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결심이 필요하고, 그 다음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용서를 진심으로 실천하고 싶지만 감정적 어려움 때문에 실행하기 어렵다면 먼저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하여야 한다.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내리는 그 순간부터 용서는 시작된다.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종교적 행위로는 가능하다. 용서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의지이다. 주님의 지상명령이기에 용서하겠다는 의지적 결단이다.
용서를 결심한 뒤에는 하느님께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하여야 한다. 응어리진 마음이 하느님의 자비로 대치되고, 좁은 이해심이 하느님의 관대함으로 대치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여야 한다. 용서하기가 힘들다고 느낀다면 ‘주님의 기도’에서 “ 저희가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를 천천히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주님의 기도’만큼 간결하면서도 의미깊게 용서를 가르쳐 주는 기도문은 없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상처가 치유되느냐 안되느냐의 열쇠가 바로 나에게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나를 치유시켜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평생 상처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내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과 하느님 뿐이다. 내가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서 일어나는 것이다. 상대가 변화되어야만, 현실이 바뀌어야만 내 상처가 낫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우리에게 상처준 사람은 분명 있지만 근본적으로 치유되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
‘내 상처, 내 아픔은 누구의 잘못도, 누구의 죄도 아니다. 그러니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일어설 필요도, 또 누가 나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행위로서 용서한다는 것과 느낌 차원에서 용서한다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용서를 한다고 해도 몸 자체가 용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신앙 안에서 용서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아픈 느낌을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만나면 여전히 얼굴은 굳어지고 아픈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나올 것이다. 우리가 느낌 차원, 몸 차원에서 상대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상처가 아물기 위해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만약 받은 상처가 아주 크고 깊다면 아무는 시간은 그만큼 더 걸린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을 용서할 필요가 있다.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을 단죄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를 단죄하고 벌을 줌으로써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데이비드 A.시맨즈는 하느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실 때 그 죄를 기억하시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이미지를 사용한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시고, 강둑에다 ‘낚시 금지’라는 팻말을 꽂아 놓으신다. 하느님이 용서하시고 잊어버린 것을 우리가 다시 낚시질해서 끄집어 낼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 송봉모 신부님의 < 상처와 용서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