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하게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받은 생명 하나 하나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있습니다. 나도 그 섭리 안에서 하느님을 만났음을 고백합니다만, 이러한 고백에는 오해가 따를 수 있기 때문에, 오해 없이 믿음으로 들어주시기를 우선 청하고 싶습니다.

1950년 6·25가 나던 때 나는 14세였습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신문사를 운영하시던 내 아버님이 납북당하셨습니다. 9·28 수복이 되자 어머니와 열네살 장녀인 나와 11세, 9세, 7세, 5세 그리고 5개월 된 아기, 이렇게 일곱 여자인 우리 가족은 월북자 가족으로 내몰리어 죽음의 위기에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는데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판단되어 은신한 곳이 부평 미군부대 근처의 기지촌이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유엔군을 상대하는 소위 성매매 종사 여성들의 생존 모습을 보았으며 하느님은 계신지, 왜 끔찍한 전쟁의 피해를 우리나라, 그 중에서도 우리 집안에만 더 많이 배당하셨는지, 불만하고 반항하는 소녀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때 매일 집단 자살하자고 어머니를 졸랐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타고르의 기도문을 들려주시며, 슬픔이 기쁨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고통이 행복으로 가는 징검다리임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기쁨과 행복 속에서만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다고 감사하는 비겁한 신앙인이 되지 말게 하시고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이 내 손을 꼭 잡고 계신다고 찬미 감사드리며 사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타고르의 기도문은 어머니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큰 은총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서 수려한 얼굴의 한국인 청년 장교를 만났는데 그가 “나는 서울 혜화동 성신 대학의 학생인데 사제가 모자라 내가 이곳 유엔군 사단에 배치되었다. 죽으러 가는 전쟁이라고 군인들이 휴가를 얻어 매춘 여성들에게 위로 받으러 갔는데, 나는 하느님께 내 생명을 유산으로 남겨 주고 갈 수 있는 사람 한 명만 선택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너를 골라 주시는 것 같다. 너의 집에 가자.”고 말했습니다.

신학생은 기지촌 한 복판에 있는 우리 가족의 피신처에 와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 제가 죽어 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제 목숨을 돌보지 마시고 이 아이들을 살려 주소서. 저는 하느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하늘 나라에 가지만, 이 아이들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조차도 모르오니 제 생명을 받으시고 이 아이들이 살아 남아 하느님을 섬기며 살다 오게 하소서.” 그렇게 기도한 후 그는 어깨에 짊어지고 온 개인 소유의 유엔군 식량과 털담요와 모포를 우리에게 주고 갔습니다.
왜, 무엇이, 누가, 그 신학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줄 음식과 겨울옷들을 나에게 주고 전쟁터에 나가게 했을까? 그것은 주님이 신학생의 옷을 입고 오시어 나에게 해 주신 일임을 나는 아주 먼 훗날,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났을 때에야 깨달았습니다.
신학생처럼 나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부평시장에 있는 제일병원에 간호보조원으로 취직하여 매춘 여성들에게 하루 500명씩 페니실린을 주사하였습니다. 중학교 교과서를 구입하여 병원에서 짬이 날 때마다 혼자 틈틈이 공부도 하였습니다.
그 신학생의 가르침을 따라야겠다는 마음에 천주교회 학교를 찾아서 인천 박문여고에 응시했는데 1등을 했습니다. 임종국 이사장 신부님께서 3년 장학금을 약속하셨고, 우리 가족 모두를 천주교회 고아원에 넣어 주시어 부평 ‘성모원’에서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옜다.책 사라.” 하시며 용돈을 쥐어 주셨던 그분을 통하여 나는 하느님 아버지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고아원 원장님인 김영식 베드로 신부님은 엄격하고 냉정하시어 나는 신부님이 나를 미워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동생들을 이끌고 다시 방 값이 싼 기지촌 근처로 독립해 나왔습니다. 장학생으로 들어간 숙명여대를 다니며 가정교사로 동생들을 부양했습니다.

대학교 2학년이었던 1957년 여름, 나는 혜화동 신학교를 개방하고 실시한 하계 교리신학대학에 가고 싶었습니다. 본당신부님의 추천장이 필요했습니다. 본당인 고아원으로 찾아가 나를 미워하신다고 생각했던 김영식 베드로 신부님께 추천서를 부탁했습니다.
신부님은 처음에 “여인이여! 너와 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하시며 냉대하시는 듯 하시었으나, 몇시간이고 문밖에 서 있던 나에게 등록금과 추천장과 비타민 한 병을 주셨습니다. 그 비타민으로 나는 건강을 회복하였고, 하계 교리신학대학을 마치고 신학 논문 경시대회에서 노기남 대주교님으로부터 1등 상을 받았습니다.
고아원에는 두 분 신학생이 계셨는데 나는 그들을 큰 오빠, 작은 오빠라고 불렀습니다. 슬픔과 고통과 분노와 절망 속에서 갈등하던 나에게 기쁨과 행복과 온유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타이르신 분들이십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나 사이를 묶어준 질긴 밧줄입니다.
추천장과 등록금과 비타민 한 병을 들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던 내 앞을, 한마디 말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면서, 교복 윗주머니에 용돈을 찔러 넣고 사라진 큰 오빠 신학생, 이제는 원로 사제이신 그의 모습은 지금도 50년 전 그날의 뒷 모습으로 내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김영식 신부님은 너를 겸손한 사람으로 키우시고자 일부러 꾸지람만 하시는 것이다. 신부님의 사랑에 감사해라.”하면서 준주성범을 읽으라고 주신 작은 오빠 신학생, 그의 모습은 영원히 그날의 준주성범과 함께 20대의 신학생으로 내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그분들을 통하여 하느님이 내 인생에 심어 주신 것은, 뜨거운 성화의 의지, 수도 성직에의 향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살겠다는 불굴의 의지, 그리고 삼구칠죄의 유혹을 이겨내는 성령의 힘 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지금 ‘나자렛 성가원’을 운영하는 목적이나 성매매 종사여성, 미혼모, 매맞은 여성들을 돌보며 사는 이유도 저 세분 신학생에게서 받은 영적 영향 때문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행위는 기도이고, 기도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기도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미기도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의 영성신학 교수였던 로버트 훼리시 신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앙고백은 인간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리는 찬미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우선 세상에서 만나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을 통하여 체험합니다. 내 생애를 통하여 내가 만난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더 있습니다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여기서 글을 접습니다.

이인복 – 숙명여대 명예교수, 나자렛 성가원 원장
– 가톨릭다이제스트 200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