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은 수많은 죽음과 만난다. 그리고 의사로서 맞이하는 죽음은, 과거 해부학 실습 때 시간이 지날수록 실습용 시신에 대해 가지는 태도처럼 점점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거나 젊은이들이 맞는 죽음이라면, 내 감정 역시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편안히 잠들기를
요한이 세상을 떠났다. 신경외과 주치의의 말에 따르면 병원 노동절 휴일이었던 목요일 저녁 9시에 세상을 뜬 것이다. 요한은 대세를 받고 2시간 만에 성모님 품에 안겼다. 요한이 중환자실에 들어 온 때는 월요일 새벽이었다. 30대 초반의 그는 남편의 대학 동기인데, 이제 막 전공의 수련을 마치고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혼수상태(코마, coma)가 되었다. 가정을 꾸린 지 얼마 안된 젊은 가장이요, 정의롭던 요한이 갑자기 그런 일을 겪자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병마는 의사라 해서 예외를 두지 않았고, 요한은 온갖 주사와 기계에 몸을 맡긴 채 말없이 누워 있었다. 회생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고 내가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화요일, 기도를 시작하던 첫날 눈물을 흘리며 도움의 성모님께 간청했다. 그리고 수요일엔 기도와 함께 요한의 머리맡에 기적의 패를 두고 나왔다. 목요일은 병원이 쉬는 날이어서 오랜 만에 평일 미사에 참례했다. 그리고 웬지 성수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성수를 담아 갔다.
그날은 여기 저기 돌아다니느라 분주히 보내고 집에서 쉬다가 잠이 들었다. 병원에 가서 요한을 위해 기도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문득 ‘가족도 아닌데 내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관두기로 했다. 그런데 오후 5시쯤 되었을까,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급한 환자가 있으니 나와달라는 당직 호출이었다. ‘오늘 당직이었나?’ 하고 생각하던 나는, 어쩌면 이것은 하느님께서 요한을 위해 나를 부르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중환자실을 찾았다.
요한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그리고 베개맡에 두고 갔던 기적의 패도 없어졌다. 환자를 시중 드는 업무원 아주머니가 요한의 자세를 바꾸다가 떨어뜨린 것 같았다. 나는 가지고 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상본에 기적의 패를 붙여서 그의 머리맡에 다시 놓았고, 절대 떼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그날, 나는 내가 아는 기도는 다 한 것 같았다. 묵주 기도, 예수님 자비의 9일 기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등. 가족도 만날 수 없고 휴일이라 병원에 나온 사람도 몇 없었으니 그렇게 할 수 밖에….
순간, “삐익!” 하는 모니터 음이 울렸다. 혈압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때 나는 어린 시절 세례를 받기 전에 수녀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수녀님은 “누군가 임종을 맞이 할 때, 여러분은 깨끗한 물만 있으면 성호경을 그으며 그에게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성수를 뿌리고 기억 나는 대로 요한에게 세례를 주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마도 다른 이를 위해 울면서 기도한 것은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았다.
다음날, 요한은 영안실에 있었다. 영정 속의 그는 밝고 젊은 얼굴의 의학도였다. 어린 부인이 눈물에 젖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분향을 마치고 나오면서, 나는 부인한테만큼은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선생님 생전에 종교가 있으셨나요?”
“아뇨. 우린 둘 다 무교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저녁 상황이 급해서 제가 허락도 없이 가톨릭식으로 세례를 드렸습니다. 세례명은 요한입니다.”
“감사합니다.”
부인이 울먹였다. 나 역시 울고 있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다. 봄볕은 여전히 화창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왜 그를 일찍 부르셨는지는 모르지만, 마지막에 세례로서 그를 구원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은 단 하나의 영혼도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다. 요한이 이제는 성모님과 하느님 품 속에서 편안히 잠들었으면 좋겠다.
– 김희경 가타리나 라부레 [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진단방사선과 전공의 3년차 ]
– 성모기사 3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