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이 야곱의 마리아의 집에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또 다른 안식일인 것 같다.
  어린 아이들은 아직 그들 가운데 있는데, 화덕 근처 예수 곁에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가리옷의 유다가 이런 말을 하게 된다.
  “그 동안 1주일이 지났는데 친척들은 오지 않았군요.” 그러면서 머리를 흔들며 웃는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시고, 둘째 아이를 쓰다듬어 주신다. 유다는 베드로와 알패오의 야고보에게 묻는다.
  “그런데 자네들은 세겜으로 가는 두 길을 걸어갔다고 했지?”
  “그래, 그렇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쓸데없는 일이었어. 확실히 도둑들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로 지나가지는 않을 거야. 더구나 로마군의 분견대가 끊임없이 그 길로 돌아다니는 지금은 말이야.”하고 야고보가 대답한다.
  “그럼 자네들은 왜 그 길로 갔나?” 하고 가리옷 사람이 계속 묻는다.
  “그래서! …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가나 우리에겐 마찬가지야. 그래서 우리는 그 길로 간 걸세.”
  “그런데 아무도 자네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지 못했단 말이지?”
  “우린 아무 것도 묻지 않았네.”
  “그러면서 어떻게 그들이 지나갔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보겠다는 건가? 어떤 길로 가는 사람들이 혹 깃발이라도 가지고 다니거나 흔적을 남기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진 않을 걸세. 그랬더라면 우리가 벌써 발견됐을 걸세. 적어도 친구들에게는. 그런데 반대로 우리가 여기 와 있은 뒤로 아무도 오지 않았단 말이야.” 그러면서 빈정대는 웃음을 웃는다.
  “우리는 왜 아무도 여기 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네.” 하고 알패오의 야고보가 참을성 있게 말한다. “선생님은 아시네. 그러나 우리는 알지 못해.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우리처럼 사람들이 모르는 곳으로 피신하는 사람들은 피신한 곳을 일러주지 않으면 올 수가 없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사촌이 친구들에게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하네.”
“오! 자넨 선생님이 적어도 라자로와 니까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으셨으리라고 믿겠다는 건가?”
  예수께서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한 아이의 손을 잡고 나가신다….
  “나는 아무 것도 믿고자 하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자네가 믿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자넨 아직 친구들이 오지 않는 이유를 판단할 수 없네. 우리 중의 아무도 판단할 수 없어….”
  “그 이유는 이해하기 쉬운 걸세. 아무도 최고회의와 말썽을 빚기를 원치 않는 거야.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일수록 난처한 일이 있는 걸 더 원치 않을 거야. 그뿐이야! 위험을 무릅쓸 줄 아는 사람은 우리뿐이야.”
  “유다, 공정하게! 선생님은 당신과 같이 남아 있으라고 우리 중의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셨네. 최고회의가 무서우면 자넨 왜 남았나?” 하고 알패오의 야고보가 지적한다.
  “그리고 자넨 마찬가지로 자네가 가고 싶은 때에 떠날 수 있네. 자넨 사슬에 묶이지 않았어….” 하고 제베대오의 아들인 다른 야고보가 말을 막는다.
  “그건 안 돼! 정말 안 돼! 여기 있으면 남아 있는 거야, 모두. 가고 싶은 사람은 전에 떠났어야 했어. 지금은 안 돼. 선생님이 반대하지 않으시더라도 내가 반대하네.” 하고. 베드로가 식탁을 주먹으로 한번 탕 치면서 느리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왜? 자네가 뭐길래 선생님 대신 명령을 하는거야?” 하고 가리옷 사람이 그에게 세차게 묻는다.
  “선생님처럼 하느님으로서 이치를 따지지 않고 사람으로서 이치를 따지는 사람일세.”
  “자넨 나를 의심하나? 나를 배반자로 생각하는 건가?” 하고 유다가 불안해하며 말한다.
  “자네가 바로 말했네. 자네가 고의적으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유다, 자네는 너무도… 태평스럽고 너무도 잘 변하네! 그리고 친구가 너무 많아. 또 모든 일에 있어서 자네는 위대함을 너무 좋아하네. 자네는, 오! 자네는 잠자코 있지 못할 걸세! 어떤 신의 없는 사람에게 대꾸하기 위해서나 자네가 사도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자넨 말을 할 걸세. 그래서 자네는 여기에 있고 여기 남아 있는 걸세. 그렇기 때문에 자네는 해를 끼치지 않고, 가책을 가지지 않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억제하지 않으시는데, 자넨 그렇게 할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이네. 그렇지만 결국 말해 보게. 자네가 비를 맞나? 빵이 없나? 공기가 나쁜가? 사람들이 자네에게 모욕을 주나? 그런 것이 하나도 없지. 집은 비록 부유하지 않아도 든든하고, 공기는 좋고, 음식도 결코 부족하지 않았고, 주민들이 자네를 존경하네. 그러면 자넨 왜 감옥에라도 갇힌 것처럼 여기서 그렇게 불안해하나?”
  “‘내 마음이 용납할 수 없는 백성이 둘이 있고, 내가 미워하는 셋째 백성은 백성도 아니다. 즉 세이르산의 백성들과 펠리시데인들과 세겜에 살고 있는 어리석은 백성이다.’ 나는 현자의 말로 대답하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네. 저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는지 보게!”
  “흠! 정말이지. 다른 사람들, 자네 고장 백성이 내 고장 백성보다 더 나은 것 같지는 않네. 우리는 유다와 갈릴래아에서 돌팔매를 받았는데, 갈릴래아에서보다 유다에서 더 받았고,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성전에서 더 많이 받았네. 나는 펠리시데인들의 땅에서나 여기서나 다른 곳에서나 우리가 푸대접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다른데 어디 말인가? 다행히 우리가 다른 곳에는 가지 않았네. 또 다른 곳에 간다고 했으면 나는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장차도 오지도 않을 걸세. 나는 더 부정 타기를 원치 않아.”
  “자네가 부정을 탄다고? 시몬의 유다, 자네가 무서워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네. 자네는 성전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네. 자네를 괴롭히는 것은 이걸세.” 하고 베드로와 알패오의 야고보가 필립보와 같이 부엌에 남아 있던 열성당원 시몬이 조용히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씩 두 아이를 데리고 선생님 계신 곳으로 갔다. 그렇게 피한 것은 사랑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공로가 되는 도망이었다.
  “아니야. 그 때문이 아니야. 다만 시간을 허비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 생각해보게. 헤르마스테아를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나? 그 사람은 가서 다시 오지 않았네. 요셉의 말로는 그 사람이 장막절에 대서 돌아오겠다고 말하면서 그와 헤어졌다는데. 자네 혹 그 사람을 봤나? 변절자….”
  “나는 그 사람이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르네. 그리고 판단하지 않네. 하지만 자네에게 묻겠는데, 선생님을 버린 사람, 선생님께 적대적인 사람이 되기까지 한 것이 혹 그 사람 하나뿐인가? 우리 유다인들 가운데, 또 갈릴래아 사람들 가운데는 변절자가 없나?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나?”
  “아니야, 그건 사실이야. 그러나 요컨대 나는 여기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단 말이야.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사람들이 안다면! 우리가 안식일에 사마리아인들의 회당에 들어갈 정도로 그들과 교섭을 한다는 걸 사람들이 안다면! 선생님은 그렇게 하려고 하시거든…. 사람들이 그걸 알면 불행한 일일세! 비난이 정당화 될 걸세….”
  “그리고 선생님은 유죄선고를 받으실 거란 그 말이지. 하지만 선생님은 벌써 유죄선고를 받으셨네. 사람이 이것을 알기 전에 벌써 유죄판결을 받으셨네. 선생님은 유다에서 유다인을 부활시키신 다음에 유죄선고를 받기까지 하셨네. 선생님은 사마리아인이라고, 또 세리들과 창녀의 친구라고 미움을 받으시고 비난을 받으시네. 처음서부터 그러시네. 그리고 자네는 그 누구보다도 선생님이 미움을 받고 비난을 받으신다는 걸 알고 있네.”
  “나타나엘, 자네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그게 무슨 뜻이야? 그 일에 내가 관여라도 했단 말인가? 내가 자네들보다 뭘 더 알 수 있다는 거야?” 유다는 매우 흥분해 있다.
  “아니, 이 사람아, 자넨 꼭 적들에게 둘러싸인 쥐 같이 보이네그려. 그러나 자넨 쥐가 아니고, 우리는 자네를 잡아 죽이려고 몽둥이를 들고 있지도 않네. 왜 그렇게까지 불안해하나? 만일 자네 양심이 평안하면, 왜 죄 없는 말에 그렇게 흥분하나? 바르톨로메오가 무슨 말을 했기에 그렇게 흥분하나? 선생님이 사마리아인과 세리와 죄인과 창녀를 사랑하지 않으시고, 사마리아인들과 세리들과 창녀들과 같이 계실 때에는 ㅡ그리고 지극히 깨끗하신 분이 사람들이며 죄인들인 우리가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에 가까이 가셔야 할 때에 얼마나 노력을 하셔야 하는지는 지극히 높으신 분만이 아실 수 있네.ㅡ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영혼만을 걱정하신다는 사실은 선생님 곁에서 자고, 선생님과 같이 사는 그분의 사도들인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이 혹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이 사람아, 자네는 아직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네! 사마리아 사람들 자신과 펠리시데 사람들과 페티키아 사람들, 그리고 자네가 말하고 싶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자네가 더 이해하지 못하고 더 알지 못한단 말이야.” 하고 베드로가 말한다. 그런데 이 마지막 말에 서글픈 기운이 스며 있다.
  유다는 말이 없고 다른 사람들도 입을 다문다.
  작은 노파가 돌아와서 말한다.
  “시내 사람들이 거리에 와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기도 시간인데 선생님이 말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고 말합니다.….”
  “할머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할머니는 에프라임 사람들에게 우리도 간다고 말씀하세요.” 하고 베드로가 대답하고, 예수께 알려 드리려고 정원으로 나간다.
  “자넨 어떻게 할 건가? 오는구먼! 자네가 가기 싫으면, 선생님이 자네 거절로 슬퍼하시기 전에 나가서 물러가게.” 하고 열성당원이 유다에게 말한다.
  “나도 자네들과 같이 가네. 여기선 말을 할 수 없구먼! 나는 큰 죄인인 것 같아! 내 말을 모두 잘못 이해된단 말이야.”
  부엌으로 다시 들어오시는 예수께서 다른 말을 일체 막으신다.
  일행은 거리로 나가 에프라임 사람들과 합쳐져서 그들과 같이 시내로 들어가, 회당 앞에 이르렀을 때에야 걸음을 멈춘다. 말라키아가 문에 있다가 인사를 하고 들어오라고 청한다.
  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기도하는 장소와 내가 다른 여러 지방에 서 본 기도의 장소 사이에 차이점을 지적하지 못하겠다. 항상 같은 등불들, 같은 작은 탁자, 두루마리들이 얹혀 있는 겹친 선반, 회당장이나 회당장 대신 가르치는 사람의 자리 따위. 다만 여기에는 다른 회당들보다 두루마리가 훨씬 적다.
  “저희들은 선생님을 기다리면서 기도는 벌써 드렸습니다. 말씀하시고자 하시면… 선생님, 어떤 두루마리를 드릴까요?”
  “필요없습니다. 게다가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로 몸을 돌리시고 말씀을 시작하신다.
  “히브리인들이 50년 전에 파괴된 솔로몬의 성전을 다시 지으라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하여 그들의 고국으로 돌려보내졌을 때, 제단이 그 기초 위에 다시 세워졌고, 제단 위에는 아침저녁으로 매일 드리는 번제물이 탔고, 매달 초하룻날의 특별 번제물과 주님께 봉헌된 명절들의 특별 번제물이나 개인이 봉헌하는 번제물이 탔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배에 필요불가결하고 의무적인 것을 복구한 다음, 그들은 돌아오는 다음 해에 예배의 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즉 외부적인 것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은 언제나 영원하신 분을 공경하기 위하여 한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들리는 예배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인데, 사랑은 마음속에 나타나고 소멸되지, 다듬은 돌과 같진 나무와 금과 향으로 나타나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을 공경하는 데보다는 한 나라나 한 도시의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데 더 알맞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신의 성전을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벽과 대리석으로 되어 있지만 사랑이 가득 찬 사람들이 들어 있지 않은 성전으로는 만족해하지 않으십니다. 나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합니다만, 깨끗하고 사랑 가득한 마음의 성전만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당신의 빛과 더불어 그 안에 거처하시며, 지방과 도시들을 그 기도의 장소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따라서 분류하는 평가는 어리석은 평가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들에서 왜 호화로움과 장식에 관하여 경쟁을 합니까? 유한한 것이 솔로몬의 성전이나 모든 왕궁을 합친 것보다도 열배나 더 아름답다 하더라도 혹 무한하신 분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떤 공간이나 어떤 물질적인 화려 속에도 들어 계실 수 없고 그것으로 공경을 받으실 수 없는 무한한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계시면서 그것을 당신을 마땅하게 또 가능하게 공경하기에 어울리는 유일한 장소로 생각하시고, 또 거기에서 공경받기를 원하기까지 하십니다. 의인의 정신은 사랑의 향기 속에서 그 위에 하느님의 영께서 감도시는 성전이고, 머지않아 하늘에서와 같이 삼위일체이신 영께서 실제로 머무르실 성전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석공들이 성전의 기초를 놓자마자 다윗의 칙령에 따라 사제들이 제목을 입고 나팔을 가지고 오고 레위파 사람들은 심벌즈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인자하시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시니 하느님을 찬미해야 한다’ 하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성직자들과 장로들은 전에 있었던 성전을 생각하고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래서 애처로운 목소리와 기뻐하는 목소리가 너무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성전을 짓는 사람들을 괴롭힌 이웃 백성들도 있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도 한 분뿐이시고 참 하느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 짓는 사람들과 같이 짓겠다고 제안했을 때 성전 짓는 사람들에게 물리침을 당한 것을 복수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장애를 인해서 하느님께서 공사를 계속하기를 원하지 않으신 동안은 공사가 중단되었었습니다. 이것은 에즈라서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말한 대목이 얼마나 많은 교훈을 줍니까? 그리고 어떤 교훈을 줍니까? 우선 예배는 돌과 나무 또는 옷과 심벌즈와 정신이 들어있지 않은 노래로 표현될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와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해서 이미 말한 교훈이 있습니다. 또 서로 사랑이 없는 것은 비록 그 자체로는 좋은 목적에 관한 것인 때에도 항상 늦어짐과 혼란의 원인이 된다는 교훈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을 우선 만들어 놓지 않으면 하느님을 찾아도 소용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속에 계십니다. 사랑 속에 자리를 잡는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은 힘들게 찾을 필요 없이도 하느님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의 모든 계획에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성전과 성곽의 재건 때에 일어났던 어려운 사건들에 대한 묵상을 한 다음에 어떤 현인의 마음에서 나온 시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약 주께서 집을 짓지 않으시면, 집 짓는 사람들이 집을 둘러싸고 애를 써도 소용이 없고, 만약 주께서 도시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그 도시를 방어하는 자들이 지켜도 소용없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께서 그 집에 살 사람들이 그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속에 당신을 모시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시면, 어떻게 그 집을 지으려고 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이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증오 때문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못하면 그 도시들에 계실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 도시들을 보호하시고, 그 도시를 방어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증오의 장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을 더 위대하게 만들었습니까? 더 부유하게 했습니까? 더 행복하게 만들었습니까? 증오나 원한은 절대로 유익하지 않고, 혼자인 사람은 결코 강하지 못하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사랑받지 못합니다.
  또 시편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위대하고 부유하고 행복하게 되려고 해뜨기 전에 일어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빛과 사람이 누리는 다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인 것과 같이 잠은 하느님의 선물이니 각자는 생활의 고통에서 기운을 회복하기 위하여 휴식을 위해야 합니다. 각자가 휴식을 취해야 하지만, 잠을 자거나 깨어 있거나 사랑을 동반자로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일이 순조롭게 될 것이고, 그의 가족과 이익이 순조롭게 될 것이며, 특히 그의 영이 발전하여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식들과 그분의 나라의 상속자들의 왕관을 차지할 것입니다.
  백성들이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생각하고 그리워했기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란한 외침 속에서 여러 가지 목소리를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아들들이여 그리고 유다와 갈릴래아의 아들들인 내 사도 너희들! 오늘도 하느님의 성전이 그 영원한 기초 위에 세워지는 동안 환희의 노래와 울음이 있습니다. 지금도 공사를 반대하고,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서가 아니라 고레스 명령에 따라서, 즉 정신의 목소리의 명령에 따라서가 아니라, 세상의 명령에 따라서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질이 낮았던 과거, 좋지 않고 지혜롭지 못해서 하느님의 분개를 유발한 그런 과거에 대해서 어리석고 인간적인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마치 우리가 빛의 시대에 있지 않고, 오랜 옛날의 안개 속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인 내가 말하는 여러분만이라도 똑똑히 보기 위해 여러분의 마음을 빛을 향해 열고, 빛으로 가득 채우시오. 지금은 새로운 때, 모든 것이 재건되는 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들어오고자 하지 않고 새로운 믿음의 성전을 짓는 사람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새로운 믿음의 성전에는 내가 모퉁이 돌이 되고, 돌들을 붙이는 회반죽을 만들기 위하여 나 자신을 온전히 이 성전에 주어서, 건물이 건전하고 튼튼히 서게 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놀랄 만하게 되고 그의 빛으로 온통 감쌀 땅만큼이나 넓게 되게 할 것입니다. 그림자라고 말하지 않고 이라고 말한 것은 내 성전은 불투명한 재료로 이루어지지 않고 정신으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을 위한 돌은 내 영원한 영과 더불어 나이고, 내 말과 새로운 믿음을 따르는 모든 사람도 돌일 것입니다. 무형의 돌, 불이 붙은 돌, 거룩한 돌, 그리고 빛이, 새 성전의 빛이 온 땅에 퍼져서 지혜와 성덕으로 감쌀 것입니다. 그리고 밖에는 과거가 그들에게 순전히 인간적인 이득과 명예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불순한 눈물로 그것을 서러워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만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여러분,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성전을 받아들이시오! 이 시대와 성전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옛날의 분리와 물질적인 경계, 생각과 정신의 경계가 이제는 없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도성 밖에 있는 귀양살이하는 사람, 문둥병자 같이 되는 것이 여러분은 혹 기쁩니까? 하느님의 품에서 쫓겨난 것 같이 느끼는 것이 혹 기쁩니까?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것을 느끼고, 여러분의 영혼이 이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육체 안에 갇혀 있는 가엾은 여러분의 영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흩어졌던 양들처럼 양의 우리로 돌아옵니다.’하고 말하고자 하지 않는 여러분의 고집 센 생각으로 압도하는 여러분의 가엾은 영혼이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자 하지 않는데, 이것도 벌써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느님께는 그 말을 드리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의 영혼의 부르짖음을 약하게 만들더라도, 보편적이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추방을 당해서 불행한 여러분의 영혼의 탄식을 하느님께서는 들으십니다.
  점진적인 시편의 말씀을 들으시오. 여러분은 여러 세기 전부터 높은 도성, 참 예루살렘,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손들입니다. 그곳에서 즉 하늘에서 여러분의 영혼이 내려와서 육체에 생명을 주었고, 그곳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돌아가고자 합니다. 왜 여러분의 영혼을 희생하고자 하고 그들에게 나라의 상속을 잃게 하려고 하십니까? 그 영혼들이 사마리아에서 잉태된 육체 안에 내려온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그 영혼들은 오직 한 분뿐이신 아버지에게서 옵니다. 그들은 유다나 갈릴래아, 페니키아나 데카폴리스의 영혼들이 가진 것과 같은 창조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영의 목적이십니다. 가지가지 우상숭배나 해로운 이단들이나 이교나 신앙 결핍이 하느님에 대한 무지 속에 붙잡아둔다 하더라도, 영은 어떤 것이나 이 하느님께로 향합니다. 만일 영혼이 진리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초기의 기억과 진리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에 대한 그의 무지는 절대적일 것입니다. 오! 이 기억과 이 갈망을 자라게 하시오. 여러분의 영혼의 문을 여시오. 빛이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오! 생명이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오! 진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오. 길이 뚫리게 하시오! 모든 것이 햇살처럼, 춘분 추분의 물결과 거센 바람처럼 들어가게 해서, 그 배에서 나무가 높은 곳을 향하여 우뚝 속사 올라가서 주님 곁으로 점점 더 가까이 가게 하시오.
  귀양살이에서 나오시오! 나와 함께 이렇게 노래하시오. ‘저님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실 때, 영혼은 기쁨을 꿈꾸는 것 같다. 우리 입에는 미소가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더 없는 기쁨이 가득하다. 이제는 사람들이 말하리라.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하셨다>고’ 그렇습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위해 큰 일을 하셨고, 여러분은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오! 아버지! 저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청하듯이 이들을 위하여도 아버지께 청합니다. 주님, 이 갇힌 사람들을, 아버지의 눈과 제 눈으로 볼 때에는 고집스러운 오류의 사슬에 묶여 있는 이들을 돌아오게 하십시오. 아버지, 이들을 마치 큰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개울처럼 아버지의 자비와 아버지의 평화의 큰 바다로 데려오십시오. 제 봉사자들과 저는 눈물을 흐리며 이들에게 진리의 씨를 뿌립니다. 아버지, 큰 추수 때에 아버지의 진리를 가르치는 아버지의 종들인 저희 모두가 지금은 가시 돋치고 독이 있는 풀들만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것 같이 이 밭에서 아버지의 곡식 창고에 들어가 정선된 곡식을 기쁘게 거두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 씨 뿌리는 사람들의 동반자였고 장차도 그러할 저희들의 피로와 눈물과 고통과 땀과 죽음 때문에 새로 태어난 영혼들을 곡식단처럼 들고 아버지께로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멘.”
  회당과 그 앞에 있는 광장을 꽉 채운 대단히 많은 군중 속에 얼마나 전적인 적막이 흐르는지 정말 무시무시할 지경이었던 그 적막이 조심스러운 속삭임이 되더니, 그다음에는 중얼거림이 되었다가 차차 커져서 웅성거림이 되고, 마침내 호산나 소리로 발전한다. 사람들은 손짓을 하며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고 환호한다.
  여기서는 성전의 연설의 결말과 얼마나 다른가! 말라키아가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말한다.
  “선생님만이 불쾌감을 주지 않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진실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 저희들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저희들은 여러 세기에 걸친… 믿음과 여러 세기에 걸친 치욕으로 냉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저희들을 감싸고 는 이 단단한 껍질을 깨뜨려야 합니다. 저희들을 동정해 주십시오.”
  “그보다 한층 더해서 사랑하겠습니다. 착한 뜻을 가지시오. 그러면 껍질은 저절로 깨질 것입니다. 빛이 여러분에게 오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군중을 헤쳐 길을 내시고 나가시니, 사도들이 뒤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