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젊은이가 끝없는 사막을 횡단하다가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되었습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는 금새 젊은이의 온 몸을 바짝 마르게 하였고
땀 한 방울의 물기마저 앗아가 버렸습니다.
젊은이는 거의 삶을 포기해야 할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저 멀리 광활한 지평선상에 검은 점이 가물가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아시스다. 이젠 살아났다.”
젊은이는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안간힘을 다해서 그곳을 향해 달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 갈수록 검은 점은 점점 푸른빛으로 시야에 들어왔고,
젊은이는 오아시스를 발견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에게 의심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설마 광활한 사막 한복판에 오아시스가 있을라구?
내가 잘못 본 것 일게야.
허기와 갈증으로 지친 나머지 헛것을 본 것일지도 몰라.
그래, 나는 지금 신기루를 보고 있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들자 젊은이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눈앞의 광경도 흐려지고 맥이 빠지면서
다시 그 뜨거운 모래밭에 쓰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에 대한 집착은 강하기 마련입니다.
젊은이는 그래도 혹시 진짜 오아시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기진한 몸을 끌며 오아시스로 향하였습니다.
넓죽한 팔마 잎새며, 푸른 풀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샘도 보이는듯 했습니다.
오아시스가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심중에 한 번 일기 시작한 그 의혹은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광활한 사막에 팔마가 자랄 수 없어.
더군다나 샘이 솟다니 그럴 수 없어.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거야.
정신을 차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 죽고 말 거야……”
젊은이는 속으로 외치며 눈을 비비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환상에서 깨어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놀리기나 하듯 시원스런 물소리까지 들려 왔습니다.
“아이구, 이번엔 환청까지….”
젊은이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발광하였습니다.
“나는 살아야 해. 이 환상에서 깨어나 이 사막을 벗어나야 해.”
하면서 절규했습니다.
얼마 후,
두 명의 베두인이 낙타에게 물을 먹이려고 샘터로 왔다가
양손을 샘물에 늘어뜨린 채 죽어 있는 한 젊은이를 발견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습니다.
“쯧쯧….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
사막을 다 지나와서 샘물에 손을 담근 채 죽어 있다니….”
그러자 그 사람의 동료가 말했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 저 자는 현대인이야.”
이 이야기는 독일의 신학자 J.칭크가 들려준 현대판 우화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현대인은 감각에는 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사고는 왜곡되어 있습니다.
보지만 보지 못하고 듣지만 듣지 못한 채
오아시스 속에서 사막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주위에는 오로지 사막뿐이었습니다.
진실을 귀뜸해 주는 친구 하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현대의 모든 인간이 이 젊은이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과학, 기술, 경제, 상업의 세속화된 세계 안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
모든 것은 물론 자신마저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삶의 터,
샘물이 샘솟는 곳에서도 사막의 한가운데 버려져 있는 듯한 느낌으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점점 자신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이야기는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 대해
실존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이에 대한 암시적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 주의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정병조 신부 지음 <생활성서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