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여러 가지 진복을 말할 때에 그것들에 이르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과 그 진복자들에게 주어질 상급들을 말했다. 그러나 내가 이름을 불러 준 종류는 여러 가지였지만, 너희들이 자세히 보면 상급은 같은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것과 같은 것을 누린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종류, 하느님께서 이 세상이 그 모든 하등과 고등의 필요에 있어서 올바른 균형을 누리도록, 어떻게 당신 생각으로 여러 가지 경향을 가진 영혼들을 창조하시도록 마련하시는지를 나는 이미 보여 주었다. 그 후, 사람을 올바른 길로 해서 사랑을 가지고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항상 어긋나게 가고자 하는 사람의 반항이 이 균형을 깨뜨리면, 그 잘못은 하느님께 있지 않다.
언제나 그들의 처지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인간들은 혹은 분명한 부정한 행위로, 혹은 부정한 시도로 남의 영토를 침략하거나 거기에 혼란을 일으킨다. 세계전쟁과 가정 안에서의 싸움, 그리고 신앙고백 사이의 싸움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부정이 아니고 무엇이냐? 사회적 혁명들은 무엇이고, ‘사회적’이라는 이름으로 외관을 장식했지만, 실제로는 과격하고 사랑에 반대되기만 하는 주의들은 무엇이냐? 그 주의들은 그것들이 권하는 정의를 원하고 실천할 줄을 모르고, 압제받는 사람들을 돕지 않고, 얼마 안 되는 압제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압제받는 사람의 수를 불리는 폭력의 폭발에 귀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하느님이 군림하는 곳에서는 이런 변질이 생기지 않는다. 참으로 내게 속해 있는 영들과 내 나라 안에서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정의롭고, 깨끗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덧없는 재물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고, 하느님의 사랑의 기쁨으로 기뻐하는 하느님의 다양한 거룩함의 여러 가지 형태가 실천되고 상을 받는다.
영혼들 가운데에서 어떤 영혼들은 이러한 형태를 지향하고, 어떤 영혼들은 저러한 형태를 지향한다. 성인 안에는 덕행이 모두 현존하기 때문에 영혼들이 탁월하게 지향한다. 그러나 이 성인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찬양받게 하는 지배적인 덕행이 하나 있다. 그러나 내가 모든 덕행 때문에 그 성인에게 강복하고 상급을 주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나, 자비로운 사람들에게나,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나, 불의에 의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나, 순결한 사람들에게나 슬퍼하는 사람들에게나, 온유한 사람들에게나,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나 상급은 ‘하느님을 누리는’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 이 정의(定議)는 그것을 올바른 뜻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얼마나 잘못 이해되었는지 모른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란 천박한 사람들과 그들의 어리석은 빈정거림, 그리고 지혜로 자처하는 무식의 편에서 볼 때에는 ‘어리석다’는 뜻이다. 가장 나은 사람들은 마음(정신)을 지능이나 생각이라고 믿는다. 물질적인 사람들에게 그것은 간교이고 악의이다.
아니다. 정신(마음)은 지능보다 훨씬 위에 있다. 그것은 너희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왕이다. 육체적, 정신적 모든 장점들이 이 왕에게는 신민(臣民)들이고 하인들이다. 하느님께 자녀로서의 충성을 다하는 한 인간이 사물들을 그것들의 올바른 자리에 놓아둘 줄을 아는 곳에서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인간이 자녀로서의 충성을 다하지 않는 곳에는 우상숭배자들이 밀어닥치고, 왕인 정신을 옥좌에서 끌어내고, 하녀들이 여왕이 된다. 모든 무정부상태가 그러하듯이 멸망을 초래하는 무정부상태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것은 사람의 더 없는 즐거움이 되고, 그것을 위하여는, 물질적인 범죄나 정신적인 범죄까지도 저지르게 되는 모든 것에 대한 저 최고의 자유에 있다. 정신적인 범죄는 인간의 법률에서 벗어나 벌을 받지 않는 일이 매우 많지만, 그래도 희생을 덜 내지도 않고, 더 많은 희생을 내기까지 하며, 그 결과는 희생된 사람의 목숨만 앗아갈 뿐 아니라, 때로는 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서 존경과 생계를 빼앗아가기도 한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더 이상 재물의 노예가 아니다. 비록 일체의 안락과 더불어 재산을 버리고 수도회에 들어감으로 재물을 물질적으로 포기하지 않더라도, 그는 자기를 위하여는 몹시 절약해서 쓸 줄을 아는데, 이것은 반대로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끼지 않고 베풀기 위한 것이므로, 이중의 희생이 되는 것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옳지 않은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만들라’고 한 내 말을 이해하였다. 그를 음란과 탐식과 자선에 반대되는 행동으로 이끌어가서 그의 정신의 원수가 될 수 있을 그의 돈을 가지고, 그는 자기의 고행과 자기와 같은 사람들의 불행을 돕는 자선사업으로 덮인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인 부자를 위하여- 하늘의 길을 고르게 하는 하인을 만드는 것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어떤 불의인들 보상하고 고치지 않겠느냐! 자캐오와 같이, 인색하고 냉혹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의 자기 자신의 불의를 보상하고 고치고, 살았거나 죽은 이웃의 불의, 사회적인 불의를 보상하고 고치는 것이다. 너희들은 권력으로만 위대했던 사람들에게 기념건조물을 세워 준다. 그런데 옹색하고 가난하고 근면한 인류의 숨은 은인들, 그들의 재산을 그들 자신의 생활을 끊임없는 향연이 되게 하는데 쓰지 않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기능적인 능력이 줄어든 사람들, 그들의 무지가 자기들의 저주받은 계획에 더 유익하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무지 속에 그대로 내버려두는 사람들에게 생활을 더 빛나고 더 낫고 더 고상하게 하기 위해서 쓴 사람들에게는 왜 기념건조물을 세워주지 않느냐? 부유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자기들이 가진 것과 같은 빛을 -그들이 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하는 방식을 보고 알 수 있다.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의 곤궁보다 더 큰 곤궁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들이 가진 ‘잔돈 두 푼’까지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그들이 가진 크거나 수수한 재력을 잃으면서도 평화와 소망을 보존할 줄 알고, 하느님도 사람도, 아무도 저주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을 줄 아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내가 맨 먼저 말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큰 범주는 -이것은 인생의 모든 더없는 즐거움을 초월하는 저 정신의 자유가 없으면, 진복들이 주는 다른 덕행들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많은 형태로 나누이고 또 나누인다.
자만하지 않고 자기가 뛰어나다고 자칭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물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인정하고 그것을 선을 위하여, 선만을 위하여 쓰는 생각의 겸손.
애정에 있어서의 너그러움. 그는 이 너그러움으로 하느님을 따르기 위하여 애정과 목숨까지도 버릴 줄 안다. 동물적인 인간의 가장참되고, 본능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재산인 생명까지도 말이다. 내 순교자들은 모두 이런 의미로 너그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정신이 오직 하나뿐인 영원한 재물인 하느님으로 ‘부유하게’ 되기 위하여 가난하게 될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물건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의 올바름. 그것들이 하느님의 섭리의 증언인 한 의무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전에 여러번 불러줄 때에 이미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보다 더 사랑할 정도로 사랑하지는 말 것이다. 사랑은 하되, 어떤 사람의 손이 그것을 너희들에게서 빼앗아 가면 하느님을 저주할 정도로 사랑하지는 말 것이다.
끝으로 되풀이 해 말하지만, 돈의 예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정의와 더불어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내가 말한 그 정신적인 가난의 여러 가지 형태이다. 영원한 재물을 차지하기위하여 인생의 덧없는 재물은 모두 발로 밟아야 한다. 세상과 거죽은 달고 속은 쓴 속이는 맛을 가진 세상의 열매는 맨 끝자리에 놓아두고, 하늘을 얻기 위하여 힘쓰면서 살아야 한다. 오! 하늘에는 속이는 맛을 가진 과일은 없다. 거기에는 하느님을 누린다는 말할 수 없는 과일이 있다.
이것을 자캐오는 깨달았었다. 이 구절이 그의 마음을 뚫어, 빛으로, 사랑으로, ‘오너라’하고 그에게 말하려고 가는 나에게로 오게 한 화살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부르러 갔을 때에는 그가 이미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을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