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눈바람이 하늘을 구름으로 뒤덮는 겨울의 짧은 황혼처럼, 나의 외조부모의 삶도, 그들의 태양이 성전의 거룩한 휘장 앞에 머물러 빛을 비추게 된 뒤에는, 빠르게 밤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집회 4,11-18).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지혜를 붙드는 이는 영광을 상속받으리니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리라. 지혜를 받드는 이들은 거룩하신 분을 섬기고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지혜에 순종하는 이는 민족들을 다스리고 지혜에 귀 기울이는 이는 안전하게 살리라. 그가 지혜를 신뢰하면 지혜를 상속받고 그의 후손들도 지혜를 얻으리라. 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오리라. 지혜는 그를 신뢰할 때까지 자신의 규율로 그를 단련시키고 자신의 바른 규범으로 그를 시험하리라. 그러고 나서 지혜는 곧 돌아와 그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비밀을 보여 주리라.’

그렇다. 이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지혜의 책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고 삶의 길잡이를 얻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지혜를 영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들은 참으로 행복하다. 나는 지상에서의 내 가족을 모두 지혜로운 이들로 두었다. 안나와 요아킴, 요셉, 즈카르야, 무엇보다도 엘리사벳,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모두 참으로 지혜로운 이들이 아니냐? 내 어머니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분 안에는 지혜께서 머물러 계셨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지혜는 내 외조부모에게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었고, 거센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장막처럼 그들을 죄에 빠질 위험에서 지켜 주었다.

하느님을 거룩하게 두려워하는 마음은 지혜라는 나무의 뿌리이다. 지혜는 그 뿌리에서 모든 가지를 힘차게 뻗어 올려 마침내 그 꼭대기로 이른다. 곧 평화 안에서 평온한 사랑에, 안전함 안에서 흔들림 없는 사랑에, 충실함 안에서 충실한 사랑에, 그 강렬함 안에서 더욱 깊어진 사랑에, 마침내 성인들이 지닌 온전하고 너그러우며 실천하는 사랑에 이르는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이는 생명을 사랑하며, 생명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다.’하고 집회서는 말한다. 이 말씀은 내가 한 이 말과도 하나로 이어진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구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이 땅의 보잘것없는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며, 한순간의 기쁨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기쁨이다. 요아킴과 안나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생명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지혜는 시련 가운데서도 늘 그들과 함께하였다.

너희는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닌데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냐고 생각하며, 울지도 않고 고통도 겪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마리아를 딸로 맞이하는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었던 이 의인들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지 생각해 보아라. 그들을 다윗의 땅에서 쫓아내어 극심한 가난에 빠뜨린 정치적 박해. ‘내가 당신들을 이어 가겠습니다.’하고 말해 줄 꽃 한 송이 없이 세월이 허무 속으로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던 슬픔. 그리고 늦은 나이에 얻은 아이였기에, 그 아이가 여인으로 성장하는 모습조차 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떨던 마음. 그리고 마침내 그 아이를 자기 가슴에서 떼어 내어 하느님의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했던 희생. 또한 작은 산비둘기의 재잘거림과 종종걸음 소리, 사랑스러운 아이의 미소와 입맞춤에 익숙해진 뒤에는, 그것들이 모두 사라진 더욱 깊은 침묵 속에서 추억만을 품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려야 했던 세월. 그리고 또, 또다시…. 질병과 악천후가 가져온 재앙, 권세 있는 자들의 횡포…. 그들의 보잘것없는 삶이라는 연약한 성곽을 향해 끊임없이 내리치는 공성추와 같은 수많은 타격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홀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아이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그토록 정성을 다하고 희생을 치렀건만, 그 아이에게는 부모의 재산 가운데 얼마 남지 않은 몫밖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었다. 더구나 그 재산은 앞으로도 여러 해 동안 주인을 기다리며 묵혀 둘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 아이가 돌아왔을 때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겠느냐?

두려움과 공포와 시련과 유혹….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 충실함만은 언제나 변하지 않았다. 가장 큰 유혹은, 삶의 황혼을 맞이한 자신들 곁에서 딸이 주는 위로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의 것이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녀는 내가 내 어머니께 말했던 것처럼(루카 2,49) 말할 수 있다.

‘제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그리고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성전에서의 마리아와 요셉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점점 더 비어 가고, 점점 더 쓸쓸해지는 나자렛의 집에 남은 안나와 요아킴을 바라보아라.

그 집에서는 모든 것이 줄어들어 갔지만, 단 하나 결코 줄어들지 않은 것이 있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자라난 것이 있었다. 바로 두 사람의 마음의 거룩함, 부부의 거룩함이었다. 병든 요아킴과 슬픔에 잠긴 그의 아내에게,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는 노년의 길고 고요한 저녁마다 마음을 밝혀 주는 것은 무엇이었겠느냐? 멀리 떠나 있는 어린 딸이 입던 자그마한 옷들, 처음 신었던 작은 샌들, 보잘것없는 장난감들…. 그리고 추억, 추억, 또 추억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함께 찾아오는 평화가 있었다.
‘나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다하였다.’

이 한마디에서 오는 평화였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하늘의 빛으로 빛나는 초자연적인 기쁨이 찾아온다. 그 기쁨은 죽어 가는 두 눈 위로 무거운 눈꺼풀이 내려앉는다고 해서 빛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찬란히 빛나며, 평생 동안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던 진리들을 환히 비추어 준다. 그 진리들은 이제껏 번데기 속에 갇혀 있던 나비들처럼 숨어 있었고, 은은한 빛과 미세한 움직임으로만 그 존재를 드러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햇살 같은 날개를 활짝 펴고, 그 날개를 수놓고 있는 말씀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을 기다리고 있는 복된 미래를 깨닫는 가운데 생명은 서서히 꺼져 가고, 그들의 입술에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 머문다.

내 외조부모의 죽음이 바로 그러하였다. 그들의 거룩한 삶에 합당한 죽음이었다. 그들은 거룩한 삶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신 분의 첫 수호자가 되는 은총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생애가 저물 무렵, 더 큰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푸신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거룩함 때문에, 안나는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겪은 것이 아니라 죄 없으신 분을 품어 세상에 내어놓는 황홀경을 누렸다. 몇몇 신학자들도 육체적인 산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극히 미미하였다고 본다. 실제로는 마리아를 낳는 황홀한 기쁨이 산모가 겪는 자연스러운 고통을 압도하였으므로, 안나는 그러한 경우에 따르는 불안과 극심한 고통 없이 마리아를 낳았다.

또한 두 사람 모두에게 죽음은 임종의 고통이 아니라, 새벽에 태양이 떠오를 때 별이 조용히 사라지듯, 평온한 쇠잔함 속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요셉처럼 강생한 지혜인 나를 품에 안는 위로는 받지 못하였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현존으로 그들의 베개 곁에 몸을 굽혀 숭고한 말씀을 들려주며, 승리의 날을 기다리는 평화 속에서 그들을 잠들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들도 아담의 자손인데, 어째서 아이를 낳을 때도 죽을 때도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원죄를 지니고 잉태된 아담의 자손인 세례자 요한도,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를 가까이한 덕분에 미리 거룩하게 되었다면, 티 없으신 분을 낳은 거룩한 어머니, 하느님께서 보존하신 그분의 어머니는 얼마나 더 큰 은총을 받았겠느냐? 그 보존되신 분은 거의 신적이라 할 수 있는 당신의 영혼 안에, 그리고 아직 태아였던 당신의 심장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계셨으며, 성부께서 당신을 생각하신 순간부터 한 태 안에 잉태되실 때까지, 또 영광스러운 영원 안에서 하늘에서 다시 하느님을 충만히 소유하시게 될 때까지, 한순간도 하느님과 떨어져 계신 적이 없으셨다.’

또 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올바른 양심은 평화로운 죽음을 가져다주며, 성인들의 기도는 그러한 죽음을 얻게 해 준다.’

요아킴과 안나는 평생 올바른 양심으로 살아왔다. 그들의 지나온 삶은 고요한 풍경처럼 눈앞에 펼쳐져, 그들을 하늘에 이르기까지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께서, 하느님의 성막 앞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부모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셨다. 부모는 최고의 선이신 하느님 다음 자리에 모셨지만, 율법과 사랑의 정이 요구하는 대로 초자연적으로 완전한 사랑으로 부모를 사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