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급류의 기슭에서 예수께서는 이사악과 많은 제자들을 만나시는데, 아는 제자들도 있고 알지 못하는 제자들도 있다.
  아는 제자들 중에는 “고운내”의 회당장인 티몬과 근친상간(近親相姦)죄로 고발되었던 엠마오의 요셉,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아버지의 장례를 포기한 젊은이, 스테파노. 지난해에 코라진 근처에서 친구 사무엘과 더불어 깨끗하게 된 문둥병자 아벨이 있고, 예리고의 뱃사공 솔로몬, 그리고 내가 알아보기는 하겠는데, 어디에서 보았는지도 모르겠고 이름도 알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는 얼굴이 이제부터는 너무도 많은데, 모두 제자의 얼굴로 아는 얼굴들이다. 그리고 또 이사악이나 내가 방금 이름을 말한 제자들 자신이 얻은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예수를 만나기를 바라면서 주요한 제자집단을 따라다닌다.
  만남은 다정스럽고 반갑고 경의를 곁들였다. 이사악은 선생님을 뵙고 선생님께 그의 새로운 양떼를 보여드리는 것이 기뻐서 얼굴이 환하다. 그리고 상급으로 그가 데리고 있는 무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한 말씀해 주시기를 청한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조용한 곳을 아는 데가 있느냐?”
  “만의 끝에 한적한 해변이 있는데 거기에 어부들의 오막살이들이 있습니다. 이 계절은 건강에 해롭기도 하고, 또 절이는 생선 잡는 계절이 끝나서 어부들이 자주 조개를 잡으러 시로-페니키아에 가기 때문에 그 오막살이들은 비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해안도시 여러 군데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거나 제자들을 만났거나 했기 때문에 벌써 선생님을 믿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에게 거기서 쉬라고 오막살이를 내주었습니다. 저희들은 전도를 한번 한 다음에는 그리로 돌아오곤 합니다. 이 해안에는 할 일이 많이 있으니까요. 이 해안은 여러 가지 일로 완전히 타락했습니다. 저는 시로-페니키아까지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다로 해서 할 수 있습니다. 해안은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걸어서 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목동이지 뱃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 중에도 돛단배를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벼운 미소를 띠시고 주의 깊게 들으신다. 키가 대단히 크신 예수께서는 마치 병사가 장군에게 모든 것을 보고하듯이 보고하는 작은 목동 앞으로 약간 몸을 숙이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네가 겸손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너를 도와주신다. 내가 여기에 알려진 것은 제자인 너를 통해서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다. 이제는 호수 사람들에게 돛단배로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서 할 수 있다면 시로-페니키아로 가자.” 그리고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야고보와 요한을 찾으시느라고 몸을 돌리신다. 이들은 어떤 제자들과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동안 가리옷 사람 유다는 뒤에 쳐져서 스테파노에게 인사말을 하느라고 여념이 없고, 열성당원과 바르톨로메오와 필립보는 여자들 곁에 있다. 다른 네 사람은 예수 곁에 있다.
  네 사람의 어부는 즉시 온다. “너희들은 바다에서 배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신다.
  네 사람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 얼굴을 쳐다본다. 베드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곰곰히 생각하다가 묻는다. “그렇지만 어디로 가는 겁니까? 먼 바다루요? 저희는 민물고기인데요….”
  “아니다. 해안을 끼고 시돈까지 가는 것이다.”
  “흠! 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네들은 어떤가?”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바다거나 호수거나 어쨌든 같은 거지 뭐. 물이란 말이야” 하고 야고보가 말한다.
  “그리고 더 아름답고 더 쉽기까지 할 거야” 하고 요한이 말한다.
  “그렇지만 네가 어디다 근거를 두고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구나”하고 형이 요한에게 대답한다.
  “바다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이지. 어떤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기에 모든 완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자네가 어떤 여자를 그렇게 사랑하면, 자넨 완전한 남편이 될 걸세” 하고 요한을 정답게 흔들면서 베드로가 농담을 한다.        
  “아니야.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배를 다루는 방법이 같다는 걸 아스칼론에서 보았고, 또 항해는 대단히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이야” 하고 요한이 대 답한다.
  “그럼 가세!” 하고 베드로가 외친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곳 사람 누군가를 데리고 가는 게 나을 거야. 우린 이 바다를 알지 못하고 어디가 얕은 곳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하고 야고보가 지적한다.
  “오! 난 그건 생각지도 않아! 우린 예수님을 모시고 있거든! 전에는 안심을 못했었지만, 선생님이 호수를 잔잔하게 하신 다음부터는! 자, 선생님을 모시고 시돈에 가세. 아마 좋은 일 할 게 있을 거야” 하고 안드레아가 말한다.
  “그러면 가자. 너는 내일 쓰게 배들을 마련하여라. 시몬의 유다에게 돈주머니를 달라고 하여라.”
  사도들과 제자들이 함께 섞인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것이 무슨 축제인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예수께 가장 잘 알려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발걸음을 돌려 시내로 향하여 시내의 변두리를 지나 마침내 구부린 팔처럼 바다로 길게 뻗어 있는 만의 맨끝에 이른다. 자갈이 뒤덮인 작은 해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몇 채 안 되는 오막살이들은 시의 가장 비참하고 가장 사람이 적은, 그리고 때때로만 사람이 사는 장소를 나타낸다. 오막살이들은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과 낡음으로 인하여 벽이 풍화(風化)한 입방체이다. 집들은 모두 닫혀 있는데, 제자들이 문을 여니, 연기로 검게 된 초라한 모습과 정말 최소한의 필요한 가구만이 보일 뿐이다.
  “자, 이 집들은 아름답지는 않지만 매우 편하고 깨끗합니다” 하고 이사악이 집들을 자랑한다.
  “아름다운 건 고사하고 초라하구먼. ‘고운 내’는 여기 비하면 대궐이었네. 그런데도 그걸 불평하는 사람이 있었지….” 하고 베드로가 투덜거린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이 한 재산입니다.”
  “물론이지, 물론이야! 중요한 건 집이 하나 있고 서로 사랑하는 거야. 그러나 우리 요한이 어디 있나 보게! 잘 있었소? 당신은 어디 있었소?”  그러나 엔도르의 요한은 베드로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예수께 인사를 드리려고 뛰어 간다. 예수께서는 매우 다정스러운 말로 그에게 인사하신다.
  “요한이 몸이 썩 좋지 않기 때문에 오라고하지 않았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이 여기 남아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은 이 도시 사람들과 메시아에 대해서 문의하는 사람들을 썩 잘 다룰 줄 압니다…” 하고 이사악이 말한다.
  사실 엔도르의 사람은 전보다 훨씬 더 야위었다. 그러나 얼굴은 차분하다. 야윈 모습으로 인하여 그의 표정이 더 고상해 보이고, 벌써 육체와 정신의 두 가지 고뇌로 충격을 받은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예수께서는 그를 살펴보시고 물으신다. “요한아, 어디가 아프냐?”
  “선생님을 뵙기 전보다 더 아프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육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영혼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제 생각이 옳다면 저는 제 개인적인 상처가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가라앉은 눈과 관자놀이가 움푹 들어간 이마를 다시 들여다보시며 아무 말씀도 덧붙이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와 함께 어떤 오막살이로 들어가시는 동안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얹으신다. 집안에는 피로한 발을 식히라고 바닷물 대야들을 갖다 놓았고, 목마름을 풀라고 시원한 물병들도 갖다 놓았다. 그동안 밖에서는 덩굴식물이 덮인 정자 같은 것으로 그늘이 진투박한 탁자 위에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밤이 내려앉고, 바다는 자갈깔린 작은 해변에 되밀려 오는 파도의 가벼운 소리로 저녁기도를 드리는 동안 예수께서는 여자들과 사도들과 같이 투박한 식탁에 앉으시고, 다른 사람들은 땅바닥이나 의자에 또는 바구니들을 뒤집어 놓고 주된 식탁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앉아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을 보니 아름다운 광경이다. 식사는 이내 끝났고. 식탁을 치우는 일은 더 빨리 끝났다. 식기가 별로 없었고, 그것도 가장 중요한 손님들에게만 차례가 갔기 때문이다. 바다는 아직 달이 뜨지 않은 밤에 남빛을 띠었고, 해변 특유의 장엄하고도 지극히 쓸쓸한 이 시간에 그 위엄이 한껏 드러난다.
  점점 더 어두워져 가는 그림자들 가운데 커다란 흰 존재이신 예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작은 집단 가운데로 오시는데, 그동안 여자들은 물러간다. 이사악과 또 한 사람이 어두움도 밝힐 겸 틀림없이 아주 가까이에 있는 늪에서 몰려오는 구름 같은 모기떼도 쫓을 겸해서 모래밭에 작은 불들을 피워 놓는다.        
  “너희들 모두에게 평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모으셔서 우리 마음에 서로 같이 나누어 가지는 기쁨을 주셨다. 나는 너희들이 나를 기다리고 내게 알맞게 자신을 형성하면서 여기에 와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도덕적으로 착한 너희들의 마음을, 그리고 너희들의 어떤 반응이 보이는 것과 같이 아직은 영적으로 불완전한 그 마음들을 모두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반응들은 너희 안에 이스라엘의 묵은 사람이 그 사상과 편견을 가지고 아직 남아 있으며, 이 묵은 사람에게서는 마치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오듯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새 사람이란 그리스도의 넓고 빛나고 자비로운 심성(心性)과 그보다도 한층 더 넘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들의 마음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비밀을 모두 알아냈다고 해서 괴로워하지 말하라. 선생은 제자들의 결점들을 고쳐 주기 위해 제자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내 분명히 말하지만 그 선생이 착한 선생이면 결점을 가장 많이 가진 제자들에게 혐오를 느끼지 않고, 반대로 그들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너희들은 내가 착한 스승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면 이제는 그 반응과 편견들이 어떤 것인지 함께 살펴보고, 우리가 왜 여기 와 있는지를 같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이 모임으로 인해서 우리가 맛보는 기쁨 때문에, 개인적인 선에서 항상 집단적인 선을 끌어내시는 주님을 찬미할 줄을 알자.
  나는 너희 입으로 엔도르의 요한에 대한 감탄을 들었는데, 그가 스스로 회개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만큼 더 크게 감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요한이 내게로 데려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전도의 기초를 삼는 그의 옛날 상태이기도 하고 새로운 상태이기도 하다. 사실, 그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자이다. 너희 중의 많은 사람이 이제 요한의 덕택으로 메시아에게 왔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스라엘의 묵은 사람이 업신여길 바로 이 방법들로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을 만들어내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그 여자가 제자라는 것을 묵은 이스라엘 사람은 이하하지 못하는 한 자매에 대해서 건전하지 못한 판단을 삼가라고 부탁한다. 나는 여자들에게 가서 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여자들에게 휴식을 주고자 하는 바람에서 그랬다기보다는, 너희들에게 회개에 대한 거룩한 평가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기 위해서, 그리고 너희가 사랑과 정의를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여자 제자들을 틀림없이 슬프게 한 그 명령을 그들에게 내린 이유이다.
  이스라엘의 큰 죄녀, 자기 죄에 대해서 변명을 할 수가 없었던 죄녀인 막달라의 마리아가 주님께로 돌아왔다. 그런데 마리아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종들에게서 성실과 자비를 기대하지 않고 누구에게서 기대하겠느냐? 이스라엘 전체가, 그리고 이스라엘과 더불어 우리 가운데 있는 외국인들, 마리아를 잘 알고 그들의 방탕에 공범이 되어 주지 않게 된 지금은 마리아를 엄혹하게 심판하는 외국인들은 이 부활을 비평하고 웃음거리를 만든다.
  부활. 이것이 가장 정확한 단어이다. 육체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적이 아니다. 그 기적은 어느 날 죽음으로 인해서 무효가 되기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언제나 상대적인 기적이다. 나는 육체를 부활시키는 사람에게는 불멸(不滅)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영으로 부활한 사람에게는 불멸을 준다. 그리고 육체로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겠다는 그의 의지를 내 의지에 결합시키지 않고, 따라서 다시 살아나는 데에는 아무공로도 없지만, 영으로 부활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의지가 있고, 또 그의 의지가 먼저 있어야하는 것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가 부활하는 데에 그의 공로가 없지 않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정당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오직 하느님께만 내 행동에 대한 설명을 드릴 의무가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내 제자들이다. 내 제자들은 또 다른 예수가 되어야 한다. 내 제자들에게는 어떤 무지도 있어서는 안 되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이름으로만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는 저 만성적인 잘못이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착한 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 가장 행동을 일으킬 능력이 가장적은 것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말이다. 어떤 재료가 하느님의 뜻 앞에 나타나면, 그것이 가장 생기가 없고 가장 차갑고 가장 불쾌한 것일지라도 움직임이 되고 불꽃이 되고 순수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나는 너희들에게 마카베오서에서 따온 비유를 하나 말하겠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의 명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재건된 성전에서 사람들은 정화된 제단 위에 제물을 바치고자 하였다. 느헤미야는 그들이 페르시아인들의 포로가 되려고 할 때에 하느님께 대한 예배를 담당하던 사제들이 어떻게 제단의 불을 꺼내다가 어떤 계곡 안쪽에 있는 비밀 장소인        깊고 물이 마른 우물 속에 감추었는지, 그리고 그 일을 어떻게나 잘 하고 비밀하게 했던지 거룩한 불이 어디 있는지는 사제들만이 알게 되었는지를 기억해 냈다. 느헤미야는 그것을 기억해 냈고, 그것을 기억해 내면서 그 사제들의 후손들을 불을 갖다 둔 곳으로 보내서 -과연 사제들은 그것을 아들들에게 말했었고, 아들들은 또 그들의 아들들에게 말해서, 비밀이 이렇게 자자손손 전해 내려왔었다 – 제사 지내는 불을 붙이기 위한 신성한 불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밀의 우물 속으로 내려간 사제들의 손자들은 불은 발견하지 못하고, 페허가 된 예루살렘의 혼잡한 하수도의 찌꺼기인 걸쭉한 물과 썩어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무거운 개흙만을 발견하였다. 그들이 느헤미야에게 그 말을 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물을 퍼서 가져오라고 말하였다. 느헤미야는 제단 위에 나무를 쌓고, 나무 위에 제물을 올려놓게 하고는 전부가 흥건히 젖도록 흙탕물을 잔뜩 뿌리게 하였다. 백성은 놀라고 사제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다보고 경건하게 그렇게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 명령을 하는 사람이 느헤미야였기 때문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은 얼마나 서글펐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불신했는지 모른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덮여 날씨가 음산한 것과 같이 마음속에는 의혹이 있어 사람들을 우울하게 하였다.
  그러나 해가 구름을 흩뜨리고 햇살이 재단으로 내려오더니, 흙탕물을 뿌린 나무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올라 대번에 제물을 불살랐다. 그동안 사제들은 제물 전체가 완전히 불살라질 때까지 느헤미야가 지은 기도문을 외고 이스라엘의 가장 아름다운 찬송가들을 불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가장 적당치는 않지만 올바른 의향으로 사용한 재료를 가지고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군중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 느헤미야는 물 남은 것을 큰 돌들 위에 뿌리게 하였다. 물을 뿌린 돌들은 불이 붙어서 제단에서 오는 빛 속에서 불타버렸다.
  영혼은 어떤 영혼이건 창조주에 대한 사랑으로 생명의 제물을 불사르는데 쓰이라고 하느님께서 마음의 제단 위에 놓으신 신성한 불이다. 생명은 어떤 것이건 번제물(煩提物)이니, 그것을 잘 쓰면 하루하루가 거룩함으로 불살라야 하는 제사가 된다.
  그러나 약탈자들, 즉 사람과 사람의 영혼을 못 살게 구는 자들이 온다. 그러면 불이 깊은 우물 속에 잠긴다. 거룩한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한 어리석음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우물 속에서는 온갖 악습의 소굴인 하수에 잠겨서 썩은 냄새가 나는 끈적거리는 진흙이 되 는데, 마침내 한 사제가 그 깊은 우물 속으로 내려가 그 진흙을 햇빛 있는 데로 가지고 올라와서 자기 자신의 제사의 번제물 위에 올려놓는다. 이것을 너희가 알아야 하겠는데, 회개해야 할 사람의 영웅적 행위만으로는 넉넉지 않고 회개시키는 사람의 영웅적 행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개시키는 사람의 영웅적 행위가 회개하는 사람의 영웅적 행위보다 오히려 먼저 있어야 한다. 영혼들은 우리의 희생이 있어야 구원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렇게 함으로써만 진흙이 불꽃으로 변하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게 되고, 하느님께서 불살라지는 희생제물을 완전하고 당신의 거룩하심에 기분 좋은 것으로 판단하시게 되기 때문이다.
  보통 불은 비록 그것이 축성된 불이라 하더라도 그저 타기에 알맞은 재료인 나무와 희생들을 태우는 데 소용될 뿐이니까, 회개한 타락한 상태가 오히려 보통 불보다 한층 더 활활 탄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충분하지 못한데, 이 회개한 진흙탕 같은 존재가 타지 않는 물건인 돌까지 불을 붙이고 태울 정도로 강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 진흙에 그런 특성이 어디에서 오는지 묻지 않느냐? 너희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말해 주마. 그것은 타는 듯한 뉘우침으로 그 진흙이 하느님과 섞이어 불꽃이 불꽃과 합쳐지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불꽃과 내려오는 불꽃이, 사랑으로 자기를 바치는 불꽃과 사랑으로 자기를 주는 불꽃이, 서로 사랑하고 다시 만나고 결합해서 하나가 되는 두 존재의 포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더 큰 불꽃이 하느님의 불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불꽃이 넘쳐흐르고, 너무도 성하고 스며들어가고 빨아들이고 해서, 뉘우친 진흙의 불꽃이 이제는 피조물의 상대적인 불꽃이 아니라, 창조되지 않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분, 지극히 능하신 분, 무한하신 분, 즉 하느님의 무한한 불꽃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회개하고 전적으로 회개해서, 과거의 것을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자기를 너그럽게 바치고, 그들의 진흙에서 올라오는 불꽃으로 우선 자기 자신들의 무거운 부분을 불사르고, 은총을 맞이하러 가서 은총의 충격을 받는 큰 죄인들은 이런 것이다.
  정말 진정으로 말한다마는,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불이 많은 돌 속에 뚫고 들어가 그 돌들이 인성을 불사르기까지 점점 더 세게, 타오르는 화덕이 될 것이고, 하늘 나라에 있는 그들의 옥좌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빛을 모으는 초자연적인 활활 타는 거울이 되어 하느님의 빛을 인류에게로 집중해서 하느님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계속해서 세상의 돌과 냉담과 의혹과 소심(小心)을 불사를 것이다.
  되풀이해 말한다마는, 나는 내 행동의 정당함을 내세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도 그렇고, 내가 너희들과 같이 있지 않게 될 미래에 이와 비슷한 다른 경우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너희들이 내 생각을 받아들여 너희 생각으로 만들기를 원하였다.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 가게 하는 것은 그분을 더럽힌다는 정도(正道)를 벗어난 생각, 바리사이파적인 의혹으로 인해서 너희들이 이 일을 하지 않게 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 안 된다. 이 일이야말로 내가 너희들에게 정해주는 사명의 완성이다. 나는 성인들을 구원하러 오지 않고 죄인들을 구원하러 왔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여라. 그리고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으니까 너희들도 그와 같이 하여라. 또 하늘의 필요를 느끼고 마침내 하늘을 맛보게 되는 세상의 찌꺼기들을 손으로 잡는 것을 내가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아주 기쁘게 하느님께로 데려가는 것은 이것이 내 사명이기 때문이고, 획득은 어떤 것이건 무한을 괴롭히는 내 강생에 대한 변호가 되기 때문이다. 죄인인 너희 형제들과 같은 본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께 모두가 많게든 적게든 불완전을 경험한 일이 있는 한정된 사람인 너희들도 이렇게 하는 것을 싫어하지 말아라. 너희들은 내가 수천 년을 사는 존재같이, 이 세상에서 계속 사는 것같이 이 세상이 다할 때까지 내 사업을 계속하라고 구원자로 뽑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 사제들의 일치가 내가 생명을 주는 영이 될 내 교회의 큰 몸의 필요불가결한 부분 같은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필요불가결한 부분 둘레로 믿는 이들의 모든 무한한 작은 조각들이 모여서 오직 하나인 몸을 이룰 것인데, 이 몸이 내 이름에서 이름을 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사제 집단에 생명력이 없게 되면 무한히 많은 그 작은 조각들이 생명을 가질 수 있겠느냐?
  사실 이 몸 안에 있는 나는 그들의 할 일을 거부하는, 막히고 무익하게 된 빗물받이 웅덩이와 도관(導管)들을 제쳐놓고 가장 멀리 떨어진 작은 조각들에까지 내 생명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비는 내리고 싶은 곳에 내려가고, 그래서 스스로 생명을 원할 능력이 있는 착한 조각들은 골고루 내 생명으로 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되겠느냐? 영혼과 영혼들 사이에 이웃이 생길 것이다. 이웃해 있지만, 이제는 유일한 중심에서 오는 생명을 주는 피를 작은 조각 하나하나에 나누어 주어서 서로 결합시켜주는 유대가 아닌 도관과 빗물받이 웅덩이로 분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갈라놓는 담과 절벽들이어서, 인간적으로 적대적인 작은 조각들은 그 담과 절벽을 통해 서로 바라다보며 초자연적인 비탄 속에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형제였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갈라져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형제라는 것을 느낀다!’ 하고. 이웃일 뿐, 융합이 아니고, 하나의 유기체(有機體)가 아니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서 내 사랑은 고통스럽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분립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렇지 않다. 이것은 내가 말하고 행하는 대로, 즉 ‘모두 내게로 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겠다’ 고 하는 대로 말하고 행해야 하는 그들의 임무를 사제들이 어겨서 영혼들을 뒷받침하고 돌보고 사랑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혼자 남아 있는 모든 영혼에게도 적용된다.  이제는 평안히들 가거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천천히 헤어져 각기 제가 들어가야 하는 오막살이를 찾아간다. 엔도르의 요한도 일어난다. 요한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자기가 쓰는 것을 볼 수 있기 위하여 뜨거운 불빛을 받아 가면서 필기하기를 그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붙드시며 말씀하신다. “네 선생과 같이 좀 남아 있어라” 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이 떠날 때까지 곁에 붙잡아 두신다.
  “물가에 있는 저 바위까지 가자. 달이 점점 더 높이 올라와서 길을 볼 수가 있다.”
  요한은 아무 말 없이 하라시는 대로 한다.
  두 사람은 집들 있는 곳에서 200미터 가량 멀어져 가서 큰 바위 위에 앉는다. 그것이 방파제의 나머지인지 또는 바닷속에 잠겨 있는 암초의 연장인지 또는 오막살이가 무너져 물게 반쯤 잠긴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 오랜 세        월을 두고 생긴 해안의 앞부분인 것 같다. 내가 아는 것은 작은 해변에서는 울퉁불퉁해서 마치 디딤돌같이 된 곳을 딛고 그리로 올라갈 수가 있는데, 바다쪽으로는 절벽이 말하자면 수직으로 내려가서 청록선의 물에 잠긴다는 것이다. 지금은 밀물이 물결로 바위를 둘러싸서 젖게 하고 엄청나게 크게 빨아들이는 소리를 내고, 그리고는 한동안 잠잠하다가 또다시 움직이며 돌아와서는 마치 신코페이션(Syncopation)을 많이 사용한 음악과 같이 철썩거리는 소리와 빨아들이는 소리와 침묵으로 이루어진 규칙적인 소리를 되풀이한다.
  두 사람은 바로 바닷물이 부딪는 그 덩어리의 위에 앉는다. 달은 물 위에은빛 길을 만들어 놓고, 달이 뜨기 전에는 캄캄한 밤 속에 거무스름한 막연한 공간이던 바다에 아주 짙은 남빛깔을 띠게 한다.
  “요한아, 너는 네 육체가 왜 고통을 당하는지 그 이유를 네 선생에게 말하지 않느냐?”
  “주님은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한다’ 고 말씀하지 마시고, ‘소멸한다’ 고 말씀하십시오. 이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을 주님이 아시고, 제 육체가 기쁘게 소멸한다는 것도 아십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저도 불꽃이 되는 진흙에서 저 자신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돌에 불을 붙일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 저는 멀지 않아 죽을 것입니다. 저는 세상의 증오로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몹시 기뻐합니다. 그러나 저는 생명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여기서 저는 아직 죄를 지을 수 있고, 주님이 저희들에게 주시는 사명을 게을리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 일생에 벌써 두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선생으로서의 제 사명에 실패했습니다. 저는 교직에서 저 자신을 도야할 만한 것을 찾아내야 했을 터인데, 저 자신을 도야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으로서의 제 임무에도 실패했습니다. 저는 아내를 도야할 줄을 몰랐으니까요. 저는 제자로서의 사명도 게을리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결례하는 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죽음이 저를 죄지을 수 없게 되는 곳으로 데려간다면 그 죽음은 축복받기 바랍니다! 그러나 제가 가르치는 제자로서의 처지는 가지지 못했다 해도 희생되는 제자로서의 처지는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처지와 가장 비슷한 처지입니다. 오늘 저녁, 주님은 ‘우선 자기 자신을 불사르면서’ 하고 말씀하셨지요.”        
  “요한아, 그것은 네가 당하는 운명이냐, 그렇지 않으면 네가 바치는 제물이냐?”
  “불이 된 진흙을 하느님께서 마다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드리는 제물입니다.”
  “요한아, 너는 많은 고행을 하는구나.”
  “성인들도 합니다. 주님이 제일 먼저 하시구요. 갚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 고행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주님이 제 속죄를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시는지도 모르겠군요. 주님이 그것을 제게 금하시는 것입니까?”
  “나는 사랑하는 영혼의 착한 열망에 절대로 장애물을 갖다 놓지 않는다. 나는 고통 속에 속죄가 있고, 고통 속에 구속이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가르치려고 왔다. 그러니 나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주님, 고맙습니다. 이것이 제 사명일 것입니다.”
  “요한아, 무엇을 쓰고 있었느냐?”
  “아이고! 선생님! 때로는 옛날 펠릭스가 아직도 선생적 습관을 가지고 다시 나타납니다. 저는 마륵지암 생각을 합니다. 마륵지암은 일생 동안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리기 때문에 선생님의 전도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저희들에게 주시는데 아이는 장난에 정신이 팔려 있거나 저희들 중의 어떤 사람하고 멀리 떨어져 있거나 해서 듣지 못한 어떤 가르침을 적어 둘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에는 아무 중요하지 않은 말이라도 지혜가 너무나 많이 들어 있습니다! 선생님의 친숙한 회화가 벌써 하나의 교훈인데, 바로 각 사람이 날마다 하거나 당하는 일에 대한 교훈이고, 저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한 교훈인데, 사실은 그 자질구레한 일들 전체가 그것을 인종(忍從)을 요구하는 하나의 중요한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인생의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꾸준한 덕행의 적용을 요구하는 천 .가지 만 가지 자질구레한 일보다 다만 한 가지 훌륭한 영웅적 행위를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매 하찮은 작은 행위들을 오랫동안 쌓지 않으면 악에 있어서나 선에 있어서나 중요한 행위에 이르지 못합니다. 악에 대해서는 제가 이것을 압니다. 저는 아내의 경박에 지쳐서 아내에게 경멸의 눈길을 처음으로 보냈을 때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마륵지암을 위해서 선생님의 자질구레한 설명들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에는 선생님의 중요한 가르침을 적으려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가 옛날 선생인 저를 기억하라고, 그리고 달리는 그애가 가지지 못할 이 가르침을 가지라고 제가 쓴 것을 그애 에게 남겨 주겠습니다. 그의 찬란한 보물인 주님의 말씀을. 허락하시겠습니까?”
  “허락한다.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해서 이 바다처럼 평온하여라. 알겠느냐? 너로서는 뜨거운 햇볕을 참아내는 것이 너무나 견디기 어려울 것인데, 사도의 생활은 정말 불같이 뜨거운 것이다. 너는 일생 동안 대단히 많이 싸웠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가라앉히고 깨끗하게 하는 이 조용한 달빛 아래서 너를 당신께로 부르신다. 하느님의 즐거움 속에서 걸어가거라. 네게 분명히 말한다마는 하느님께서는 너를 만족스럽게 생각하신다.”
  엔도르의 요한은 예수의 손을 잡고 입맞춤하면서 속삭인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께로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도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 말을 천국에서 하여라. 너도 뜨거운 거울이 될 것이다. 요한아, 가자. 네가 쓴 것을 읽고 싶구나.”
  두 사람은 그들이 있던 바위에서 내려와, 해변의 조약돌들을 은으로 바꾸어 놓은 눈부시게 하얀 달빛을 받으며 집들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요한은 무릎을 꿇고, 예수께서는 손으로 강복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면서 손을 요한의 머리에 얹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