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과의 합일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하느님 당신의 주도권(主導權)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성장되고 완성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몫인 대신덕(對神德)의 훈련과 더불어서만 가능하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대신덕(對神德)은 병행(竝行)· 발전(發展)되는 두 가지 일, 즉 정화(淨化)와 기도 안에서 실천되어야만 한다.
1. 정화(淨化)
신덕· 망덕· 애덕은 하느님을 최고선(最高善)으로, 무한히 매력적이고 무한히 사랑스러운 최고선(最高善)으로 우리에게 제시한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라.’
하느님께 대한 이 전적(全的)인 사랑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격렬히 끌어당기는 감각적(感覺的)인 피조물(被造物)들에 대한 사랑과 대조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께만 돌려져야 할 이 사랑의 한 몫을 하느님 아닌 피조물들에게 돌리기 때문에, 이 피조물들을 마치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인 양 사랑하게 되는 위험을 날마다 겪게 된다.
무질서(無秩序)란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들은 모두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직접 피조물들 안에서 우리의 행복을 찾음으로써 하느님과는 무관하게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데에 무질서가 있는 것이다. 피조물들은 -우리가 앞으로 말하게 되겠지만-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무질서를 피하기 위해서, 또 우리 마음 속에 숨어있는 피조물들에 대한 애착을 피하기 위해서, 피조물들이 우리에게 주는 유혹에 대항해야 함은 불가피하다. 바로 여기에서, 피조물들에 대한 우리 사랑의 점진적(漸進的) 이탈(離脫)인 정화(淨化)가 이루어진다.
우리 마음의 정화(淨化)가 이루어지지 않은 그만큼, 다시 말해서, 우리 의지(意志)의 미소한 부분이나마 무질서한 방법으로 – 즉 하느님과는 무관하게- 피조물을 사랑하는 그만큼, 우리 사랑은 더럽고 불순한 사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께로 향하기에 부적당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성인의 말씀대로, 새가 노끈으로 지상에 묶여 있는 한, 노끈이 아주 가늘다고 하더라도 그 새는 하늘로 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피조물들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비록 가늘다고 할지라도 그 노끈을 끊어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께로 날아오를 수 없다.
그러나, 되풀이해 말하지만, 끊어버려야 할 노끈은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들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 즉 하느님 때문이 아닌 피조물 자체 때문에 그것들을 원하는 그런 사랑이다.
따라서, 정화(淨化)에 관심을 가진 영혼이 자기의 것들을, 자기의 합당한 일이나 자기 생활에 유익한 사물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자기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피조물들을 직접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피조물들도 더 완전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부부(夫婦)의 사랑을 예(例)로 들어보자.
남편은 아내를 두 가지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다:
–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순수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이 경우에,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동기는 바로 아내 자신이고, 아내가 완전할 수 있기를 바라나, 아내는 항상 피조물로서 머물러있게 된다. 이런 사랑은 당연히 자기 아내의 인간적인 품성에 매여 있게 되고, 지상적(地上的)인 행복에만 한정될 것이다.
– 만일, 이와는 반대로, 남편이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아내의 모습 안에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같은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은 아내의 인간적인 품성에 좌우되지도 않고, 순전히 지상적(地上的)인 행복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사랑은 아내를 하느님께로 이끌고 하느님과의 영원한 합일(合一)을 지향(指向)하는 그런 사랑이 될 것이다.
이 두번째 사랑이 첫번째 사랑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것을 누가 모를 것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합당한 일을,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상급들이나 고통 때문에 사랑하거나 인내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행하도록 우리에게 명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또 우리가 그것을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거나 인내하게 되는 것이다.
기쁨도 고통도, 성공도 실패도, 건강도 병고(病苦)도, 또는 죽음 자체까지도, 우리에게 그것을 원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침착한 이탈 안에서 그것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깊은 평화 중에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온갖 다양한 사물들, 가령 집이나 식량이나 돈 따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도, 그것들에 우리 마음을 집착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그런 것들에 우리 행복을 묶어두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즉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하고 유익한 수단들로써, 우리가 그것들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사실상, 우리 의지(意志)를 정화(淨化)시키는 것은 사랑하기를 포기(抛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랑을 최대한으로 증진(增進)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전부를 오로지 하느님께만 집중시키는 탁월한 목표를 가지고, 피조물들에 대한 의지(意志)의 완전한 이탈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적(神的) 사랑의 완전함과 힘을 가지고 다시 피조물들에게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2. 기도
의지(意志)의 정화(淨化)는 우리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도를 통해 완성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새가 하늘로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땅에 묶어두는 노끈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날개를 움직이고 높이 날아올라야 한다.
기도란 바로, 하느님께로 향한 영혼의 이 ‘날아오름’이고, 인간의 의지(意志)를 하느님의 의지(意志)에로 밀착시키는 것, 하느님과의 친밀한 대화(對話)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인간은 대신덕(對神德)을, 특히 애덕(愛德)을 최대한으로 실천하게 된다.
신덕(信德)으로 기도하는 영혼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인식(認識)과 존경은 점점 커나가고, 자기 자신과 피조물들에 대한 존경은 점점 줄어든다. 그러면 망덕(望德)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로잡으실 만한 탁월한 분이심을 발견하고서 영혼의 모든 욕망을 그분께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애덕(愛德)은,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을 때까지, 영혼을 하느님께 항상 더 완전히 밀착시킨다.
이와 같이, 하느님을 향한 기도는 -즉, 대신덕(對神德)으로 배양된 기도는- 영혼을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상태에로 인도한다. 거기서는 더이상 두 의지(意志)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의 의지(意志)만이 존재하니, 하느님의 의지가 바로 영혼의 의지가 된다.
정화(淨化) 즉 모든 피조물에 대한 의지(意志)의 이탈이 하루의 모든 행위들 안에 미치는 동안, 우리는 기도에 편리한 시간과 장소를 기도를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 복음(福音)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서 외딴 곳으로 가셨다’는 것과 ‘밤새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을 전해준다.
기도에 바쳐질 시간은, 각자의 고유한 능력들과 필요성들에 따라 각자에 의해 선정(選定)되어야 한다. 일이나 가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평신도들도, 하루에 30분이나 15분 정도 조용한 곳에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그것을 암시해 주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하느님과의 이 만남에 있어서, 영혼이 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신덕과 망덕과 애덕의 행위들이다. 우리는 점점 더 완전한 기도의 형식(形式)을 원하지만, 모든 기도의 본질(本質)은, 우리가 앞서 말한 것처럼, 대신덕(對神德)의 실천이다.
만일 영혼이 하느님과의 이 만남에 성실하다면, 그의 의지(意志)와 하느님의 의지의 일치는, 하루의 모든 행위들에 확산되고, 예수의 다음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점점 습관이 될 것이다: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 이 말씀은 ‘삶의 모든 상황들 안에서 항상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원하라’는 뜻이다.
–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적(靈性的) 교의(敎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