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릭 신앙 / 신흥영성운동 (뉴에이지)

방황하는 양떼, 방관하는 목자

   다원주의 시대에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 벤쳐기업은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다. 나중에 별도로 용어풀이가 있을 터이지만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은 일찍이 칼 막스가 『자본주의가 갈 데까지 가면, 팔아먹을 수 없는 것까지 팔아먹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던 대로 자본주의 말기에 나타난 무차별 상업주의의 소산이라고도 볼 수 있다. 21세기 상업주의는 마침내 인간의 종교심을 수요로 삼아 새로운 구원재(救援財)를 개발?공급하면서 무한한 시장을 형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른바, 「신흥영성 시장」에는 별별 상품들이 즐비하다. 평화, 행복, 성공, 건강, (인생)상담, 문화, 웰빙 등등 품목별로 오만가지 제품들이 출시되어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문제는 점점 많은 기성종교의 신앙인들이 종교적인 욕구를 더 이상 자신이 속해 있는 종교에서 충족시키지 않고, 이들 「쉽고」 「재미있고」 「편리한」 종교적 대체물(religious alternative) 또는 보이지 않는 종교(invisible religion)들로 대리충족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의 최대 피해자는 가톨릭교회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노길명 교수는 가톨릭 언론매체를 통하여 신흥영성운동의 대표적 상품에 속하는 기 수련 참여 실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개진한다.
   『이러한 기 수련에 몰입하는 사람들 중에는 개신교보다 가톨릭 신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가톨릭이 체계화된 교리와 전례 중심의 종교이다 보니 영적인 욕구와 종교체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사실 부족한 점이 많지요.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이를 기 수련을 통해 보상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 사실은 필자도 다양한 사목현장의 교우들을 만나면서 거의 매일 확인하고 있는 내용이다. 대체로 개신교 신자들은 신앙정체성이 분명해서 덜 휘둘린다. 또 부흥회, 사경회, 수양회, 철야기도 등 영적 메뉴가 다양해서 그리 한 눈 팔 겨를도 없다.
   대조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영적인 욕구와 신앙체험의 갈증을 해소할 영적 프로그램의 부족을 원망하며 교회 밖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방황하기 일쑤이다. 그 위험성과 해악에 대해 특별한 경각심이 없는 정도는 약과요 아예 심하게 매료되어 있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래에 옮겨보는 근래에 가톨릭 언론매체에 실린 교우들의 인터뷰 내용은 이러한 현실인식이 필자만의 주관적인 착각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주고도 남는다.

– 일산에 사는 김 소화데레사(59): 『미국에서 살 당시에 만났던 뉴 에이지 활동가들은 느낌이 굉장히 신선하고 좋았어요. 내가 갖지 못했던 용기를 갖고 있었던 것 같고, 특히 정형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교과서적인 사고방식을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죠』
– 서울대교구 ㅇ본당 신자 박 안나(27): 『뉴 에이지가 어때서요. 뭐가 잘못된 건가요? 뉴 에이지라는 조지 윈스턴의 「겨울(DECEMBER)」이나 영화 「사랑과 영혼」 등의 작품들은 좋기만 하던데요』
– 서울대교구 ㅅ본당 신자 이 프란치스코(47): 『잘 사용하면 좋지 않아요? 요가나 명상법 같은 건강법은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이처럼 가톨릭 신자들은 식별력이 없다. 시쳇말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정도의 좋은 마음들만 가지고 산다.
   목자들은 어떠한가? 목자들이라고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다. 필자에게는 「신흥영성운동」과 관련하여 많은 이들이 상담을 요청해 온다. 미국의 교포 신자들에게서도 드물지 않게 온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일차적으로 「본당 신부님」에게 문의를 해보고 나서 여전히 답답한 것이 남아서 수소문 끝에 필자에게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들은 신부님들이 그 실태에 대하여 너무들 모른다고 하소연한다. 알아도 과소평가하며 천하태평이라고 불평한다. 또 모르면서도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한다. 요컨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떼들은 방황하고 목자들이 방관하고 있다는 것이 가톨릭교회가 처한 평균적이며 비극적인 현실인 것이다.

피해사례

   몰라서 그렇지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은 심각한 영적 부작용을 초래한다. 필자가 직접 들은 사례의 종류들만 해도 다음과 같다.
– 초월명상 등 뉴에이지 서적에 빠져있던 청년이 악성 정신질환자가 된 경우(다수).
– 명문대학을 다니는 수재가 대순진리회에서 기를 받은 후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경우.
– 전통(무속관련) 민요를 직업으로 부르다가 단 1분도 기도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경우.
– 수도자가 기와 명상에 빠져 환속하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경우(다수).
– 기수련(대표적으로 「단월드」)을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교회를 떠난 경우(다수).
– 기치료 받다가 우울증에 걸린 경우(다수).
-「마음수련」하다가 정신질환자가 되고 이혼까지 한 경우.

   이들은 최소한의 실례들일 뿐이다. 신자들은 목말라 하고 있다. 신자들은 영적으로 불량 음식을 먹고 병들고 있다. 이는 정확한 현실이다. 결코 필자의 과민인식이 아니다. 목자라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통탄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에제 34,5~6).

용어의 문제

   먼저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라는 용어에 대해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이미 한국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신영성운동」이라는 용어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는 일본의 종교사회학자 시마조노 스스무가 뉴에이지 운동 및 일본과 한국에서 생겨난 그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영성운동들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도입한 용어이다. 한국에서는 노길명 교수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필자도 글과 강의를 통하여 이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런데 「신영성운동」이라는 이 용어를 처음 접하는 교우들과 사제들은 뭔가 혼돈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대부분 『무슨 좋은 영성프로그램이 나왔는가 보다』하며 기대감이나 호기심을 가졌는데 나중에 대강 실상을 파악하고 보니 「위험한」 사이비 영성이더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신영성운동」이라는 용어가 과연 적절한 것이냐 하는 반문을 해 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것이 용어문제에 대하여 재고하게 된 연유이다. 그 결과 「신영성」 대신에 「신흥영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여러 종교 현상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종교사회학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용어는 별로 무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기성 종교의 범주 밖에서 새로운 형태로 확산되고 있는 이 시대 영성의 현상을 「신영성운동」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당연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러나 기성 종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런 새로운 형태의 영성 현상은 결코 「새로운 영성」 곧 신영성(新靈性)이 아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영성」이 아니라 과거 여러 종교에서 이미 있어왔던 것을 혼합하여 새롭게 「붐」을 타고 있는 영성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新) 곧 「새로운」이라는 표현 대신에 신흥(新興) 곧 「새롭게 부흥하는」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본다. 그래서 「신흥영성운동」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이는 「신흥종교」와 유사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궤를 맞춰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기에 「(뉴에이지)」를 추가한 것은 뉴에이지가 신흥영성운동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가톨릭교회 내의 다원적 반응

   이제 본 주제로 돌아와 보자. 지난 번에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반응과 폐해에 대하여 언급하던 참이었다. 마저 얘기해 보자.
   언급하였듯이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는 다원주의 시대에 흥성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대목은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 내의 반응도 다원적이라는 사실이다.
   우선 신자들의 태도가 다원적이다. 지난 호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다수가 중심을 잘 잡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교회와 신자들의 영적인 안녕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남은 자」(1열왕 19,18)들이 있다. 그 단적인 실례로써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온 자매님의 열심을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노베르또신부님. 저는 미국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신자 김율리엣다입니다. 괴상한 「마음수련」이라는 것이 한인 신자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는 이곳 동부까지 왔습니다.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신부님의 글을 성모기사지에서 발견하고 여러 장 복사하였습니다. 우선 레지오 단원들에게라도 교육을 시킬까 해서요. 괜찮겠지요?
   제가 지금 글을 드리는 것은 000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제가 인터넷 상에서 약간 조사한 것에 의하면 아무리 보아도 뉴에이지와 비슷한 부류인데요. 어찌된 일인지 본당사목회 교육부 주관으로 이틀씩 두 번에 걸쳐서 000세미나를 한다고 합니다. 000연구소 수녀님께서 오셔서요. 마음이 답답하여 연락드립니다. 제가 너무 민감한 것인지 아니면 저의 염려가 사실인지요. 만일 사실이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물론 일개 신자로 본당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어찌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으면 주변 분들에게라도 조용히 알려주고 현명한 대처를 하도록 설명은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도움말씀 부탁드립니다』

   인용 글 가운데 000로 처리한 것은 그 프로그램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 프로그램 및 관련자 전체를 총괄하여 옳으니 그르니를 평가한다는 것은 위험한 접근법이라는 견해를 말해줬다. 사용자의 의도와 영적 노선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이메일 전문을 인용한 것은 글의 말미에 서려있는 건강한 사도적 열심을 독자들께 전하기 위함이다.
   미국으로부터 이 자매님 보다 먼저 국제전화를 통하여 비슷한 염려를 전해온 자매님도 있었다. 지난 3월 말쯤이었을 것이다. 자매님은 자신이 다니는 한인공동체 신자 30여명이 「마음수련」이라는 데에 빠져서 거의 신앙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오면서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에 대한 교회 책임 기관의 태도 역시 다원적이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에서는 「건전한 신앙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이라는 문헌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통하여 그 해악을 알려왔다.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사목자들 가운데에는 이 문헌을 열심히 교육한 이들도 있고, 자신만 읽고 신자들에게는 교육을 안 한 이들도 있고, 자신도 안 읽고 신자들에게 교육도 안 시킨 이들도 있다.
   나아가 주교회의에서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라고 규정한 바로 그 문제의 것들이 오히려 교회 지도층인 사제와 수녀들 그리고 교회 기관에 의해 신자들에게 교육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건강증진이라는 명목으로 기수련이 여기저기서 버젓이 본당 프로그램으로 도입되고 있다. 한국에 뉴에이지 붐을 일으킨 일등공신인 「류시화」의 시가 교회 주보와 방송매체를 통하여 홍보되고 있다고 필자에게 제보를 해온 신자들도 꽤 있었다. 명백한 뉴에이지 음악이 여전히 피정과 전례에 사용되는 일도 많다.
   물론, 정확한 정보가 부족해서 일 것이다. 그러기에 필자는 이 귀한 지면을 통하여 그 실상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신흥영성운동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접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정체와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간 가톨릭 언론 매체들을 통하여 어느 만큼 알려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목현장에서는 아직도 무지, 혼돈, 방관 속에서 무대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여 먼저 사목현장의 실태를 스케치해 보는 것도 속 찬 접근법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사례로부터 출발해 보고자 한다.

어느 자매님 이야기

   두 달쯤 전 어느 자매님으로부터 급한 전화상담요청이 왔다. 경황이 없는 중이었지만 한 영혼의 구원이 달린 문제라 만사를 제쳐놓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임했다. 자매님은 「단월드」에서 단학수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매님은 막 「고급수련」을 하게 되면 건강, 사업, 영성의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는 유혹을 「단월드」(=단학선원) 사범으로부터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만큼 성당에 대한 회의와 반감이 고조되고 있던 처지에 있었다.
   필자는 차근차근 문제를 짚어주고 다시금 신앙에로 돌아오는 결단을 내려야한다고 독려하였다. 크게 갈등하던 터였지만 자매님은 놀랍게도 해냈다. 그리고 이메일을 통해 장문의 편지를 띄워 보냈다. 이 편지에는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의 핵심 문제들이 잘 드러나 있었다. 좀 길어서 한 번에 인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단락별로 끊어서 소개하면서 그 시사하는 교훈을 독자들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첫째, 특별한 경계심이 없다
   자매님은 이렇게 시작한다.
『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신부님께 고맙고 너무도 감사하여 저의 마음을 글로 올립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6월 14일 월요일 오후에 신부님께서 저에게 친히 전화를 주신 것은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저에게 주신 주님의 은총이었나 봅니다. 제가 참 오만하여서 「하느님의 뜻」이니 「주님의 은총」이니 하는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참 지혜롭지도 못하고 깨달은 바도 없으면서 그런 척 하고 산 사람인 듯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겪는 오류는 아마도 다 겪은 듯 합니다.
그리하여 「난 헬스도 에어로빅도 할 수 없어, 조용히 품위 있게 단전호흡이나 하는 것이 제일 어울려」란 착각 속에 처음엔 정말 운동으로만 생각하고 단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좀은 불안한 마음이 있어 보좌신부님께 의견을 물었을 때 순수한 운동의 목적이라면 해도 무방하리는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난 절대 다른 사람들처럼 심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구요』

   평소 건강이 문제였던 자매님은 커다란 경각심이 없이 단전호흡 수련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그래도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어서 자매님은 본당의 보좌신부에게 문의를 하였다. 하지만 보좌신부는 정보의 부족으로 오히려 허락 또는 권장을 해주는 셈이 되고 말았다. 내심 불안하기는 했던 자매님은 설사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신앙 정도면 「심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일단 등록을 하였다. 이처럼 정보의 부족은 경계심을 풀어놓는 원인이 되고 있다.

둘째, 야금야금 빠져든다
『하지만 안개에 옷 젖듯이 젖어든 듯 합니다. 1월부터 5개월 남짓 단학을 하면서 몸은 명현(?)이라는 것으로 너무도 아팠고 마음은 무척 부대끼었습니다. 모든 것을 그냥 그렇거니 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듯하나, 의문을 가지면 가슴은 조여 오고 우리 본당신부님의 강론은 귀찮게만 들리고 성서에 대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적으로 이해되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제가 젊은 시절에 그토록 어렵게 읽었던 샤르댕 신부님의 저서(?)들이 너무 쉽게 읽혀지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모든 책들이 마치 명오가 열리듯이 이해되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도올(김용옥)의 강의에 심취가 되기도 하고 「아 그래 맞아 진리일 수도 있어」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마음은 온갖 상념들로 가득차서 「이러다 내가 미치지, 차라리 가톨릭을 떠나 버릴까」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자매님의 예는 수련을 하다보면 야금야금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확신이 허물어지고 혼란에 빠진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신흥영성에 빠지면 처음에는 사제들의 강론이 시시하게 들리고, 전례가 죽은 예식처럼 여겨지고, 가톨릭교회의 주장들이 옹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저들의 주장이 대단한 대안이나 비전인 것처럼 들린다. 신본주의 대신에 인본주의, 타율영성 대신에 자율영성, 한 종파 대신에 우주적 통합 종파 등을 내세우는 거창한 말들이 너무 매력있게 들리는 것이다. 신(흥)영성은 종교혼합주의적인 접근법을 쓰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거기에 통합, 통일, 완성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이 때문에 기성종교는 답답하고 고리타분하고 편협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부분」의 도용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지적하는 뉴만 추기경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전체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전체를 거부해야 한다. 축소하면 약해지고, 절단하면 불구가 된다. 각 부분이 결합되어 전체를 이루므로, 어느 한 부분을 빼놓고서 전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뉴만 추기경, <발전에 관하여>, 레지오교본 196쪽에서 재인용)
   신흥영성운동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씩 가져다가 버무려서 「퓨전」 영성을 만들어 놓는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현대적이고 매혹적일 수 있다. 뭔가 갈증을 풀어줄 것처럼 보인다. 상대적으로 기성종교의 구태의연한 모습은 실망을 줄 뿐이다. 식상하고 맛깔스럽지 못하게만 여겨진다. 슬슬 불만이 하나 둘 늘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작별」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매력적이던 것이 결국 「독버섯」 영성이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 속에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기 십상이다.

셋째, 하느님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자매님은 말한다.
『하여 그들이(단학) 그토록 집요하게 요구해왔지만 계속 거부해 왔던 「심성수련」이란 것을 다녀오겠노라고 대답을 하고 예비수련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그리고 단학의 사상인 「삶의 의미」라는 이승헌의 비디오를 예를 갖추고 보라 하기에 수련시간이니까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원장이 저에게 속삭였습니다. 「도우님, 21세기와 앞으로의 세기는 사람이 신의 지배를 받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이 신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라고』

   우리는 지금 결정적인 대목에 이르러 있다. 여기에는 단월드(단학선원)의 본색이 얼추 드러나 있다.
   우선, 이승헌의 비디오를 「예를 갖추고」 보도록 지도받았다는 이야기에서 심상치 않은 우상화(偶像化)의 일면을 인지하게 된다. 본인 자신도 아닌 비디오 제작물을 예(禮)를 갖추고 보게 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신격화(神格化)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 이는 극히 일면일 따름이다. 이승헌은 이미 그들에게 교주를 넘어 신적 경지로서 추앙받고 있다.
   다음으로, 「원장」이라는 사람이 자매님에게 무슨 말을 하였던가. 『도우님, 21세기와 앞으로의 세기는 사람이 신의 지배를 받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이 신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올바로 정신이 박힌 가톨릭 신자라면 이 말을 과연 그 원장이라는 사람이 했겠는가 하고 의문을 던져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원장은 이 말을 했다. 그가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에 용신(用神)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자신의 필요에 맞게 우주에 내장된 신적인 능력을 마음껏 끌어다 쓴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을 그는 대담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발칙한 유혹이다. 따먹기만 하면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태초에 이브를 유혹한 「뱀」의 음흉한 간계가 이 말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에는 대부분 가톨릭 신자들의 식별력이 턱없이 미흡하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자매님의 말을 더 들어보자.

『마치 무슨 최면을 거는 듯이 말입니다. 너무도 이상한 것은 그 당시 아무런 저항하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빨려 들어가듯 그랬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거기에 대한 저항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일에 미사를 마치고 오후에 남편과 함께 「트로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물론 신화를 각색한 영화이지만 신이 지배하던 그 시대에 신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주인공 「아킬레스」가 마치 「신은 없다(?)」라고 절규하듯이 사는 모습에서 일전에 단학원장이 저의 귀에다 대고 속삭인 말이 머리가 쭈뼛하며 떠올랐습니다.
마치 머리는 터질 것 같고 가슴은 답답하고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렵고 미칠 것 같다는 말 바로 자체였습니다. 이런 말로 저의 상태가 다 표현 되지 못합니다. 그 이상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차려야지」 하며 스스로를 안정시키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나마 자매님이 신앙의 기본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이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의 책자들은 인간 안에 있는 무한한 영적 잠재성, 나아가 신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부추긴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창조신과 인격신을 부정한다. 마침내 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어서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마음껏 부리라고 감언이설로 유혹해 댄다. 어설픈 주장 같지만 『자기 인생의 창조자가 되라』, 『강한 자가 되라』라는, 그럴 듯한 미끼를 내 걸고 교묘하게 접근하기에 웬만한 사람은 어느새 넘어가고 만다. 하지만 자매님은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버틸 수 있었다.

넷째, 집요하게 붙든다
   자매님은 도움이 필요했다. 지혜로운 결단을 내리기에는 이미 혼돈 속에서 씨름한다는 것이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자매님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래서 제가 세 번째 「미래사목연구소」로 전화를 했습니다. 신부님과 꼭 통화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저는 그때 그와 같이 절박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주신 것은 저에게는 신부님 말씀처럼 은총이었고 빛이었습니다. 신부님과 통화를 하고 즉시 단학에 전화로 「나 단학 그만 하겠노라. 날 설득하려 하지도 말고 왜 라고 묻지도 말고 그냥 이름을 지워주고 회비는 환불해 달라」. 정말 무 자르듯 단호하게 그리했습니다.
(다음날 원장과 단판을 짓는 과정에서의 기 싸움에서는 제가 이겼습니다. 집요하게 수 시간을 설득하던 원장이 먼저 지칠 만큼 제가 단호할 수 있었음은 신부님께서 절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집요하다. 「수 시간」의 설득이 그것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말이 그렇지 수 시간의 입씨름은 결코 만만한 대화가 아니었을 것이다. 원장은 자신이 교육받은 대로 자매님 신앙의 빈 구석을 찾으며 여기 저기 허점을 찔러댔을 것이다. 하지만 자매님은 필자의 코치에 충실했다.
『분명히 호락호락 응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든 말려들지 말고 「무 자르듯이 단호하게 잘라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다섯째,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한다.
   자매님은 단호하게 유혹을 물리쳤다. 그 때의 해방감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자매님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신흥영성운동의 정체와 관련된 단서를 드러내 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전화를 끊고 너무도 답답하여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무는 순간 그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머리에서 무언가 시원하게 쭉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머리가 가벼워지는지 난 돌아온 탕자의 모습이었고 우리를 벗어나려 했던 한 마리의 양이었습니다.
이상하리만큼 미사참례를 하는 동안 머리가 어지럽고 띵 하던 것도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신부님, 이 모든 것을 정확한 어떤 언어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매님은 신흥영성운동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무언가 시원하게 쭉 빠져 나가는 느낌」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조금의 과장이 없는 사실이다. 주관적인 착각현상이 아니다. 신흥영성운동을 책만 읽고서 식별하려는 이들은 이 현상이 어떤 현상인지 모른다. 신흥영성운동의 가장 큰 피해는 이론이나 개념에 있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어느 틈엔가 자신을 사로잡는 알 수 없는 힘, 자신도 모르게 덮씌워진 에너지에 있다. 기수련 또는 기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자연적인 에너지, 소위 자연지기(自然之氣)에 섞여(또는 묻어서) 다니는 정체불명의 영기(靈氣)가 있다는 사실은 책으로만 연구하는 학자들이 알 리가 없다. 이를 굳이 악령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이는 수련자들의 몸에 배어 있는 잡기(雜氣)들이다. 한의학적인 용어를 빌자면, 기수련을 하려는 이들은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은 환자들이기에 이들에게서 발산되는 에너지가 병기(病氣)요 사기(邪氣)일 것은 당연하다. 이것들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뒤섞인다. 수련자 가운데 정신질환자가 있을 경우 그에게서 정신을 혼미케 하는 탁기(濁氣)가 발산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잘 이해가 안가는 사람이 있거든 우리들이 흔히 체험하는 분위기(雰圍氣)라는 것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상하게 어느 곳엘 가면 「썰렁」하고, 어느 곳엘 가면 「살벌」한 느낌이 들고, 어느 곳엘 가면 「아늑」하게 느껴진다. 술집엘 가면 술 생각을 넘어 「음란」한 마음까지 동한다. 독서실엘 가면 「책」이 술술 읽히고, 성당엘 가면 갑자기 「경건」해 지면서 기도가 잘 된다. 이는 단순히 생각 때문이 아니다. 그 공간을 지배하는 에너지 때문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일본의 대안의학 박사 에모토 마사루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세간에서 많이 읽혔다. 그는 「눈 결정은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그렇다면 물의 결정도 저마다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물을 얼려 결정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8년을 연구한 끝에 얻어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그 물이 사람의 마음과 언어에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영어, 일본어, 독일어 등 어느 나라 언어가 되었건 「사랑」, 「감사」라고 쓴 글을 보여준 물에서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육각형 결정이 나타났고 「악마」라는 글을 보여준 물은 중앙의 시커먼 부분이 주변을 공격하는 듯한 형상을 보였다. 또 「고맙습니다」라고 했을 때는 정돈된 깨끗한 결정을 보여주었지만, 「망할 놈」, 「바보」, 「짜증나네」, 「죽여 버릴 거야」 등과 같이 부정적인 말에는 마치 어린아이가 폭력을 당하는 듯한 형상을 드러냈다. 한편, 물은 음악에도 반응했는데, 쇼팽의 「빗방울」에는 정말 빗방울처럼 생긴 결정이 나타났고, 「이별의 곡」에는 결정들이 잘게 쪼개지며 이별의 형태를, 「아리랑」에는 가슴이 저미는 듯한 형상을 보였다. 어떤 글을 보여주든, 어떤 말을 들려주든, 어떤 음악을 들려주든, 물은 그 글이나 말이나 음악에 담긴 인간의 정서에 상응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실험을 통해서 에모토 마사루를 비롯해 국내외 물 관련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과학적 사실을 확증하였다.
   첫째, 모든 물질, 감정, 생각, 그리고 언어는 고유의 파동을 발산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 고유파동들이 주변 대상들에게 전달되어 반응(간섭, 영향, 수용 및 기억)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셋째, 그 가운데 물의 정보 기억력이 탁월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물뿐 아니라 모든 물질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고 그 자극을 기억한다고 한다.
   결국 이 사실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들은 종합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여러 유형의 에너지들이 자아내는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해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다만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氣)와 과학에서 말하는 「파동」 및 「에너지」 사이에 용어상의 차이가 있을 따름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그 고유의 파장이 합해져서 경건(敬虔)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믿음도, 순명도, 감사도 그 고유의 에너지를 띠고서 그 사람의 영적 오라(aura)를 형성한다. 대조적으로 하느님을 부정하고 스스로 신적 경지를 탐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그 고유의 파장이 합해져서 불경(不敬)과 교만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설명을 위하여 극단적인 대립구도를 설정해 봤으나 이 세상 모든 종교와 영성들은 그 신앙내용에 따라 고유의 영성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가톨릭 고유의 영성에너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이 다른 영성의 도량을 기웃거릴 경우 그쪽 영성 오라(aura)에 휩싸여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주장이 아니라 사실이다. 엄연히 과학적인 사실이다. 구약에서 우상숭배를 엄하게 금하고 신약에서도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마태 7,24)고 한 명령은 단순히 죄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영성의 문제이며 삶의 문제이다. 영적 집중의 문제인 것이다.

   하던 얘기를 마저 해보자. 우리는 최근의 과학은 물의 연구를 통해서 모든 물질과 정신현상이 파동(波動)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주의를 요하는 것은 바로 이 과학적인 정보를 신흥영성운동에서는 신과학(新科學)을 표방하며 아전인수격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점이다. 곧 우주의 현상을 여기서 말하는 파동, 기, 에너지로 완벽하게 설명함으로써 창조주 하느님이 끼어 들어오는 것을 원천봉쇄하려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신흥영성운동가들은 이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못박아 둠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와 「섭리」를 부정하려 든다.

신과학과 계시
   여기서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신과학운동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엄연히 과학은 과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학적 정보는 그대로 인정하되 그 정보를 해석하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접근법의 한계는 지적할 수 있다. 그동안 과학이 밝혀낸 지식은 전체 지식의 1% 정도밖에 못 미친다고 한다(이것이 과연 얼마나 정확한 수치인지 자체도 불확실하다. 다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따름이다!).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의 1%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모든 과학적 도구를 동원해도 99%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그런데 신흥영성운동은 신과학의 이름으로 1%의 정보만 가지고 우주 삼라만상을 설명하려든다. 그리하여 창조주 하느님, 인격신을 축출하고서 이신론(deism)과 자연주의(naturalism)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 신비(mystery)로 남아 있는 99%의 세계가 시사하듯이 이는 대단히 무모한 속단이다.
   99%의 세계가 실존한다는 사실은 인간은 어떤 절대 진리로부터의 계시가 없이는 우주현상을 올바로 파악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로 이끌어 준다. 이는 결국 조작(manipulation)이 가능한 사적 계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역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공적 계시의 주제에로 이어진다. 그리스도교는 이 계시를 믿는다. 이를 체계화한 것이 그리스도교의 계시론이다. 이 계시론에 의거할 때 그리스도교는 신흥영성운동이 하듯이 1%의 정보만 가지고 불확실성 속에서 끙끙대지 않고, 99%의 정보를 쥐고 계신 하느님의 비추임(illumination) 속에서 진리 자체를 향유한다.
   곁가지 얘기는 이쯤에서 그치고 편지 얘기로 돌아가 보자.

여섯째, 사목적 대응책이 미흡하다.
   다시 자매님 이야기이다. 이제 자매님에게 남은 일은 다시 예수님께로, 이전의 신앙에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매님은 고해성사를 받기로 했다. 자매님의 얘기를 들어보자.
『다음날 성당에 구반장 교육이 있어 미사에 참여할 참으로 서둘러 준비를 하고 성당에 도착하니 고백실에 불이 켜있어 성사를 보았습니다. 말을 돌릴 필요가 없었기에 사실 그대로를 고백했습니다. 「신부님 그동안의 몇 달 동안 제가 단학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제 오만함을 진심으로 크게 뉘우칩니다. 머리 숙여 주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신부님께서는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매에게 뭐라고 해야 할 말이 없습니다. 보속으로 묵주기도 5단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망감이 좀 들었지만 벅찬 기쁨이 더 컸기에 이에 대한 응답은 분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큰마음 먹고서 고해성사를 받았지만 자매님에게 신부님이 주신 말씀은 뭔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목자들이 기수련의 해악, 특히 단월드 기수련의 폐해에 대하여 전혀 모른다. 그냥 건강을 위한 기수련정도로만 인식한다. 그러니 한 자매가 실존을 걸고 내린 위대한 결단에 공명하지 못한다. 그 곡절, 그 고뇌, 그 긴장에 대하여 전혀 느낌이 없을 수밖에 없다. 아닌 경우도 많겠지만 이는 사실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본인이 기수련을 행하기도 한다. 물론 단월드 지원에서는 사제들이 수련할 경우 매우 조심스럽게 대한다. 가급적이면 운동차원에만 머물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지 않는다. 고급단계에 이르면 충돌이나 갈등이 생길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아쉬움을 더해 주는 것은 사목자들은 신자들이 어떤 문제 때문에 그리고 어떤 갈증 때문에 수련을 하려하는지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 아니라도 할일이 많기 때문이다. 사제 1명이 수천 명의 신자를 돌보아야 하는 실정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는 현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을 강도의 위험으로부터 돌보는 것(요한 10, 10~11 참조)은 어떤 이유로도 관면 받을 수 없는 사제의 사명에 속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신흥영성운동에 빠지는 문제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목자들은 알 필요가 있다. 가톨릭 교회가 제공하는 기존의 영적 메뉴에서 식상함을 느끼는 신자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시달리며 신음하는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사목자들은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정보가 부족하다면 정보를 구해야 한다. 혼자서 해결 방안을 줄 수 없다면 교회 내에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전문기관(예를 들면 주교회의 사목연구소)에 문의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일곱째, 생각보다 많은 신자들이 빠져 있다.
   사목자들이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신자들이 신흥영성운동에 빠져있다. 자매님은 끝으로 말한다.
『신부님, XX만큼 단학의 회원 수가 많은 지원은 없을 것입니다. 그 속에 천주교 신자가 셋 중의 하나는 될 것입니다. 단학을 하면서 그들의 말처럼 혼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황폐해 가는 것을 몸소 체험 했습니다. 그것도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말입니다.
신부님, 제게 도움 주심에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XX에서 000 올림』
   실태를 좀 강조하느라고 「셋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신(흥)영성의 그물망에 걸려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여전히 성당에 잘 나오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성당에 나오기는 해도 어딘가 모르게 성당에서의 활동과 열성이 약해지고 특히 기도생활이 왜곡되기 십상이다. 전통적인 가톨릭 기도는 시시해서 안하려 하고 주관적으로 명상을 하려한다. 이러면서 점점 예수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친교는 약화되어가는 것이다.

–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 가톨릭 신문 2004년 8월~ 9월 기획/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