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적의 그림의 유래에 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 성모님께서는 성 요한의 집으로 가셨다. 그 때 몇 가지의 사유물들을 가지고 가셨는데, 그 중에는 구세주께서 직접 만드신 식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루살렘의 거룩한 동정녀들이 성 루까에게 성모님의 초상화를 하나 그려달라고 졸랐을 때, 성 루까는 그 식탁 위에다 그렸다고 한다. 붓과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성 루까는 예수님의 어머님께서 당신의 아드님께 대하여 하시는 말씀을 주의깊게 들었으며, 나중에 그 때 들은 내용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 그림은 한 동안 예루살렘 안과 부근에서 보관되고 있었는데, 4세기에 성녀 헬레나 황후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성녀는 다른 몇 가지의 성물들과 함께 그 그림을 콘스탄티노플로 가지고 갔으며, 성녀의 아들인 콘스탄틴 황제는 이를 기념하여 성당을 건립하였다.
사람들은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초상화를 공경하였으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사라센 인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도시가 포위되어 있는 동안 원로원 의원들과 시민들은 그 거룩한 초상화를 모시고 길거리로, 뚝으로 행진을 하였다. 그러자, 사라센 인들은 무엇인가 놀라운 것을 보고서 공포에 질려 퇴각했다고 한다.
나중에, 폭군 이자우린(Izaeuryn) 황제는 성물들을 몹시 혐오하였으며, 발견된 많은 성물들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거룩한 초상화는 황제의 아내 이레네(Irene) 황후에 의하여 구제되었다. 그녀는 성모님의 원수들이 전혀 의심하지 않는, 황제의 궁전 안에다 그림을 감추어 놓았던 것이다.
초상화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약 500년 간 보존되어 있었는데, 몇 번에 걸쳐 가자(嫁資: 시집가는 여인이 지참하여 가는 물건)로서 옮겨졌으며, 끝내는 러시아로 옮겨졌는데, 그 곳은 나중에 폴랜드의 영토가 되었다.
초상화는 15세기에 폴랜드의 왕자 성 라디슬라우스(St. Ladislaus)의 소유물이 되었으며, 그는 그의 성(城)이 있던 벨츠(Belz)에 특별히 준비된 소성당에 초상화를 모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성은 타타르 족(the Tartars)에 의하여 포위되었으며, 그들이 쏜 화살 하나가 소성당의 창문을 뚫고 초상화에 맞았으며, 성모님의 목에 상처를 남겼다. 그 후에 여러 차례 그 흔적을 없애려고 시도하였으나,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성 라디슬라우스는 타타르 족의 거듭되는 침략으로부터 초상화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의 태생지인 오팔라(Opala)로 초상화를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초상화를 옮겨가는 도중에 체스토호바(Czestochowa)를 통과하게 되었는데, 날이 저물었으므로, 그 곳에서 묵어 가기로 하였다. 그 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초상화는 야스나 고라(Jasna Gora, “밝은 언덕”이라는 뜻)로 모셔졌는데, 그 곳에는 작은 나무로 지은, 성모님의 몽소승천을 기리는 성당이 있었다. 그 다음 날 아침,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마차에다 실었는데, 말들이 움직이려 하지를 않았다. 성 라디슬라우스는 이를 그 초상화가 체스토호바(Czestochowa)에 남아있어야 된다고 하는 하늘의 징표로 받아들이고, 초상화를 정중히 성모님 몽소승천의 성당으로 모셔갔다. 이 일이 있은 것은 1382년 8월 26일이었는데, 아직도 이 날을 이 초상화의 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 라디슬라우스는 초상화가 가장 거룩한 사람들에 의하여 지켜지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그 성당과 부속 수도원을 성 바오로 회 신부들(the Pauline Fathers)에게 맡겼다. 그 회의 신부들이 지난 6세기 동안 초상화를 경건히 보존해오고 있다.
이자우린 황제의 난동을 피하고, 타타르 족의 화살에 상처를 입은 이 초상화는 엄청난 이단설을 따르는 후스 파(the Hussites)에 의하여 또 다시 위기를 맞았다. 그 이단들은 1430년에 바오로 회 신부들의 수도원을 침입하여 성당 안의 성물들을 약탈하였다. 그리고, 성모님의 초상화도 훔쳤다. 그들은 초상화를 수레에 싣고 길을 떠났는데, 잠시 후에 말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단들은 50년 전에 라디슬라우스 왕자에게 일어났던 비슷한 일을 기억하였으며, 그 초상화 때문에 말들이 가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땅에다 내버렸다. 이단 중의 하나가 분노하여 칼을 뽑아들고 초상화를 내리쳤으며, 성모님의 얼굴에 두 줄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자가 세 번째로 내리치려고 하는 순간 그는 땅에 쓰러졌으며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 죽었다.
그 후에 성모님 뺨에 생긴 두 줄의 상처와 목에 있던 상처를 없애려고 화가들이 여러 차례 시도를 하였으나, 그 상처들은 매 번 다시 나타났다.
초상화는 1655년에 또 다시 위기를 맞았다. 성당을 지키던 300명이 12,000명의 스웨덴 군인들과 맞서서 싸웠는데, 그처럼 압도적인 숫자의 적군을 성모님을 지키는 이들이 치열한 싸움 끝에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그 다음 해에 거룩하신 동정녀께서는 폴랜드의 여왕으로 선언되셨다.
금세기에 와서, 1920년 9월 14일, 러시아 군대가 비스툴라(Vistula) 강 가에 집결하여 와르소(Warsaw)를 향해 진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폴랜드 국민은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였다. 그 다음날이 통고의 성모님 축일이었는데, 성모님의 모습이 와르소 시 위의 구름에 나타나심을 본 러시아 군인들은 황급히 퇴각하고 말았다. 폴랜드 역사에서 그 날의 승리가 “비스툴라 강에서의 기적 (the Miracle at the Vistula)”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와르소를 점령하는 데에 실패한 러시아 군대와는 달리, 독일군은 폴랜드를 침략하고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와르소 시를 점령한 후에, 히틀러는 성모님의 초상화를 모신 곳에로의 모든 순례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성모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보호하심에 대한 신뢰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50만 명의 폴랜드 국민들이 히틀러의 명령에 항거하여 몰래 순례를 하였다. 1945년 폴랜드가 해방되자, 150만 명이 성모님께 감사드리기 위하여 성모님의 초상화를 찾아왔다.
러시아가 와르소를 점령하려고 첫 번째 시도한 지 28년이 지난 1948년 그들은 폴랜드 전국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 한 해 동안 80만 명 이상의 용감한 폴랜드인들이 성모님의 몽소승천 축일에 초상화를 모신 성소를 찾아왔다. 그 날은 그 초상화를 기리는 세 축일들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거리를 순찰하는 공산 군인들의 눈길을 피하면서 순례를 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귀중한 초상화를 계속해서 찾고 있으며, 특히 8월 26일에 많은 이들이 온다. 그 날은 성 라디슬라우스 왕자 때부터 축일로 지켜지고 있다.
초상화의 성모님의 얼굴과 손 색갈이 어둡게 변했기 때문에, “검은 마돈나(the Black Madonna)”라는 애칭으로 불리워 오고 있다. 이 칭호는 “나는 검지만, 아름답다,”라는 아가(雅歌)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준다. 초상화의 색갈이 검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었겠지만, 오랜 세월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그 초상화는 위험들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장소들에서 보관되어 왔는데, 그 장소들은 예술품을 보관하기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곳들이 아니었다. 뿐 아니라, 초상화 앞에서 봉헌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촛불들로 인한 연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수없이 여러 번 함부로 다루어졌다.
초상화의 크기는 높이가 19 인치(48 cm), 넓이가 13인치(33 cm)이며, 두께가 반 인치(1.25 cm)이다. 초상화의 뒷면에 부착된 천에는 초상화의 역사와 성모님께서 개입하셔서 행하신 기적들 중 몇 가지를 설명하는 광경들이 묘사되어 있다.
체스토호바의 성모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수없이 많으며 놀라운 것들이다. 그 기적적인 치유들과 기타 기적들에 대한 기록들은 야스나 고라(Jasna Gora)의 바오로 회 수도원의 서류실에 보관되어 있다.
이 기적의 상(像)에 대한 교황청의 인정은 1717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하여 있었는데, 이 초상화에 대한 첫 번째의 공식적인 대관식 때에 교황께서 사용하신 왕관은 1909년에 도난 당하였다. 성모님께서 여왕이심을 상징하는 이 왕관은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하여 보석들로 장식된 금관으로 대체되었다.
이 초상화의 성소를 방문한 이들 중에는 폴랜드의 국왕 얀 카시미르(Jan Casimir)도 있었는데, 그가 방문한 것은 1656년이었다. 왕은 그의 왕관을 성모님의 제단 밑에 벗어놓고, 이렇게 서원하였다: “나, 폴랜드의 국왕, 얀 카시미르는 당신을 나의 왕국의 여왕이시며 주보 성인으로 모시나이다. 나는 나의 백성과 나의 군대를 당신의 보호 하에 두나이다. . .” 이 서원이 바쳐진 5월 3일이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폴랜드의 여왕”이라는 칭호 하에 마리아 축일로 정해졌다.
현대에 와서, 폴랜드 태생이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교황좌에 오르신지 몇 개월 후의 역사적인 폴랜드 방문 동안에 초상화의 성모님 앞에서 기도드리셨다. 교황은 1983년과 1991년에도 체스토호바의 성모님을 방문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