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아녜스 스텀프 – 보게라
보게라는 북이탈리아의 도시이다. 스텀프 양(Miss Stump)은 이탈리아인이긴 하지만, 스위스-독일계이다. 그녀의 경우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고 완벽하기 때문에, 그녀가 설명한 기적은 아마 비오 신부의 시성 소송 절차에 쓰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처음 어떻게 비오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가부터 물었다. – 요한 슈그
(참고 –
1. 요한 슈그 신부님이 이 책을 쓰셨을 때에는 아직 비오 신부님의 시성(1887 – 1968년 / 2002년에 시성되심)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2.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 눈을 감으신 직후, 신부님께서 50 여년 동안(정확히는 58년) 지니고 계셨던 오상이 흔적 없이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 아기 피부와 같은 고운 살이 돋아났습니다.)
* * *
제가 어릴 때, 여섯 살이나 일곱 살일 때 처음 비오 신부님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학교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의 할머니가 비오 신부님을 찾아가곤 했지요. 제가 그 친구 집에 갈 때마다, 비오 신부님의 사진이 눈에 띄었답니다. 그 후로 그분에 대하여 조금씩 더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분이 아주 가깝게 느껴졌답니다.
또, 우리 아주머니도 비오 신부님께 아주 헌신적이었어요. 아주머니가 하시는 것을 따라서 전 늘 비오 신부님께 기도를 했지요. 그리고 그분은 저를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저의 일상 생활에서도 도와 주셨답니다. 비록 제가 그분 생전에 만나 뵐 기쁨을 갖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제가 스무 살 쯤 됐을 때, 가끔 무릎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지요. 우리 가정 주치의에게 갔더니 관절염이라고 하더군요. 주사 맞고 약도 받아 왔어요. 통증이 왔다갔다하기에 관절염이구나 생각하고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무릎으르 만지거나 무엇에 부딪칠 때만 아팠으니까요.
하루는 발목을 삐었는데, 너무 아파서 다리를 절게 되었어요. 또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종양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저를 도와 줄 수 없다고 하면서 토르토나에 있는 정형 외과 전문의 리날디 박사에게 가라고 하더군요.
리날디 박사는 왼쪽 무릎 경골 종양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다른 데로 퍼지지 않도록 곧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했지만, 나는 의사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수술한다는 것이 싫었거든요. 사실 그 때까지 난 두통 한 번 없었는데, 그런 중병이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난 폴리 박사를 만나려고 밀라노에 갔는데, 그분도 리날디 박사와 같은 말을 하는 겁니다. 그분은 내가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했지만, 난 그분 말도 믿고 싶지 않았어요.
1967년 12월 22일, 나는 아버지와 오빠에게 비오 신부님께 가서 제가 수술을 받아야 하는지 여쭈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 산조반니로톤도에 도착하여 그분께 고백하러 갔습니다. 그분은 “그래요, 어서 수술을 받아야지요. 두려워할 것 없어요. 내 손길 없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아요. 내 기도 안에서 아녜스를 도와 주고 그리고 그 아이를 수술하는 손을 내가 인도하지요.” 하셨답니다.
1968년 1월 2일, 나는 토르토나의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았지요. 나는 한 달 동안 깁스를 하고 병원에 있다가 집에 왔어요. 내 다리는 깁스를 감고 있었고, 목발을 사용했지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두 달 동안 검사하러 토르토나에 다녔지요. 의사는 엑스레이를 더 찍고는 다 나았다고 했습니다. 비타민 말고는 다른 약을 먹을 필요가 없었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되어 갔지요. 내 다리에서 깁스를 떼어 내고 붕대를 감고는 운동을 시켰습니다. 10월까지 그랬죠. 그런데 다시 아프기 시작해서 병원에 갔더니, 재발했다는 것이었어요. 또 수술을 받으라고 하더군요. 그 충격이라니 ! 그전의 내 모든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다시 토르토나에서 리날디 박사가 수술을 했습니다. 종양을 모두 제거하고 다시 깁스를 했지요. 그리고는 뼈 한 조각은 떼어 내서 조직 검사를 위해서 파비아, 밀라노와 제노바로 보냈답니다. 우리가 받은 진단은 악성 암이 골수암으로 발전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뼈가 다 삭아서 검은 스폰지처럼 보였답니다. 나는 내 다리로 설 수가 없었어요. 뼈에 날 지탱해 줄 것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요. 뼛속에는 고름만 가득 차 있었죠. 그러나 의사가 수술을 해서 고름을 닦아 내고 나니 조그만 구멍이 났지요.
1월부터 10월까지 뼈는 다시 구멍이 메워졌지만, 같은 곳에 다시 종양이 돋아났습니다. 이 두 번째 종양은 첫번 것보다 더 나빴어요. 암이 혈관으로 들어간 거지요. 의사는 더 악화되어 내 전신으로 더 퍼지기 전에 다리를 자르기를 원했지요. “안 돼요, 난 싫어요. 비오 신부님께 기도를 해야 겠어요.” 라고 리날디 박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난 집으로 갔지요. 리날디 박사는 화가 나서 잘 가라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답니다. 난 기도를 시작했어요. 의사의 결정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내 다리를 잘라야만 한다고 하더라도, 나를 위한 것이니 받아들일 것이라고.
나는 또 검사를 받으러 갔답니다. 이번에는 카르나키아 박사에게였죠. 그는 다리 절단을 권하지는 않고, 내 다리를 뻣뻣하게 할 치료를 처방해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나는 거절을 하고 집으로 왔어요. 비오 신부님께서 나를 고쳐 주시리라고 나는 확신했습니다.
11월 30일에 또 다른 의사, 프론티노 박사를 만나러 나는 밀라노로 갔습니다. 그는 피렌체의 스칼리에티 박사의 보조자였지요. 그런데 이 의사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야만 다리를 절단할지 그냥 둘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때까지 나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녔지요. 수술을 안하면 내가 전혀 걸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었습니다. 내 다리는 나를 지탱할 수 없었지요.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답니다.
12월 20일에 나는 비오 신부님의 묘지를 찾아갔습니다. 물론 나는 그분을 뵐 수는 없었지만, 그분이 저 차디찬 회색 대리석 밑에 누워 계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답니다. 나는 내 안에 그리고 그 작은 지하 묘소의 구석구석에 그분이 살아 계심을 느꼈으니까요.
나는 ‘고통의 구제를 위한 집’으로 피콜라 박사를 뵈로 갔습니다. 내 다리에는 부분 깁스가 되어 있었죠. 그는 내 무릎을 부분적으로 쓸 수 있게 하는 수술을 권했습니다.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절대로 수술은 더 안해 !
그러는 동안, 나는 비오 신부님께 끊임없이 기도를 했습니다. 어느 날 밤 나는 그분 꿈을 꾸었지요. 난 다리에 깁스를 하고, 지팡이를 집고 그분께 간 것 같아요. 그분이 순례자들을 접견하는 방에서 나를 맞아 주셨지요. 꿈속에서 나는 다리에 깁스를 했고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했지요. 그분은 나를 바라보고 웃으시더니 내게 윙크를 하시더라구요. 난 그분 손에 입을 맞추었어요. 그러나 손에 오상은 없었어요. 째진 상처나 피는 볼 수 없었어요.
내가 그분 볼에 입을 맞추었더니, 그분이 소리 내 웃으시더라구요. 그 방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답니다. 그분이 내 팔을 잡으셨어요. 그리고 우리는 팔짱을 끼고 문으로 걸어갔지요. 내 목발을 방 구석에 놓아 둔 것이 생각나서 “신부님 ! 목발을 저 구석에 놓아 두었는데, 제가 목발 없이도 문으로 걸어가고 있네요.” 했답니다. 그리고는 “목발 가지러 가야겠어요.” 했지요.
그분이 “그게 무슨 소용 있지? 이젠 필요 없는데.” 하셨습니다. 그 말에, 나는 깨었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에, 나는 내가 지팡이만 짚고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 때까지는 목발이 없이는 몸이 무거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거든요. 나는 오빠에게 지팡이만 짚고도 걸어 다닐 수 있고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지요.
1969년 4월 25일, 나는 지팡이를 던져 버렸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그걸 던져 버리라고 명령한 것처럼 느꼈어요. 의사가 깁스를 뜯었지요. 내 다리의 움직임을 자극하기 위해서 약간 운동을 했지만, 어떤 치료도 필요 없었답니다. 일 년 반 동안 깁스를 하고 다녔죠. 그리고 나서 의지하기 위해서 지팡이를 짚고 조금씩 걷기 시작했고, 그리고는 지팡이 없이 매일 조금씩 걷기 시작했지요. 이제는 전혀 안 쓴답니다.
내가 처음으로 다시 걷게 되었을 때, 내가 맨 처음 한 것은 산조반니로톤도에 가는 것이었어요. 피콜라 박사가 엑스레이를 찍고는 뼈가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상했던 뼈가 이제는 정상적인 건강한 뼈가 되었다고 진술서에 서명을 했답니다. 이것은 기적으로밖에는 설명될 수 없다고 쓴 진술서를 내게 주었지요. ‘소모된 뼈에서 건강한 뼈가 자라 나왔다.’
나는 수술한 의사에게 다시 갔지요. 엑스레이를 더 찍어 보더니 의사가 놀라더라구요. 그리고는 그도 똑같은 말을 하더군요. “이건 기적이야.” 엑스레이를 보고 기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곧 울기 시작하더군요. “이건 비오 신부님 선종 후에 내가 목격한 첫 기적이오.” 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는 의사들을 불러들여 놓고는 “비오 신부님 선종 후 첫 기적을 받은 기적의 여인을 와 보시오.” 했답니다.
나를 수술한 의사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당에 다니지 않았어요. 성당하고는 멀었죠. 비오 신부님이 나를 위해서 투사가 되어 주셨다는 것을 그는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비오 신부님과 같은 분을 제가 상대했다니 기쁘군.” 하더라구요.
나는 매년 산조반니로톤도에 간답니다. 비오 신부님께 약속했지요. “신부님, 제가 다시 걸을 수 있다면, 매년 산조반니로톤도에 가겠습니다.” 제가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전 언제든 거기 갈 겁니다. 이제 나는 도움 없이도 지하 묘소의 계단을 내려갈 수 있고, 그분의 묘소에서 무릎을 꿇고 그분께 감사할 수 있지요.
– ‘비오 신부를 만난 사람들의 증언 – 오상의 비오 신부’ 중에서: (요한 A. 슈그 신부 엮음/송열섭 신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