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올리에(Jean Jacques Olier) 신부는 1608년 프랑스에서 출생하여 1657년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풍성한 영적 결실을 맺은 명설교가였으며, 설교를 통해 많은 기적을 일으킨 훌륭한 영적 지도자였다. 1642년 올리에 신부는 파리의 변두리에 있는 성 쉴피스 성당의 주임 사제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643년 성 쉴피스 성당을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그 후 그 성당은 괄목상대할 만큼 쇄신되었다. 그리고 올리에 신부는 바로 그곳에 성 쉴피스 신학교를 세워 거룩한 사제들과 주교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조선의 봉헌
19세기에 한국에 파견되었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바로 이 성 쉴피스 신학교 출신이었으며 그들은 쉴피스 신학교의 정신으로 꽉 차있었다.
순교 성인 다블뤼 주교(1818-1866년)는 바로 이 쉴피스 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서품을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올리에 신부의 모범을 따라 한국에 와서도 성모님께 대한 봉헌을 실천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전역을 8개 구역으로 나누어 성모님께 봉헌하였는데 이 8개 구역에 각각 성모님의 축일과 관련된 명칭을 붙였다. 이 사실에 대해 아돌프 니콜라오 칼래 신부는 1862년 10월에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우리의 사랑하올 베르뇌 주교님은 예전에 성 쉴피스 신학교에서 올리에 신부가 하던 식으로 한국에서도 모든 구역을 성모님의 보호 아래 맡기고 또 특별한 성모 호칭을 각각의 명칭으로 삼았습니다. 내 구역은 성모 취결례(2월 2일 주님봉헌축일)의 명칭을 받았습니다.”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를 보면 우리나라를 성모님께 어떻게 봉헌하였는지 알 수 있다.
“1861년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랑드르, 죠안노, 칼래, 리델 선교사 4명은 중국을 떠나 한국을 향했다. 3월 28일 한국 신자의 배로 갈아타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됐던 섬을 지나갈 때 모두가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님의 보호 아래 모든 것을 맡겼다. 8일 후인 4월 6일 드디어 육지에 내렸고, 그 다음날 이른 아침 베르뇌 주교의 집에 도착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다블뤼 주교도 그 곳에 계셨다고 달레 신부는 기록하였다. 그들은 15일 동안 서울에 머물다가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어서 헤어지기로 하고 그전에 성모님께 봉헌식을 가졌다. 이 사실을 달레 신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 포교지는 최근에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성모께 봉헌되었고 각 구역이 성모님의 축일 중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구장이 계신 수도 서울은 성모 무염 시태의 지역이고, 다블뤼 주교님의 구역은 성모 성탄의 이름을 가졌고, 페롱 신부의 구역은 성모 승천의 구역이며, 지금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있는 학교는 성 요셉 신학교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이 맡은 구역의 이름은 아래와 같습니다. 리델 신부는 성모 자헌의 구역, 죠안노 신부는 성모 영보의 구역, 그리고 칼래 신부는 성모 취결례 구역입니다.”
이 8개 구역은 당시 조선의 8도와는 같지 않다. 성 요셉 구역은 두 명의 사제가 신학교에 상주하면서 지도하고 계셨는데 다만 신학교가 배론 성당과 그 주위의 강원도 지역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원죄 없으신 잉태의 성모 구역은 베르뇌 주교님이 맡았고 서울뿐 아니라 경기도 서부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님은 혼자 북한과 중국 국경까지 맡고 있었다.
칼래 신부는 경기도 한 부분을 맡았고 미리내에서 기거하였다. 이 구역은 성모 취결례 구역이었다.
리델 신부는 충청도 한 부분을 맡게 되었는데 판자리, 진밭 등 공주 일대와 경상도 일부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 구역은 성모 자헌 구역이었다.
랑드르 신부는 충청도 내포에서 전교하였고 성모 엘리사벳 방문 구역을 맡았는데 1863년 9월 15일 황무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여음리)에서 선종하셨다.
죠안노 신부는 성모 영보 구역을 맡았는데 1863년 4월 13일 둠벙(충남 공주군 신하면 조평리)이라는 곳에서 선종하셨다. 둠벙은 수리치골에서 가깝다. 이 수리치골에서 1846년 11월 2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한국을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고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회, 즉 성모회를 세우게 되었다.
페롱 신부는 성모 승천 구역을 맡았는데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 일부와 경상도 지역 일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다블뤼 신부는 성모 성탄 구역을 맡았는데 경상도에서 활동하였다. 전라도는 어느 구역에 속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리델 신부와 다블뤼 신부는 이곳에도 전교하였다.
이상한 것은 사제들의 무덤이 있는 미리내, 황무실, 둠벙, 배론 이 네 곳에 선교사들이 거처를 정하였고 이로써 이곳을 마리아의 도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미리내는 성 김대건과 고 요한 주교의 묘소가 있으므로 특별한 위치를 갖게 되었다.
각 구역마다 주보 축일을 엄숙히 지냈었다. 리델 신부는 이와 같이 썼다.
“1864년 11월 21일 성모 자헌 축일은 내가 맡은 구역의 큰 축일이다. 나는 이 날을 아주 엄숙하게 지내려고 하였다. 나는 나의 방, 성당, 내가 가지고 있는 상본 큰 것, 작은 것 하나하나에 장식을 하였다. 교우들은 이것을 보고 매우 아름답다며 감탄했다.”
그런데 언제 이 같은 성모 축일의 명칭을 붙이게 되었을까? 리델 주교는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네 명의 새로운 선교사가 도착하였다. 우리는 2주일 동안 기도와 묵상 가운데 함께 지냈다. 이제 우리가 다시 헤어질 때가 왔다. 어젯밤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조선의 여왕이며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네 명의 선교사들이 서울에 도착한 후 15일 동안 머물면서 봉헌식을 계획적으로 준비하였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한국을 성모님께 봉헌하고, 또 전국의 전교 지역을 8개로 나누어 성모님께 봉헌한 것은 1861년 4월 21일에 있었던 일이다.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파리 외방 전교회 출신의 선교사들은 올리에 신부가 1643년 성 쉴피스 성당을 장엄하게 성모님께 봉헌한 바대로 먼 이국 조선에서도 그 봉헌을 실천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은 19세기에 세 분의 목자들을 통해 세 번, 즉 1841년 8월 22일, 1846년 11월 2일 그리고 1861년 4월 21일에 성모님께 봉헌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덧붙이는 말 – 푸른군대 역사에서의 두 번의 봉헌
6.25 사변 중에 파티마의 순례 성모상이 한국에 도착했다. 끝내 남북이 하나로 합치지 못하고 갈라지게 된 것에 대해 당시의 완고한 위정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순례 성모상은 전국을 순례하였다. 동시에 우리에 대한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의 불타는 사랑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1953년 4월 5일 부활 대축일에 당시 노기남 바오로 주교님은 서울에서 파티마의 성모님을 한국을 위한 평화의 모후로 모시면서 파티마에서 도착한 순례 성모상에 엄숙하게 왕관을 씌우셨다. 그때 참석했던 모든 주교님들은 관할 교구를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였고 그 자리에 함께했던 오만 명의 신자들도 성모님께서 파티마에서 하신 요청을 그대로 따르며 생활에 실천하겠다는 서약서를 성모님께 봉헌했다. 이어서 파티마의 순례 성모상을 각 교구마다 모시고 각 교구별로 또 다시 성모님을 세계의 여왕으로 엄숙하게 선언하면서 왕관을 씌웠고 그리하여 이 성모상은 한국 전역을 순례하게 되었다.
1967년 11월 7일 푸른군대 한국본부는, 1942년 5월 13일 비오 12세 교황께서 마셀라 추기경을 특사로 임명하여 대관한, 세계를 순례하는 파티마 성모상을 한국에 초청하였다. 그때 파티마의 벤난시오 주교님을 비롯하여 약 백여 명이 넘는 미국 순례자들도 함께 서울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명동 성당에서 우리나라를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는 행사를 성대하게 진행하였다. 그때 그 봉헌식을 주례한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님은 남한뿐 아니라 북한을 포함해서 한국 전체를 봉헌했다.
여섯 번째 봉헌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을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푸른군대와 마리아 사제 운동모임에서는, 교황께서 한국을 성모 마리아께 봉헌해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그 요청서에 세 분의 주교님과 160여 명의 신부님들이 서명했다.
그리고 교황께서는 요청을 받아들여, 우리와 같은 정신으로 한국을 봉헌하겠다는 전보를 비행기 안에서 푸른군대 한국본부로 보내오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는 백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여의도 광장에 가시기 전에 서울 명동 대성당에 가시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한국을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셨다.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우리를 맡기나이다.
모든 이들과 모든 민족들의 어머니시여, 당신은 모든 이의 고통과 희망을 아시나이다. 이 세상 안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빚어지고 있는 빛과 어둠, 선과 악의 겨룸을 아시나이다.
당신은 이 겨레가 놀라운 기쁨과 아울러 수많은 고난을 통해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아 얻게 하셨고, 이 겨레에게 사람의 아들이며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주셨나이다.
오 자비의 어머니시여, 우리는 이제 당신의 사랑 가득한 마음에 이 겨레와 이 땅의 모든 교회를 맡기나이다. 모든 불의와 분열과 폭력과 전쟁에서 우리를 지켜주소서. 죄와 악의 유혹과 멍에에서 우리를 지켜주소서.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 의혹을 믿음으로, 이기심을 봉사로, 교만을 온유로, 미움을 사랑으로 이기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써 복음을 살아,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시어, 당신 아드님과 함께 성령의 일치 안에 아버지와의 참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소서.
오 그리스도의 어머니시여,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을 어루만지고 붙들어주소서. 가난한 이, 외로운 이, 아픈 이, 사랑받지 못하는 이, 억눌린 이, 잊혀진 이를 두루 거두어주소서.
우리를 축복하소서. 요셉 성인과 더불어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모두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갈라진 이 땅에 평화를 내리시고 모든 이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소서. 복되신 태중의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아멘.”
이 봉헌식 후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다.
“우리는 오늘 이 땅의 모든 성전의 어머니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무염시태 대성당에 모였습니다. 이는 온 세상 신자들의 깊은 기도, 초창기에서부터 한국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마음에 가깝던 ‘천주의 성모여, 당신 보호에 우리를 맡기나이다’하며 바치던 기도를 새로이 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찍이 1837년에 범 주교님이 어느 성모 축일에 드디어 이 땅에 들어오는 데 성공하자, 무염시태 성모를 이 나라의 주보로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성좌에 청한 바 있었습니다. 이 소원은 그의 후계자인 고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서도 공주의 수리치골에서 이 겨레와 이 나라의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 마리아께 조용히 봉헌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이 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얻자마자 순교자의 피로 물든 이 땅에서 천주교 신앙의 가장 뚜렷한 상징인 이곳 종현 언덕 위에 이 명동 대성당이 세워지고, 민 대주교님에 의해 무염시태 성모 마리아께 1898년 5월 29일 성대히 봉헌되었던 것입니다.
또 한국 겨레의 운명에 있어 성모 축일과 날을 같이 한 일들도 여럿 있으니, 근래에 와서는 1945년의 8.15 해방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계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 성모성월에, 한국 교회사를 통틀어 가장 상서로운, 그 가장 훌륭한 아들 딸들이 제단의 영예에 오르게 될 이날에, 나, 요한바오로 2세는 이 땅의 온 겨레와 교회를 예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의 자애로운 보호에 의탁하는 바입니다.”
– 심재성 신부님
– 마리아 1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