 자동차가 없다면 이 기회에 차를 하나 장만하십시오. 그것도 안되면 자전거나 조랑말이라도 구하십시오.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친구 차라도 얻어 타십시오. 가십시오. 이런 저런 것 모두 안된다면 버스 토큰이라도 사십시오. 다른 본당으로 가십시오. 지금은 편리한 교통의 세상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니는 본당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 현재 로마의 주교가 해석하는 가톨릭 교회 가르침에 열성적으로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불편을 느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다면, 다른 본당으로 가십시오.”
사람들은 언제나 제게 묻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답합니다.
다른 본당을 찾아 가십시오.
당신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법
만일 사정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경우, 재치있는 잡음을 내시기 바랍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잡음들은 매우 재치있지는 못합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 저는 불만사항들을 추수 조사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적어도 그러한 불평의 절반은 전혀 말도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불만 청원은 우스꽝스럽거나 지극히 사소한 일에 대한 트집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불만 사항들입니다. 그러나 종종 아주 좋은 불평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있는 불평을 제기하시는 분들조차도 심리적 쌍도끼를 치켜 들고 우격다짐으로 저를 찾아 오십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는껏 최선을 다해 지역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엉망진창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구현될 수 있게끔 노력해야 합니다.
대림절에 사제가 청색 제의를 입었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노발대발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신심이 깊기는 하지만 요란 떨기 좋아하시는 가톨릭 신자 분들은 이단과 부적절한 품행 사이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모르십니다.
내가 규율을 어겼을 때
때때로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분노합니다. 만일 당신이 사제라면, 조만간 영혼의 선익을 위해 규정을 어겨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규율을 어긴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죄가 되는 것은 단연코 아닙니다. 사실, 규율을 어기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법을 포함한 교회 규율은 드물지 않게 정상 참작 청원을 받아들입니다. 매우 심각한 규율을 깨버렸던 저의 실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심지어 저는 법적으로 좋지 못한 행실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매우 신심깊고 사랑스러운 푸에르토 리코인 부부의 결혼 50주년을 기념하는 미사를 드리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자녀들과 손자 손녀와 증손들이 있었고 그들 모두는 세례와 견진을 받았습니다. 대단한 가정이었지요. 성대한 기념 미사가 있기 전날 저는 그 부부를 만나서 말씀을 여쭈었습니다.
“내일이 실제 결혼 기념일이시지요?”
쥐죽은 듯한 침묵. 그 방에는 12명 가량의 일가 친척들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자, 정확한 결혼 기념일이 언제이신가요? 결혼하신 날짜를 기억하고 계시다면 제가 내일 강론에서 잠깐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한 딸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희 부모님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부부랍니다.”
제가 무엇이길래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더 좋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전혀 결혼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대신 단순히 내일을 기념일로 잡은 것입니다.
(미국) 교회와 국가 규율은 민법적 결혼식 증서 없이는 성직자가 결혼식을 주례할 수 없다고 규정합니다. 만일 성직자가 그렇게 한다면 법적으로 좋지 못한 행실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50년이 지난 지금 저는 상서원(尙書院) 담당 신부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들어 보세요. 지금 오후 3시인데, 내일이면 이곳에 약 백명의 사람들이 올 겁니다. 만일 신부님께서 제가 이 노부부를 시청까지 데려다가 와서만 테스트 (Wasserman Test) 를 받게 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저를 아주 잘못 이해하신 겁니다.”
지금은 주교님이 되신 상서원 신부님은 단순히
“유효한 교회 결혼이 될 수 있도록 담당 사제로부터 위임장을 받도록 하세요.”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민법적 결혼 증서 없이 혼배성사를 거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저를 찾아와서 연행해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가 적발되는 경우 저는 앞으로 결코 법무장관은 되보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제가 저지른 유일한 법적 비행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곤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리사이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바리사이인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바리사이인들은 별로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법을 지키는데 사용했지만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갈바리아산 십자가 아래에도 서 있기는 하였으나 잘못된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와 달리 우리는 정직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의(敎義)와 전통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질서에서 벗어난 무엇에 반대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1960년대에 젊은 사제였던 저는 대주교님의 서면 허가를 받고 유대교 회당과 개신교회들에서 설교하였을 때 여러 곳에서 혹평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조롱하고 비판하였으며 주교회의에 저를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언제나 스펠만 추기경의 허가서를 받았습니다. 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로마에 있는 유대교 회당에서 연설하시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을 정도로 오래 살았습니다. 저는 20년 이내에 교황께서 행하시게 될 일을 함으로써 혹독한 비판을 받았었습니다.
요즘은 어려운 시기요 격동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질서 속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회 가르침으로부터 엇나간다거나 불평을 하고자 한다면 지혜롭게 그리고 애덕으로써 그렇게 하십시오. 남용과 예외와 개인적인 짜증을 구분하는 것은 지혜롭고 애덕에 넘치는 일입니다. 일부 신심깊으신 분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최상위 목자이십니다. 교황은 교회의 최상위 목자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십니다. 교황은 이 세상 속에서 당신 자리에 서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지상에서 걸어다니셨던 시대에도 최상위 목자이셨지만 하느님의 섭리와 성령강림으로써 오늘날에도 교회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일을 얽히고 설키게 만드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이들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때조차 잘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 바로 곁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툴렀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실수는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인내심을 보여달라는 부탁을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극도로 어렵고 혼란스럽고 이교도적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평화를 불필요하게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수백 명의 주교님들의 피정 지도를 해 왔습니다. 그분들은 매우 어려운 직무를 맡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저와 마찬가지로, 그분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하여 대부분 준비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종교가 매우 긍정적었고 미국인 생활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에서 자라났습니다. 종교는 대중적인 것이었고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보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대를 살아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아기들이 살해당하는 장소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체포당하시는 일흔, 여든 연세의 수녀님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 중얼거립니다. “이곳이 정말 미국 땅이란 말인가?” 저는 감옥에 있는 사제들과 주교들을 방문하였습니다. 저의 친구인 오스틴 보건 주교와 죠지 린치 주교는 여러 날동안 감방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린치 주교의 경우는 여러 주 동안 복역해야 했습니다. 또다시 저는 질문합니다.
“이런 일이 정말로 미국 땅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걸까?”
그 두 분의 주교님들과 다른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단 몇 십년 전만 해도 미국 땅에서 심각한 범죄였던 일들에 반대한다고 해서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35년 전만 해도 낙태를 하는 사람들은 법적으로 중죄인이었습니다. 미국 의학 협회는 낙태 집행자들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이들의 생명을 빼앗는 저급한 자들로 비판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낙태가 허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금 납부자들이 내는 돈을 지원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이 상처받고 있을 때라도 교회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교회는 엄청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망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허리케인에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음악을 놓고 불평하는 사람은 제게 타이타닉호 갑판 위에서 셔플보드 게임을 즐기던 승객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지금은 교회에 충실해야 할 시기입니다. 저는 테렌스 쿡 추기경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분은 가톨릭 교회를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의 전임자 스펠만 추기경과 그 후임자 오코너 추기경처럼 테렌스 쿡 추기경은 교회를 위해 “잦은 방문과 수많은 불면의 밤을”(2고린토, 11:26-27) 정말 쉼을 모르고 일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어가시는 중에조차 온갖 인간의 기대를 넘어서까지 자신을 몰아 세우셨습니다. 그분은 가톨릭 신자들 뿐만 아니라 하느님 백성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정교회 그리스도교인, 개신교인, 유대교인, 이슬람교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대주교가 되셨을 때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이들, 심지어 하느님을 전혀 믿지 않는 이들의 주교로서의 저의 책임을 인식합니다. 그분들께서 허락하시기만 한다면 저는 최선을 다하여 그분들께 봉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께서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이렇게 강론하시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교회를 사랑합시다. 교회를 위하여 우리 일합시다. 교회를 위해 수난하고 교회를 수호합시다.”
아마도 교회는 그분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저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교회에 가까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기간 동안이 되었든지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교회가 준 상처가 아니라 교회의 일부분이 준 상처였습니다. 우리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위대한 교회가 그 충만한 실제를 실현할 것임을 여러분과 제가 알게 될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때 모든 이들은 나라와 인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신비체 속으로 모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천상 교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해 분투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충실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교회에 충실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의 영성 생활은 매우 약하고 정말로 매우 협소해질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날에는 다른 누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 개개인이 이 상처받은 세상속의 그리스도 교회의 지체로서 교회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셨고 교회를 위해 수난하였던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쓰셨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이렇게 내가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라고 나에게 주신 직무에 따라,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 나타난 이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골로사이, 1:24-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 시대에 걸쳐 이어주신 교회에 충실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성 프란치스꼬, 성녀 가타리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성 비오 10세, 성 파드레 비오, 솔라누스 신부, 쿡 추기경,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마더 데레사 모두가 당신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로서 충실하셨고 겸손하셨으며 너그럽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교회에 봉사하셨던 모범에서 우리의 영성적 완성을 발견하도록 합시다.
기도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께서 이 지상에서 걸어다니셨을 때
당신은 숫한 거부를 체험하셨습니다.
당신 성가정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와
이스라엘에서 만나신 사람들의 거부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의 사도들의 배반에까지….
당신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슬피 우셨고
당신 벗들의 배반에 깊이 한탄하셨음에도
그들의 거부는 당신을 단념시키지 못했습니다.
당신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당신께서는 교회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를 당신의 교회라 부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영원한 생명 속에서 구원받고 당신과 일치하게 될 모든 사람들의 결합이며
우리가 당신의 몸이라 부르는 신비로운 실재를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교회가 저희를 낙담에 빠지게 할 때,
오 주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가 비통함에 빠지지 않고 배반하지 않으며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있도록 저희를 도우소서.
당신과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
교회를 사랑하고 그를 배반하지 않도록 저희를 이끄소서.
비통함 없이 받아들이고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저희를 도우소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봉사할 수 있도록
저희를 도우소서.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저희가
저희 시대의 온갖 공격과 추문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당신 은총을
당신 교회의 자녀들에게 비추어 주소서.
당신께서 사도 바오로를 교회의 종으로 부르셨듯이,
당신 은총으로써 당신 교회의 적들을
교회의 친구와 지체로 불러 주소서.
그리고 오 주여,
이 모든 환란 가운데 저희가 사도들을 통하여 온 교회에게
“내가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하신 당신 말씀을
믿을 수 있도록 도우소서.
– 베네딕트 J. 그로쉘 신부, 쇄신의 프란치스꼬회 (Fr. Benedict J. Groeschel, C.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