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이다. 기도하자. 연도 책을 들고, 묵주를 들고 우리의 기도를 가뭄에 단비 기다리듯 갈급해 하는 연령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기도해 주자.
뉴에이지란 무엇인가?
전생, 윤회, 귀신, 원혼(?魂), 초령(招靈) 등등. 이는 IT(information technology), BT(bio technology), NT(nano technology)로 대표되는 21세기 첨단 과학의 시대에 별스런 거부감 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들이다.
이런 주제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여 짭짤한 흥행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도 비근하게 접하고 있다. <사랑과 영혼>, <은행나무 침대>, <여학교 귀신 시리즈> 등등.
또 요즈음 서점가에는 채널링(channeling)이라는 것을 소개하는 책들이 즐비하다. 채널링은 TV 채널을 돌리듯이 영적 주파수를 맞추어 원하는 영들과 교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채널링을 전파하는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특별한 방법을 통하여 원혼, 깨달은 영, 우주인 등의 영들과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저들은 채널링을 통하여 깨달은 영들을 만남으로써 그 영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깨달은 영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 깨달음의 경지를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그럼으로써 윤회의 과정을 단축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사상을 급속히 전파시키려 갖은 방법을 다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을 통틀어 우리는 ‘뉴에이지 영성’ 또는 노길명 교수의 제안을 따라 ‘신영성(新靈性)’이라 부른다. 어떻게 부르건 이런 주장들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당혹스럽게 한다.
이런 주장을 접할 때 우리는 자연스레 묻게 된다. 과연 귀신은 있는가? 원혼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가? 또 깨달은 자들이 머무는 영계(靈界)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들과의 교신이 과연 가능한가?
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은 이런 물음들 앞에 서게 되면 얼른 답변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망설이며 얼버무리고 만다.
영적 중심을 잡자
가톨릭교회는 이런 ‘이름’이나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는 현상들을 ‘악령의 장난’이라고 본다. 모두가 사탄(마귀, 악령)의 놀음이다. 사탄이 죽은 사람이 나타난 것처럼 귀신 행세를 하는 것이고, 한(恨) 많은 원혼 행세를 하는 것이고, 깨달은 영인 것처럼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유일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곧 잡신들을 믿게 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이탈시키려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라도 동원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뉴에이지, 신영성, 채널링이라는 것들은 가톨릭 신자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을 공략하기 위해 사탄이 발명한 최신형 무기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 아바타, 기(단학선원, 단월드), 비술, 영술, 마음수련 등의 이름으로 이러한 유혹들이 도처에서 신자들을 빼내가고 있다. 해가 갈수록 늘고 있는 냉담자 숫자는 이런 현상들과 무관하지 않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그 뒤에 숨어있는 태초의 유혹을 식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뉴에이지는 이것이 인간의 약점인 줄 알고 수많은 사이비 영성을 내세워 가톨릭 신자를 노리고 있다. 먹지 말아야 할 ‘나무 열매’, 먹으면 죽고 마는 ‘나무 열매’를 꿀을 발라서 팔고 있는 것이 뉴에이지이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중심을 잡아야 한다. 흐느적거리다가 유혹과 죽음의 늪에로 끌려가고 만다.
통공(通功)신앙이 정통이다
우리에게는 고유의 통공신앙이 있다. 가톨릭의 통공신앙은 산 이와 죽은 이들이 철저하게 하느님의 통치하에 예속되어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느님의 통치에서 벗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없다. 벗어난 존재가 있다면 하느님께서 잠시 그러도록 허락한 악의 세력들 곧 마귀들 밖에 없다.
통공신앙은 하느님의 통치 아래 산 이와 죽은 이들 사이에 서로의 공로를 서로를 위해 사양하고 나눌 수 있다는 신앙이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의 통공신앙은 개신교의 신앙과 차이가 있다. 개신교는 죽은 이를 위해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미 ‘지옥’ 아니면 ‘천당’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톨릭은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연옥’에 있을 여지가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바티칸은 ‘죽은 이들이 죄의 사함을 받도록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은 갸륵하고도 경건한 생각.’(2마카 12,46; 교회 헌장 50항 참조)이라고 확실히 천명한다. 또한 가톨릭 교리서는 ‘조상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그들을 도울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들의 전구를 효과 있게 할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 위령성월에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조상들의 연령과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불쌍한 연령들을 위해 정성껏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귀신이니 원혼이니 초령이니 영매니 채널링이니 하는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 흔들리지 말고 꿋꿋이 우리의 신앙을 견지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 월간성모기사 11월호 중에서 / 차동엽 로베르토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