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더 슬픔에 잠겼지만 여전히 환대하는 베다니아의 집이다. 벗들과 제자들이 있다고 해서 이 집에서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요셉과 니고데모와 마나헨, 그리고 엘리사와 아나스타시카가 있다. 엘리사와 아나스타시카는 내가 알아차린 바로는 예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고, 거기 대하여 불복종을 한 것처럼 용서를 청한다. 그러면서도 떠나가지 않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있다. 그리고 엘리사는 거기 대하여 타당한 이유들을 설명하는데, 그 타당한 이유란 이런 것이다. 라자로의 누이동생들이 선생님을 따라다니면서, 남자들만의, 그것도 박해를 받는 남자들만의 집단에 필요한 여자의 보살핌을 선생님과 사도들에게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저희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오빠를 내버려둘 수 없지요. 요안나는 여기 없지요. 안날리아는 너무 젊어서 선생님네를 따라다닐 수가 없지요. 니까로서는 있는 곳에 그대로 있으면서 선생님네를 맞이하는 것이 좋을 테구요. 제 머리가 백발이라, 쑥덕공론을 피할 수 있구요. 선생님이 가실 곳에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남아 있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대로 있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항상 어머니를 선생님 곁에 두시게 되고, 저는 아직도 아들을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선생님이 하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 봉사하게 그냥 놔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느끼시고 예수께서는 동의하신다. 또 어쩌면 틀림없이 마음속에 가지고 계실 큰 고민중에 어머니의 상냥한 마음씨의 반영을 보시게 될 어머니다운 마음을 당신 곁에 가지기를 바라시는지도 모르겠다….
엘리사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예수께서 엘리사에게 말씀하신다. “저는 노베에 자주 가겠습니다. 아주머니는 늙은 요한의 집으로 가세요. 요한은 제가 머무르라고 그 집을 주었습니다. 제가 그리로 돌아갈 때마다 아주머니를 만날 겁니다….”
“비가 오는데도 떠나려고 하십니까?” 하고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묻는다.
“그렇소. 나는 베레아 지방으로 또 가서 솔로몬의 집에 머무르고 싶소. 그런 다음 예리고와 사마리아로 가고. 오! 나는 아직 아주 많은 곳에 가고 싶소….”
“선생님, 수비대가 있는 길과 백부장이 있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지지 마십시오. 저들은 믿을만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믿을만하지 못합니다. 선생님에 대한 두 가지 두려움과 두 가지 감시이고, 또 저희들끼리도 서로 두려워하고 감시합니다. 그러나 정말이지 선생님께는 로마인들이 덜 위험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버렸습니다!….”하고 가리옷의 유다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지 않소.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이방인들 중에서 끌라우디아나 본시오가 보낸 사람을 알아낼 수 있소? 끌라우디아의 해방된 노예들 가운데에는 만일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미남 니드락에게 말 할 수 있을 사람이 적지 않소. 유식한 사람은 어느 곳에나 다 있고, 로마가 세계를 굴복시켰고, 로마의 귀족들은 그들의 집을 꾸미기 위해 가장 좋은 전리품을 가지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체육장(體育場)의 장과 곡마단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돈과 명예를 마련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택하지만, 로마의 귀족들은 교양과 아름다움이 그들의 집과 그들 자신의 장식과 즐거움이 되는 사람들을 택하고…. 선생님, 이렇게 말하다 보니까 어떤 기억이 되살아나는군요…. 질문을 한 가지 해도 되겠습니까?”
“말하시오.”
“작년에 우리와 같이 있었던 그 여자… 선생님에 대한 비난조항을 제공하던 그 그리이스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사람이 그것을 알려고 애를 썼습니다…. 좋은 의향으로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저는 나쁜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그 여자가 오류로 돌아갔으리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 여자는 큰 총명과 진정한 정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이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교도인 그 여자가 박해받는 한 이스라엘사람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지 않았던 사랑을 베풀 줄 알았소.”
“엔도르의 요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 사람이 그 여자와 같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죽었소. “
“죽었어요?”
“그렇소.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내 곁에서 죽게 놔 둘 수도 있었소…. 많이 기다릴 필요가 없었소…. 그가 멀리 떨어져 나가도록 유발하려고 힘을 기울인 사람은 대단히 많은데, 그 사람들은 그를 치려고 칼을 쥔 손을 쳐든 것과 마찬가지로 살인을 했소. 그 사람들은 그의 마음을 찢어 놓았소. 그리고 그가 이것으로 인해서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이 살인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들은 살인자가 되었다는 가책을 느끼지 않소. 사람은 형제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죽일 수 있소. 무기로나 말로나 또는 나쁜 행동으로. 박해받는 사람의 은신처를 박해자에게 밀고하거나, 불행한 사람에게 그가 위안을 발견하는 장소를 빼앗는 것 따위와 같이 말이오…. 오!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사람을 죽이는지… 그러나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가책을 느끼지 않소. 사람은 앙심의 가책을 죽였소. 그리고 이것이 그의 정신적 쇠퇴의 표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어떻게나 엄하신지 아무도 말을 할 힘을 얻어내지 못한다. 그들은 가장 죄없고 가장 착한 사람들까지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서로 곁눈질로 바라본다. 예수께서는 잠시 잠자코 계시다가 말씀하신다. “아무도 내가 한 말을 죽은 사람의 원수와 내 원수들에게 알려서 그들에게 악마같은 기쁨을 주어서는 안 되오. 그러나 누가 당신들에게 묻거든 그저 요한은 평화 중에 있고, 그의 육체는 먼 곳의 무덤 속에 있고, 그의 영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만 말하시오.”
“주님, 그로 인해서 고통을 겪으셨습니까?” 하고 니고데모가 묻는다.
“무엇 말이오? 그의 죽음 말이오?”
“예”
“아니오. 그의 죽음은 그의 평화였기 때문에 내게 평화를 주었소. 그가 제자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야비한 감정으로 최고회의에 밀고해서 그를 떠나게 한 사람들이 내게 준 것이 고통이고, 그것도 큰 고통이오. 그러나 사람은 각기 생각이 다르고, 본능과 사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크고 착한 뜻뿐이오. 그러나 나 당신들에게 말하오만, ‘밀고한 사람은 또 밀고할 것이고, 죽게 한 사람은 또 죽게 할 것이오.’ 그러나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오. 그는 승리하는 줄로 믿고 있지만 자신의 파멸을 향해 가고 있소. 그리고 하느님의 심판이 그를 기다리고 있소.”
“선생님, 왜 저를 그렇게 바라보십니까?” 하고 제베대오의 요한이 자기가 죄를 지은 사람이기나 한 듯이 당황하고 얼굴을 붉히며 묻는다.
“내가 너를 바라보는 것은 아무도, 가장 악한 사람까지도 네가 형제를 미워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로마인일 수 있겠지요…. 그가 로마인들에게 달걀을 팔았었으니까요…”하고 가리옷의 유다가 말한다.
“그것은 마귀였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다가 그에게 좋은 일을 했다. 요한의 정화와 평화를 재촉했으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누가 선생님께 소식을 가져왔습니까?” 하고 요한이 묻는다.
“선생님은 혹 누가 소식을 갖다 드릴 필요가 있습니까? 선생님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지 못하기라도 하십니까? 선생님은 요안나가 당신께 오도록, 그래서 고쳐 주시도록 요안나를 부르러 가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막달라의 마리아가 격렬하게 말한다.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네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래서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었다.”
“좋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선생님, 오세요. 오빠가 깨서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고 결단성 있게 대화와 질문의 가능성을 일체 끊어버리고 예수를 모시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