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예루살렘이다. 이제는 그 거리와 성문들을 보고 잘 알아볼 수 있다.
  두 부부는 우선 성전 쪽으로 향한다. 나는 성전에 예수님을 봉헌하던 날 요셉이 나귀를 맡겼던 마구간을 알아본다. 오늘도 그는 두 나귀를 손질한 다음 그곳에 맡기고 마리아와 함께 주께 예배하러 간다.
  그런 다음 나와서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어떤 집으로 가는데, 아는 사람의 집인 것 같다. 그들은 그 집에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요셉이 한 작은 노인과 같이 돌아올 때까지 쉰다. “이분은 당신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오. 당신이 친척집에 이르기까지 혼자 갈 길은 얼마 안 될거요. 이 노인을 믿으시오. 내가 잘 아는 분이오.”
  그들은 나귀를 다시 타고, 요셉은 성문(그들이 들어온 성문과는 다른 성문이다)까지 마리아를 배웅한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마리아는 작은 노인과 같이 간다. 노인은 요셉이 말수가 적었던 것과는 반대로 말을 많이 하고, 별별 일에 다 관심을 보이는데, 마리아는 참을성 있게 대답한다.
  지금은 안장 앞쪽에 요셉의 나귀가 실었던 작은 궤가 놓여 있고 마리아는 겉옷도 입지 않았다. 쇼올도 두르지 않고 개켜서 궤 위에 놓았다. 마리아는 파란 옷을 입고 햇볕을 가려 주는 흰 베일을 쓰고 있는데 아주 아름답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항상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마리아가 그에게 들리게 하려면 큰 소리로 말해야 하는 것을 보면 작은 노인은 가는 귀가 먹은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 끝났다. 이제는 그의 질문과 소식의 보고도 동이 나서 이제 노인은 길을 잘 아는 짐승이 인도하도록 맡겨두고 안장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마리아는 그 일시적인 중단을 이용하여 자기 생각을 가다듬고 기도를 드린다. 한 팔을 가슴에 얹고 파란 하늘을 쳐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기도임에 틀림없다. 그의 얼굴은 영혼의 감동의 노력으로 인하여 빛과 무상의 기쁨을 나타낸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내게는 환상이 중단된 지금, 나는 어제와 같이 내 곁에 내적인 환상으로 볼 수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아 있다. 어떻게나 분명히 볼 수 있던지 어머니의 초상을 묘사할 수 있을 정도이다. 약간 포동포동하지만 기분 좋게 부드러운 엷은 분홍빛 뺨, 선명한 붉은 색의 작은 입, 짙은 금빛 속눈썹 밑에 있는 다정스럽게 빛나는 파란 눈.
  나는 머리 꼭대기에서 갈라진 머리가 어떻게 기분 좋게 세 개의 웨이브를 이루면서 양쪽으로 내려와 볼그레한 작은 귀를 반쯤 덮기까지 하고 그 엷고 빛나는 금빛을 보이며 머리를 덮은 베일 뒤로 사라지는지 말할 수 있다. (과연 나는 성모님이 천국에나 있을 것 같은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으시고 겉옷을 머리에까지 쓰고 계신 것을 보는데, 그 겉옷은 베일처럼 가볍기는 하지만 그래도 옷과 같은 감으로 만든 탁탁한 것이었다).
  나는 옷이 목에서는 끈이 미끄러져 움직이는 홈으로 죄어지는데, 그 끈의 두 끝은 목이 시작되는 곳 앞 쪽에서 고리로 끝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어떻게 옷이 허리에 더 굵은 끈으로 매져 있으며, 그 끈도 역시 흰 비단으로 만든 것으로 술 두 개가 달려 있으며 옆구리를 따라 내려뜨려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목과 허리에 매진 옷의 가슴 부위에는 부드럽고 둥글게 한 주름 일곱 개가 있는데, 이것이 그분의 지극히 정숙한 옷의 유일한 장식이라는 말까지도 할 수 있다.
  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서 풍겨지는 순결의 인상을 말할 수 있고, 그분을 천사와 같은 여인으로 만드는 그분의 지극히 품위 있고 대단히 균형 잡힌 형태에서 풍겨지는 순결의 인상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모님을 쳐다보면 볼수록 어느 정도까지 사람들이 그분을 괴롭혔는지를 생각하며 고통을 느끼고, 어떻게 사람들이 그분의 육체적인 모습으로도 그렇게도 다정스럽고 친절하고 품위 있는 그분을 동정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나는 그분을 쳐다보며, 그분을 향하여 지르는 골고타의 아우성, 그분이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분을 향하여 내뱉는 모든 조롱과 야유, 모든 저주를 듣는다. 나는 지금은 성모님의 아름답고 불안이 없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분의 지금 모습도 예수님의 임종의 고통 때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예루살렘의 집에서 나타내던 슬픔의 시간에 가지셨던 비참한 얼굴의 기억을 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성모 마리아를 쓰다듬어 드리고 그렇게도 품위 있게 볼그레한 뺨에 입 맞추어 드리며 성모님과 내 안에 남아 있는 그 눈물들의 기억을 내 입맞춤으로써 없애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성모 마리아를 아주 가까이에 모시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평화를 주는지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성모님을 보면서 죽는 것이 살아 있을 때의 가장 즐거운 시간만큼이나, 그보다도 더 즐거우리라고 생각한다. 나 혼자만이 이렇게 그분을 온전히 보지 못한 요 근래에 나는 엄마가 없는 것처럼 그분이 안 계신 것이 괴로웠다. 이제는 지난 12월과 1월 초에 나를 떠나지 않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수난와 가슴찟기는 비통을 보는 것이 내 지복을 흐리게 하는 고통의 베일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
  수난 동안에 예수님이 고통당하시는 것을 본 2월 11일 저녁부터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당하였는지를 말하고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보고서 나는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내가 지금 죽든지 100년 후에 죽든지 그 환상은 그 강함과 그 영향을 그대로 보존할 것이다. 그전에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 고통들을 살고 있다. 말 한 마디만 들어도, 상본을 한 번 흘낏 보기만 해도 그날 저녁 내가 당한 고통을 다시 당할 수 있고, 그 소름끼치는 고문을 느낄 수 있으며, 그분의 비탄에 잠긴 고통의 고뇌를 겪을 수 있기 때문이며, 그분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그분의 추억이 내 마음을 죄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께서 말씀을 시작하신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