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 사제에 대한 신뢰는 부모에 대한 아들의 신뢰와 같아야 한다. 쓸데없는 걱정과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영혼에 대한 사정이면 무엇이든지 숨기지 말고 모든 것을 그에게 털어놓아야 한다. 마치 아이들이 저들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솔직히 말해버리듯이….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죄와 결점과 나쁜 습관과 악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과 과거와 현재의 양심에 가책되는 일 등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성 이냐시오가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마귀는 경솔한 영혼에 대해 마치 처녀를 유혹하려는 방탕한 청년과 같은 태도를 갖는다고 했다. 이런 고약한 청년은 자기가 말한 것이나 취한 행동을 처녀가 부모에게 말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마찬가지로 마귀란 놈도 고해자가 고해 사제에게 자신의 올가미와 나쁜 꾐을 고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사실 마귀가 여기서 무서워할 이유가 있다. 고해 때 그것을 다 털어놓으면 그놈의 꾀는 올가미는 쓸데없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귀는 사람에게 고해 사제에 대한 신뢰심을 적게 가지게 하든지, 아주 가지지 못하도록 그 영혼 속에 고해 사제를 의심하고, 무서워하고, 믿지 않는 생각을 집어넣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용기를 내서 우리 영혼의 아버지인 고해 사제에게 이 고약한 유감까지 다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저것 다 말하여 고해 사제를 귀찮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영혼에 대한 사정이면 어떤 것이든지 솔직히 말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고해 사제에 대한 신뢰에는 제한이 없다. 다른 사람이 욕을 하든지, 고해 사제에 대한 존경에 일그러짐이 있다 하더라도 관계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자기의 영혼 사정을 바로 말하기를 부끄러워하고 무서워해서 고해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나 드물게 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불행을 부른다. 그런 사람은 마귀의 유감에 지는 것이다.

  혹시 어떤 사람은 자기 영혼 사정의 전부를 알아내어 고해 사제에게 모두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요, 공연한 괴로움이다. 그런 걱정은 도리어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생각하고 설명했으면 그만이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길 일이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지도자요 아버지인 고해 사제도 우리를 도와줄 것이요, 우리가 설명하려 해도 잘 안되는 것을 알아서 스스로 이해하기로 힘을 쓰며, 우리에게 알맞게 물어보아서라도 우리가 고해를 잘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고해 사제의 질문을 귀찮게 여기는 사람은 마치 자기 병을 옳게 고쳐주려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의사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이 제 병을 고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말할 점은 고해할 때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말 것이며,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는 방법을 어렵게 한다든지, 솔직히 말하기에 너무 덤빈다든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않나 하고 무서워서 이랬다 저랬다 한다든지, 해석하기에 애매하고 어려운 말을 한다든지, 앞서 말한 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말한다든지 하여 고해 사제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고해할 때 자기 사정을 분명히 또한 솔직하게 말하게 되면 자신에게 불명예스럽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는 정직함과 단순함이 고해 사제로 하여금 그 고해자에 대해 마음을 기울이게 한다. 도리어 둘러서 말하거나 거짓을 말하면 나쁜 결과가 생기게 된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성 돈 보스코에게 고해하러 왔다. 그 사람은 지나치게 마음이 여린 까닭에 자기 죄를 고해한다기보다 그것을 변명하기 일쑤였다. 고해자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성인은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사이사이에 말을 가로막고 친절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당신은 죄를 변명하러 왔습니까? 고해하러 왔습니까?”
  “아, 신부님! 물론 고해하러 왔지요.”
  “그러면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나는 이러 이렇게 했습니다, 이러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고 말하세요.”
  그래서 성인은 여러 가지 죄명을 들어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말한 죄가 당신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거든 용서하시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모고해하여 지옥에 떨어지도록 버려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송사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송사하시고, 자기가 자기를 변명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송사하신다’는 속담을 잘 생각해보시오”라고 타일렀다.
  이 소심한 사람은 낭패했다고 생각하고 성인이 묻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죄를 모두 바로 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을 듯 매우 즐거워하면서 성인의 손을 잡고 친구하며 자기를 독성죄에서 구해주신 그 은공을 몇 번이나 감사해 마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해 사제가 다 저 성인과 같이 고해자의 머리와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으므로 고해자는 고해 사제를 속이지 말고, 모든 사정을 잘 알도록 솔직하게, 거짓 없고 변명이나 둘러 말함이 없이 항상 바르게 고해야만 고해 사제가 잘 판단하여 용서할 수 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교황은 한 교도소를 방문하셨다. 교도소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죄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슨 일로 여기 들어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죄수들은 거의 모두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교황님, 변변치 않은 죄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사람은 울면서 “아 교황님! 저는 불행한 인간이옵니다.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여기에 와서 벌을 받게 된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라며 참으로 뉘우치고 겸손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교황은 간수에게 말하기를 “이 대죄인을 죄가 별로 없다고 하는 이렇게 많은 선량한 사람들과 함께 두어서는 안되겠으니 그를 여기서 내쫓아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시오.”라고 하셨다.
  솔직한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그만한 보속이 오는 법이다.

  또 한 가지는, 고해는 간단명료해야 한다. 가장 큰 죄로부터 시작하여 분명히 그리고 작은 죄까지 전부 말하는 것이 더욱 좋다. 고해하는 시간이 길었다고 고해가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주 짧은 고해 중에 매우 좋은 고해가 있을 수 있는 반면에 아주 시간이 긴 고해 중에도 대단히 변변치 않은 고해가 있을 수 있다. 쓸데없는 잡담이 없는 고해는 언제든지 짧고, 필요 없는 무익한 말이 섞이는 고해는 항상 너무 길다고 성인들이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