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 예수

  주님 안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크신 자비와 도우심에 힘입어 기도, 참회, 보속, 그리고 애덕의 실천으로써 기다림의 시기를 뜻있게 보내고 나서, 마침내 우리는 기다리던 분을 모셔 들이는 기쁜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우리보다도 그분 자신이 더 애태우며 기다리시던 성탄일입니다. 이 즐겁고 기쁜 대축일을 맞이하여 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모든 가정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을 풍성히 받아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 자매 여러분과 함께 외아드님을 보내주신 하느님 아버지와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이를 이루어주신 성령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아울러 하느님의 이 위대한 일에 전적으로 협력하신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 마리아께도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바입니다.

  오늘의 경사를 맞이하여 나는 이 서한을 통해 몇 가지 감상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1. 초자연적인 눈으로

  탄생하신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본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몇 명의 목동들과 세 동방박사 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까? 목동들로 말하면 천사가 전해준 정보와 하늘의 표징을 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요, 세 박사에게는 심상치 않은 큰 별의 인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원자를 알아 보는 눈은 육안이 아니라, 특별한 은총을 받은 눈, 즉 초자연적, 초본성적 눈인 것입니다. 이것은 후에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리입니다.(마태 13,11.16 참조) 육안으로 늘 보면서 함께 살아온 예수님의 형제들이나 마을 사람들도 그분을 다 믿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거의 다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마태 13,54-57;요한 7,5 참조)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언제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육안으로 보는 사람들과 영안으로도 보는 사람들로 나뉘어 왔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지만 두 부류로 갈라지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마르4,10-12; 루가8,9-10).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옳게 알아본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요한6,65 참조). 그것은 마치 마구간에 누워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뵌 목동들이 다른 목동들보다 그럴 자격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며, 동방의 세 박사들이 다른 점성가들보다 그럴 자격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구세주를 알아본 것은 온전히 주님의 특별한 은총의 덕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그리스도를 옳게 고백하고 났을 때 예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마태16,17).  

  사정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알아본 데 대하여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고 오직 자기가 받은 특별한 은혜에 감사해야 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눈과 함께 초자연적인 눈으로도 보는 것, 또는 이성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신앙으로써 받아들이는 것이 일상화되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교회와 성사를 떠난 사람들, 한 마디로 배교자나 냉담자들은 그것을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눈을 버리고 자연적인 눈만을 가지고 보려 하였고 신앙을 버리고 이성에 의해서만 살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자기네가 받은 비할 데 없이 귀중한 특전을 포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교황님은 회칙 “새천년기를 맞이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 하십니다. “실상 그분의 육체가 어느 만큼 보이느냐, 또는 접촉되느냐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오직 신앙만이 그 성안(聖顔)의 신비에 온전히 들어 갈 수 있다”(19항). 교황님의 이 말씀은 “신앙은 그 자체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복음 사가들이 “믿지 않음”을 “보지 않음”에 결부시키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2. 영적으로 장님일 때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람이 만일 초자연적인 눈이 멀어 단지 육적으로만 볼 경우에 그 결과가 어떠할지를 잠깐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되면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신성은 보지 못하고 오직 인성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이루신 구원 사업을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유일신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갈라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유다교라든가 이슬람교가 유일신교이긴 하지만 그것들이 진교(眞敎)가 아닌것은 그 때문입니다. 유일신교가 반드시 진교가 아니듯이 그리스도교를 표방하는 모든 종교나 종파가 다 진교는 아닙니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만이 진교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가 그 창설자로부터 위임받은 교도권을 통해 믿을 교리로 제시하는 것들을 예외없이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때 비가톨릭 그리스도교파가 생겨납니다. 진교인 가톨릭측에서는 그렇게 갈라져나간 종파를 열교(裂敎) 또는 이교(離敎)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다음의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현재 가톨릭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과연 믿을 교리를 비롯한 교도권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고 있는가? 라고. 슬픈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올바른 대답입니다. 갈라지고 떨어져 나가는 일은 교회 창설 이래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왔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이단자나 배교자가 생겨 나지 않은 시대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열교 종파에 정식으로 가입해야만 이단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종파에도 속하지 않은 이단자, 이를테면 익명의 이단자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 이단자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영적 가치가 저하되고 세속화가 심해질수록 신앙의 눈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법이어서 그 수효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근있는 추측입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갈라놓으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다음 말씀으로써 당신이 칼을 쓰신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예수님의 칼은 자르고 갈라놓는 칼입니다. 그 칼은 혈육을 비롯한 그 어떤 인연일지라도 잘라 버릴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즉, 부부, 부자, 모녀, 형제자매, 친척, 친지, 겨레, 그리스도인, 가톨릭 신자 그 누구라도 사정 없이 자를 수 있는 칼입니다. 그것은 양과 염소, 밀과 가라지, 알곡과 쭉정이,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한 종을 가르는 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밭에서 함께 일하는 두 농부를, 함께 맷돌질하는 두 여인을, 한 침상에 같이 누워 있는 두 사람을 가르는 칼이며, 똑똑하고 안다는 사람과 철부지 어린이를, 어둠의 자녀와 빛의 자녀를,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과 교만한 사람을 가르는 칼입니다. 결국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편과 그 분의 반대 편을 갈라 세우는 칼인 것입니다(마태12,30 참조).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거의 상관 없으리 만큼 되어 버린 교회의 내일을 위해 쾌도난마(快刀亂麻)하시는 예수님을 나는 자주 꿈꾸게 됩니다.

  이번 성탄에 형제 자매님들에게 이러한 나의 생각을 전해드리는 것은 여러 분이 세례 때 받은 영혼의 눈, 신앙의 눈, 초자연적 눈을 항상 잘 간직하고 지켜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그 분의 창조 및 구원 사업에 관련된 모든 진리들을 옳게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여 그 분이 세우신 진교 안에 충실히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육안으로만이 아니라 영안으도 보는 법을 계속 배워 익혀 나가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3. 받들어야 할 전통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그러했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더욱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고 그것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말로 이 시대는 우리로 말미암아 가톨릭성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야 할 시대입니다. 이것은 원리주의와는 도무지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굳이 주의라고 한다면 계시 진리와 우리 가톨릭 교회를 지키기 위한 전통주의라 하겠습니다. 계시 진리에 관해서는 타협이니 절충이니 하는 따위는 도대체 끼어 들어서는 안 될 말들입니다. 전통 교리에 관한 한 원수를 만들지 않기 위한 노력은 축복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완전한 고요(정밀)보다 더 위험한 폭풍이 없고 원수 없는 것 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다”고 한 어느 성인의 경구(警句)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내 견해를 지지해 줍니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가12,51)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서로 원수 맺지 말고 잘 지내도록 하자. 평화가 좋지 않은가? 좋은 일인데 우리 함께 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성 회복, 생명 문화 운동, 사랑의 문명 건설 등을 위해 우리 함께 일해 나가자. 그리고 가톨릭이 앞장서라.” 이렇게 세속은 우리에게 손짓합니다. “좋다. 우리 함께 일하자. 그리고 우리 가톨릭이 앞장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사랑과 생명 문제라면 의당 우리가 기선을 제압해야지 않겠는가.” 이것은 굳이 타협주의자나 절충론자가 아니라도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가 마음 속에 느끼는 충동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생명 운동하는 단체와 연합하여 일을 벌이게 되는데 그 단체가 어느 시점에서 인공 유산이나 안락사에 대하여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게 되면 우리는 그야말로 진퇴유곡(進退維谷)에 빠지는 격이 됩니다. 또 사랑의 문명 건설을 우리와 공동으로 추진하는 자들이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차원에만 머물 때 우리는 그들과 결별하든가 아니면 그 차원에서 그들과 함께 허우적거리게 될 것입니다. 초자연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에게서 그 이상의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나 가톨릭적인 것을 배격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가 멋도 모르고 분별없이 가담하고 있는 듯한 세계화나 신세계 질서 운동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일치 운동에 대하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좋은 운동에도 가톨릭의 전통교리를 변질시키거나 희석하려는 악마의 계락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전후해서 가톨릭의 전통 교리나 제도 등을 위태롭게 하는 흐름이 거세어졌습니다. 성체교리에 대한 이단설이나 사제 독신제의 폐지론 같은 것이 그 예입니다. 또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구원론을 주장하는 유설까지 공공연하게 유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새 신앙 교리성은 이런저런 이유로 바쁘게 되었습니다. 지난 봄에 내가 신앙 교리성을 방문했을 때 성장 추기경으로부터 그 얼마 전에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 예수님’이란 선언문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설명인즉, 우리 아동들도 배워서 익히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는 매우 기본적이며 초보적인 교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유일하고 보편적인 구원자이며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교리였습니다. 오호, 애재(哀哉)라!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하여 구원 사업을 펴신지 20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새삼 그러한 선언문을 엄숙하게 발표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교리 선포가 후퇴했단 말인가! 이렇게 된것이 일부 불량한 신학자들로 인해서임을 생각할 때 내 마음은 더욱 아팠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열심히 활용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악마인 것 같습니다. 그놈은 일부 성직자나 신학자들을 사주하여 교묘하게 자기 뜻을 이루어 나가는 듯 합니다. 이전에는 ‘프리 메이슨(Free-mason: 비밀결사)’이라는 말은 ‘공산당’이라는 말보다 더하게 가톨릭 신자를 긴장시키는 두렵고도 혐오스러운 말이었습니다. 한편 그 비밀 결사는 그것대로 우리 가톨릭 교회를 적 제1호로 세워 놓고 반드시 파괴해야 할 두려운 존재로 간주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정체불명의 그 실재에 대하여 항시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지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그것이 가톨릭교회를 만만히 볼 뿐 아니라 오히려 자기네 동반자로까지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누구나 쉽게 알아 볼수 있는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그 조직은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색깔이 없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그것은 비밀 결사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제 얼굴을 가리고 허술해진 우리 교회의 울타리를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비밀 공작을 펴 나가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와 그 조직의 공동 관심사인 인도주의, 박애정신, 사회복지 등을 매개로 하여 그 조직원들은 뛰어난 변장술과 미소 작전으로써 특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 인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여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묵인하는 것이 과연 가톨릭교회의 관용이나 아량이나 대도(大度)의 표시겠습니까?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서슴지 않고 그것을 무관심, 무기력, 패배주의의 증거로 제시하는 바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누기 무슨 말을 해도 상관이 없을 만큼 느슨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의 구원과 영생에 밀접히 관계되는 교회의 거룩한 전승에 충실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반드시 영성적인 눈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구원에 필수적인 도구임을 알게 되는 동시에 그 전승에 충실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육안으로만 보는 사람은 전통을 무시하게 됩니다. 전통은 생명이 없는 인습 따위가 아니라 생명력을 지닌, 말할 수 없이 귀중한 보물입니다.

  교회에 대한 애정은 많은 성인들과 위대한 저술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프랑스 작가 베르나노스(G. Bernano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 교회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만의 하나 내가 내일 교회 밖에 나와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라도 된다면 나는 5분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무릎으로 기는 한이 있어도 나는 기어이 그 안에 들어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 사랑의 고백입니까? 기쁨과 축복의 성탄일을 맞아 우리 모두 위대하고 고마운 어머니인 가톨릭 교회를 더욱 많이 사랑하고 더욱 잘 따를 것을 다짐합시다.

4.하느님의 심장과 품

  제2위 성자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어 오신 오늘, 나는 하느님의 ‘심장’과 ‘품’에 대하여 잠깐 얘기하고자 합니다.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심장이라든가 품이란 것을 생각지 않고 지냈습니다. 다분히 육신적이며 인간적인 심장이라던가 품이란 것을 순수 영적 존재이시며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속에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결부시키지 못하고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나는 인간이 되신 성자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는 것이 바로 아버지를 보는 것임을 알려주셨기에 그 일이 가능해졌습니다(요한14,9참조).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심장과 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심장과 품은 사랑과 따스함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 그 심장의 고동을 들으면서 자라나신 분이십니다. 즉 어머니의 사랑과 온정을 가득히 받으면서 성장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위해 같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겨서 당신 심장의 고동을 느끼기를, 당신 사랑과 온정을 우리가 느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형상이신 그분은 우리가 아버지 자신의 심장과 품까지도 체험하기를 바라십니다.

  한편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낳으셨을 때 당신 품에 안으셨고 그 아드님이 돌아가셨을 때 다시 그 분을 당신 품에 안으신 성모 마리아가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의 품에 안기신 예수님 안에 우리가 모두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안으셨을 때 우리도 함께 안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가 넘어지거나 잘못했을 때,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를 받아 안을 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온기 넘치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품,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품,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마음과 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나는 감사와 환희 속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모든 가정을, 그리고 우리 교구와 우리 고장을 후히 축복해주시기를 간절히 빌면서 이 서한을 맺습니다.

2001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교구장 김창렬 주교

– 가톨릭출판사 : ‘그 가정 교사의 나머지 글’ : 169~181쪽 2001년 성탄절 사목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