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벌써 사해가 근처에 있음으로 인하여 영향을 받는, 짐승의 발자취가 일체 없는 땅에 와 있으며, 곧바로 동북쪽을 향하여 간다. 날카로운 돌과 소금 결정 투성이이고 키가 작고 가시가 있는 풀이 깔린 땅이 껄껄하다는 점만 빼놓고는 걸음 걷기가 좋고 무엇보다 조용하다. 눈 닿는 곳까지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고 날씨는 온화하고 땅은 말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을 주고받는데, 목자들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지난 며칠 동안 그들을 만나서 그들의 집에 머물던 것 같다. 그들은 또 병이 고쳐진 어린 아이에 대하여도 말한다. 서로 사랑하며 조용히 말한다.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때에도, 지극히 사랑하는 친구와 같이 있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과 같은 눈길로 서로 바라보며 마음으로 말을 주고받는다. 두 사람은 쉬거나 음식을 조금 들기 위하여 앉았다가 다시 길을 가곤 하는데, 항상 보기만 해도 내 마음에 평화를 주는 화평한 태도로 그렇게 한다.
“여기에는 갈갈라가 있다”하고 예수께서 앞에 동북쪽에 있는 산위에 햇빛에 그 흰 빛을 반사하고 있는 한 무더기의 집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신다. “이제는 강이 가까웠다.”
“그럼 갈갈라에 들어가서 밤을 지냅니까?”
“아니다, 요한아. 나는 도시란 도시는 모두 계획적으로 피했다. 그래도 이 도시도 피하겠다. 만일 어떤 다른 목자를 만나면 그의 집으로 갈 것이다. 우리가 곧 다다르게 될 큰 길 근처에서 밤을 지내려고 걸음을 멈추려고 하는 대상(隊商)들을 보면, 그들의 천막에 받아들여달라고 청하자. 사막의 유목민들은 항상 인심이 좋고 지금은 대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시기이다. 만일 아무도 우리를 받아주지 않으면, 한데서 우리 겉옷 속에 꼭 붙어서 자자. 그러면 천사들이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슬픈 밤, 베들레헴에서 제가 지낸 마지막 밤보다는 그래도 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왜 내게로 즉시 오지 않았느냐?”
“제가 죄인이라고 느꼈기 예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도 인자하셔서 나를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위로해 주실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신 것처럼. 그러면 내가 하려고 한 보속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요.”
“요한아, 우리는 그 보속을 함께 했을 것이다. 아침에 음식물과 나무를 발견했지만, 나도 음식을 먹지 않고 불을 피우지 않은 채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과 같이 있을 때에는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선생님과 같이 있으면, 저는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선생님을 쳐다보고 선생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주 행복합니다.”
“나도 안다. 또 아무에게도 내 요한에게 만큼 내 생각이 새겨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네가 이해를 하고 필요한 때에는 침묵을 지킬 줄 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렇다, 너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이해한다. 요한아, 내 말을 들어라. 이제 얼마 있으면….”
“무엇 말씀입니까, 주님?” 요한은 즉시 예수의 말씀을 막고 예수의 팔을 붙잡고, 겁에 질리고 의아하다는 듯한 눈과 납빛깔이 된 얼굴로 똑바로 쳐다보려고 예수를 멈추어 서시게 하면서 묻는다.
“이제 얼마 있으면, 내가 복음을 전하는 지가 3년이 된다. 내가 군중들에게 해야 할 말은 다 했다. 나를 사랑하고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제 자신있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은 사실로 인해서 설득될 것이지만, 대부분은 사실들을 보고도 귀머거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내가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래도 그 말을 하겠다. 자비 외에 정의로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자비가 여러번 또 많은 일에 대해서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영원히 입을 다물기 전에 선생은 재판관과 같은 엄격을 가지고도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네게 이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다. 내가 네게 말하고자 하던 것은 얼마 안 있어, 내 양떼가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해야 할 모든 말을 하고 나서, 나는 기도를 하고 준비를 하기 위하여 정신집중을 많이 하겠다. 그리고 기도를 드리지 않을 때에는 너희들에게 몸을 바치겠다. 내가 처음에 한 것과 같이 끝에 가서도 그렇게 하겠다. 여자제자들이 올 것이고, 내 어머니도 오실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과월절 준비를 할 것이다. 요한아, 그 제자들에게 많이 헌신하라고 지금부터 부탁한다. 특히 내 어머니께….”
“주님, 선생님의 어머니께서는 저희 모두에게 주셔야 할 만큼 벌써 지나칠 정도로 많이 가지고 계신데, 무엇을 제가 드릴 수 있습니까?”
“네 사랑이다. 네가 내 어머니께 둘째 아들과 같다고 가정하여라. 내 어머니는 너를 사랑하시고, 너도 내 어머니를 사랑한다. 육체와 마음에 의한 어머니의 아들인 나는 점점 더 …어머니를 떠나 있겠고, 내… 일에 몰두하겠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시기 때문에 괴로우실 것이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아신다. 너는 내 대신으로도 어머니를 위로해 드려야 하고,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가 되어서, 어머니가 네 가슴에서 우시고 네 마음에서 위안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 어머니는 네게 모르는 여인이 아니시다. 너는 벌써 내어머니를 모시고 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어머니를 경의를 가지고 사랑하는 제자로서 그렇게 하는 것 다르고, 아들로서 그렇게 하는 것 다르다. 나는 내 어머니가 나를 잃으셨을 때 좀 덜 괴로워하시도록 네가 아들로서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주님, 주님은 돌아가시려는 것입니까? 주님은 곧 죽게 된 사람이 말하듯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저를 슬프게 하십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을 너희들에게 여러번 해 주었다. 그런데 정신이 산만하거나 알아듣게 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과 같구나. 그래, 나는 죽음을 향해 간다. 이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겠다마는 나중에 하겠다. 네게는 지금 말해 준다. 요한아, 이 말을 기억하여라.”
“저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려고 항상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너는 이 말을 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는 말이지? 가엾은 것! 네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네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네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네 인간성이 견디어낼 수 없을 정도로 이 너무 큰 일을, 너무나 큰 일을 기억할 수없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네 머리 위에 떨어지는 덩어리처럼 얼빠지게 하는 너무나 큰 일이 얼마나 크고 극악무도할 것인지 완전히 알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는 머지않아 내가 죽음으로 갈 것이고, 내 어머니는 혼자 남으실 것이다. 만일 내가 너를 내 어머니께 ‘아들’인 것을 보게 되면, 대양과 같은 내 고통 속에서 한 방울과 같은 즐거움을 가지고 죽겠다….”
“오! 주님! 만일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베들레헴에서와 같은 일이 제게 일어나지 않으면,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들과 같은 마음으로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주님을 잃으시면, 어머니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그 무엇을 제가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저도 모든 것을 잃고 고통 때문에 얼이 빠진 사람처럼 되었을 터인데, 제가 어머니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평온한 가운데에서 하룻밤을 깨어 있지 못하고 조금 배가 고픈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한 제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이때에 많이 기도하여라. 나는 너를 많이 데리고 있고, 내 어머니와 함께 데리고 있겠다. 요한아, 너는 우리의 평화인데, 그 때에도 우리의 평화일 것이다. 염려 말아라, 요한아. 네 사랑이 모든 것을 할 것이다.”
“오! 그렇구 말구요 주님! 저를 많이 데리고 계셔 주십시오. 저는 주님도 아시다시피 사람의 시선을 끌고 기적을 행하기를 열망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기만 원하고 또 사랑할 줄만 압니다….”
예수께서는 동굴에서처럼 관자놀이 쪽 이마에 또 입맞춤을 하신다.
두 사람은 강으로 가는 길이 보이는 곳에 와 있다. 여기에는 여행자들이 있는데, 밤이 되기 전에 머무를 수 있는 곳에 갈 수 있기 위하여 타고 가는 짐승들을 막대로 찔러 몰거나 걸음을 재촉하거나 한다. 그러나 해가 진 다음에는 추위가 매서워지기 때문에 모두가 몸을 포근하게 싸고 간다. 그래서 강을 향하여 빨리 가고 있는 두 여행자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언다.
말을 탄 사람 하나가 거의 구보(驅步)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줄기찬 속보(速步)로 두 사람을 쫓아와서 지나쳐 가더니 몇 미터중 가서 큰 시내 위에 놓인 작은 다리 근처에 나귀들이 몰려서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정지한다. 그 시냇물은 제법 급류인 체하며 거품이 일면서 요르단강 또는 사해 쪽으로 흘러간다. 건너갈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그 사람은 뒤를 돌아보다가 놀라는 몸짓을 한다. 그는 말에서 차려서 말고삐를 잡고 그를 알아보지 못한 예수와 요한에게 향하여 뒤로 돌아온다.
“선생님! 아니, 어떻게 여기 계십니까? 요한하고만” 하곤 말 탔던 사람은 그의 모자전을 뒤로 젖히며 묻는다. 그는 모자전을 두건 모양으로 내려뜨리고 있었는데, 바람과 먼지를 막는 마스크 노릇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마나헨의 씩씩한 갈색 얼굴이 나타난다.
“마나헨, 당신에게 평화.” 강을 건너려고 강 쪽으로 가는데, 밤이 되기 전에 건널 수 있을는지 모르겠소. 그런데 당신은 어디로 가는 길이오?”
“마제론테의 몹시 불쾌한 소굴로 갑니다. 주무실 데가 없습니까? 저와 같이 가시지요. 저는 대상로에 있는 어떤 여관으로 급히 가던 길입니다. 혹 더 원하시면 나무 아래 천막을 치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모두 안장 위에 있습니다.”
“그쪽이 낫겠소. 그러나 당신은 분명히 여관이 더 낫겠지요”
“주님, 저는 주님이 더 좋습니다. 저는 주님을 만난 것을 큰 은총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가십시다. 저는 강의 연안을 제 집의 복도처럼 잘 압니다. 갈갈라의 언덕 아래에는 바람이 막힌 수풀이 있고, 제 말이 먹을 풀과 불을 피울 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거기면 우리가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동쪽으로 돌아 걸어서 건네는 곳이나 예리고로 가는 길을 버리고 빨리 간다. 오래지 않아 언덕 비탈을 타고 내려와 강안쪽 평야로 퍼지는 우거진 수풀 기슭에 이른다.
“저는 저 집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를 압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양젖과 짚을 청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말을 끌고 갔다가 빨리 돌아오는데, 짚단들을 메고 양젖이 가득 찬 구리로 만든 물통을 든 두 사람이 따라 온다.
그들은 말없이 수풀 속으로 들어온다. 마나헨은 짚을 땅에 내려놓게 하고 두 사람을 돌려보낸다. 그는 안장주머니에서 부싯깃과 부시를 꺼내서 땅에 깔려 있는 많은 나뭇가지로 불을 피운다. 불은 기쁘게 하고 따뜻하게 한다. 요한이 가져온 돌 두개에 올려놓은 남비가 뜨거워진다. 그동안 마나헨은 말에서 안장을 내려놓은 다음, 낙타털로 만든 폭신한 천막을 땅에 박은 말뚝 두개에 매고, 매우 오래된 나무의 튼튼한 줄기에 기대게 해서 친다. 그리고 역시 안장 앞테에 비끌어 맸던 양가죽을 풀 위에 깔고 그 위에 안장을 놓으면서 말한다.
“선생님, 오십시오, 이것은 사막의 기수(騎手)가 몸 두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슬과 땅의 축축한 기운을 막아 줍니다. 저희들은 짚만 있으면 됩니다. 선생님, 정말이지 제게는 왕궁의 값진 양탄자들과 닫집들과 의자들이 선생님의 옥좌와 이 천막과 이 칠보다 덜, 휠씬 덜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번 맛본 맛좋은 요리도 절대로 우리가 함께 들 여기 있는 양젖과 빵 같은 맛은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 저는 행복합니다.”
“나도 그렇소. 마나헨. 그리고 요한도 물론 그럴 것이오. 섭리는 오늘 저녁 우리 공동의 기쁨을 위해 우리를 모아놓았소”
“선생님, 오늘 저녁도 그렇고, 내일도 모레도, 선생님께서, 사도들 가운데 안전하게 계신 것을 제가 알 때까지 입니다. 사도들에게로 가시겠지요….”
“그렇소. 그들을 다시 만나러 가오. 솔로몬의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소”
마나헨은 예수를 쳐다보고 나서 말한다. “저는 예루살렘에 들렀는데… 소식을 들었습니다. 베다니아를 통해서. 그리고 선생님께서 왜 거기 머무르지 않으셨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거기서 떠나신 것은 잘하신 일입니다. 예루살렘은 가엾은 라자로보다도 더 독과 썩은 부분이 가득한 몸과 같습니다.”
“라자로를 보았소?”
“예, 육체의 고통과 선생님에 대한 마음의 고통으로 괴로워합니다. 라자로는 몹시 고민하며 죽어갑니다…. 그러나 저도 저희 동포들의 죄를 보기보다는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예루살렘이 술렁이고 있었습니까?” 하고 불을 보살피고 있는 요한이 묻는다.
“대단히, 두 패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은 로마인들이 전날 반란으로 인해서 체포된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관용을 베푼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동요를 증가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비밀히 말들 합니다. 그리고 총독이 오래지 않아, 예상했던 것보다 더 일찍 예루살렘에 올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헤로데도 분명히 총독이 하는 대로 하리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러면 선생님 가까이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니까 제게는 분명히 좋은 일일 것입니다. 좋은 말로는 -그런데 안티파의 마구간에는 빠른 아랍 말들이 있습니다. – 시내에서 강까지는 이내 가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그곳에 머무르신다면 말입니다….”
“그렇소, 그곳에 머무르겠소. 적어도 당분간은….”
요한이 뜨거운 양젖을 가져오고, 각자는 예수께서 바치시고 강복하신 다음 빵을 양젖에 담근다. 마나헨은 꿀같이 금빛깔이 도는 야자대추들을 드린다.
“아니, 이렇게 많은 물건을 어디에 두셨습니까?” 하고 요한이 놀라서 묻는다.
“말 타고 다니는 사람의 안장은 조그마한 장이오. 요한, 사람과 짐승을 위한 모든 것이 있어요” 하고 마나헨은 그의 갈색 얼굴에 솔직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한다. 그리고 한동안 곰곰 생각하더니 묻는다. “선생님, 저희들에게 봉사하고, 또 흔히는 사람보다도 더 충실하게 봉사하는 짐승들을 사랑해도 됩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하오?”
“달리고 나서 땀을 줄줄 홀리는 제 말을 지금 우리의 천막으로 쓰이는 담요로 덮어 주는 것을 어떤 사람들에게서 업신여김과 비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지 않았소?” 마나헨은 어리둥절하여 예수를 쳐다보며… 잠자코 있다.
“솔직히 말하시오. 그들이 나를 또 한 번 헐뜯기 위해서 당신에게 한 말을 하는 것은 불평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모욕하는 것도 아니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아시는군요. 정말 선생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아시니. 저희들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숨기려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 사마리아인의 제자라는 걸 알겠소. 당신은 부정한 짐승들을 만져서 자기를 부정하게 만들려고 안식일까지도 어기는 그 사람과 같이 이교도요’하고”
“아! 그것은 틀림없이 이스마엘이었을 것입니다!” 하고 요한이 외친다.
“그래요 그리고 그와 같이 다른 사람들도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내가 안티파스의 조정에 있기 때문에 부정하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짐승을 돌보았기 때문에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당신들이 말하면 당신들을 이해하겠소. 그랬더니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집단에는 헤로데 당원들도 있었으니까요. -얼마 전부터 헤로데 당원들을 보기가 쉬운데, 전에는 그들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있었기 때문에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안티파스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거요 세례자 요한도 마케론테에 있었고, 왕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그는 항상 의인으로 있었소. 반대로 당신은 우상 숭배자요…’하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흥분시키지 않으려고 말을 그만두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이 흥분상태가 선생님의 거짓 제자 중의 몇 사람에 의해서 계속됩니다. 그들은 선생님께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들고 일어나라고 군중을 부추기거나, 자기들이 선생님께서 보내신 제자들이라고 말하면서 부당한 행위들을 합니다….”
“아니, 그건 너무합니다! 선생님? 그들이 어디까지 갈 것입니까?”하고 요한이 흥분하며 말한다.
“그들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 너머로는 가지 못할 것이다. 그 한계 너머로는 나만이 나아갈 것이고 빛이 빛날 것이며, 아무도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내게로 가까이 와서 내 말을 들으시오. 그전에 불에 나무를 더 넣으시오.”
두 사람은 매우 기뻐하며 예수의 발 앞에 땅바닥에 간 두꺼운 양가죽 위로 달려든다. 예수께서는 나무줄기에 의지하여 세운 천막에 기대 놓은 진홍색 안장에 앉아 계신다. 마나헨은 거의 눕다시피 하고 땅바닥에 팔꿈치를 붙이고, 머리는 손으로 받치고, 눈은 예수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 요한은 발꿈치를 괴고 앉아서, 그가 늘 취하는 자세대로 머리는 예수의 가슴에 대고, 한 팔로는 예수를 껴안고 있다.
“창조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을 만물의 왕으로 주시고 나서, 창조된 모든 것을 사람에게 보이시며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그것들에 이름을 지어 주라고 하셨소. 그래서 창세기에는 ‘아담이 동물 하나하나에게 붙여 준 이름이 좋았고, 그것이 그대로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다’고 했고 창세기에는 또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다음, ‘우리 모습을 닳은 사람을 만들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고 말씀하셨다는 말이 있소.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아담과 같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여자를 동무로 창조하신 다음, 망을 보고 있는 유혹하는 자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남자를 한층 더 흉측하게 유혹하는 것은 좋지 않으므로 남자와 여자에게 말씀하셨소.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하고 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소.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들을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푸른 풀을 먹이로 준다’하고
사람에게 유익하라고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짐승들과 초목들과 모든 것은 그러니까 아들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일체의 섭리를 주신 분께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쓰라고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맡겨 준 사랑의 선물과 상속재산을 나타내는 것이오. 그러므로 그것들을 사랑하고 적당히 보살펴야 하오
아버지가 한 아들에게 옷과 가구와 돈과 밭과 집을 주면서, ‘내가 이것들을 너와 네 자손들을 위해서, 너희들이 행복하게 될 만한 것을 가지라고 네게 준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는 내 사랑을 기억해서 이것을 모두 사랑으로 써라’하고 말했는데, 그 후 그들이 모든 것을 쓰러지게 내버려두거나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낭비하거나 하면, 그 아들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당신들은 말하겠소? 그들이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았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선물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하느님께서 섭리적인 배려로그에게 맡기신 것을 정성스럽게 써야 하오.
정성을 들인다는 것은 짐승이나 초목이나 다른 어떤 물건에 대한우상 숭배도 아니고 터무니없는 애정이라는 뜻이 아니오, 정성을 들인다는 것은 우리에게 소용이 되면서 그것들의 생명 즉 그것들의 감수성를 가진 중요성이 덜한 것들에 대한 동정과 감사의 감정을 가진다는 뜻이오.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등 피조물들의 살아 있는 혼은 사람의 영혼과 같은 그런 혼이 아니오. 그것은 생명, 순전히 생명일 뿐이오. 물질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현재의 것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것뿐이오. 어떤 짐승이 죽으면, 그 짐승은 감각이 없소. 그것은 죽음과 더불어 그에게는 진짜 끝이 오기 때문이오. 짐승에게는 미래가 없소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배고픈 것, 추위, 피로로 고통을 느끼고, 상처와 고통과 즐거움과 사랑과 미움과 병과 죽음을 느끼오. _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서의 귀양살이를 덜 힘들게 하기 위하여 이 방법을 그에게 주신 하느님을 기억해서, 그가 보기에 짐승들이라는 낮은 종들에 대하여 인정이 있어야 하오. 모세의 책에 혹 새건 네발짐승이건 동물들에 대해서도 인정을 가지라고 명령하지 않았소?
나 분명히 말하지만, 창조주의 작품들을 올바르게 볼 줄 알아야 하오. 그것들을 올바르게 보면, 그것들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오. 그런데 좋은 것은 항상 사랑을 받아야 하오. 우리는 그것들이 좋은 목적으로 사랑의 충동으로 주어졌다는 것과, 유한한 존재 너머로 우리를 위하여 그것들을 창조하신 무한하신 존재를 보면서 그것들을 그런 것으로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오. 우리는 그것들이 유익한 것이고, 그러한 것으로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아오. 우주에는 목적없이 창조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능력을 무익한 일에 허비하지는 않으시오. 이 풀포기도 우리의 임시 피신처가 의지하고 있는 이 커다란 줄기보다 덜 유익하지 않소. 이슬방울과 작은 진주같은 서리도 무한히 넓은 큰 바다보다 덜 유익하지 않소. 각다귀도 코끼리보다 덜 유익하지 않고 진흙 속에서 사는 지렁이도 고래보다 덜 유익하지 않소. 우주만물에 무익한 것은 아무 것도 없소 하느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좋은 목적으로 만드셨소. 사람은 모든 것 올바른 의향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주셔서 만물의 왕에게 복종하게 하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써야 하오. 마나헨, 당신은 짐승이 흔히 사람들보다 더 낫게 사람들에게 봉사한다고 말했지요. 나는 이렇게 말하겠소. 동물, 식물, 광물 따위 기본요소는 모두가 복종하는데 있어서는 사람보다 나아서, 수동적(受動的)으로 만물의 법칙을 따르거나, 창조주께서 그것들 안에 넣어 주신본능을 능동적으로 따르거나, 그것을 위하여 창조된 목적으로 길들임에 동의하오. 만물의 정화(精華)이어야 할 사람이 만물의 추물인 경우가 너무나 많소.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천사들의 합창에 더 어울리는 음이어야 할 거요. 그런데 저주나 모독하는 말을 하는 귀에 거슬리는 음이 되거나, 반항을 가거나 그의 노래를 창조주께 바치지 않고 피조물을 찬미하는데 바치는 일이 너무나 많소. 따라서 그것은 우상 숭배요 그러니까 모욕이 되고, 흠이 되오. 그리고 그것은 죄요. 그러므로 마나헨, 안심하시오. 당신에게 봉사했기 때문에 땀에 젖은 말에 대한 당신의 동정은 죄가 아니오.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 흘리게 하는 눈물이 죄이고, 사람의 모든 사랑을 드려야 마땅한 하느님에 대한 모욕인 억제되지 않은 사랑들이 죄요.”
“그러나 안티파스 곁에 있으면 제가 죄를 짓는 것입니까?”
“무슨 목적으로 거기 남아 있소? 심심풀이로 있는 거요?”
“아닙니다, 선생님. 선생님을 보살피기 위해서 입니다. 선생님도 그것을 아십니다. 지금도 그 때문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선생님께 대해 헤로데를 부추기기 위해 사자(使者)들을 보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가 없소. 당신은 나와 같이 있으면서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하겠소?”
“선생님께서 그것을 제게 물으십니까? 처음에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천막에서 지내는 오늘 밤과 우리가 먹은 보잘것없는 음식이 제게는 비할 데가 없습니다. 오! 뱀들의 쌕쌕거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그들의 소굴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만 아니면 선생님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사명의 실상을 깨달았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잘못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가 깨닫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보시오! 무익한 것은 아무 것도 없소. 잘못도 선을 지향하는 사람에게는 선을 위한 방법이 되오. 잘못은 번데기의 껍데기처럼 떨어져나가고, 보기 흉하지 않은 나비가 나와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 않고, 기지 않고, 꽃받침과 빛살을 찾아 날아다니오. 그런데 착한 영혼들도 이러하오. 영혼들이 한동안 모욕적인 비참과 곤란에 둘러싸이게 될 수는 있소. 그러나 곧 이어서 거기에서 빠져나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이 덕행에서 저 덕행으로, 빛을 향하여, 완전을 향하여 날아가오.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사람의 마음속과 사람의 주위에서 작용하는 끊임없는 당신의 자비의 행위에 대하여 주님을 찬미합시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신다. 천막이 낮고 좁아서 다른 자세는 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천막 앞에 피워놓은 불에 나무를 던져 넣고 말을 매놓은 다음, 일행은 번갈아 불과 말을 보살피기로 서로 약속하며 쉴 준비를 한다. 말에는 마나헨이 담요 역할을 하고 밤의 찬 기운을 막아 주라고 두꺼운 양털을 덮어 주었다.
예수와 마나헨은 잠자리짚에 누워 자기들의 겉옷을 덮고 잠을 청한다. 요한은 잠에 곯아떨어 질까봐 겁이 나서 천막 밖에서 왔다 갔다 하며 불에 나무를 집어넣고 말을 보살핀다. 말은 영리한 검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머리를 흔들면서 박자를 맞추어 굽으로 땅을 치며, 마구(馬具)의 은사슬을 울리게 하고 제가 매여 있는 나무 아래 돋아난 향기가 있는 야생 회향(茴香) 줄기를 뜯어먹는다. 그리고 요한이 좀 더 멀리에 난 더 좋은 것들을 갖다 주니까 말은 좋아서 히힝 소리를 내며 그 부드러운 분홍빛 코를 사도의 목에 비비려고 한다. 멀리서는 밤의 깊은 적요 속에 강물이 조용히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이렇게 해서 공생활의 셋째 해도 끝난다. 이제는 수난의 준비 시기가 온다. 모든 것이 적은 수의 행동과 적은 수의 사람에 한정되는 것같이 보이는 시기이다. 내 모습과 내 사명이 어렴풋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는 지고 압도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최고의 영예를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고, 그의 둘레에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격정이 집중되어 그 극한을 향하여 치닫는 것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 그리고 어떤 삽화들의 경우에는 악의를 가졌거나 피상적인 독자들에게 어쩌면 목적이 없는 것으로 보였을 모든 것이 여기서 어둡거나 환한 빛으로 밝혀진다. 특히 가장 중요한 모습들이 그러하다. 많은 사람이 유익하다고 인정하고자 하지 않은 모습들이 그러한데, 참된 정신의 선생이 되기 위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는 지금의 선생들을 위한 교훈들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요한과 마나헨에게 말한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에는, 보잘것없는 풀포기 하나까지도 무익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와 같이 이 작품에도 쓸데없는 겻은 아무 것도 없다. 찬란한 모습도, 약하고 어두운 모습도, 오히려 정신의 선생들에게는 윤곽이 뚜렷하고 영웅적인 모습들보다는 약하고 어두운 모습들이 더 유익하다.
어떤 산 위 정상이 가까운 곳에서는 산의 지형 전체와 수풀, 급류, 풀밭 따위와 평야에서 산꼭대기에 이르기 위한 비탈들의 존재 이유를 파악하고, 아름다운 전경을 모두 보고, 게다가 하느님의 작품은 모두가 유익하고 훌륭하며 서로서로 보충하여 모든 것이 만물의 아름다움을 형성하는데 협력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내 선생의 일이라는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이 복음 전파의 3년 동안의 모습과 삽화와 교훈의 다양성은, 내가 선생님이었고, 구속자가 된, 죄악에 이르기까지 이기적이거나 희생에 이르기까지 이타적(利他的)인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집단적, 정신적인 이 복합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주는데 소용된다. 이 극적인 사건의 위대한 성격은 다만 한 장면에서만을 볼 수 없고, 이 극적 사건의 모든 부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주역의 모습은 부차적인 부분이 비추는 여러 가지 빛에서 드러난다.
이제는 산꼭대기에 거의 올라왔는데 -그리고 정상은 내가 이를 위하여 사람이 된 그 희생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의 모든 은밀한 구석과 당파들의 모든 음모가 드러나면, 산꼭대기 가까이에 이른 여행자와 같이 할 일밖에 남지 않았다. 즉 보는 것,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다. 히브리인의 세계를 아는 것이다. 나의 정체를 아는 것이다. 즉 내가 관능과 이기주의와 원한을 초월한 사람이었다는 것, 복수와 권력과 또 결혼과 가정의 올바른 기쁨에 관해서까지도 온 세상 사람에게서 유혹을 받아야 한 사람, 세상과 접촉하면서 살아야 했는데, 세상의 불완전과 죄와 내 완전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세상과의 접촉에서 고통을 당해야 한 사람, 그리고 세상과 사탄과 자아의 모든 목소리, 모든 유혹, 모든 반응에 대하여‘안 된다’고 대답할 줄을 알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결하고 온유하고 충실하고 자비롭고 겸손하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있을 줄 안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탄과 세상의 점점 더 격렬해지는 습격에 대하여 강해지라고 내개 대한이 지식을 주는 오늘의 사회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겠느냐?
오늘도 20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내가 나를 드러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반대가 있을 것이다. 나는 한번 더 반대의 표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고 나 자신에 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일으키는 것에 관해서 그런 것이다. 착한 사람들, 착한 뜻을 가진 사람들은 목자들과 겸손한 사람들의 착한 반응을 보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사제들과 같이 나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각자는 자기가 가진 것을 주는 것이다. 악한 사람들과 접촉을 하는 착한 사람은 이들 안에 더 큰 사악의 격동을 폭발시킨다. 그리고 성 금요일에 심판이 행해진 것과 같이, 사람들에 대해서 벌써 심판이 행해질 것인데, 무한한 자비의 새로운 시도로 자기를 다시 한번 알린 선생님을 어떻게 판단하고 받아들이고 따랐느냐 하는데 따라서 심판이 행해질 것이다.
눈을 뜨고 나를 알아보고 ‘그분이셔!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하고 말할 사람들에게.
그들에게와, 귀엽고 충실하고 다정스러운 요한인 너에게 내 평화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