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각·결석이 많은 여대생을 면담하면서 임신과 낙태가 더 이상 비행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젊은이가 무방비로 노출된 위험임을 알게 되었다. 이 시대적 충격에서 뜻하지 않게 성교육 연구를 시작했다. 백에 하나가 말썽이면 개인의 문제지만, 열에 하나가 그렇다면 문화와 구조의 문제라 생각했다. 그래서 낙태라는 빙산의 일각이 아니라 그 몸통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대중문화와 포르노가 청소년들에게 쾌락 중심적으로 왜곡된 성 의식을 주입하고 결국에는 생명을 공격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젊은이들에게 수면 밑의 그 몸통을 확인시켜 주는 강의를 시작했다. 대학생들의 진심이 담긴 보고서를 받아 읽으면서 성교육 연구가 심화·확장되었고, 필자는 곧 전공과 이 연구의 병행이 사실상 불가함을 체감했다. 전공을 하면 밥이 나오지만, 성교육 연구는 보장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저 밥벌이에만 매달리면서 내 눈에 뻔히 보이는 위험한 초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는 불의한 삶을 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깊은 묵상 중에 만나는 이가 ‘착한 사마리아인’이다. 그는 길에 쓰러져 있는 극한의 고통 중에 있는 타자에게 다가갔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강도에게 얻어맞아 초주검이 된, 주변을 지나던 이들에게도 외면받아 방치된 이의 한없이 슬픈 얼굴! 사마리아인은 그 얼굴이 무언으로 외치는 간절한 필요를 읽었고,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 가던 길을 벗어나서 새 길을 갔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고통받는 타자에게 이웃이 되어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필자가 낙태를 겪은 여학생들의 이웃이 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세상이 외면한 그들 곁에 가서 그 구체적인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묵시적 요청을 읽는 것이었다. ‘당신은 연구·강의·글쓰기의 능력이 있으니, 예방교육을 제공해주시오.’ 이것은 성공을 향한 계산된 코스에서 벗어나서 새 길을 가달라는 탄원이었다.
우연히 만난 그들은 애초의 인생 계획을 방해하는 타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응답함으로써 필자는 자아의 고립된 세계에서 탈출하여,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로소 따를 수 있었다. 삶의 우연한 교차점에서 만난 타자가 무한이신 하느님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고 믿는다.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계산된 성공의 탄탄대로를 벗어나서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비포장도로를 기꺼이 가겠다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늘어나야 한다. 길은 처음부터 있지 않다. 한 사람 두 사람 다니고, 많은 이가 다니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하느님은 길이 아닌 그 길로 우리를 부르신다.
– 이광호(베네딕토·생명문화연구가)
– http://blog.daum.net/prolifecorpus/10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