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쥬고리예의 스벳신부님이 3월30일 ‘성토요일’에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
(스벳토잘 크랄리에비치 신부님이 조금 늦게 오셨습니다.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고, 주모경으로 시작합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저는 슬라브코 신부님이 창설하신 이 근처에 있는 고아원 ‘성모님의 마을’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내일 12시에 네명 아이들이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부 한 식구였던 아이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몇가지 준비할게 있는데 한번에 다 처리하려니까 쉽지 않군요. 그래서 오늘 아침 제가 가야하는곳마다 지각을 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순례일 것입니다.
이 아이들 모두 역시 순례자들입니다. 전쟁 중에 태어나서, 피난민이면서 병든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있고, 정신분열증이 생긴 어머니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친척들도 없이된 아이도 있어서 그런 아이들이 이 ‘성모님 마을’에서 길러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모님 동산’은 우리 모두에게 정말 이 모든 것이 순례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집트로 가실 때와 갈바리에 오르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 모든 것이 바로 순례의 여정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너는 집에 있으니까 아무 염려 없다’라는 기만적인 사고방식을 얻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편한것이 좋다는 느낌을 받도록 우리를 속이려합니다. 우리는 너무 편해지려고만 하고, 모든게 다 잘되고 있다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특히 질병이나 고통, 가난 등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을 때 말이죠. 때때로 우리는 우리 삶에서 순례를 위해 필요한 이런 차원의 것들을 겪지 않는것처럼 가장하며 살기도 하죠.
순례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 매우 특별한 것을 가르치시려는 순간입니다. 메쥬고리예의 성모님의 가장 핵심적인 메세지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메세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라’는 말씀 자체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 있는 기도만으로는 삶의 지혜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이죠. 종종 세속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기도로 바쳐지게 되곤 합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중얼거릴 때, 다른 훌륭한 기도문들을 바칠 때, 우리는 그것으로 다 잘하고 있는 것으로 편하게 생각해버립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메쥬고리예에 초대를 받게 되었죠. 이 메쥬고리예에의 순례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기도를 이끌어내게 됩니다. 이 육체적인 순례를 통해 우리는 기도를 배웁니다. 순례를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육체적인 개념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모님께서는 순례자들 가운데 첫째가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아드님과 함께 말이죠. 성모님께서 많은 말씀으로 기도하신다는 건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성모님에 관한 부분을 읽어볼 때, 성모님은 언제나 길을 가고 계셨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움직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언제나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천사가 성모님께 나타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다”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핵심적인 작용 방법입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것. 하느님의 ‘말씀’이 성모님의 ‘육체’가 되신 것. 그것이 성모님의 기도의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차원의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반복하죠. “하느님의 말씀이 성모님의 육체가 되시다.” 이것이 성모님 기도의 주된 방향입니다. 바로 순례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놀라우신 가르침(교훈)이십니다. 순례를 통해서 우리는 성모님의 이러한 기도의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성모님의 삶의 방법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삶에서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말씀과 성모님의 육체 사이의 대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우리의 ‘말’로 하지요?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그분의 기도를 그분의 ‘육체’로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것보다 우월한 점이자, 우리와의 차이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현 세상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하셨던것과 같은 ‘육체적’인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의 기도는 이러한 육체적인 면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전 인류의 96%가 종교가 있으면서도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두가 신에 대한 축제를 올리지만, 이 세상에서 신은 인지되지 않고 있습니다. 육화(말씀이 사람이 되심, 구체화, 실현)가 없기 때문입니다. 뉴욕의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겠지만, 뉴욕시를 걸어보면 그 구체적인 육화는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들은 이렇듯 믿음의 육화(구체화)를 잃어버렸습니다. 실제화되지 않는 신앙인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어리석은 것들을 다 물리치십니다.(?) 감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그분의 ‘말씀’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 자체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육체’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분의 육체가 말씀하셨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분은 침묵하셨습니다. 전혀 말씀을 안하시거나, 짧게 몇마디만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체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하십니다.
천상으로부터 지상으로의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바로 이러한 ‘육화’입니다. 육화 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그리스도의 몸은 천상으로부터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러한 ‘육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엔 너무나 많은 ‘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볼 수 없게 우리가 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행 체계, 경제, 문화, 정치 제도가 있고, 세상은 군대화되었습니다. 문화라는 것은 완전히 세속화 되고있고 – 어쩌면 너무 성적으로만 치닫고 있으며 – 이젠 하느님의 말씀이 구체화(육화)되는 것은 거의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순례는 오늘날의 우리가 배워야할 중요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순례를 통해 우리는 ‘변화’를 경험합니다. 순례가 지식적으로 알아야할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지적인 일이 아닌 것입니다. 순례의 최종 목적은 어떤 새로운 교훈을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순례는 어떤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닌 훨씬 더 큰 그 무엇입니다. 순례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자신의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 몸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뭐, 대단히 낭만적인 일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흠. 저는 여러분의 몸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지만요. 60킬로그램? 90킬로그램? 어쨌든, 그 몸무게만큼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살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러한 물리적인 움직임(순례)의 이유인 것입니다.
언젠가 이곳 메쥬고리예에 굉장히 굉장히 중요한 정치가 한 분이 오신 적이 있습니다.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 분과 좀 지내게 되었는데, 제가 ‘가서 십자가 산에 올라 보십시오’라고 얘길 했었습니다. 그 분은 제게 ‘내가 왜 거길 올라야 하는지 설명을 해주겠소?’라고 물으셨고, 저는 ‘설명은 필요가 없으니, 그냥 올라 보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설명을 하려고 한다해도, 우리는 그것의 작은 부분밖에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가난한 사람에게 맛있는 스테이크와 빵과 좋은 맥주를 곁들인 맛있는 점심식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별로 감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데리고가서 그러한 식사를 차려줄 때에야 그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씀’이 육화가 될 때에, 바로 그럴 때에만이, 오직 그래야만,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고, 올바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주로 비판받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입니다.(?) 우리는 자주 젊은이들이 얼마나 잘못되고 있는지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보는데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의 그들이 듣게되는 이러한 육화(구체화)가 그들 자체로써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의사소통을 통해 그들이 받게되는 것으로 그들은 자라나게 됩니다. 그들은 본 것과 경험한 것들의 증거자가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길, 성모님이 따르시던 길 만이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이 되는 것. 우리의 육체가 되는 것. 바로 우리가 순례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순례를 통해 감화를 받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도록 우리의 존재 자체를 내어놓아 의탁하는 것입니다.
순례를 완전한 기도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도와 하느님께로의 의탁 없이는 어떠한 발견도, 우리 삶의 어떠한 면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약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믿음, 신앙은 병들게 될 것입니다. 그 병은 정신분열증이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한 부분은 여기, 한 부분은 저기에로 분열되고 말 것입니다. 순례는 가장 놀라운 치유의 순간입니다. 순례는 그러한 분열이 다시 돌이켜지는 어떤 ‘처리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순례를 한다고 예를 들어봅시다. 성서에서 ‘마태오’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세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과 함께 가기로 마음먹었죠. 그가 예수님을 믿기로 마음만 먹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가진 돈을 모두 내어놓았고,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것이 그가 치유받게 된 이유입니다. 그의 안의 분열되었던 모든 것이 다시금 일치된 것입니다. 그는 ‘말’로만 하느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손을 내뻗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집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 되었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순례하라고 부르시는 그 의향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노력을 요하는, 굉장히 놀라운 과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실질적으로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수년 전에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아이들에게 제가 강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성체성사’를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저는 줄자를 하나 준비했습니다. 잴 때 쓰는거 말이죠.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 갑자기 줄자를 길게 내보였습니다. 아이들은 ‘이게 뭐지, 신부님이 뭐하시는걸까’하며 놀랐죠. 다들 줄자가 뭘 하는것인지 아시죠. 저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성체’는 우리 삶을 재는 척도입니다. 성체로 우리의 삶을 잴 수 있습니다. 성체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잴 수 있습니다. 우리 삶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성체로 측량되어야 합니다! 성체로 잴 수 없는 것은 우리 삶 안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체성사는 삶에서 절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체성사는 모든 것을 재는 것입니다. 성체 성사로 측량될 수 없는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장 우주적인 척도입니다. 모든이의 마음 안의 모든 것을 잴 궁극적인 ‘자’인 것입니다. 성체 외에 우리의 삶을 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체 외의 것으로 우리 삶을 다르게 재기 시작한다면, 근본적으로 두가지 선택권이 있을 것입니다. 성체로 재던지, 아니면 우리만의 기준으로 재던지. 근본적으로 그 둘밖에 없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뭐,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게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내가 이만하면 잘났지”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조차 우리가 결정하는데로 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의 기준으로 삶 안의 것들을 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치명적인 죄악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것이 아닌 우리만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재고 판단하는 것 말입니다.
주일의 미사로 모든 것은 시작됩니다. 제가 이제껏 여러번 말한 것을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이웃이 당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모른다면, 절대로 당신은 가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다시 반복하죠. 당신의 이웃이 당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모른다면. 정말로, 대부분의 경우 당신은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화(말씀이 사람이 되심, 구체화)는 정말, 정말 공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7일간 단 하루만이라도 성당에 가는 것 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무신론자입니다. 다시 반복할까요?
교회의 계명은 우리에게 7일중 하루라도 성당에 가라고 합니다. 가능하다면 그것은 ‘주일’이어야겠지요.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범위 밖에 있는 것입니다. 상관없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반대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정말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재판소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정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주일 미사조차 가지 않음으로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언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전혀 찾아가 만나보지 않는 친구와 같은 것이죠. 전혀 찾아보지 않는다면, 우정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우정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것이죠. 함께한다는 것이 친구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무신론자는 아닙니다. 당연한거죠. 하느님을 믿는것과, 안믿는것은 하느님이 계시고, 안계시고를 말하는 것과 같겠습니다만, 하느님이 계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건 마치..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차이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친구인지, 아닌지. 우리 안에서 육화(구체화)가 일어나는지, 아닌지인 것입니다. 흠, 너무 단순히 말씀드린것 같습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께 헌금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돈과 하느님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고, 여러분 삶에 하느님의 자리는 없다는 뜻이며,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삶 안에 하느님의 자리가 없다면, 하느님과의 우정도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우리는 순례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순례는 진정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다’- 곧, 육화(구체화)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기도입니다. 육화으로의 진정한 경험입니다.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사람들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고, 알게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산에 오를 때, 그 완전한 침묵 중에서 – 그 아무 말도 필요없는 순간 – 당신이 그곳에 서있다는 것만으로,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에 대한 총체적인 증거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곳에 서있다는 것, 기분이 나쁜 상태일 수도 있겠지요,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고, 그게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이 그곳에 서있다는 것을 보고있는 누군가에게는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보고있는 그 사람은 당신이 ‘하느님의 증거자’라는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그 ‘신앙’으로 감화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깊은 인상을 받고, 감동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순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육체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침묵하고 있지만, 그 육체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이끌고 거룩한 곳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 집앞의 길에서 대단한 믿음을 갖고 신앙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도 당신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식으로는 하느님의 증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입으로 말을 하실지 모르지만, 육체는 그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집에 돌아가서는, 여러분은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육체’가 하느님의 편으로 가야합니다. 여러분의 소유물들을 하느님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말을 하지 않고도 충분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밤낮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얘길하는것보다, 침묵중에 주일에 미사에 가는 것이 가장 강력한 웅변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업에 돈을 낸다면, 자녀들이 안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분명 당신 믿음에 깊은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순례는 이렇듯 놀라운 기도의 배움터입니다. 여러분들도 성서안의 인물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과 같은 순례자가 되는 것이며, 여러분 주변의 세상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복되신 성모님의 메세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성사’를 통해 유도되어야겠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성체성사는 우리 삶의 척도입니다. 그리고 성체 성사 안에 모든 다른 성사가 들어있습니다. 모든 성사는 성체성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순례는 우리가 성체성사의 삶을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순례는 우리 자신을 성체성사가 되게- 거룩한 일치(영성체)- 생명의 음식이 되게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독이 되지 않으며, 온 세상에 생명을 주는 음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놀라운 위안(수단)인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시면, 여러분 모두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이 순례 동안에도 여러분에게는 두려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천사가 복되신 성모님께 나타났을 때에도 처음에는 성모님이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러니 집에 돌아가시게되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그 두려움 위에 세워나가지 마십시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한번 청하는 것은 부디 용기를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질문 – 우리에게 안수를 해주실 것입니까?
대답 – 궁금한거 질문해주세요.
질문 – 미국의 9월 11일 테러가 있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대답 – 여기 계신 분들 그때 기도를 많이 바쳤습니다. 이곳에 영어권 순례자들이 매우 많이 있었습니다. 보셨듯이, 이 세상이 하느님 말씀의 육화(구체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유일한 길은 악마의 육화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그때 나타난 것입니다. 9월 11일에.
하지만 9월 11일에 대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때에 3000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이 나라에도 9월11일과 같은 것이 있었고, 50000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누구에게나 9월11일이라는 것은 있습니다. 누군가의 9월11일만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모두의 9월11일을 존중해야 합니다. 문제는 나의 9월11일은 생각하면서, 이웃의 9월11일은 생각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 – 성령으로 잉태하셨나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주님의 종이오니 –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 저희 가운데 계시나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기도합시다 – 하느님,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셨음을 알았으니,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강복하시고 길이 머무소서.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축복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