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의 때, 나는 아주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 이유가 우리에게 묵주기도의 신비를 아주 훌륭하게 설명해주셨던 당시의 종교 선생님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경이감을 가질 수 있는 소년의 순진한 마음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 아주 중요한 것은 놀랄 수 있는 능력이다. 은총의 기적에 놀랄 수 있는 것 말이다! 마리아는 은총으로 가득하다. 천사는 마리아께 그런 말로 인사한다. 그리고 천사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라며 마리아께 그러한 인사를 한 이유까지도 들고 있다. 마리아께 대한 천사의 인사는 그 인사에 대한 이유와 함께 묵주기도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께로 이어지는 기본 운율이다.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묵주기도를 통해 우리는 이 신비를 여러 면에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묵주기도에서 경이감을 가지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구원의 중요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묵주기도는 일종의 교리문답서가 되었다.
소년시절에 나는 그 신비에 대해 감동할 수 있었고 기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나의 지성이 내 생활의 중심이 되었을 때 불현듯 묵주기도를 바치기가 어려워졌다. 끊임없는 반복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몇 년간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했을 때 나는 원주민들의 노래에서 생명의 중요한 법칙을 깨닫게 되었다. 끊임없는 반복,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이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다시 묵주기도를 바칠 수가 있었다.
끊임없는 반복, 그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끊임없이 음식물을 섭취하며 산다. 끊임없는 반복은 모든 창조에 있어서 위대한 법칙이다. 인간이 말을 할 때에도 이 법칙은 반복된다. 인사를 할 때에도 우리는 항상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몇 마디 말만을 언제나 반복한다. 엄마가 자신의 갓난 아기를 어떻게 대하는지 한 번만 눈여겨 보기만 해도 우리는 이를 알게 된다. 엄마는 사랑이 담긴 말, “아가, 아가, 아가”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것이 묵주기도의 박자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다시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권고는 “매일 묵주기도 한 단으로 시작해보라!” 는 것이다.
– 로버트 암머 신부
-마리아지 1997년 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