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을 불안하게 갖지 말아라. 그 병에 대해서는 두려워 말아라, 또한 다른 질병이나 고민들도 말이다.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 내가 너의 어머니가 아니냐? 네가 내 보호 아래 있지 않느냐? 내가 너의 건강이 아니냐? 내 품 안에서 너는 행복하지 않느냐? 더이상 무엇을 원하느냐? 그 어떤 것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지거나 불안해지지 말아라.” (과달루페의 성모님께서 성 후안 디에고에게 하신 말씀)
후안 디에고가 이 말씀을 듣고 얼마나 위안을 얻었을까요! 복되신 성모님께서는 그에게 인디언 말 ‘나후아틀’로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를 ‘후아니토, 후안 디에귀토’라고 부르셨는데, 그 말은 ‘가장 겸손한 내 아들’ ‘가장 작은 아들’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그 지역 남자의 평균 수명은 40세였고, 그의 나이는 57세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힘써 일했고, 바로 겸손의 본보기였습니다.
1523년, 아즈텍 문명이 개척자들에게 정복된 2년 후에, 멕시코에는 로마 가톨릭의 선교사들이 처음 도착하고 영적인 정복을 시작했습니다.
초창기의 개종자들 중에 후안 디에고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1531년 12월 9일 쌀쌀했던 아침에, 후안 디에고는 아침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황량한 테페약 언덕을 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눈부신 빛과 천상의 음악 소리가 들려 그는 멈춰서게 되었습니다. 그의 앞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는데, 검은 피부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고, 그를 ‘내 아들아’라고 부르며, 당신을 동정녀 마리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후안 디에고에게 말씀하시기를, 테페약 언덕에 성당이 있기를 원하며, 그것을 ‘후안 데 주마라가’ 주교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한 인디언이 고위 성직자에게 말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후안 디에고는 결국 부탁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않았던 주교님은 그에게 쉽게 구할 수 없는 어떤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혼란스럽고 두려워진 후안 디에고는 그 뒤 며칠 동안 테페약 언덕을 피해다녔습니다. 그러다가 12월 12일, 그의 삼촌의 병이 몹시 위중해서 그는 사제를 찾으러 테페약 언덕의 지름길을 가로질러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 다시 후안 디에고에게 나타나셨고, 그는 주교님이 요청한 것을 성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황폐하고 황량한 언덕에서 수많은 장미를 주시며 그것을 꺾어서 주마라가 주교님에게 표징으로 가져가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후안 디에고는 그의 외투에 기적의 꽃들을 가득 담아서 주교님에게 달려갔습니다. 다시 주교님 앞에 선 그는 그 앞에 꽃들을 쏟아놓았습니다.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란 것은, 후안 디에고의 외투에 ‘과달루페의 동정녀’의 완전한 그림이 새겨져 있던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로 지은 대성당에 조심스럽게 보관되어 있는 후안 디에고의 이 외투는, 그 후 수년에 걸쳐 면밀하게 조사, 분석 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그 외투가 16세기의 직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아직까지도 그 그림에 쓰여진 안료(색소)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못했습니다. 식민 시대 멕시코에서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섬세하고 정교한 그림이 그려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현재의 멕시코에서도 가능할 지 의문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것은, 47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기적의 외투에 그려진 과달루페의 동정녀 그림은 어떤 가시적인 손상이 전혀 없이 깨끗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주교님의 명령에 의해서, 복되신 동정녀께서 가리키신 장소에 얼마 안있어 작은 성당이 지어졌습니다. 회의론자들은 테페약 언덕에서의 동정녀의 발현에 대한 대단한 우연의 일치를 지적해냈습니다. 그것은, 그 테페약 언덕이 주마라가 주교님의 명령에 의해서 파괴된 토나친에게 바쳐진 사원이 있던 바로 그 자리였던 것입니다. 아즈텍 문명의 토나친 여신은 ‘땅의 여신’, ‘모든 신들의 어머니’, ‘인간의 보호자’였습니다.
1709년에는 원래 세워진 작은 성당 대신에 더 큰 성당이 지어졌고, 1745년에 바티칸에 의해서 과달루페의 기적은 공식적으로 승인을 얻었습니다. 1904년에는 두번째 성전이 ‘대성당’으로 선포되었으며, 현대적 디자인과 굉장히 큰 규모의 새 대성전은 1976년 10월에 봉헌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멕시코시티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성당과 온 나라 안의 ‘과달루페의 동정녀’께 봉헌된 성당에서는 12월 12일이 되면 수많은 신자들이 모여서 행진을 하고 기도와 찬양과 춤, 불꽃놀이 등으로 ‘멕시코의 여왕’을 기리는 축제를 합니다.
사실, 1519년에서 1521년 사이에 스페인 개척자들은 아즈텍 문명의 종교적인 본질 -전쟁 숭배와 인간 제물-을 파괴시켰습니다. 아즈텍 문명의 사람들은 더이상 태양신에게 제물을 바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온 세상은 그대로 살아있었고, ‘후이칠로포크틀리’를 의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즈텍의 신앙은 1531년에는 그 촛점을 완전히 잃었었습니다.
아즈텍 문명의 사람들은 대단한 규모로 사람들을 제물로 바쳐왔습니다.
그들은 매년 최소 2만여명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을 그들의 신에게 인간제물로 바쳐왔습니다. 1487년에는 ‘테노크티틀란’에게 바쳐진 새로운 사원을 봉헌하는 축제에서 4일 동안에 8만 명의 인간제물을 죽였었습니다.
왜 성모님께서는 막 정복된 멕시코에서, 인디언에게, 인디언 말로, ‘과달루페의’ 성모님이라는 스페인 이름으로 발현하셨을까요? 스페인의 에스트라마두라에 있는 ‘과달루페의 성모님’ 성상 때문에 그런 호칭을 원하신 걸까요? ‘누에보 르레도 (Nuevo Laredo)’에 살고 있던 루피타 때문에? 모든 발현에서 복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당신 자신을 ‘동정녀 마리아’나 ‘하느님의 어머니’ 등의 여러 호칭으로 밝히시고, 나중에는 발현하신 장소나 지역의 이름으로 알려지시게 됩니다 (루르드의 성모님, 파티마의 성모님). 그런데 왜 성모님께서는 정복된지 얼마 되지 않은 멕시코에서 인디언에게 그 지역 언어로 나타나시면서 과달루페라는 스페인 이름으로 불리시길 바라셨을까요? 과달루페의 성모의 기적의 성상을 말씀하신 걸까요? (교황 대그리고리오 성하께서 세빌리아의 주교님께 선사하였던 것이 분실되었다가 600년 만에 -1326년에- 소 치는 사람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셔서 찾아주셨다. 그 성상을 찾아낸 곳에 가까웠던 마을의 이름이 과달루페였고, 그래서 그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과달루페라는 호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언제나 논쟁거리가 되어왔습니다. 어쨌든 이 이름은 후안 디에고의 병들었던 삼촌에게 성모님께서 발현하시는 동안 사용하셨던 단어를 나후아틀(인디언 언어)에서 스페인어로 번역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아즈텍 나후아틀 언어로 ‘콰틀라수페’라고 말씀하셨다고 여겨지며, 그것은 스페인어의 ‘Guadalupe’와 발음이 거의 똑같습니다. ‘콰’는 큰 뱀이나 독사를 뜻하고, ‘틀라’는 명사의 끝을 이루는데 ‘the’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수페’는 눌러 부수다, 박멸하다, 밟아 꺼뜨리다 등의 뜻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독사를 짓밟아버리는’ 이로 드러내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뱀신이었던 ‘퀴차콰틀’을 말입니다. 실제로 성모님께서는 뱀을 짓밟으셨고 몇년 지나지 않아 수백만 명의 원주민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며, 사람을 제물로 삼는 의식은 끝이 났습니다.
과달루페의 기적 이후에, 후안 디에고는 자신의 일과 재산을 모두 삼촌에게 주고, 그 성스러운 그림이 보관된 성당에 딸린 작은 방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발현 이야기를 동포들에게 전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는 1548년 5월 30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겸손의 모범이 되는 후안 디에고는 성모님께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저는 보잘것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작은 밧줄이고, 조그마한 사닥다리입니다. 가장 끄트머리이며, 풀잎입니다.”
2002년 7월에 멕시코시티 ‘과달루페의 동정녀 대성당’에서 후안 디에고는 시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