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마리아로 이루어지는 한 쌍은 아담-하와로 이루어지는 한 쌍의 반대명제(反對命題)이다. 이 한 쌍이 아담과 하와의 모든 행동을 무효로 만들기로 되어있다. 그리고 인류가 창조되었을 때에 있던 상태, 즉 조물주께서 가득히 베풀어 주셨던 은총과 모든 은혜를 풍부히 가진 상태로 되돌리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인류는 예수-마리아로 이루어지는 한 쌍의 활동으로 온전히 재생되었고, 이로써 이들은 인류의 새 부모가 되었다. 앞서 간 모든 시간은 무효가 되었다. 사람의 시간과 역사는 새로운 하와가 창조를 되돌리는 것으로 자기의 순결한 태에서 주 하느님의 작업으로 새로운 아담을 끌어내는 그 순간부터 계산된다.
  과연 범죄 후에 아담과 하와는 무한한 부(富)이신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였다. 치명적인 불구들과 영속적인 절단과 가난해짐과, 그보다도 더한 정신적인 빈곤- 이 모든 것의 원인인 첫째 두 사람의 행동을 무효로 만들기 위하여는 이 둘째 두 사람이 모든 일에, 또 모든 것을 위하여 첫째 사람의 방식과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수행해야 하였다. 순종으로 자신을 없애고, 육체와 감정과 생각과 의지에서 자기를 제물로 바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완전에까지 밀고 나가야 하였다. 따라서 그 순결을 절대적인 정결에까지 밀고 나가야 하였다. 그것으로 육체는…순결한 두 사람인 우리에게 육체가 무슨 의미였느냐? 승리자인 정신을 덮은 물의 베일이고, 왕인 정신에 와서 닿는 바람의 어루만짐이며, 주인인 정신을 격리시켜 타락시키지 않는 수정이고, 자극하는 충동일 뿐, 억누르는 무게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육체가 이런 것이었다. 아마로 지은 옷보다도 덜 무겁고 덜 느껴지며, 세상과 초자연적인 나의 찬란한 사이에 놓인 가벼운 실체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능력이었다.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사랑을 알았느냐? 물론, ‘완전한 사랑’을 가졌었다. 사람들아, 육체를 탐욕스럽게 만족시키도록 너희를 이끌어가는 관능적인 갈망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음란이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가 서로 이렇게 사랑하면-너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너희가 관용을 가질 줄을 모르고 서로 돕고 서로 용서할 줄을 모를 만큼 그만큼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면 너희들의 사랑은 무엇이냐? 그것은 미움이다. 그것은 오직 연하게 맛이 든 음식의 맛을 고귀한 감정을 튼튼하게 하는 건강한 양식보다 낫게 여기도록 너희를 이끌어가는 편집병(偏執病)적인 욕망일 뿐이다. 완전히 정결한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랑은 하늘에서 하느님을 껴안고, 마치 가지가 그것들에 영양분을 주는 줄기에 결합하여 있듯이 하느님과 결합하고, 흘러나와 땅과 땅에 사는 것들에게 안식과 피신처와 양식과 안락을 아낌없이 주며 내려왔었다. 이 사랑에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 중의 아무도, 하등동물들도 식물계도 물도 천체도 제외되지 않았었다. 악인들 자신도 이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았었다. 과연 그들도 비록 죽은 지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주라는 큰 몸의 지체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서도 비록 그들의 악의로 변형되고 더러워지기는 하였어도 그들을 당신 모습과 비슷하게 만드셨던 주의 거룩하신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착한 사람들과 같이 즐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면서(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보호를 청하여 얼음으로써 자기를 겉으로 나타내는 적극적인 사랑), 착한 사람들을 위하여는 그들이 점점 더 착하게 되어 우리를 하늘에서 사랑하시는 착하신 분의 완전에 점점 더 가까이 가도록 기도하면서, 착함과 악 사이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하여는 그들이  정신을 강하게 하여 거룩한 길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도록 기도하면서, 악한 사람들을 위하여는 착하신 분이 그들의 정신에 말씀하시고 혹은 당신 능력의 대타격으로 그들을 쓰러뜨리시더라도 그들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께로 회두시키시도록 기도하면서 우리는 사랑하였다. 다른 어떤 사람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였다. 하느님보다 더 높게 되기 위해 그들에게 허락된 것 이상의 것을 가지기를 원함으로써 하느님보다 자기 자신들을 더 사랑한 첫째 사람들의 사랑의 결핍으로 인해 파여진 심연을 우리는 대양과 같은 사랑으로 메우기 위해 사랑을 완전의 꼭대기에까지 밀고 갔다. 따라서 순결과 순종과 사랑과 믿음과 바람과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3항식(項式)에 반대되는 사탄의 3항식인 육욕과 권력과 돈이라는 세상의 모든 재물에서의 초탈에, 따라서 굳셈과 절제와 정의와 조심성의 네 가지 거룩한 덕행에 반대되는 네 가지 비뚤어진 열정인 미움과 음란과 분노와 교만에 우리는 아담-하와 한 쌍의 행동방식과 반대되는 모든 것의 끊임없는 실천을 결합시켜야 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한없는 착한 뜻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쉽기는 하였지만 어떤 시기에 또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영웅적이었는지는 홀로 영원하신 분 만이 아신다. 나는 여기서 한 사람에 대해서만, 나 말고 내 어머니에 대하여만 말하고자 한다. 과일을 깨물어 아담의 여자동무를 미치게 하였던 그 맛을 보라고 그를 끌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한 아첨을 벌써 아주 어린 나이때부터 물리쳤던 새로운 하와에 대하여 말이다. 사탄을 물리치는 데 그리지 않고 하도 큰 순종과 사랑과 순결의 의지로 그놈을 짓밟아 이겼던지 그 저주받은 자가 그것으로 으스러지고 정복당할 지경이 되게 한 새로운 하와에 대하여 말이다. 아니다! 사탄이 동정녀인 내 어머니의 발뒤꿈치 밑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놈은 침을 흘리고 게거품을 물고 으르렁거리고 하느님을 모독한다. 그러나 그놈의 힘은 아래로 흐르고, 그놈의 으르렁거림은 내 거룩한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충격을 주지 못하여 그분은 악취를 맡지 못하고 마귀의 음란한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아름답고 거룩한 분 주위에는 천상의 화성(和聲)과 천상의 향기가 반하여 춤을 추고, 배합보다도 더 깨끗하고 구구거리며 우는 멧비둘기의 눈보다도 더 반한 그 분의 눈은 그분의 딸이요 어머니요 정배인 영원하신 그의 주만을 똑바로 쳐다보기 때문에 영원한 파충의 메스꺼운 침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그의 어머니의 입에서는 하느님을 떠난 그의 정신이 그의 가장 친근한 이웃, 사탄에 의하여 더럽혀지고 추잡한 정욕으로 더러워진 그의 뱃속에서 나온 자식에 대하여 암시하는 악담이 나왔다. 그리고 이 악담은 카인의 죄가 인간 동물의 나라에 오점이었던 것처럼 인간의 정신의 나라에 오점이었다. 형의 손으로 인하여 흐른 피가 땅에 떨어졌다. 사람의 손이 사람의 정맥에서 뽑아서 뿌리는 모든 피를 천년 된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첫번째  피였다. 마치 땅이 그의 하느님께 모반한 인간 때문에 충분히 저주받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완전하게 창조되고 완전한 자연력의 봉사를 받아 그 왕인 인간을 위하여 매력있고 아름다운 주거지가 되기로 되었던 그 땅이 가시덤불과 가시와 단단한 흙덩어리를 겪고 가뭄과 우박과 결빙기와 삼복더위를 겪어야 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랑의 입이 땅에 내뱉은 악담이었다.
  마리아는 하와를 무효하게 만들어야 한다. 마리아는 둘째 카인 유다를 본다. 마리아는 그가 둘째 아벨인 그의 예수의 카인이라는 것을 안다. 마리아는 이 둘째 아벨의 피가 카인에 의하여 팔렸고 벌써 뿌려졌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마리아는 저주하지 않고 사랑하고 용서한다. 사랑하고 다시 부른다.
  오! 박해받는 마리아의 모성! 동정이고 숭고한 모성 만큼이나 숭고한 모성! 동정녀의 모성을 하느님께서는 어머니께 선사하셨습니다! 그러나 박해받는 모성으로는 공동 구속자이신 거룩한 어머니, 어머니를 선물로 바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어머니만이 홀로 그 시간에 제 육체를 부수었던 채찍질로 인하여 어머니의 마음이 부수어지는 것을 느끼시면서도 유다에게 그 말을 할 줄 아셨고, 어머니만이 홀로 그 시간에 십자가가 어머니의 마음을 부수는 것을 벌써 느끼고 계셨는데도 사랑하고 용서할 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새로운 하와이다. 마리아는 너희들에게 너희 아들을 죽이는 사람을 용서하도록 사랑을 밀고 가는 새로운 종교를 가르친다. 너희는 이 은총의 여주인에게 그의 마음의 문을 닫고 실망하여 ‘그는 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며, 진리의 어머니의 말을 의심하게 하고, 따라서 내가 멸망시키러 오지 않고 구원하러 왔으며, 뉘우치며 내게로 오는 사람은 용서하러 왔다고 끊임없이 되풀이한 내 말을 의심하게 한 유다같이 되지 말아라.
  새로운 하와인 마리아는 ‘카인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아벨 대신에’ 하느님에게서 새 아들을 받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새 아들을 덧없는 관능성과 포만시키는 피로로 고통을 진정시키는 동물적인 기쁨 속에서 얻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 새 아들을 전적인 고통의 시간에 십자가 아래에서, 자기의 아들인 죽어가는 사람의 헐떡거리는 소리와 하느님을 죽이는 군중의 욕설 가운데에,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위로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억울하고도 전적인 비탄 속에서 얻은 것이다.
  새 생활은 인류를 위하여도 각 개인을 위하여도 마리아에 의하여 시작된다. 그분의 덕행과 생활 방식에 너희 교훈이 들어 있다. 그러고 모든 얼굴, 자기아들을 죽인 사람에 대한 용서의 얼굴까지도 가졌던 그분의 고통 속에 너희의 구원이 들어 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언젠가 카인과 첫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또 해 주마. 말할 것도 많고 묵상할 것도 많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창세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담은 아내를 인류의 어머니라 해서 하와라고 이름지어 불렀다.”
  오! 그렇고 말고. 여자는 아담의 동무가 되라고 하느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를 보아 만드신 ‘여장부’에게서 났었다. 여자는 나기를 원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운명을 지니고 났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그의 관능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고 후예를 가지는 기쁨을 주는 즐거움을 당신이 유보하셔서 그에게는 숨기셨던 것을 알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아담의 여자동무는 악 속에 감추어져 있는 선과 특히 선 속에, 표면상의 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악을 알기를 원했었다. 과연 사탄의 꾐에 빠졌던 하와는 홀로 하느님만이 위험없이 아실 수 있는 지식을 원하였었고, 그래서 창조자가 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그 선의 힘을 부당하게 씀으로써 하와는 그 힘을 타락시켜 악한 행위를 만들었으니 그 행위는 하느님께 대한 불복종이요, 육체의 악의와 탐욕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하와는 ‘어머니’가 되었었다. 그것들의 여왕의 결백이 더럽혀진 것을 둘러싸고 만물이 무한히 통탄하였다! 또 하와가 그 중요성과 무효화가 불가능함을 깨달은 그 모독에 대하여 여왕이 슬피 탄식하였다! 암흑과 대이변이 무죄한 이의 죽음과 동시에 일어났지만, 첫조상들의 마음속에서 무죄가 죽음과 동시에 암흑과 폭풍우가 일어났다. 땅 위에 고통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섭리는 고통이 영원하기를 원치 않으시어 고통의 많은 세월 뒤에 고통에서 나오는 기쁨을 주시어 너희가 올바른 영혼으로 살 줄을 알면 기쁨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셨다. 인간이 인간적으로 생명의 주인이 되어야 했다면 참 불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죄악과 그것의 끊임없는 증가의 기억을 가지고 사는 것도 불행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빛을 알라고 창조되었었지만 암흑이 타락시켜 그 희생물을 만든 피조물인 너희가 죄를 짓지 않고 살기는 숨을 쉬지 않고 살기보다 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암흑! 암흑은 끊임없이 너희를 에워싸고 있다. 암흑은 너희를 둘러싸고 고해성사로써 지워진 것을 되살아나게 하며, 또 너희가 하느님께 속하겠다는 의지를 그것에 맞세워 놓지 않기 때문에 세례로 인하여 해독이 없게 되었던 그 독약으로 또다시 너희에게 해독을 주게 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 불복종의 표가 분명한 사람을 낙원의 더없는 즐거움에서 멀리 하셔서 그의 탐욕스러운 손을 생명의 나무로 올려 다시 한번 그리고 한층 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녀를 믿을 수가 없고 낙원에서 안심하고 계실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사탄이 특은받은 피조물들을 속이려고 그 곳에 침입하였었고, 그들이 죄없을 때에 죄를 짓게 할 수가 있었으니, 결백하지 않게 된 지금은 그들을 더 쉽게 죄로 이끌 수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낳는 자로서의 보물을 하느님께 남겨놓지 않고 전부 차지하고자 하였었다. 따라서 사람이 폭력으로 얻었던 재물을 가지고 떠나 귀양살이 땅으로 가게 하시어 품위를 잃고 그의 은혜를 빼앗긴 왕에게 그의 죄를 항상 생각나게 하셨다. 낙원에 있던 사람이 땅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의 나무로 손을 벋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와서 온 인류를 위하여 그 열매를 딸 수 있게 되려면 고통의 여러 세기가 지나야 했다. 사람들이 하늘의 공동 상속자가 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소유가 되도록 뚫린 손으로 그 열매를 따서 그들에게 주게 되려면 말이다.
  창세기에는 또 이런 말도 있다. ‘그후 아담이 아내 하와를 알았다.’ (*역주: 공동번역에는 “아담이 아내 하와와 한 자리에 들었더니…”로 되어 있는데, 불가타 판에는 라틴어로  “cognomt”이라고 “알았다”는 말을 썼다.)
  그들이 선과 악의 비밀을 알았으니, 이제는 자기 자신들이 생식해야 하는 육체의 고통도 아는 것이 당연하였다. 사람이 만들 수 없는 것, 즉 하느님에게서 오는 불똥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으시는 숨이며, 육체에 영원한 조물주의 표를 찍는 도장인 정신을 위하여서만 하느님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그래서 하와가 카인을 낳았다. 하와는 그의 죄를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이 미처 생각못하는 사실에 너희의 주의를 촉구한다. 하와는 그의 죄를 짊어지고 있었다. 고통은 아직 그의 죄를 덜기에 충분한 기준에까지 즉시 이르지 못하였었다. 독소를 지니고 있는 유기체와 같이 하와는 자기 아들에게 자기 안에 우글거리고 있는 것을 전해 주었었다. 이리하여 하와의 맏아들 카인은 냉혹하고 질투하고 성 잘내고 음란하고 악랄하게 태어나서 본능으로는 야수와 별로 다를 데가 없고, 비록 그의 포악한 자아 안에서 그가 원수로 생각하고 자기가 진실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믿던 하느님께 대한 공경을 거부하기는 해도 초자연적인 것으로는 야수보다 훨씬 나았다. 사탄이 하느님을 조롱하라고 그를 부추겼다. 하느님을 조롱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존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분을 조롱하는 자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은 눈물의 쓰라림을 맛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식들의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희망이 없고, 배우자의 충실한 사람의 보장이 없으며, 친구의 성실한 우정의 확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의 냉혹 때문에 많은 눈물이 하와의 얼굴과 그의 마음을 적시었고 그의 마음의 뉘우침의 씨를 뿌렸다,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사람의 고통을 용서하시기 때문에 그 많은 눈물이 하와에게 죄가 가벼워지는 은혜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 하와의 둘째 아들은 어머니의 눈물로 영혼이 씻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부모에게 온순하고 공손하였으며 그 전능이 하늘에서 퍼져 나오는 것을 느끼던 주께 대하여 충성스러웠다. 그는 왕위를 잃은 어머니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하와의 고통의 길은 그가 죄를 경험한 그의 길에 비하면 멀고 고통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죄를 경험한 그의 길에는 관능의 전율이 있었고 고통의 길에는 고통의 전율이 있었다. 한 길에는 입맞춤이, 또 한길에는 티가 있었다. 한 길에서는 아들이 하나 생겼고, 또 한 길에서는 아들의 죽음, 착하기 때문에 더 예뻐하던 아들의 죽음이 왔다. 아벨은 죄지은 어머니를 위하여 깨끗이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나 고통스러운 정화(淨化)이었느냐! 하와는 형제살해로 인하여 공포에 떨고 있는 땅을 고통의 부르짖음으로 채웠고 아들의 피에 어머니의 눈물을 섞었다. 그러는 동안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동생이 미워서 그 피를 흘리게 한 자는 그의 가책에 쫓겨 도망치고 있었다.
  주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만일 네가 내게 대하여 잘못이 있으면, 내가 너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고 해서 왜 화를 내느냐?
  세상에는 카인이 얼마나 있느냐? 그들은 내게 우롱적이고 위선적인 예배를 드리거나 전혀 예배를 하지 않거나 한다. 그러면서 내가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고 지복(至福)으로 그들을 만족시켜 주기를 원한다. 하느님은 너희 왕이시지, 너희 종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너희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정의대로 판단하면 아버지는 결코 종이 아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시지만, 너희는 그렇지 못하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시다. 너희가 다만 조금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너희에게 지나치게 은혜를 베풀어 그 정도로까지 그분을 업신여기는 만큼 너희를 벌하시지 않을 수가 없다. 정의는 두 가지 길을 알지 못한다. 그의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너희가 행동하는 대로 얻게 된다. 너희가 착하면 선을 얻고, 너희가 악하면 악을 얻는다. 그리고 하느님의 율법에 반항하는 너희 생활 방식 때문에 너희들이 얻어야 할 악에 비하면 너희가 얻는 선이 항상 더 크다는 것을 믿어라.
  하느님께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선을 가지게 될것이고, 네가 악을 행하면 죄가 즉시 네 문 앞에 와 있으리라는 것이 사실이 아니냐?’ 사실에 있어서 선은 끊임없는 정신을 이끌어 가고 점점 더 큰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더 가지게 하여 완덕에 까지 이르게 하고 성인이 되게 한다. 그런데 악에 굴복하기만 하면 타락하고 완덕에서 멀어지며, 마음 속에 들어와서 그것을 점점 더 커지는 유죄성(有罪性)으로 단계적으로 내려가게 하는 죄의 지배를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또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욕망이 네 밑에 있을 것이니 네가 그것을 제압해야 한다.’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죄의 종을 만들지는 않으셨다. 격정이 너희들 밑에 있지 위에 있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라고 지성을 주셨다. 하느님의 엄벌을 받은 최초의 사람들에게도 하느님께서는 지능과 정신적인 힘을 남겨 주셨다. 그리고 구속자께서 너희를 위하여 제헌을 완수하신 지금 너희는 지성과 힘을 돕기 위하여 강물과 같이 풍부한 은총을 가지고 있으니, 악의 욕망을 제압할 수가 있고 또 제압해야 한다. 은총으로 강하게 된 너희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났을 때의 천사들이 땅을 향하여 ‘착한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 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은총을 다시 가져오려고 왔었으니, 너희의 착한 뜻과 은총의 결합에 의하여 평화가 사람들에게 왔을 것이다. 평화는 하느님의 하늘의 영광이다.
  ‘그러나 카인은 아우에게 <들로 가자>고 말하였다.’ 미소 아래 죽이는 배반을 감춘 거짓말이다. 범죄행위는 그 희생자들과 또 속이려고 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항상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하느님도 속이고 싶어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마음 속을 읽으신다.    “들로 가자”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어떤 사람이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말하면서 그에게 입맞춤하였다. 두 사람의 카인은 그들의 범죄를 해를 끼치지 않는 외양 속에 감추고 그들의 질투와 분노와 난폭함과 그들의 모든 나쁜 본능을 희생자에게 흘러나가게 하였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타락한 자아로 자신들의 정신을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와는 속죄로 올라가고, 카인은 지옥을 향해 내려간다. 실망이 그를 붙잡아 그리고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죄악 때문에 벌써 쇠약해진 정신에게는 마지막 치명타인 실망과 더불어 인간의 벌에 대한 신체의 비겁한 공포가 온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이제는 하늘을 기억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의 동물적인 생명 때문에 떨고 있는 동물이다. 의인들은 죽음으로 하느님을 차지하는 기쁨으로 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 모습이 기쁨인 죽음이 마음의 지옥에서 영원히 사탄의 지옥으로 건너가는 것임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공포가 된다. 그래서 환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처럼 사방에서 그들을 칠 차비를 하고 있는 복수를 본다.
  이것은 의인들에게 말하는 것이다만, 죄 지은 마음의 가책과 암흑이 죄인의 환각을 허락하고 부추긴다 하더라도, 아무에게도 자기를 형제에 대한 재판관으로 세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시비곡직을 가리는 사람으로 세우는 것을 더욱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라. 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다. 인간의 정의가 재판소들을 만들어놓았고 또한 재판을 하는 소임을 거기에 맡겨야 하지만, 이 이름을 모독하여 개인적인 격정에 끌리거나 인간의 권력의 압력에 의하여 판단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자기를 어떤 사람의 시비곡직을 가리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 충동적인 분개의 영향으로가 아니라 냉정한 인간적인 계산으로 정당한 이유없이 죽이거나 감옥의 수치를 겪게 하는 사람들은 한층 더 저주를 받아야 한다.
  주께서 카인을 칠 사람이 당하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사람을 죽인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일곱 갑절이나 큰 벌을 받을 것이니, 사탄에 대한 예속으로 인간 권력의 자격으로 정당하지 않게 유죄를 선고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엄격으로 일흔 일곱 갑절이나 벌받을 것이다. 쓰러진 사람들을 가지고 너희 승리의 기초를 삼으려고 서로 죽이면서 너희가 하느님과 사람들의 저주를 받아 떨어질 함정을 너희 발 밑에 파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아, 이것을 항상, 그리고 특히 이 시간에 머리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 고 내가 말하였기 때문이다.
  하와는 그의 속죄의 길을 올라간다. 그의 죄로 인한 시련 앞에서 그의 마음에는 뉘우침이 커진다. 하와는 선과 악을 알고자 하였다. 그런데 잃어버린 선의 기억이 하와에게는 갑자기 어두워진 태양의 기억과 같고, 악은 그의 앞에 죽임을 당한 아들의 시체 안에 있고, 죽이고 도망친 아들이 남긴 공백 때문에 그의 주위에 있다.
  그리고 셋이 났고, 셋에서는 에노스가 났다. 최초의 사제이다. 너희는 과학의 도도한 물결로 너희 정신을 부풀리고 진화를 너희들이 말하는 자연발생의 표인 것처럼 말한다. 인간-동물은 진화하여 초인에 이를 것이라고 너희는 말한다. 그렇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 진영에서 내 방식대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너희 진영에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수류(四手類)의 처지에서 사람의 처지로 넘어옴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처지에서 영(靈)의 처지로 건너감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선(腺) 이야기를 하고 뇌하수체와 송과선(松果腺)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으레 선 이야기를 하고, 너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아니라 앞서간 시대와 뒤에 올 시대에 그것을 생명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너희들은 너희의 참된 선(腺), 즉 너희를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사람을 만드는 선(腺)은 너희 정신이라는 것을 알아라. 너희 정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너희가 하느님의 빛을 더 차지할 것이고, 사람에서 신으로, 불사불멸하는 신으로 변화하여, 하느님의 소원을 어기지 않고 생명의 나무에 관한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그 생명을 정말 하느님께서 너희들이 차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차지하려는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너희를 위하여 영원하고 빛나게 창조하셨고, 너희를 그 안에 흡수하고 그 특성들을 너희에게 전하는 그분의 영원과의 진복을 주는 포옹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정신이 변화하면 할수록 너희는 하느님을 더 잘 알 것이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뜻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분께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상에서 그들의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제가 되는 것이다. 축성된 사람이 사제이지만, 확신하고 충실하고 사랑이 가득한 믿는 사람도 사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의 충동으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인 사람이 사제이다. 하느님께서는 옷을 보시지 않고 마음을 살펴보신다. 그리고 너희에게 말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내가 볼 때에는 삭발례(削髮禮)를 받은 사람중에 성직자다운 것이라고는 삭발밖에 가진 것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사람이 많고, 그들에게는 그들이 사로잡혀 그것으로 다 타버리게 되는 사랑이 서품의 성유가 되는 평신도가 많다. 이 서품의 성유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게는 알려졌고 그 평신도들을 내가 축복하는 사제로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