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을 아침이다. 땅에 깔려 있는 노랗고 빨간 나뭇잎들을 빼놓고는, 10월의 비로 인하여 생기를 되찾은 덤불들에서 피어나는 꽃들과 더불어 풀이 어떻게나 파랗고, 잎이 벌써 부분적으로 떨어진 나뭇가지들 사이로 돌아다니는 바람이 어떻게나 맑은지 초봄을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낙엽수들에 섞여 있는 상록수들이 다른 나무들의 잎이 떨어진 가지들 곁에 저희들 가지 끝에서 돋아난 에메랄드 빛깔의 새 잎으로 명랑한 색조를 놓아 주어, 마치 앙상한 가지에 첫잎들이 돋아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양들은 울타리 안에서 나와, 가을에 낳은 어린 양들과 같이 매애 매애 울면서 풀밭으로 간다. 마을 초입에 있는 샘의 물은 햇빛을 받아 액체로 된 금강석처럼 반짝이고, 어두운 수반으로 떨어져서, 세월이 흐르는데 따라 벽이 검게 된 작은 집을 배경으로 하고 여러 가지 빛깔의 반짝이는 빛을 만들어 놓는다.
예수께서는 한 쪽이 길로 면한 낮은 담에 앉으셔서 기다리신다. 제자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데, 양떼에서 너무 떨어질 수가 없는 목자들은 더 높이 올라가지 않고, 평야 쪽으로 가는 길 양편에 흩어진다.
계곡에서 네보산으로 올가가는 길에서는 지금 당장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 사람이 올까요?” 하고 사도들이 묻는다.
“올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다리자, 나는 생겨나는 바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장래의 믿음을 소멸시키고 싶지 않다”하고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우리들 가운데에서 편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을 드렸는데요”하고 햇볕을 쬐고 있는 노인이 말한다.
“다른 데보다도 더 편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친절을 갚아 주실 것입니다”하고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그러면 저희들에게 또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에는 열정적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교만한 율법학자들이 어쩌다가 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모든 것… 위에 높이 올라가 앉은 그들은 별개의 사람들이고 현인들인데, 우리들은… 그렇지만 우리는 그럼 운명이 우리를 여기서 나게 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알지 말아야 합니까?”
“내 아버지의 집에서는 사람이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을 받기 위하여 의인으로 살기만 하면, 내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의 뜻의 법전인 그분의 율법을 지키게 되는 사람들에게는 분리도 없고 차이도 없습니다.
들으시오. 어떤 아버지가 아들 여럿을 두었었습니다. 어떤 아들들은 항상 아버지와 긴밀한 접촉을 취하며 살았고, 어떤 아들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비교적 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버지의 소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같이 계신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훨씬 더 멀리 멀어져 있었고, 태어난 첫날서부터 다른 말을 하고 다른 관습을 가진 하인들 가운데에서 자랐지만, 그들은 지식보다는 오히려 본능으로 그렇게 하면 아버지의 마음에 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얼마 안 되는 것에 따라서 아버지를 섬기려고 애썼습니다.
하루는 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이 교만한 생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들을 열등(劣等)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생각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버지가 그의 모든 자손을 모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자손들을 그에게로 불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버지가 인간적 이론에 따라서 판단해서, 항상 그의 집에 있었거나 별로 떨어져 있지 않아서 그의 명령과 그의 희망을 아는데 지장이 없었던 아들들에게만 자기의 재산을 차지하게 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버지는 이와 반대로 아주 다른 판단 방식을 취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들이 이름으로 알던 아버지, 또 그들의 모든 행동으로 공경한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의로웠던 그 아들들의 행동을 깨닫고, 그들을 곁으로 불러서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도움을 받지 않고 너희들 자신의 의지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므로 이중으로 공로가 있다. 와서 내 둘레에 있어라. 너희들은 그럴 권리가 있다! 첫번째 아들들은 항상 나를 모시고 있었고, 그들의 모든 행동은 내 조언으로 조절되었고, 내 미소로 갚음을 받았다. 너희들은 다만 믿음과 사랑으로만 행동해야 했다. 내 집에는 너희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그것도 오래 전부터 마련되어 있으니까 이리들 오너라. 그리고 내 눈으로 보기에 차이를 이루는 것은 항상 집 사람이었다거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내 곁에 있거나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내 아들들이 한 행동들이다.’
이것은 비유인데, 그 설명은 이렇습니다. 성전 주위에서 사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영원한 날에 하느님의 집에 있지 않을 수도 있고,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느님의 일을 간단하게나 겨우 아는 많은 사람이 그 때에는 하느님의 품에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 향하는 사람의 뜻이지, 한 무더기의 행동이나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제 여러분에게 설명한 대로 하시오. 그렇게 하되, 마비시키는 지나친 두려움없이 그렇게 함으로써 벌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하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아버지의 집에 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오! 더 말씀해 주세요!”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선생님은 어제 어린 양과 숫양의 제물보다 하느님의 마음에 더 드는 제물이 있고, 또 육체의 문둥병보다 더 부끄러운 문둥병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하고 한 목자가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끝맺는다. “어린 양이 한 돌이 되기 전에, 흠이 없고 결점이 없어 양떼에서 가장 훌륭한 양일 때에는 그 놈을 양떼의 으뜸 양으로 그냥 두든가, 그런 양으로 팔든가 할 유혹을 몇 번이나 물리쳐야 하고 얼마나 한 희생을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1년 동안 온갖 유혹에 저항하고 그 놈을 돌보아서 그 놈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면, 그 놈을 이득없이 또 마음의 고통을 안고 제물로 바치는 것이 얼마나 큰 희생인지 아십니까? 주님께 바칠 그보다 더 큰 제물이 있습니까?”
“여보시오, 정말 잘 들어 두시오. 희생은 제물로 바쳐진 짐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물로 바치려고 그 짐승을 보존하기 위해서 당신이 기울인 노력에 있습니다. 나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만, 영감을 받은 말씀이 말하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 ‘나는 어린 양과 숫양제물이 필요없다’고 말씀하시고, 오직 하나뿐이고 완전한 제물을 요구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부터 어떤 제사든지 정신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벌써 여러 세기 전에 주께서 어떤 제물을 더 좋아하시는지 말한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울면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만일 주님이 제물을 원하셨더라면 제가 드렸을 것입니다마는 번제는 주님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뉘우치는 정신입니다(그리고 나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순종하고 다정스러운 정신입니다. 우리는 속죄의 제사뿐 아니라 찬미와 기쁨과 사랑의 제사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는 찢어진 정신이고, 뉘우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느님, 당신은 그 제사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하고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죄를 짓고서 자기를 낮춘 마음도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당신을 사랑하는 깨끗하고 올바른 마음의 제사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가장 하느님 뜻에 맞는 제물은 이런 것입니다. 율법과 영감과 날마다 일어나는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에 사람의 뜻을 날마다 희생하는 것입니다. 또 가장 부끄러운 문둥병은 사람의 눈에 띄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는 곳에 못오게하는 육체의 문둥병이 아니라, 죄의 문둥병입니다. 하기는 이 문둥병은 흔히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사람들을 위해 사십니까? 주님을 위해 사십니까? 모든 것이 여기서 끝납니까? 그렇지 않으면 저 세상에서 계속됩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압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의 눈에 문둥병자로 보이지 않기 위하여 거룩하게 되시오. 그리고 영원히 살 수 있기 위하여 여러분의 정신을 매끈하게 간직하시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요?”
“그 사람은 카인을 본받지 말고, 아담과 하와를 본받지 말고 하느님의 발 앞으로 달려가서, 참된 뉘우침으로 불쌍히 여기심을 청하십시오. 병자나 상처를 입은 사람은 고쳐 달라고 의사에게로 달려갑니다. 죄인은 하느님의 용서를 얻기 위하여 하느님께로 가야 합니다. 나는….”
“선생이 여기에?” 하고 다른 여러 사람 가운데에 온통 겉옷에 감싸여서 길로 올라오는 어떤 사람이 외친다.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려고 몸을 돌리신다.
“나를 못 알아보십니까? 나는 라삐 사독입니다. 우리는 가끔 만나는군요.”
“하느님께서 두 사람이 만나기를 원하실 때에는 세상이 언제나 좁은 것입니다. 우리는 또 만날 것입니다, 라삐. 우선 평화가 당신과 함께 있기를.”
그 사람은 평화의 인사 답례를 하지 않고 묻는다. “여기서 뭘 하십니까?”
“당신이 하려고 하는 것을 나는 했습니다. 이 산이 당신에게는 신성하지 않습니까?”
“선생이 바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 제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율법학자입니다!”
“그런데 나는 율법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모세를 공경하는 것처럼 나도 모세를 공경합니다.”
“거짓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말을 가지고 모세의 말을 무효화하고, 이제는 우리에게 복종하지 말고 당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소.”
“당신들에게는 아닙니다. 당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필요치 않다구요? 소름끼치는 일이오!”
“그렇습니다. 가을바람을 막는데 당신 옷을 장식하고 있는 펄럭이는 많은 지짓이 당신 옷에 필요치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을 보호하는 것은 당신의 옷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가르치는 많은 말들 중에서 나는 필요하고 거룩한 말, 즉 모세의 말을 받아들이고, 다른 말에 대해서는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 당신은 예언자들을 믿지 않는군요!”
“예언자들은, 당신들도 예언자들의 말을 지키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의 말을 지킨다면, 나보고 사마리아인이라고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사독, 저 사람을 가만 놔두시오. 마귀와 말을 하고자 하오?” 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도착하는 다른 순례자가 말한다. 그리고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집단으로 매정한 눈길을 돌리다가 가리옷의 유다를 보고, 빈정거리며 인사를 한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옹호하고자 하기 때문에 어떤 작은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하인 한 사람이 뒤따르는 페트라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군중 사이를 헤치고 온다. 그 사람과 하인은 아이를 하나씩 안고 있다. “나를 지나가게 해 주시오. 주님, 너무 많이 기다리시게 했지요?”
“아니오, 내게로 오시오.”
사람들은 그를 지나가게 하려고 비킨다. 그는 예수께로 와서 머리를 아마포 붕대로 감은 작은 계집 아이를 땅에 내려놓으려고 무릎을 끊는다. 하인도 주인이 하는 것을 따라 눈이 먼 사내아이를 땅에 내려놓는다.
“얘들아, 주 선생님이시다!” 하고 그 사람이 말한다. 그런데 이 짤막한 말 속에서 아버지의 온 고통과 소망이 떨고 있다.
“여보시오, 당신은 많은 믿음을 가졌소. 그런데 만일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더라면 어쩔 뻔 했소? 만일 당신이 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만일 내가 이 아이들을 고칠 수가 없다고 말하면?”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보지 못하는 명백한 사실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제 믿음을 시험하시느라고 숨으셨다고 말하고, 선생님을 찾아낼 때까지 찾을 것 입니다.”
“그럼 대상은 어떡하고? 당신의 벌이는 어떡하고?”
“그런 것들이요? 제 아이들을 고쳐 주실 수 있고. 선생님께 대한 확신이 가득한 믿음을 제게 주실 수 있는 선생님과 비교해서 그것들이 무엇입니까?”
“계집아이의 얼굴을 드러내 놓으시오.”
“얼굴을 가린 채로 두는 것은 이 애가 빛을 몹시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잠간 동안의 고통에 지나지 않을 거요”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계집아이는 절망적으로 울기 시작하고, 붕대를 풀지 못하게 한다.
“선생님도 의사들처럼 불로 저를 괴롭히실 것으로 생각해서 그럽니다”하고 아버지가 붕대에서 계집아이의 귀여운 손을 치우려고 애를 쓰면서 말한다.
“오! 얘야, 무서워하지 말아라. 이름이 뭐냐?”
계집아이는 울면서 대답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딸 대신 대답한다. “태어난 곳의 이름을 따서 타마르라고 합니다. 사내아이는 파라입니다.”
“타마르야, 울지 말아라. 나는 아프게 하지 않는다. 내 손을 느끼지. 나는 손가락 사이에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다. 내 무릎으로 오너라. 우선 네 동생을 고쳐 주겠다. 그러면 네 동생이 무엇을 느꼈는지 말해 줄 거다. 꼬마야, 이리 오너라.”
하인은 트라코마로 눈이 흐려진 가엾은 어린 소경을 예수의 무릎곁으로 밀어 놓는다. 예수께서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물으신다. “내가 누군지 아니?”
“이스라엘의 라삐, 하느님의 아들, 나자렛의 예수요.”
“나를 믿고 싶으니?”
“예.”
예수께서 그의 눈 위에 손을 얹으시는데, 얼굴의 반 이상이 가려진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눈동자의 빛이 믿음의 빛에 길을 열어주도록 하여라.” 그리고 손을 떼신다.
어린 아이는 손을 자기 눈으로 가져가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더니 말한다. “아빠! 눈이 보여!”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로 달려가지 않고, 어린이다운 자연스러움으로 예수의 목에 매달리며 예수의 뺨에 입맞춤을 하고, 그대로 목에 매달린 채로 있으면서 그의 눈동자를 해에 다시 익숙하게 하려고 그의 작은 머리를 예수의 어깨에 묻는다. 군중은 기적이라고 외치고, 그동안 아버지는 어린 아이를 예수의 목에서 떼어 내려고 한다.
“가만 놔두시오. 귀찮게 굴지 않소. 다만 파라야, 내가 네게 어떻게 했는지만 누나에게 말해라.”
“누나, 한번 쓰다듬었어. 엄마의 손처럼. 오! 누나도 나아, 그래서 또 같이 놀아!”
계집아이는 아직 약간 주저하면서 예수의 무릎에 앉히게 한다. 예수께서는 붕대에 손을 대지도 않고 고쳐 주려고 하신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외치기 시작한다. “저건 속임수다. 계집아이는 눈이 보인다. 이곳 주민 여러분, 당신들의 솔직성을 속이려고 꾸민 수작이오.”
“내 딸은 병자요. 나는….”
“그냥 놔두시오. 타마르야, 너 이제는 얌전히 있고, 내가 네 붕대를 끄르게 가만있어라.”
계집아이는 설득되어 하는 대로 그냥 놓아둔다. 마지막 붕대가 떨어지니 기막힌 광경이다! 딱딱한 딱지가 앉고 붓고 새빨간 헌데 둘이 눈 있는 자리에 있고, 눈물과 고름이 흘러나온다. 사람들은 질겁을 하고 불쌍해서 수군거리는데, 계집아이는 무서운 고통을 줄 것이 틀림없는 빛을 가리기 위하여 그의 작은 손을 얼굴로 가져간다. 관자놀이에는 최근에 지진 자리가 빨개진다.
예수께서는 그의 작은 손을 떼어 놓으시고, 그 심한 상처 위에 손을 대고 가볍게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신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쁨을 위하여 빛을 창조하시고, 각다귀(모기과에 속하는 곤충의 이름)들에게까지도 눈동자를 주신 아버지, 당신의 사람인 이 아이에게 빛을 돌려주셔서, 이 아이가 당신을 보고 당신을 믿게 하시며, 이 세상의 빛에서 믿음으로 당신의 나라의 빛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떼신다.
“오!” 하고 모든 사람이 외친다.
헌데는 없어졌다. 그러나 계집아이는 눈을 감은 채로 있다. “타마르야, 눈을 떠라. 염려하지 말라. 빛이 너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다.”
계집아이는 조금 염려하면서 순종한다. 그리고 눈꺼풀을 벌려 매우 초롱초롱한 두 작은 눈을 드러낸다.
“아버지! 아버지가 보여요!” 그러면서 계집아이도 빛에 천천히 익숙해지기 위하여 예수의 어깨에 엎딘다.
군중은 흥분하고, 페트라 사람은 기쁨으로 흐느끼며 예수의 발 앞에 쓰러진다.
“당신의 믿음이 갚음을 받았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감사하는 마음이 사람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더 높은 영역으로, 즉 참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져가기를 바라오. 일어나시오. 갑시다.”
예수께서는 기쁨으로 상그레 웃고 있는 계집아이를 땅에 내려놓으시고, 일어나시면서 사내아이와도 떨어지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강복하시고, 고쳐진 눈을 보기 위하여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뚫고 나가려고 하신다.
“영감님도 영감님의 흐리멍덩한 눈을 고쳐 주십사고 청해야 할 텐데 그랬어요”하고 한 제자가 눈이 너무 흐려서 누가 손을 잡고 인도하는 어떤 늙은이에게 말한다.
“내가?! 내가?! 나는 마귀의 빛은 가지고 싶지 않아. 오히려 나는 오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제게는! 제게는 캄캄한 어둠을 주십시오! 그러나 마귀의 얼굴, 이 마귀, 이 독성자(瀆聖者), 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 이 하느님을 죽이는 자의 얼굴은 보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어둠이 영원히 내 눈에 떨어지게 하십시오. 그를 절대로, 절대로, 절차로 보지 않게 어둠이 어둠이!” 그 사람이야말로 마귀 같다! 절정에 이른 발작으로 그는 마치 눈을 터뜨리려는 듯이 스스로 눈구멍을 때린다.
“염려 마시오. 당신은 나를 보지 못할 거요. 어두움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소. 그리고 빛은 자기를 물리치는 사람에게 자기를 강요하지 않소. 늙은 양반, 나는 가오. 당신은 이 세상에서 나를 보지 않을 거요. 그러나 그래도 다른 곳에서 나를 볼 거요.”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키 큰 사람들의 독특한 걸음걸이를 두드러지게 하는 낙담을 안구 약간 앞으로 몸을 숙이신 채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하신다. 예수께서는 어떻게나 낙담하셨는지 벌써 십자가를 지고 모리아산을 내려가시는 사형선고 받으신 분과 같다…. 그리고 화가 난 늙은이가 흥분시킨 원수들의 외침은 성금요일의 예루살렘의 군중들의 외침과 매우 비슷하다.
페트라 사람은 원통하여, 무서워서 울고 있는 어린 딸을 안은 채 속삭인다.
“주님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주님은 제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베푸셨는데! 그리고 저는 선생님을 위해서! 저는 낙타 위에 있는 천막안에 주님께 드릴 물건들을 놔두었는데, 그러나 제가 주님께 당하시게 한 모욕에 비하면 그까짓 것들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온 것이 부끄럽습니다….”
“여보시오, 그렇지 않소. 이것은 내가 날마다 먹는 쓴 방이오. 그리고 당신은 그 빵맛을 달게 하는 꿀이오. 빵은 언제나 꿀보다 많소. 그러나 꿀 한 방울만 있어도 많은 빵을 달게 할 수 있소.”
“주님은 친절하십니다…. 그러나 이 마음의 상처를 돌보아 드리기 위해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만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내게 대한 믿음을 보존하시오. 지금 당장은 당신이 할 수 있는 대로,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얼마 안 있어… 그렇소, 내 제자들이 페트라까지, 페트라 너머까지 갈 거요. 그 때에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시오. 그들을 통해서 내가 말을 할 것이니까. 그리고 우선은 내가 당신에게 해 준 것을 페트라 사람들에게 말하시오. 그래서, 내 둘레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갈 때에 내 이름이 페트라의 사람들에게 모르는 이름이 아니게 하시오.”
내려오는 길 아래, 로마인들의 길에 낙타 세 마리가 멎어 있다. 한마리는 안장만 얹혀 있고, 다른 놈들은 닫집이 얹혀 있다. 하인 한사람이 낙타들을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은 한 천막으로 가서 꾸러미들을 가지고 와서 예수께 드리며 말한다. “옛습니다. 이것들은 주님께 유익할 것입니다. 제게 고맙단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제게 주신 것에 대해서 제가 주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주님, 만일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실 수 있으면 저와 제 아이들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아이들과 같이 무릎을 꿇는다. 하인들도 따라서 한다.
예수께서는 두 손을 내미시고 하늘을 쳐다보시며 낮은 소리로 기도하신다.
“자! 올바르게 사시오. 그러면 당신이 가는 길에서 하느님을 만날 거요. 다시는 하느님을 잃지 말고 따르시오. 안녕, 타마르! 안녕, 파라!” 예수께서는 그들이 한 낙타에 하나씩 하인들과 같이 올라가는 동안 그들을 쓰다듬어 주신다.
짐승들은 낙타몰이들의 끄르르르, 끄르르르 소리에 일어나서 몸을 돌려 남쪽으로 가는 길을 속보로 달린다. 두 작은 손이 커튼 사이로 나오고 “안녕, 주 예수님! 안녕, 아빠!” 하는 어린 두 목소리가 들린다.
그 사람도 이제 낙타에 오르려고 한다. 그는 몸을 땅에까지 구부려 예수의 옷에 입맞춤 하고, 안장에 올라 북쪽으로 떠나간다.
“그럼 이제는 가자”하고 예수께서 북쪽으로 향하시며 말씀하신다.
“아니? 가시려던 곳으로는 이제 안 가십니까?” 하고 사도들이 묻는다.
“아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 갈 수 없게 되었다!…. 세상의 목소리가 옳았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이 약삭빨라서 마귀의 활동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리고로 간다….”
예수께서는 얼마나 침울하신가!…. 모두가 그 사람이 준 꾸러미들을 지니고, 낙심하여 말없이 예수를 따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