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데레사 수녀는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는 ‘노하우’를 갖고 계셨다. 어떤 골칫거리가 앞에 놓여 있어도, 어떤 난관이 길을 막고 있어도 마더 데레사는 그것을 정면 돌파할 신통한 방법을 알고 계셨다. 우리는 국내에서도 상영됐던 ‘마더 데레사’에서 그 노하우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
수녀님은 아기와 어린 아이들을 보호, 교육하면서 좋은 부모가 나타나면 입양을 시켰다. 그런데 프랑스의 한 부부가 어떤 아이를 입양하기로 서류 절차까지 끝내놓고 기다려도 아이가 오지 않아 경찰에서 수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아이 행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수녀님과 사랑의 선교회는 아이들을 팔아넘긴다는 누명을 쓰고 재판까지 가게 된다. 위기 순간에 수녀님은 사랑의 선교회에서 함께 봉사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귀국한 영국인 자매에게 한 통의 전화를 한다. 전화 내용은 와서 함께 재판에서 싸워 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유명한 변호사를 알아봐 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그 아이를 수소문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수녀님이 그 자매에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부탁한 전화 내용은 아주 짤막한 말이었다. “기도로 하느님을 감동시켜라!”
이 얼마나 놀랍고도 의외의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통했다. 기도보다 더 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하느님보다 더 큰 ‘빽’이 어디 있겠는가!
마더 데레사는 ‘기도’ 하나로 세계를 움직였다. 만년에 그녀는 노구를 이끌고 고통의 현장을 방문하면서 연설을 통해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만나는 이마다 감동을 받았다. 겉모습으로는 연약한 여인이요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이었지만 미국 클린턴 대통령도 그녀 연설을 듣고 인권 문제를 다시 고심할 만큼 힘을 발휘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기도의 힘이었던 것이다.
하루는 동료 수녀들과 아침 회의를 가졌다. 여러 수녀들이 건의를 하였다. “마더(=어머니)! 요즘 일거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어요. 돌봐야 할 사람들이 막사가 넘치도록 몰려와서 하루 종일 일만 해도 일손이 모자랍니다. 그러니 아침 기도 시간을 1시간에서 반 시간으로 줄이면 어떨까요?”
마더 데레사가 대답했다. “그래요? 할 일은 많고 일손이 모자란다구요? 그러면 기도 시간을 조정해야 되겠군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 시간을 2시간으로 늘려야 하겠어요.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 ‘사람’의 계산법과 ‘믿음’의 계산법은 전혀 다르다. 마더 데레사의 처방이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는 묘안이었음을 훗날 동료 수녀들은 체험했다고 한다.
마더 데레사는 말한다.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생명과 힘과 존재 자체를 부여하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그분 존재가 흔들리면 모든 존재는 끝나고 무로 떨어집니다. 당신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 둘러싸여 있고, 그분 안에서 헤엄친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느님 사랑은 무한합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불가능은 없습니다”(「작은 몸짓으로 이 사랑을」 중에서).
”각박한 세상 사느라고 바빠서 시간이 없어 기도를 못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생각이다. 바쁠수록 그 문제를 위해 더욱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지름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가장 훌륭한 기도의 선생님은 단연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기도하는 분이셨다. 큰 사건이 있기 전에 항상 기도하셨고 기도를 하신 후에는 그 능력이 넘쳐났다. 홀로 한적한 곳에서, 때로는 밤을 지새우시면서, 어느 때는 피땀까지 흘리시면서, 시시각각으로 기도하셨던 주님이셨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방법을 묻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기본이 되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마태 6,9-13).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유일한 기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성경에 실려 있는 어떤 기도문도 주님의 기도에 포함돼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리라 생각할 수 없다”고 했으며,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은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라고 말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방법이자 동시에 내용이며, 복음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기도의 정수이다.
이 기도에는 기도가 갖춰야 할 형식(形式)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우리가 기도할 때에 1)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 2) 먼저 ‘하느님의 일(거룩함, 나라, 뜻)’을 위해 기도하는 것, 3) 다음에 ‘사람의 일(양식, 화해, 성화 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골격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기도에는 기도가 갖춰야 할 내용(內容)이 잘 나타나 있다. 각 구절구절에 담긴 뜻을 헤아려 보자.
성경 원문을 보면, ‘아버지’가 먼저 나오고, ‘하늘에 계신’이라는 관형어가 따라온다. 루카 복음에는 아예 ‘하늘에 계신’이라는 수식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주님의 기도의 첫 단어가 ‘아버지’ 곧 ‘아빠’라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람어로 ‘아빠(abba)’라고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기도의 포인트를 시사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즉, 기도할 때 하느님을 “전능하시고, 엄위로우시고, 온 우주를 주재하시고…, … 하신 아도나이 야훼 하느님” 하면서 너무 거창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그렇게 부르면 하느님이 저 높이 멀리 계신 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신에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 계신 분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빠는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신 이유 가운데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아빠가 아이에게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응석을 부리거나, 떼를 쓰거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분인 것처럼 하느님이 사람에게 그런 ‘아빠’라는 것이다.
둘째, 기도하는 이는 철저하게 ‘어린이’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기도할 때는 “어린이처럼”(마태 18,3) 단순하고 의지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철부지 어린아이들”(마태 11,25 참조)에게 당신을 드러내보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어린이가 되어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일단 정서적으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되면, 이미 기도의 반은 배운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