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알고 있는 존경하는 신부님중의 한 분을 소개할까 합니다. 이 신부님은 고향이 멕시코입니다. 2년 전에 팔순 잔치도 하신 사제 서품 받은 지 50년이 지난 신부님입니다.

  이 분은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곧 바로 멕시코에서 한국으로 오셨습니다. 당시의 한국은 정식으로 언어를 가르쳐 준 곳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섭리에 의존한 것입니다.  

  이 신부님은 소록도에 3번이나 부임하셨습니다. 약 15년 정도 사목하셨습니다. 지금이야 소록도가 여러모로 좋아졌지만 60년대 70년대의 소록도는 비참함 자체였잖아요! 이분은 소록도에 3번 다 자원해서 오신 것입니다. 소록도가 바닷가여서 바다가 좋아서 자원하셨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이분이 태어나신 맥시코의 고향에서는 바다를 볼 수도 없었고 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도 먹지 못했습니다.  몸에서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바다의 그 습기 찬 바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록도에 3번이나 부임하신 것입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바닷바람도 싫어하시고 바다에서 나오는 음식도 먹지 못하시면서 3번이나 소록도에 자원해서 오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분의 대답은 너무도 단순했습니다. “다른 신부님들이 가지 않으려고 하니 자신이 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환우들이 좋아서 왔다는 말보다 더 감동을 받았습니다. 누군가는 가야 하지만 아무도 가려하지 않기에 자신이 지원했다는 이 말씀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긴 완전한 겸손을 보았습니다.  

  이 분은 80이 넘으신 연세에 소록도에서 가까운 시골 공소 같은 곳에서 사십니다. 이분이 얼마나 정정 하신지 이 신부님의 모습을 보면 여러분들은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50대 후반입니다. 쪼깐 오바 하자면!

  이곳에 부임했을 때 일입니다. 이분이 부임하자마자 그곳 공소신자 몇 사람이 그렇게 신부님을 괴롭힙니다. 한국말도 잘 못하시는 늙은이를 우리 공소에 보냈다고 막말을 하며 다시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말도 통하지 않은 한국에 오셔서 한국말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상태에서 선교사로서 가장 불쌍한 곳을 찾아다니며 반평생을 겸손하게 살아온 이분에게 세상에 그렇게 막말을 한 것입니다. 이뿐입니까? 한 번은 어떤 사람이 합병증으로 죽어 가는데 신부님이 기도도 해주시고 병자성사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세가 워낙 심각하여 돌아가셨는데 신부님 때문에 죽었다고, 아니 신부님이 죽였다고 막말을 하더니 급기야 사제관에 와서 그 연세 드신 분의 멱살까지 잡고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본당신자들과 지역 사람들한테 신부님이 자신의 목을 잡고 흔들었다고 오히려 왜곡해서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그 당사자의 어머니는 오히려 이번 기회에 신부님을 보내자는 심산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부채질했고 일부 신자들은 또 그렇게 믿었습니다. (만약 저한 테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아마 둘 중에 한 사람은 이 지구에 없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신부님의 침묵이었습니다. 해명하지 않고 침묵한 것입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났습니다. 사제관에 홍시 감이 선물로 많이  들어 온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여러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다가 문득 신부님은 대뜸 주방 자매님에게 이 홍시 감을 자신의 멱살을 잡은 그 집에도 나누어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주방 자매님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신부님이 그래도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바람에 순명으로 그 집에 홍시 감을 전해 준 것입니다.

  이 감을 받은 후 그 집 사람 중에서 신부님의 멱살을 잡고 흔든 사람의 어머니가 사제관 주방 자매님한테 전화를 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만나자고 하더랍니다.

  만났을 때 그 자매님이 비로소 우리가 신부님과 교회신자들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 해 성탄 자정미사 예년 같으면 약 40명 정도 나오는데 이번에는 70명이 넘게 나왔습니다. 그 집안사람들도 나 와서 성당 신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용서를 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성당에 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신부님 목을 잡고 흔든 그 사람만! 신부님은 항상 편안한 몸짓과 따뜻한 미소로 그 가족을 기다렸고 지금도 그 형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부님을  만날 때마나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인자함입니다. 깊은 겸손과 사랑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 등장한 착한 목자의 모습을 이 신부님에게서 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이분 앞에 서면 저절로 고백될 것 같은 인자함을 가득 품고 계십니다. 우리의 착한 목자 예수님은 바로 이런 신부님을 통해서 드러나십니다.  

  내 허물에 놀라지 말고 끝없는 그 분의 사랑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 분의 음성을 듣고 따르기 위해서는 정말 온전히 내 죄를 인식하고 그 것을 고백하고 새로운 삶을 결심하면서부터 그분의 음성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마귀도 우리에게 속삭이고 주님께서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 귀는 내가 원하는 것에 따라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음성에 따라 움직이는 이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 김연준 신부님 “부활4주일 강론 – 착한 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