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에 오기까지 성모님에 대한 남다른 신심도 없었고 특별히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거나 전구를 부탁한 적도 그렇게 흔치 않았다. 그런에 이곳에서 지내다보니 내 자신이 조금씩 그분과 좀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면서 그분이 늘 옆에 계신 친구같고 엄마 같다는 것을 느낄수 있게 되었다.
완전히 짐을 싸서 수단으로 오기 2년전인 1999년 8월에 이곳 수단을 우연치않게 열흘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입구에서 나를 맞이해주시던 성모님, 나환자들이 쓰던 집을 고쳐 만든 허름한 수도원 입구 베란다 지붕위에 계셨던 목각 성모님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전쟁중에 어느 한 아랍인으로부터 수백 탄의 총알을 맞아 차마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의 성모님상이었다. 대충의 윤곽은 남아있었지만 전체의 형태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 성모상의 모습을 보면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성모님은 그 무언가 때문에 계속 고통스러워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고통중에서도 우리를 위해 계속 기도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가지런히 합장한 아름다운 두 손의 슬픈 윤곽은 아직도 기억속에 뚜렷이 남아있다. 너무 많이 부서져 결국은 땅에 묻었지만 그 목각상은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세상의 악’의 회개를 위한 성모님의 ‘피눈물의 기도’에 대한 의미를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이곳의 내전 중에 많은 이들을 괴롭히던 ‘안티놉’이란 놈이 있었다. 안티놉은 제 2차 세계대전때 쓰이던 소련제 비행기인데 전쟁중에 잊을 만하면 이 마을 저 마을로 찾아가 폭탄을 떨어뜨려 많은 인명 피해를 냈던 장본인이다. 굉장한 소음을 내는 그 비랭기의 묵직한 금속음이 주는 공포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몇십 킬로미터 떨어진 먼 곳에서부터 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서 점점 가까이 다가와 사람들의 피를 말려버린다.
일단 이놈의 소리가 들리기시작하면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하던 것을 멈추기 때문에 마을은 쥐죽은듯 조용해지며 사람들의 쫑곳해진 귀는 그 놈이 움직이는 곳으로 함께 따라 움직인다. 폭풍전야와 같은 무시무시한 고요함이 마을 전체를 휘감는다.
그러다 비행기가 그냥 지나쳐가 버리면 다행이지만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그 놈이 다시 방향을 틀어 되돌아오는 날에는 온 마을은 아비규환이 된다. 여인들과 아이들의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 울음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속을 향해 무조건 달려야하고 폭탄이 떨어져 폭발하는 소리만을 들으며 꼼짝하지 않고 땅바닥에 엎드려 있어야 한다.
이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형제 자매나 자식들 또는 부모를 잃었기에 그놈의 소리를 소름끼치도록 싫어하고 그와 비슷한 일반 비행기 소리만 들려도 안절부절 못하며 몹시 불안해하는 노이로제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비행기 소리가 날때마다 이곳 사람들 속에 잠재해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의 공포는 인간에게 심한 충격을 주어 예상 밖의 이상한 행동을 유발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 토마스라는 한 인도 신부님은 자기가 있던 곳에서 10m정도의 가까운거리에 떨어졌던 폭탄의 충격으로 인해 비행기 소리만 나면 스스로는 도저히 조절할 수 없는 극도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어 사목을 못한 채 결국은 다시 케냐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곳 사람들의 이런 엄청난 아픔을 위로라도 하듯 ‘도움이신 마리아’의 도움이 역사한 사건이 이곳 톤즈에서 일어났다. 2001년 5월24일 도움이신 마리아 대축일이었다. 그해 처음으로 준비를 해서 치렀던 성모상의 행렬이 있었던 날이었다. 모든 신자들은 아름다운 들꽃으로 장식된 성모마리아의 성상을 모시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며 행렬을 벌이고 있었다.
행렬이 정확히 마을의 중심부에 다다랐을때 그 무시무시한 안티놉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즉시 행렬은 정지되었고 모든 사람믈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을 멈추고 그놈의 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마을을 그냥 지나가는 듯하던 그놈이 ‘철커덕’소리를 내며 방향을 틀어 다시 마을쪽으로 돌아왔다. 특별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고함을 지르며 숲속으로 도망을 쳐야 마땅했건만 그날은 그럴 수가 없었다. 성모상을 내팽개치고 도망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상을 모시고 마을의 신작로 양쪽으로 갈라져 그냥 땅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했다. 물론 성모상은 엎드릴 수가 없었다. 아니 엎드리지 않고 당당히 서서 이 사람들의 아픔을 바라보며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무려 14개의 폭탄이 떨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을 중심부로 떨어지던 폭탄들이 마치 강한 바람에 날리듯이 이상한 힘에 의해 마을 바깥쪽으로 밀려 모두 숲속으로만 떨어지고 말았다. 이 신비스런 광경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은 분명히 도움이신 마리아께서 행하신 기적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땅바닥에서 일어나 기쁨과 감사의 눈물로 행렬을 계속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매년 5월 24일 도움이신 마리아의 축제 행렬이 마을 전체의 큰 행사가 되어버렸다. 이곳에서 지내다보면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성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저절로 알 수 있게된다 . 이제는 성모님을 빼놓고는 수단을 이야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곳의 어려움과 이곳 사람들의 가난과 고통이 성모님께서 이곳을 더 더욱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는 이유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성모님의 사랑을 알기라도 하듯 매일 저녁 6시경 오라토리오의 놀이가 끝나면 어김없이 망고 나무 밑으로 100여 명의 아이들이 모여든다.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기 위해서다. 아름다운 석양의 붉은 빛과 함께 망고 나무 가지에 놓여진 작은 성모상을 바라보며 묵주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의 모습이 ‘세상의 악’ 때문에 고통받는 성모님의 고통에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내 삶의 중요한 순간 순간에서도 성모님의 드러나지 않았던 많은 도움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는지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20년전 군의관을 마친 후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을때 의사를 만들기 위해 밤 낮게까지 바느질을 해가며 희생으로 뒷바라지 하신 홀어머니께 조그마한 보답도 하지 못한 채 ‘이제 신부가 되겠노라’고 말씀드리기가 너무 미안해 망설이고 있을때도 그랬고 그것도 모자라 폭탄이 떨어지는 전쟁중인 나라 수단으로 가겠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어 망설이고 있을때도 성모님은 너무나도 오묘하신 방법으로 모든 것을 쉽게 해결해 주셨다.
지난날 나 자신이 이곳 남부 수단으로 오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이곳으로 불러주신 실제 장본인은 바로 성모님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친구처럼 엄마처럼 편한 성모님’이라고 부른다면 건방지다고 나무라실까? 나무라셔도 좋다.
조용히 계속 뒤에서 지켜봐주시며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고 도와주시는 어머니, 그것도 혹시 드러나게 될까싶어 조심조심 도와주시는 배려깊고 자상한 어머님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성모님이 정말 친구처럼 편하게 느껴지는게 사실인데 어떻하겠는가? 그러나 정말 편한 친구는 될 수 없는 분이신모양이다 . 당신의 ‘피눈물의 고통’을 뒤로 숨긴 채 그토록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으니 말이다.
– 생활성서 11월호
– 故이태석 요한 신부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