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한가운데서 일어난 사고로 말미암아 나는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8일 후 의사가 왔으나 때가 너무 늦어 나는 아마 평생을 절게 될 것 같다. 사하라의 오래된 성채 독방 멍석 위에 누워, 외인부대의 군인이 석회로 칠한 더러워진 벽을 올려다보았다. 45도의 열로 정신은 멍한 상태였다.

나는 기도하고 싶었지만 이런 때에 기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묵묵히 누워만 있었다. 그리고 성체가 모셔져 있을 아랍형의 ‘굽바'(성당)의 벽 저쪽으로 정신을 모았다. 형제들은 멀리 있었다. 그들은 밭이나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무릎이 몹시 아팠지만 텅 빈 방에서 생각이 흩어지지 않도록 애써야만 했다.

나는 지난 알현 때 비오 11세가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다.
“성체 안에서 예수는 무엇을 하시나?” 하고 물어놓고는 젊은 학생들인 우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때부터 수 년이 지나간 오늘에도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를 모르고 있다.
“성체 안에서 예수는 무엇을 하시나?”

몇 번이나 나는 그 말씀을 생각했던 것일까!

예수는 성체 안에서 꼼짝도 않으신다. 그분은 작은 흰 빵으로 고요히 계신다. 세상은 이렇게 그분을 필요로 하는데 그분은 아무 말씀도 안하신다. 인간들은 그분을 이렇게 필요로 하는데 그분은 꼼짝도 안하신다. 성체는 참으로 하느님의 침묵이요 하느님의 약점이다.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고 어지럽고 동요하고 있는 그 시간에 그분은 빵 속에 묵묵히 계실 분이다.

세상과 성체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무한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서로 멀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의 행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고, 그 흐름을 거슬러 성체께 가서 묵묵히 경배하기 위해 신앙과 의지가 필요하다.

어제는 해골산의 무능이요 패배이더니 오늘은 성체의 무능이요 패배인 것처럼만 보인다. 이것을 믿기 위해서는 아주 순수한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약하고, 못박히고, 낮추신 예수는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이요, 알파요, 오메가이며, 시작이며, 마침이다. 묵시록에서 요한이 묘사한 것처럼.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공정하게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을 썼으며 그분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분의 몸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분은 피에 젖은 옷을 입으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모든 나라를 쳐부술 예리한 칼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친히 쇠지팡이로 모든 나라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분노의 포도를 담은 술틀을 밟아서 진노의 포도주를 짜내실 것입니다.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모든 왕의 왕’, ‘모든 군주의 군주’라는 칭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묵시 19.11-16)

예수는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으로서, 불가능이 없는 것이 그분의 특색이다. 나의 무능은 하느님의 능력을 잘 드러내고, 나 ‘피조물’의 빈약함이 창조주의 존재를 더욱 뚜렷이 한다.
…..

나는 밤에 양심성찰을 할 때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 또한 자주 의무를 소흘히 한 죄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적극적인 요소의 골자로 본다.
비록 내 영혼이 어떤 균형을 잡고 의식적으로는 하느님께 거역하지 아니했다고 잠시 인정하더라도 나의 사랑을, 더욱이 아주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무한히 작고 비참해지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다…. 기도 생활에서도 같은 불가능을 느낀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 내 힘으로는 ‘아빠, 아버지’라는 말조차 할 수 없다는 이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하느님이 우리 무능의 극단의 한계점까지 우리를 끌어당기는 그때, 우리는 철저히 우리의 허무를 이해할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나 자신의 무능과 약점에 대해 투쟁해왔다… 나의 교만이 무능을 거부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조금씩 그것을 나에게 깨닫게 해주셨다. 지금 나는 더 이상 투쟁하지 아니한다. 가면이 없이, 꿈도 없이 있는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노력한다. 거기에서 비로소 한걸음 진보가 있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교리책을 암송하면서 배웠을 때 만일 내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이미 40년 전에 이만큼은 진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내 약점을 하느님의 전능 앞에, 나의 죗더미를 그분의 자비의 태양 밑에, 나의 미소한 구렁텅이를 그의 위대한 심연에 두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하나의 만남, 그분과의 일치, 그분의 사랑의 충만을 알았다. 그렇다. 나의 비참이 그분의 전능을 끌어당겼다. 내 상처가 큰소리로 그분을 부르고, 나의 허무가 그분의 모든 것을 풍부히 다시 받을 수 있게 했다.
하느님의 모든 것과 인간의 허무 사이의 이 만남에 창조의 가장 큰 불가사의가 있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치이다. 자신을 주는 무상의 사랑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무상의 사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의 모든 진리이다. 또한 이 진리를 받아들이기에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겸손 없이 진리가 없고, 진리 없이 겸손도 없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루가 1.48)라고 마리아는 자기 허무 위에 하느님의 본질적인 모든 사랑이 넘치도록 내려진 것을 보았고, 사람이 되신 말씀의 거처와 음식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느님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마리아의 이 허무는 얼마나 신기한가!
하느님으로부터 이렇게 멀리 있는 자기를 의식했던 마리아의 기도 속에 얼마나 큰 감미로움이 흐르고 있는가! 겸손이 있는 거기 다만 승낙뿐만 아니라 사랑의 요구도 있는 것이다.
자기 중심을 떠나 자기를 돌보지 않는 사랑하는 자의 위대성과 완전성에 대하여서만 명상하면서 황홀한 행복 가운데에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은 얼마나 평화스러운지!
이 이상 더 완전한 관계가 없다. 또 마리아는 어지러울 정도로 손이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은 곳에서, 하느님의 이슬로 적셔진 경건한 영혼이 가장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모범을 우리에게 주었다.

나는 내 무능 전부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사실 그것은 은혜였다. 나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 속에서 하느님의 전능을 관상했다. 그리고 그것도 은혜였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기도를 통해 나의 허무를 사랑 속에서 하느님께 드릴 때 모든 것이 내 안에 가능하게 된다.
….

그분은 나를 변화시킬 은혜를 내게 주실 것이며, 불가능을 변케 하여 하늘 나라와 나 사이에 버티고 있는 바위를 들어낼 힘을 주실 것이다.
나를 위해서는 기다리는 겸손과, 신뢰의 기도와, 그것을 인내롭게 거듭하는 일, 희망을 갖는 것 등이 문제이다.
그러나 불가능을 모르는 하느님은 나의 사랑의 호소에 귀를 막지 않으실 것이다.

[ 성체. 무능한 나와 전능한 하느님 – C. 카레토, <사막에서의 편지>, 신상조 옮김, 바오로딸, 130-13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