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 영적 갈증 채워줄 물 ‘여기있다’

2004년 성탄절 직후 지구를 강타한 남아시아 지진 해일 참사는 첨단과학시대의 21세기 인류에게 새삼 ‘두려움’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모르긴 몰라도 당시 참변 과정을 포착한 비디오 기록물 방영을 보았던 시청자들 반응은 그야말로 숙연(肅然) 그 자체였으리라.

덮쳐오는 자연의 힘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의 무력, 그리고 눈앞에 몰려오는 죽음의 노도(怒濤)를 바닷가 낭만거리로 여기다가 순식간에 익사했을 만큼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

 이번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무한(無限)을 꿈꾸던 인간이 유한(有限)을 새삼스럽게 절감하는 기회가 되었다. 생명을 창조하고 우주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던 21세기 인류도 자연의 대재앙 앞에서는 겸허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온몸을 휘감는 저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 하느님을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 바다가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 그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욥기 38,4-9)  

 다음으로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상들의 겉모습에 속지 않고 그 속모습 곧 그 실상(實相)을 볼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값진 가르침을 얻었다. 그동안 우리는 일상사를 얼마나 자주 피상적으로 판단해 왔으며 또 얼마나 자주 근시안적으로 살아왔는가. 사실이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죽음의 징조를 죽음의 징조로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생명의 길로 여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고 있는가.

 수십만이 넘는다는 희생자들에게 주님의 가호를, 그 유족들에게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위로를 삼가 빌어드린다. 그리고 그 희생의 대가로 얻은 깨달음을 귀히 여기고자 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기이한 현상이 하나 전개되고 있다.

이른바 탈세속화(脫世俗化: desecularization)라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곧 사람들의 세속적 관심이 점점 영적 관심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이목을 끄는 대목이다. 한때는 세속화(世俗化)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였던 적이 있었다. 이는 20세기 후반기에 사람들이 점차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면서 과거에는 종교 및 교회에 집중했던 관심을 점점 세속에로 옮겨 가고 있음을 일컫던 말이었다. 동시에 신앙생활 자체를 점점 현세구복적으로 영위해 가고 있음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뒤집혀 역조(逆潮)의 물결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어떤 이들은 21세기를 ‘영성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특히 한국사회에서 이런 조류가 눈에 띄게 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이 한창 고조되고 있던 20세기 후반기에 한국인은 현세구복과 물질의 풍요를 위해 종교생활을 하던 성향이 짙었다. 이때는 저마다에게 성공, 재산, 출세, 사회적 지위 등이 삶의 목표였다. 이 시기 사람들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종교의 힘이 크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기존 신앙생활을 영위하거나 종교에 입문하거나 했다.  

 그러나 20세기 한국인들은 이것들에서 만족과 행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과 고갈을 체험했다. 사람들은 물질의 과도한 추구로 말미암아 정신적 황폐 증상, 인간 존엄성 실추, 환경 파괴 등 심각한 문제들만 더 조장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원하던 행복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상처투성이인 채 정신적 공허에 시달리며 갈증만 더 심해갔다.

 이런 배경에서 21세기 한국인들은 이제 새로운 동기에서 종교를 찾고 있다.

 첫째로 내적 평안을 위해 종교를 찾는다. 승전보를 기약하며 도도하게 전쟁터에 나갔던 용사들이 저마다 상처를 안고 지친 영육(靈肉)을 질질 끌면서 치유와 안식, 심기일전과 재충전을 꿈꾸며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 그 모습이 바로 신앙생활에 기대어보려고 종교를 찾고 있는 현대인 모습이다.

요컨대 현대 종교인이 갈구하고 있는 것은 현세적 축복이나 내세의 구원이 아니고 깊은 영성적 체험에서 오는 평안이다. 허무한 삶에서 느끼는 불안, 갈등, 위기감, 정체성 실종 등을 일소하는 것이 우선적 욕구인 것이다.

 둘째로 현대인들은 너무 고독해서 종교를 찾는다. 마음 터놓고 진정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웃을 찾아 종교를 기웃거린다. 삶이 분주하고 만남이 요란할수록 점점 고독의 늪은 깊어만 가는 것이 현대인 실상이다. 그래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실존적 고독을 벗어나고자 소속감, 아늑함, 가족적 유대를 얻을 수 있는 공동체를 찾아 종교의 문을 두드린다. 이를 우리는 ‘유랑하는 종교심’이라 부를 수 있다. 여기저기 더 만족스런 대안을 찾아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영적 목마름이 점점 심해져 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인 나아가 인류의 현실임에는 틀림이 없다.

 서로 무관한 듯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위의 두 화제(話題)들에는 이미 앞으로 연재할 글의 실마리가 함의되어 있다.

 크게 말할 때,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종교심(宗敎心)이 21세기 정보사회에서는 어떻게 발로(發露)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답은 어떠해야 할 것인지 구명(究明)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삼을 것이다.

 가급적이면 교의(敎義)신학적 관점이 아닌 사목(司牧)적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다. 오로지 이 시대 목마른 양들을 야훼의 ‘파란 풀밭'(시편 23)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소박한 사랑을 품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볼 것이다.

원망을 기도로 승화 시켜야

  불굴의 의지로 암투병을 해왔던 가수 길은정씨 사망소식이 며칠 전 안쓰러움을 자아내더니, 이번에는 전(前) 대법원장 유태흥옹 자살 소식이 우리를 안타깝게 하였다. 평소 신병으로 극심한 허리통증에 시달리며 삶을 비관해 왔다고 하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하고 동정이 간다. 유족들의 아픔은 또 얼마나 클까.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태어날 때(生) 울고, 나이 들도록(老) 온갖 인연으로 고통을 겪고, 병(病)들어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마지막 죽음(死)마저 고통 속에서 맞이하는 게 인생이라는 것이다.

 어느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을 때 몸이 많이 불편한 자매가 있었다. 혼자서 간신히 걸어 다닐 정도이고 발 한번 떼려면 한참씩 걸리기 때문에 성당에 다닐 때에는 꼭 누가 부축해 준다. 이 자매가 시단(詩壇)에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신앙시 좀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했더니 자매의 대답이 가슴을 한방 쳤다. “신부님, 나는요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하느님 원망하고 하느님 욕해요. 어떻게 그걸 시로 써요.” 나는 애써 있는 그대로의 감정 표현도 기도가 될 수 있고 시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해 봤다. 자매의 대답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고통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다. 고통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본능적이고 육체적 고통에 한정되어 있는 동물과는 달리, 정신적 고통 때문에도 괴로워한다. 자녀 문제, 이별, 상실, 질병, 사고, 경제적 어려움, 좌절의 아픔, 외로움, 누군가에게서 배척이나 소외 등으로 잠을 뒤척이고 괴로워하고 신음한다.

 고통이 인류가 똑같이 겪는 숙명임에 비할 때, 한국인에게 특별히 두드러지는 시달림이 하나 있다. 불안(不安)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 가지 변수들을 종합해 보면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뭐니 뭐니 해도 한국인을 가장 불안케 하는 것은 초스피드 변화다. 통계가 이를 입증한다.

 첫째로, 급격하게 농촌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 변화했다. 1960년대 도시 인구 대 농촌 인구 비율이 28:72에서 2000년도에 이르러 89:11로 뒤집혀 거의 전국토의 도시화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 되었다. 또 구미 선진국에서는 50년 내지 100년 걸려야 한 단계씩 올라갈 수 있었던 노동집약산업→기술산업→자본집약산업→지식정보산업으로의 발전을 한국은 매 10년마다 이룩하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국의 드러커(P. Drucker) 교수는 한국사회가 1960년대 이후 이루어낸 변화 속도는 세계사에 남을 ‘경이'(wonder)라고 찬탄했던 것이다.

 둘째로,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이사를 자주 다닌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인구 유동성은 20%대를 상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는 유럽의 약 10배, 일본의 약 4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변화와 유동성은 바로 한국인이 겪고 있는 불안의 정도를 시사해 주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남북 대치 속에서 ‘북핵문제’가 연일 국제급 뉴스로 보도되는 가운데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니 불안하다. 이미 아이 때부터 불안하다. 시험에 떨어질까 봐 불안하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야 하니 불안하다. 승진을 못하면 도태되기에 불안하다. 미래에 뭐가 밀어닥칠지 모르니 불안하다. 건강이 예전처럼 따라주지 못하니 불안하다. 돈벌이가 시원찮으면 사람대접을 못 받으니 불안하다. 또 오늘 아무 일 없이 지나간 것이 아무래도 괜히 불안하다. 특별한 일이 없어서 집에서 가만히 쉬고 있자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다. 이래서 불안하고 저래서 불안하다. 이 불안은 일찍이 교회가 통찰했던 그 불안의 도를 넘는다. “따라서 희망과 불안이 엇갈리는 사이에서 현대인은 스스로 의문을 품으며 안정을 찾지 못한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4항).

 고통이나 불안에 처할 때마다 오늘의 우리는 묻는다. “왜?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가?” 하늘에다 대고 항변도 해본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나에게 주십니까? 착하게 죄 없이 살려고 노력한 나에게 이게 뭡니까? 너무 혹독합니다.” 삶을 원망하기도 한다. “오, 하늘이시여, 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이런 고초를 겪게 합니까?”

그 옛적 하느님 사람들은 이런 물음을, 항변을, 원망을 기도(祈禱)로 승화(昇華)시킬 줄 알았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 사람들은 부르짖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 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나의 하느님, 온종일 불러 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 체하십니까?…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사람마다 나를 보고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빈정댑니다….물이 잦아들듯 맥이 빠지고 뼈 마디마디 어그러지고, 가슴 속 염통도 촛물처럼 녹았습니다. 깨진 옹기조각처럼 목이 타오르고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었습니다”(시편 22,1-2. 6-7. 14-15).

 불안 속에서 하느님 사람들은 읊조렸다.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낙심하는가?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하는가?”(시편 42,5) “나를 구하소서. 하느님, 목에까지 물이 올라왔사옵니다.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시편 69,1-2).

 나아가 삶을 저주하며 탄원하였다.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나를 죽이셨던들, 어머니 몸이 나의 무덤이 되어 언제까지나 태속에 있었을 것을! “(예레 20,14-18) “견딜 수 없는 이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숨통이라도 막혔으면 좋겠습니다”(욥 7,15).

 잘 알아들어야 한다. 이는 기도였다. 능력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을 향한 강력한 청원이었다. 구제와 위로와 도움을 청하는 믿음의 기도였다. 성서는 그들이 이윽고 야훼의 응답을 만났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시련의 시기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는 어찌해야 옳겠는가?

고통, ‘하느님의 확성기’ 

  “남의 엉덩이에 난 종기보다 내 몸에 난 뾰루지가 더 아프게 느껴진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이든 내가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될 때 그 고통은 크게 보이고 심각하게 여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겪는 모든 형태의 고통마다 불가피하게 “왜?”라는 물음을 묻는다. 신비롭게도 이 물음은 인간을 하느님께 인도해 준다. 고통은 탁월한 ‘하느님 코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고통이라는 한계상황은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신호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한계 체험을 ‘최종적 포괄자’를 위한 암호라고 말했다. 고통의 극한 체험은 바로 ‘최종적 포괄자’인 하느님을 찾게 하는 구실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최종적 포괄자’는 우리가 음식점 종업원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사장, 나오라고 그래!”하고 소리칠 때 뉘앙스로 알아들을 수 있겠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모든 현상 밑 심연(深淵)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슬픔의 밑바닥, 절망의 밑바닥, 바로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만나고 싶으면 체험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그리스도교 변증가(辨證家) C. S. 루이스는 고통이란 “귀머거리에게 알아듣도록 만드는 하느님의 확성기”라고 말했다. 평소 하느님 음성을 못 듣던 사람들이 고통스런 일이 생겨야 비로소 하느님 음성을 듣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이렇듯이 인간은 고통스러울 때 비로소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귀를 기울인다. 그렇다. 인간의 끝은 하느님의 시작이며, 인간의 절망은 하느님의 기회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절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된다. 최근 사람들이 비관하여 자살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들이 쉽게 목숨을 끊은 것은 현실적 고통의 그 너머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앙의 안목을 가졌더라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단계 도약을 위한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차라리 하느님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고, 원망하고, 욕을 해대는 한이 있어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뒤에 숨어 있는 은총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고통은 원죄(原罪)의 결과로 생겨났지만 고통이 벌(罰)인 것만은 아니다. 그냥 괴로워하라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통이 사람에게 유익할 때가 있다.

우선, 고통은 사람을 위험이나 파괴로부터 지켜준다. 고통이 없다면 아이가 불장난을 하다가 손을 태워버리고 말 것이다. 고통은 우리 몸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또 고통스러운 과정은 사람을 성숙시켜 준다. 운동선수들에게는 땀과 고통이 발전을 가져다 준다. 세계적 스포츠 스타들을 배출한 것은 다름 아닌 훈련의 고통이다. 고통이 영성적 의미를 지닐 때도 있다. 하느님께서 영적 성장을 위하여 허락하시는 고통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견책으로서 주어지는 고통이 있다. 성서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히브 12,6)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매를 드시고 고통을 주시는 것은 ‘잘되라’는 교육적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백성은 괴로움을 참다못해 마침내 나를 애타게 찾으리라”(호세 5,15) 하신 말씀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 계획에 고통이 주어지는 심오한 뜻을 일러주고 있다. 이런 고통에서 정화의 열매가 달리기에 이런 고통을 치러낸 신앙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욥 23,10).

 둘째, 시험으로서 주어지는 고통이 있다. 그 의도는 성숙의 은총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권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시험하려는 것이니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1베드 4,12).

 셋째, 다른 사람 구원을 위해 겪는 고통이 있다. 이 대속적(代贖的)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 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1베드 2,24).

 요컨대, 견책(譴責)으로 받는 고통은 하느님께서 잘못된 길에 들어선 당신 자녀를 제 길에 들어서도록 주시는 고통이며, 시험(試驗)으로 받는 고통은 믿음의 성숙을 위해 허락하시는 고통이며, 대속적(代贖的) 의미의 고통은 남을 위해 우리 자신이 공로를 쌓도록 초대하시는 고통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고통을 당하든 그 고통을 승화시켜서 더욱 높은 의미의 고통으로 봉헌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고통에 의미가 있고 없는 것도 결국 우리 자세에 달렸다고 말할 수 있다.

 고통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막상 고통이 닥치면 당장은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피하려한다고 피해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아주 좋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문제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그대로 모든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 속에서 그대로 그냥 살자. 그러면 먼 훗날 언젠가 당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 뒤에는 반드시 선한 의도가 깔려 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 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에서 고통스런 여정을 가게 했을 때도 거기에는 이스라엘을 믿음의 백성으로 훈련시키려는 선한 의도가 서려 있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라면 그 길이 가장 곧은 길이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헤아려보아도 납득이 안 가는 고통 뒤에서 다음과 같이 속삭이는 하느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아직 답을 위한 때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을 위한 때다. 만약 네가 창조의 놀라운 세계에서 나의 선함과 위대함을 체험할 수 있다면, 너의 고통 안에서도 나의 선함과 전능함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준비되어 있을 때 나는 너에게 답을 줄 것이다.”

하느님 찾게 하는 도구, 불안

 최근에 나온 「한국 교회 미래 리포트」(2005, 갤럽) 한국 종교 현황 통계를 보면, 신앙생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개신교 신자들 45.5%가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라고 가장 많이 답했던 반면, 불교 신자 74%, 가톨릭 신자 73.2%가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만큼 가톨릭신자는 천국 지향의 교조적 영성보다 평화지향의 실존(實存)적 영성에 기울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오늘 주제는 실존적 영성의 실마리에 해당하는 ‘불안’이다. 불안은 지난주 다루었던 고통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설치해 놓으신 또 하나의 하느님 코드이다.

 인간 자아는 태어나면서부터 불안을 안고 산다. 그런데 불안(不安)이라는 것은 공포(恐怖)와는 다른 것이다.

 ’공포’는 동물도 느낄 수 있다. 눈앞에 주어진 자극이나 위협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생기는 원초적 감정을 공포라고 한다. 쥐는 눈앞에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나면 공포에 떨면서 안절부절못한다. 이것은 사고 작용이 없어도 생기는 일종의 반사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안’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 상태다. 불안은 반드시 생각의 결과로 생긴다. 자신의 존재와 관련해서 어떤 위기나 피해를 미리 상상하거나 불길한 일을 예상할 때 그 생각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불안이다. 동물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동물이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불면증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불안’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낸 사람이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다. 그는 불안이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며, 이 불안 때문에 인간은 발전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단계에 따라서 심미적 삶, 윤리적 삶, 종교적 삶을 사는데 불안이 앞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우선 사람은 본능적으로 심미적(審美的) 삶을 산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좇아 살거나 환상에 빠져서 산다. 삶을 기분풀이로 여기며 쾌락을 탐닉하면서 기분에 따라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러한 삶은 결국 권태와 싫증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마침내 무기력한 자신의 눈에 비친 인생은 무상하며 미래는 불안하고 그들은 절망한다. 이 절망은 새로운 삶을 찾게 한다. 이렇게 해서 절망의 늪을 넘어 윤리적 삶으로 도약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불안으로 인해서 이제 두번째 단계인 윤리적(倫理的) 삶이 시작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쾌락만을 좇아 무비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하게 된다. 사람은 이제 내면의 양심에 호응하고 의무에 성실하려고 애쓴다. 이제 비로소 인간은 ‘되어야 할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단계도 결국 벽에 부딪치고 만다. 높은 도덕에 이르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 그리고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무력함을 절감한다.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뜻대로 잘 안 되고, 또 윤리적으로 산다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이 망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고뇌하는 인간은 마침내 죄의식과 불안에 빠지고 절망하게 된다. 이 불안과 절망은 다시 도약을 요구한다. 이 불안과 절망이 사람을 신(神)에게로 내몬다고 한다. 이 현실의 모순을 심판해 줄 하느님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마침내 불안은 윤리적 삶에서 종교적(宗敎的) 삶으로 옮겨가도록 사람들을 이끌어준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으로서 완전하고 참된 삶은 세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실현된다고 말한다. 스스로 결심에 따라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를 때에 인간으로서 무력감과 허무함을 떨쳐버리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불안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찾게 한다. 불안하기에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쉽게 손에 잡히지 않고 은폐되어 있거나 없다고 느끼기에 자아는 더욱 불안하다. 인간은 하느님 안에 온전히 안기게 될 때에 비로소 불안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기에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는 다음의 유명한 말을 했던 것이다.

 ”오 주님,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수 있을 때까지는 불안하나이다.”(고백록 1권 1장)

 유다인은 독일인에 의해 대량 학살을 당하는 그 순간에 시편 23편 ‘야훼는 나의 목자’를 외우면서 두려움 없이 장엄하게 죽어갔다고 한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여 주시고….” 하느님 약속 말씀에 의지하는 것이 불안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다. 하느님 사람들이 불안에 떨었을 때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오늘의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다.

 ―”힘을 내고 용기를 가져라. 무서워 떨지 마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느님 야훼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여호 1,9; 이사 43,1; 예레 46,27-28).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5-37).

 암송하고 마음에 새겨두면 두고두고 격려가 될 것이다.

 성서는 또한 기도로서 역경을 이긴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를 위로한다. 성서는 막다른 골목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바친 기도가 ‘부르짖음’의 기도였다고 전한다. 시편은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으로 가득 차 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 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시편 22,1).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벼랑 끝에 매달려 절규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이나 모세 같은 위대한 인물들 기도뿐 아니라 카인 같은 죄인의 부르짖음과 하갈 같은 천민의 울부짖음도 들어주셨다. 예수님도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나인의 과부와 눈을 뜨게 해달라는 예리고 소경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극심한 괴로움의 순간에도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을 굳게 믿고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와 희망으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로마 8,28). 숱한 하느님 사람들이 이 믿음으로 역경을 이겨냈다.

인간 구원은 ‘하느님 손길’에

 지난번까지 글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불안 속에서 답을 찾아 나선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답을 여기저기서 찾아본다. 그리고 그것들이 영원한 답인 것처럼 꼭 붙들고 산다. 점을 치고, 무당을 찾고, 신흥영성에도 기웃거려보고, 수행법도 배워본다. 요즈음에는 ‘좋은 것이 좋은 것’, ‘그 답이 그 답’이라는 말도 두루 통한다. 과연 그럴까?

 2004년 하반기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서울평협 주최 명동성당 ‘하상대학’강좌에서 정의채 신부가 “상대주의는 지나갈 것이며 인간은 궁극적으로 절대자 안에서만 답을 발견하게 되어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원로 철학자로서 그리고 형이상학계 거두로서 했던 이 발언을 권위있는 예언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정의채 신부의 이 발언은 특히 요즘 젊은 세대에서 확산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적용되는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내세우는 이성(理性) 대신에 감성(感性)을 믿을 만한 판단 및 행동 준거로 내세운다. 곧 오감이 명하는 대로 살면 그것이 옳게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보편타당한 진리를 추구하지만, 감성은 ‘그때 그때’의 주장에 가치를 부여한다.(웃자고 하는 말로 “그때 그때 달라요!”라는 식.) 그래서 모던 사회가 상식, 합리성, 공동선 중심의 가치관을 표방했음에 반하여, 포스트모던 사회는 느낌, 부딪힘, 개성 중심의 가치관을 추구한다.

 요컨대, 포스트모더니즘이 내세우는 ‘감성’의 전선성(全善性:감성에 충실한 것은 모두 선하다는 생각)으로 인해 절대적 가치기준이 허물어지고 상대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보편적이고 근원적 진리 개념을 거부하고, 모든 사상은 단지 계급이나 성별, 인종에 따라 만들어진 사회적 구축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절대 진리는 없고 그때 그때 집단의 관점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관점, 모든 생활양식, 모든 신념과 행동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는 인류를 혼돈으로 몰아넣을 공산이 짙다. 상대주의는 선과 악, 참과 거짓의 경계선을 없애버린다. 때문에 프리섹스, 약물, 헤비메탈 음악 등이 ‘명상’의 이름으로 난무하고 허무와 광기의 문화가 버젓이 ‘신영성’의 이름으로 종교시장에 출시되어도 사람들은 그것이 ‘구원’의 손길인 줄 안다. ‘대화’와 ‘개방’의 이름으로 좋은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예스’와 ‘노’를 분명히 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상호인정이 역설(力說)되고 있는 와중에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는 것 자체가 전근대적이라고 치부되어 반감을 사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리’가 ‘거짓’과 동일시되는 것을 수수방관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수와 무당을 동일한 종교인으로 대접하는 현상을 그냥 시대 흐름이라고만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점에 가보라. 얼마나 많은 오늘의 ‘메시아’들이 그럴듯한 가르침으로 ‘심지 얕은’ 가톨릭 신자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는지 보라. 그리고 신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이 어떠어떠한 책들인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다음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겨들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훗날에 사람들이 거짓된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 디모 4,1).

 철학사를 더듬어보면 일찍이 그리스 고대철학 태동기에도 이런 진통이 있었다. 상대주의 시대가 있었다. 온갖 궤변론자들이 군웅할거하며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치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철인(哲人) 소크라테스는 이런 혼란 속에서도 보편타당한 진리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구명하고자 했다. 그의 제자 플라톤 그리고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절대적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후 철학사는 보편타당한 진리의 점근선(漸近線)에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가 하는, 그러면서 그 점근선에로 접근하는 반복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정의채 신부의 저 예단(豫斷)은 이런 철학사 흐름을 꿰뚫은 통찰인 것이다.

 일찍이 청년시절 일본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서 평생을 다하여 구도의 길을 걸었던 시인 구상 세례자 요한(1920~2004)은 ‘진정한 답은 하나’라고 고백했다. 그의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는 제목의 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읽게 된다.

 이 밑도 끝도 없는 /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 빠져나올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 이 밑도 끝도 없는/ 고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 벗어날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 이 밑도 끝도 없는 / 불안과 허망의 잔을 / 피할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 감추어져 있음을, /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짧은 시에는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 실려 있다.

 시인은 먼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고백한다. 시인이 알고 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限界)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시인은 인간이 처한 현실로서 인정한다.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 갈증, 고뇌, 고통, 불안, 허망 등을 인간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가 바로 인간 현실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수긍한다.

 사실, 시인은 종교학을 전공하던 시절부터 한평생 진지한 구도자로서 인간의 자력구원 가능성을 탐색해 왔다. 만년에 가서 그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스로는 저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도 ‘벗어날 수’도 ‘피할 수’도 없음을 뼈저리게 절감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이 피할 수 없는 한계가 바로 원죄(原罪)의 소산이라고 가르친다. 이 점을 시인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시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인은 자력구원 한계에 대한 ‘앎’을 넘어서 이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시인은 굳게 믿었다. 바로 저 피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있다는 것을 시인은 믿었다. 시인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절대자 하느님에게서 오는 ‘신령한 손길’밖에 없음을 통감하고 이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고백했던 믿음을 우리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 자비와 용서, 은총이라는 사실을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믿을 일이다. 요즘 시중에 상품화되어 나도는 온갖 영적 불량품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을 찾을 일이다. 사람이 되시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심을 입증하셨던 그분만을 따를 일이다.

사랑 품고 하느님께로 떠나라

그것이 고통이 되었든, 불안이 되었든, 내면의 영적 갈애가 되었든, 우리는 생애에서 절대자 하느님을 애절하게 찾는 계기를 만나게 된다. 홀연 신앙의 문턱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하다. 누군가의 안내가 필요한 것이다.

 한 선배의 고백은 우리를 신앙이 가져다주는 은총의 세계로 친절히 안내해 준다. 일찍이 청년 시절 동경으로 유학 가서 종교학을 전공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모태 신앙(母胎信仰)과 동양 유수의 종교(儒佛仙) 사이에서 처절한 갈등을 겪어 내고나서, 스스로는 천상 가톨릭 신자임을 선언하고 살았던 구상 시인(1919-2004년)은 만년에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은총에 눈을 뜨니/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 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意識)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구상,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누구든지 신앙의 은총에 눈을 뜨게 되면 세상이 이제까지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보이게 된다. 이 세상의 하찮은 들꽃 하나도 거룩함이 깃든 하느님 피조물로 보이게 되고, 지난날 슬픔과 고통 투성이로 보였던 삶의 편린(片鱗)들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축복과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껏 몸부림치며 고독하게 살아온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삶에서 드러나지 않게 도움의 손길로 부추겨 왔던 하느님 동반(同伴)에 눈물로써 감사할 줄도 알게 된다.

 당신께서 신앙의 눈을 떠서 당신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림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거룩하게 대하고, 아름답게 누리시기를 바란다.

 당신은 이제 신앙의 첫 발을 내디디려 한다. 신앙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며 결단이기 때문이다. 망설이는 당신 발걸음에 이해인 수녀가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이라는 제목의 시(詩)로 격려의 말을 전한다.

 ”내가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나와 정든 것과의 아낌없는 결별이며 당신과의 새로운 해후입니다. 유예 없는 결단이며 지체 없는 출발입니다. 또한 낯선 것과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처럼 모험을 받아들이는 용기 있는 행위.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그러므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고백을 세 번 거듭한 시몬 베드로처럼 당신께 대한 사랑을 매사에 확인하는 기쁨의 응답입니다.

 ’사랑은 나의 인력(引力), 당겨지는 대로 그리로 나는 쏠린다’고 외운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과도 같이 당신 아닌 그 아무것도 나의 배고픔을 채워 줄 순 없습니다. 당신의 좁은 길을 넓은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려 하오니 지금껏 나를 이끄시고 보살피신 그 크신 사랑으로 나를 새롭게 하여 주소서. 내가 당신을 잘 듣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한 건 나 자신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당신 은총으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이해인, ‘사계절의 기도’)

 당신이 과거 정든 것과 아낌없이 결별하시기 바란다. 낡은 가치관, 악습, 고집들을 가차없이 버리기 바란다. 그래야 하느님과 새로운 해후가 이루어진다.

 과거가 당신을 잡아당기더라도 주저하지도 머뭇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단호하게 출발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모험의 길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낯선 것’들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마라. 당신이 챙길 것은 오로지 하나, 사랑뿐이다. 사랑을 품고 사랑이 부르는 대로 가라. 거기 하느님이 계신다.

 그렇다고 대충 떠나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호락호락한 길이 아니다. 좁고 험한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마태 7,13). 이렇듯이 생명에 이르는 길은 모든 것을 원하고 몰두를 요하는 길이다. 헐렁한 마음으로는 얼마 못 가서 포기하기 십상인 길이다.

 하지만 길이 험하다 해서 신앙을 짐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신앙이 당신 짐을 덜어줄 것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길은 순탄치 않지만 예수님께서 짐꾼으로서 우리와 동행해 주실 것이다. 우리 짐이 무겁지 않도록 부축해 주실 것이다. 아니 그 짐이 더 이상 짐이 안 되게 하는 비결을 일러주실 것이다. 이윽고 당신은 신앙이 결코 짐이 아니고 오히려 인생의 고달픈 짐을 대신 져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주저하지 마라. 당신이 신앙을 통해 누리게 될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몰라서 그렇지 그 가치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을 몽땅 팔아 그것을 사려들 것이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우리는 세상 잇속에는 얼마나 눈이 밝은가! 어느 지역 땅이 얼마나 오를지, 어느 아파트가 얼마나 투자가치가 있는지 얼마나 잘들 아는가!

 아무리 잘난 체하고, 아무리 으스대도 이런 사람들은 ‘밭에 묻혀 있는’ 하늘나라 ‘보물’을 볼 줄 아는 사람에 비하면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지혜는 잠시의 가치에 집착하지만 성령의 영감을 받은 지혜는 영원히 녹슬지 않을 보화(마태 6,20)를 붙들기 때문이다.

– 평화신문 [807~812호] 가톨릭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