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이 말씀하신다.

“마리아야, 어머니가 말하는 것이다.
내 예수는 네게 나라를 얻는 데에는 반드시 요구되는 정신의 어린이다움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어제는 그의 선생님으로서의 생활의 한 장면을 네게 보여 주었다. 너는 어린이들을, 불쌍한 어린이들을 보았다. 다른 말할 것이 아무 말도 없겠니? 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말하겠다. 예수에게 점점 더 소중해지기를 내가 원하는 네게 말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의 정신을 위해서 네 정신에 말한 그림 안에 있는 뉘앙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림을 아름답게 하는 뉘앙스들이고, 화가의 재주와 관찰자들의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 이 뉘앙스들이다.

나는 내 예수의 겸손을 네게 지적해 주고 싶다.

저 불쌍한 계집아이는 그 순진한 무지로 돌 같은 마음을 가진 죄인을 내 아들과 달리 취급하지 않는다. 그애는 선생님이나 메시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선생님을 업신여기던 밭과 집에서 -바리사이파 사람 이스마엘은 내 예수를 업신여겼으니까 -살았기 때문에 어린 미개인보다 조금 덜한 그 계집아이는 예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없었고 본 적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잔인한 주인이 요구하는 지치게 하는 일 때문에 피로해서 그들이 개간하는 땅에서 머리를 들 시간도 가능성도 없었다. 그들이 곡식을 베는 동안, 또는 과일과 포도를 따거나 힘드는 돌절구에 올리브를 으깨는 동안 어쩌면 기쁨의 함성을 들었는지도 모르고, 피로한 머리를 잠깐 동안 쳐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포와 피로로 인해서 멍에에 짓눌린 그들의 머리가 즉시 다시 숙여졌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이 그저 미움과 괴로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죽었었다. 내 예수가 그의 지극히 거룩한 발을 디딘 순간부터는 반대로 세상이 사랑과 선일뿐이었는데 말이다. 무자비한 주인의 노예인 그들은 내 예수의 시선과 미소를 단 한 벌도 만난 적이 없었고, 정신에 부유함을 주는 내 예수의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 부유함의 덕택으로 극빈자들이 자기들이 부유한 것으로 느끼고, 굶주린 사람들이 실컷 먹은 것으로 느끼고, 병자들은 건강이 좋다고 느끼며,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은 위로를 받는 줄로 느낀다.
그런데 예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주님인 내가 네게 말한다, 이렇게 하여라’ 하고. 예수는 이름을 숨긴 채로 있다.
그래서 잎까지도 다 떨어진 사과나무의 가지 중의 하나에 그들의 허기를 달랠 실과들이 달린 기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무지한 그 어린 것은 그의 주인 이스마엘과 잔인한 야곱을 부르던 것과 같이 예수를 ‘주님’ (나으리 )이라고 계속 부른다. 친절은 항상 사람을 끌어당기기 때문에 그 아이는 친절한 주님께로 끌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애는 탁 믿고 예수를 따라간다. 세상에서, 그리고 세상이, ‘권력자들과 향락 추구 자들의 상류사회’가 원하는 무지 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불쌍한 어린 인간인 그 계집아이는 본능적으로 즉시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권력자들과 쾌락 추구 자들은 아랫사람들을 더 마음대로 괴롭히고, 더 가증스럽게 착취할 수 있도록 그들을 무지 속에 그대로 두기를 원한다. 이 계집아이는 그 뒤에 이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엾은 계집아이인 그 보잘 것 없는 인간인 자기를 위해서도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어머니도 없이 자기처럼 가난한 그 주님을, 그의 입술과 마음에서 권력자들께 대한 불행한 사람들의 증오가 만들어내는 인간의 악의라는 쓴 맛을 없애고자 해서, 그러나 뒤늦게 준 빵덩어리로 그렇게 하지 않고 아버지의 과일을 주었던 그 주님을 알게 될 것이다. 뒤늦게 준 빵덩어리가 그애에게는 언제나 냉혹과 눈물의 맛을 냈을 것이다.
정말로 그 사과들은 낙원의 실과들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선과 악을 나타내는 가지에 열린 실과인 그 과일은 모든 불행, 우선 그 두 고아의 경우에는 하느님에 대한 무지라는 불행에서의 구속을 나타냈을 것이고, 이미 말씀을 알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한 사람의 경우에는 벌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 계집아이는 나중에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거두어준 자선을 하는 여자를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 것이다. 그애에게는 여러 가지로 구원자인 예수를. 굶주림과 악천후와 세상의 위험과 원죄에서 구해준 구원자인 예수를.
그러나 그 계집아이의 경우에는, 예수를 항상 그날에 비추어서 보았다, 그래서 예수는 항상 동화에 나오는 것 같은 친절을 가진 마음착한 주님, 애무와 선물을 주는 주님,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고, 집과 옷이 없다는 것을 잊게 한 주님으로 나타났었다. 그것은 예수가 아버지처럼 자애롭고, 어머니처럼 다정스러웠고, 피로할 때 쉴 곳을, 헐벗은 것을 그의 가슴과 겉옷으로, 그리고 그와 같이 있던 자선심 많은 사람들의 겉옷으로 덮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애에게 있어서 예수는 온정이 넘치는 그윽한 빛이었다. 예수가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초대 교회의 어린 신자로서 그의 ‘주님’의 얼굴이 매를 맞고 가시관을 써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았을 때에도, 지금은 어떻게 하늘에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지를 곰곰히 생각하고 나서 펑펑 쏟은 눈물로도 꺼지지 않은 온정 넘치는 그윽한 빛이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에 그에게 미소를 보내고, 겁내지 말라고 하며 그의 구세주께로 자기를 데려다준 빛, 찬란한 천국에서 이루 형언할 수없을 만큼 다정스럽게 또 미소를 보내준 빛이었다.

예수는 너도 이렇게 본다. 너도 예수를 저 옛날에 너와 같은 이름을 가졌던 계집아이가 본 것과 같이 보아라, 그리고 예수가 네게 대해서 가지는 사랑을 기뻐하여라. 네가 안 가엾은 어린 마리아처럼 순진하고 겸손하고 충실하여라. 그애가 비록 이스라엘의 보잘 것 없는 작은 무식쟁이이지만 어디에 도달했는지 보아라. 하느님의 가슴에 이르렀다. 사랑이 네게와 마찬가지로 그애에게 나타났고, 그애는 참다운 지혜로 유식하게 되었다.
믿음을 가지고 안심하고 있어라. 내 아들이 부유함으로 바꿀 수 없는 빈곤은 없고 내 아들이 채울 수 없는 고독이 없고, 그가 지울 수 없는 과오도 없다. 사랑이 과거를 무효로 하면 이미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몹시 무서운 과거까지도. 도둑 디스마가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네가 두려워하고자 하느냐? 사랑하고 또 사랑하여라, 그리고 아무것도 두려워 말아라. 어머니는 네게 강복을 주며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