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와 신부, 부제, 남녀 수도자 모든 평신도에게 보내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DEUS CARITAS EST
SUMMI PONTIFICIS BENEDICTI PP. XVI LITTERAE ENCYCLICAE
EPISCOPIS
PRESBYTERIS ET DIACONIS
VIRIS ET MULIERIBUS CONSECRATIS
OMNIBUSQUE CHRISTIFIDELIBUS LAICIS
DE CHRISTIANO AMORE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2004.12.25
서론
1.”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사람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요한의 첫째 서간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곧 하느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의 모습과 여정을 매우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 성인은 같은 성경 구절에서 그리스도인 생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말로 자기 삶의 근본적인 결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그 사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사랑의 중심점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을 간직하는 동시에 거기에 새로운 넓이를 부여하였습니다. 독실한 유다인은 날마다 자기 삶의 핵심을 드러내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계명과 레위기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마르 12,29-31 참조)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하나의 계명으로 묶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므로(1요한 4,10 참조), 사랑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계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사랑의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때때로 복수나 심지어 증오와 폭력의 명분에 하느님의 이름을 결부시키는 오늘날, 이러한 메시지는 시의 적절하고 중요합니다. 따라서 저는 제 회칙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에 대하여, 이어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이 회칙 제1부와 제2부의 핵심 내용이며, 이 두 부분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1부는 다소 이론적입니다. 그것은, 교황직을 시작하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신비로운 방식으로 거저 베풀어 주시는 사랑에 관한 몇몇 본질적인 사실들과, 그 사랑과 인간 사랑이 본질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 회칙에서 밝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2부는 이웃 사랑의 계명에 대한 교회의 실천을 다루기 때문에 더욱 구체적입니다. 이는 복잡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 회칙의 목적상 길게 다루지 않겠습니다. 저는 몇 가지 기본 요소들을 강조하여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인간이 응답하도록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키고자 합니다.
제1부 창조와 구원 역사에서 사랑의 일치
언어의 문제
2.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삶에 근본 물음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이시고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중요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곧바로 언어의 문제와 맞닥뜨립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오늘날 가장 자주 사용되고 전혀 다른 의미들로 오용되고 있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회칙이 주로 성경과 교회 전승 안에 나타난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문제를 다루겠지만, 사랑이라는 말이 여러 문화와 오늘날의 언어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사랑’이라는 말이 지닌 폭넓은 의미를 상기해 봅시다. 조국에 대한 사랑, 직업에 대한 사랑, 친구 간의 사랑, 일에 대한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의미 가운데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남녀 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나뉠 수 없는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고, 마다할 수 없는 행복에 대한 약속이 인간에게 드러납니다. 이는 뛰어난 사랑의 원형처럼 보여, 다른 온갖 사랑은 그와 비교할 때 빛을 잃어버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이 모든 형태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하나여서, 사랑은 참으로 다양하게 드러나지만 결국 사랑은 유일한 실재인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의 낱말을 사용하여 전혀 다른 실재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에로스’와 ‘아가페’- 차이와 일치
3.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 계획이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모로 분명히 인간에게 부여된 것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로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어 구약 성경에서는 에로스라는 말이 단 두 번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신약 성경에서는 이 말이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시다. 사랑과 관련한 그리스어의 세 단어 에로스(eros), 필리아(philia, 우애), 아가페(agape) 가운데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그리스어에서는 거의 잘 사용되지 않던 아가페라는 말을 선호하였습니다. 우애를 나타내는 필리아는 요한 복음서에서 그 의미가 심화되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로스라는 말을 삼가고 아가페라는 말로 사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표현하려는 경향은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에는 어떤 새롭고 본질적인 것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계몽주의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점점 더 과격해진 그리스도교 비판에서, 이 새로운 요소는 철저히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에로스를 독살하였으며, 에로스가 완전히 죽지는 않았더라도 점차 악한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고 주장하였습니다.1) 여기에서 이 독일 철학자는 널리 퍼져 있던 인식을 드러냈습니다. 곧 교회가 그 모든 계명과 금기로 삶의 가장 고귀한 것을 쓰디쓴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창조주의 선물인 기쁨이 우리에게 신적인 것을 어느 정도 미리 맛보게 해 주는 행복을 주는 바로 그 순간에 교회가 금지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닌가?
4.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교가 정말로 에로스를 파괴해 버린 것입니까? 그리스도교 이전 세계를 한번 살펴봅시다. 다른 문화들에서처럼 그리스인들도 에로스를 주로 일종의 도취로, 곧 ‘신적인 광기’로 이성((理性)을 압도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광기로 인간은 유한한 삶에서 벗어나 신적인 힘에 사로잡혀 지고의 행복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과 땅의 다른 모든 힘은 이차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베르길리우스는 ‘목가’(Bucolicis)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amor).”고 말하며, “우리도 사랑에 굴복하자(et nos cedamus amori).”고 덧붙입니다.2) 종교에서 이러한 태도는 다산 숭배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신전에서 횡행하였던 ‘신성한’ 매춘이 여기에 속합니다. 따라서 에로스는 신과 사귀는 신적인 힘으로 찬양되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유일신 신앙에 반대하려는 강한 유혹인 이러한 형태의 종교를 종교 타락으로 여겨 강력히 맞섰습니다. 그러나 결코 에로스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왜곡되고 파괴적인 형태의 에로스를 물리치고자 하였습니다. 에로스를 그릇되게 신격화하는 이러한 행위는 사실상 에로스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에로스를 비인간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신적인 도취를 가져다주어야 했던 신전 매춘부들은 인간이나 인격체로 대우받았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신적인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여신이 되기는커녕 착취당하는 인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무분별한 도취의 에로스는 ‘황홀경’에서 신을 향해 오르는 상승이 아니라 추락이며 인간의 타락인 것입니다. 에로스가 인간에게 단순히 순간적 쾌락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절정, 곧 우리의 온 존재가 열망하는 지복을 어느정도 미리 맛보게 해 주려면 에로스는 절제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5. 에로스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개념을 간략히 살펴보면 두 가지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첫째는, 사랑과 신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무한과 영원을 약속합니다. 사랑은 우리 일상의 삶보다 휠씬 더 위대하고 또 전혀 다른 실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본능에 따르는 것만이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도 보아 왔습니다. 정화와 성숙이 요구됩니다. 이는 또한 포기의 길을 거칩니다. 정화와 성숙은 에로스를 거부하거나 ‘독살’하기보다는 에로스를 치유하고 그 진정한 위대함을 회복시켜 줍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긴밀히 일치될 때에 진정 그 자신이 됩니다. 이러한 일치가 이루어질 때에 에로스의 도전은 진정으로 극복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순전히 영적인 존재가 되기만을 갈망하고 육체를 단지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 거부하려 한다면, 영혼과 육체 모두 그 존엄을 잃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영혼을 거부하고 물질, 곧 육체를 유일한 실재로 여긴다면, 마찬가지로 인간은 인간의 위대함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쾌락주의자인 가상디는 데카르트에게 “오 영혼!”이라는 익살스러운 인사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오, 육체!”라고 대답하였습니다.3)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영혼만도 육체만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통합된 피조물, 곧 인간인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의 두 차원이 진정으로 일치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온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사랑, 곧 에로스는 성숙하여 그 진정한 위대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과거의 그리스도교가 육체에 적대적이었다는 비판을 자주합니다. 그러한 경향이 언제나 있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육체를 찬양하는 방식은 기만적입니다. 에로스는 단순히 ‘성’으로 전락하여 상품화 되었고, 사고파는 단순한 ‘물건’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이 상품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육체와 성을 단순히 마음대로 사용하고 착취하는 자신의 물질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무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즐기고도 문제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반대로 인간 육체의 타락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육체는 더 이상 우리 존재의 총체적 자유 안에 통합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의 전 존재를 생생하게 드러내지도 못하고 순전히 생물학적 차원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육체에 대한 표면적 찬양은 금방 육적인 것에 대한 증오로 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언제나 인간을 이원성 안의 일치로, 곧 정신과 물질이 하나로 융합되고 그리하여 정신과 물질이 모두 새로운 고귀함에 이르게 되는 하나의 실재로 보아 왔습니다. 에로스는 ‘황홀경’의 상태에서 신에게로 올라가고,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에로스는 상승과 극기, 정화, 치유의 길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6. 구체적으로, 이 상승과 정화의 길은 무엇을 내포하는 것입니까? 사랑이 그 인간적 신적인 약속을 충만히 실현할 수 있으려면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여야 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신비주의자들에게 알려진 구약 성경의 아가에서 으뜸가는 중요한 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에 따르면, 이 책 속에 담긴 시들은 본래 유다인의 혼인 잔치를 위해 만들어진 연가였으며, 부부 사랑을 드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아가에서 ‘사랑’을 지칭하는 두 가지 다른 히브리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매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도딤(dodim)’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은 아직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찾아 헤메는 사랑을 나타내는 복수형입니다. 이 말은 곧 ‘아하바(ahaba)’라는 말로 바뀌는데, 그리스어 구약 성경에서는 이 말을 그와 비슷한 발음의 아가페로 옮겨졌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가페는 성경에서 사랑의 개념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이 됩니다. ‘찾아 헤메는’ 불확실한 사랑과 대조적으로, 이 말은 이전에 풍미하였던 이기적 성격을 뛰어넘어 다른 이를 참되게 발견하는 사랑의 체험을 드러냅니다. 사랑은 이제 다른 이를 염려하고 배려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은 더 이상 자기를 찾는 것도 아니고 행복의 도취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은 포기가 됩니다. 사랑은 희생하겠다는 각오이고, 바로 그 희생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은 더 높은 차원으로 성장하고 내적으로 정화해 가며 이제 결정적인 사랑이 되고자 합니다. 결정적인 사랑이란 두 가지 의미, 곧(오로지 이 사람뿐이라는) 배타의 의미와 ‘영원’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사랑은 시간을 비롯한 온 삶을 끌어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약속은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은 영원을 바라봅니다. 사랑은 참으로 ‘황홀경’입니다. 도취 순간의 황홀경이 아니라, 자기만을 찾는 닫힌 자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 자기를 줌으로써 자아를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참으로 하느님을 발견하는 여정인 황홀경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 33)라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십니다(마태 10,39; 1625; 마르 8,35; 루카 9,24; 요한 12,25 참조).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에 이르는 당신 자신의 길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것은 땅에 떨어져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이 말씀으로, 사랑의 본질과 인생의 보편적인 본질을 밝히십니다. 이것은 당신의 희생과 당신 안에서 완성된 사랑의 원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7. 사랑의 본질에 대한 서두의 이러한 다소 철학적인 고찰은 그 내적 논리를 통하여 이제 우리를 성경의 신앙으로 이끌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이 지닌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대립되는 의미들이 어떤 근본적인 심오한 일치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의미들은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과 교회 전승이 우리에게 선포한 사랑의 메시지가 사랑에 대한 인간의 공통 체험과 상응하는 점이 있는지, 아니면 그 체험과 반대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근본적인 두 낱말을 숙고하였습니다. 곧 ‘세속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낱말인 에로스와, 신앙 안에 뿌리를 박고 신앙으로 형성되는 사랑을 드러내는 아가페입니다. 이 두 개념은 흔히 ‘올라가는’ 사랑과 ‘내려오는’ 사랑으로 대비됩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다른 구분으로, 가지려는 사랑(탐욕의 사랑, amor concupiscentiae)과 내어 주는 사랑(호의의 사랑, amor benevolentiae), 그리고 여기에 때때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랑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철한적 신학적 토론에서, 이러한 구분들은 종종 서로 명확히 대립될 정도로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내려오는 사랑, 주는 사랑, 곧 아가페는 그리스도교의 전형인 반면에, 올라가는 사랑, 가지려는 사랑, 탐욕적인 사랑, 곧 에로스는 비그리스도교 문화, 특히 그리스 문화의 전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조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인간의 삶에 근본적인 핵심 관계들과 단절되어, 하나의 동떨어진 세계, 찬미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 삶의 복잡한 구조에서 결정적으로 떨어져 나간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에로스와 아가페-올라가는 사랑과 내려오는 사랑-는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측면의 이 두 사랑이 사랑의 동일한 실재 안에서 올바르게 일치하면 할수록, 일반적으로 사랑의 참된 본성은 그만큼 더 잘 실현됩니다. 에로스가 처음에는 커다란 행복을 약속하는 매혹으로서 탐욕적이고 올라가는 사랑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다른 사람의 행복은 더욱더 추구하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을 점점 더 염려하고, 자신을 내어 주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가페의 요소가 이 사랑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로스는 타락하여 그 고유의 본성조차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인간은 내려오는 사랑, 주는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줄 수만은 없으며, 받기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선물로 받기도 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듯이, 분명히 인간은 생수의 강들이 흘러 나오는 샘이 될 수 있습니다(요한 7,37-38 참조). 그러나 그러한 샘이 되려면 그 원천에서 흘러 나오는 새 물을 끊임없이 마셔야 합니다. 그 원천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창에 찔린 그분의 심장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 나옵니다(요한 19,34 참조).
야곱의 사다리 이야기에서, 교부들은 올라가는 사랑과 내려오는 사랑, 하느님을 추구하는 에로스와 받은 선물을 전해 주는 아가페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상징화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성경 구절에서 우리는 족장 야곱이 꿈에서 그가 베고 자던 돌 위로 나 있는 층계가 하늘에 닿아 있고,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가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읽습니다(창세 28,12; 요한 1,51 참조). 교황 대 그레고리오가 ‘사목 규칙’(Regula Pastoralis)에서 제시한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에 따르면, 착한 목자는 관상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떠안고, 그 요구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나약함을 자기 것으로 삼습니다(Per pietatis viscera in se infimitatem caeterorum transferat).”4) 이러한 맥락에서 그레고리오 성인은 바오로 성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하느님의 가장 드높은 신비에까지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내려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2코린 12,2-4;1코린 9,22 참조). 그는 또한 모세의 예를 들기도 하는데, 모세는 여러 번 거듭 장막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장막 밖으로 나왔을 때 그의 백성에게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안에서는 관상으로 드높여지지만, 밖에서는 병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한다(Intus un contemplationem rapitur, foris infomantium negotiis urgetur).” 5)
8. 이리하여 우리는 앞서 제기된 두 가지 물음에 대하여 다소 일반적인 대답에 이르렀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은 서로 다른 차원을 가진 하나의 실재입니다. 때로는 이 차원이, 또 때로는 다른 차원이 더 명확히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차원이 서로 완전히 분리될 때, 기묘한 모습이 되거나 가장 빈약한 형태의 사랑으로 전락합니다. 종합적으로 보아, 성경의 신앙은 사랑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현상과 다른 대립 세계나 평행 세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전체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신앙은 인간이 사랑을 추구하는 과정에 개입하여 그 사랑을 정화하고 동시에 인간에게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줍니다. 성경 신앙의 이 새로움은 두드러진 자리, 곧 하느님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 안에서 주로 드러납니다.
성경의 신앙이 지닌 새로움
9. 먼저, 성경의 세계는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제시합니다. 주변 문화들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신들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불명확하고 모순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앙이 발전하면서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기도(Shema)의 내용이 점점 더 명확하고 분명해졌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따라서 모든 것의 하느님이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이 존재하십니다. 이 말에는 두가지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곧, 다른 모든 신은 하느님이 아니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고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창조의 개념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지만, 그분께서는 다른 많은 신들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유일하고 참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비로소 명백해집니다. 우주 전체가 그분의 창조적 말씀의 힘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분의 피조물은 그분께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분께서 바라셨고 또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중요성은 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최고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성찰을 통하여 인식하고자 노력하였던 신성은 사실 모든 존재가 열망하고 사랑하는 그 무엇이지만- 사랑을 받기에 이 신성은 세계를 움직입니다.6) -,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사랑받을 뿐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믿는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격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더욱이 그분의 사랑은 선택하는 사랑입니다. 곧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 인류를 치유하려는 목적에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분명히 에로스라 할 수 있지만, 또한 전적으로 아가페이기도 합니다.7)
예언자들, 특히 호세아와 에제키엘은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열정을 묘사할 때 대담한 관능적 표상들을 사용합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약혼과 혼인의 은유를 이용하여 묘사됩니다. 따라서 우상 숭배는 간음과 매춘이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에서 보았듯이 다산 숭배와 그 에로스의 남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봅니다. 그러나 또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느님 사이의 충실한 관계에 대한 묘사도 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펼쳐진 사랑의 역사는,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토라(Torah)를 주시어 인간의 참된 본성에 눈을 뜨게 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참된 인간애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 역사는, 인간이 한 분이신 하느님께 충실한 삶을 통하여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진리와 정의 안에 사는 기쁨, 자신의 근원적 행복인 하느님 안에 사는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저를 위하여 누가 하늘에 계십니까?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시편 73[72],25.28).
10.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에로스 또한 전적으로 아가페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전의 아무런 공로 없이도 완전히 거저 주어지기 때문만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특히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이 아가페적인 차원이 거저 주어지는 측면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간음’을 했고, 계약을 깨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과 관계를 끊어 버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복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호세 11,8-9). 당시 백성에 대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열정적인 사랑은 동시에 용서하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 사랑은 너무도 위대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스르시고, 그분의 사랑이 그분의 정의를 거스르게 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신비를 어렴풋이 미리 엿볼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위대하여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인간이 되심으로써 죽기까지 인간을 따르시고, 그리하여 정의와 사랑을 일치시키신 것입니다.
이 성경 구절에서 주목하여야 할 철학적인 차원과 종교사의 관점에서 이 구절이 갖는 중요성은, 한편으로 우리 앞에 제시된 하느님의 모습이 완전히 형이상학적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근원이십니다. 그러나 창조의 이 보편 원리, 곧 제1인성인 로고스는 동시에 참사랑의 모든 열정으로 사랑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에로스는 최고로 드높여지지만, 동시에 아가페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정화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가가 성경의 정경에 받아들여진 이유는, 이 사랑 노래들이 결국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와 인간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명확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가는 그리스도교 문헌과 유다 문헌에서 동시에 성경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는, 신비로운 지식과 체험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은 인간의 원초적 꿈인 하느님과의 결합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결합은 신성의 바다 속에 이름도 없이 가라앉는 침몰이거나 어떤 혼합이아니라, 사랑을 창조하는 일치인 것입니다. 그 일치 안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으로, 인간은 인간으로 남아 있지만, 완전한 하나가 됩니다. 바오로 성인이 말하듯이,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 6,17)
11. 성경 신앙의 첫번째 새로운은, 앞에서 보았듯이,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이와 본질적으로 연관도니 두 번째 새로움은 인간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첫 사람인 아담이 혼자여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협력자를 주시기로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서 아담이 필요로 하는 협력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온갖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그들을 온전히 그의 삶의 일부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제 아담은 자신이 필요로 하였던 협력자를 얻었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여기에서 우리는 예컨대 플라톤이 언급한 신화에도 나오는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자족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본래는 둥근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만심에 대한 벌로, 제우스는 인간을 둘로 나누어 버렸고, 그래서 이제 인간은 자신의 다른 반쪽을 갈망하고, 자신의 온 존재로 그 반쪽을 소유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완전성을 다시 회복하려 애쓴다는 것입니다.8) 성경의 이야기는 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이 다소 불완전하며, 본능적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한다는 생각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이성(理性)과 일치를 이룰 때에만 인간은 ‘완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아담에 대한 예언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창세 2,24).
이 이야기에서 두가지 측면이 중요합니다. 먼저, 에로스는 어느 정도 인간의 본성 자체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아담은 여자를 찾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는”, 찾는 사람입니다. 함께 여야만 둘은 완전한 인간성을 드러내며 ‘한 몸’이 됩니다. 두 번째 측면도 이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창조의 관점에서 볼 때, 에로스는 인간을 혼인으로, 곧 유일하고 결정적인 유대로 인도합니다. 그렇게 하여, 또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에로스는 그 가장 심오한 목적을 달성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부합하는 것이 일부일처제 혼인입니다. 배타적이고 결정적인 사랑에 토대를 둔 혼인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상이 되고, 반대로 그 관계가 혼인의 표상도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은 인간 사랑의 척도가 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혼인과 에로스 사이의 밀접한 관계와 비길 만한 것은 그 밖의 어떤 문헌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강생하신 하느님의 사랑
12.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구약성경에 대하여 언급해 왔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일한 경전인 두 성경이 서로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이미 명백해졌습니다. 신약성경의 실질적인 새로움은 새로운 개념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개념들에 살과 피를 부여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에 있습니다. 이는 유례없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성경의 새로움은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고 어떤 면에서는 전례 없는 하느님의 활동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활동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몸소 ‘길 잃은 양’, 고통받는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나서는 목자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여인, 방탕한 아들을 보고 달려 나가 안아 주는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이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십니다. 그 비유들은 그분의 존재와 활동 자체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위 죽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슬러, 인간을 들어 높이시고 구원해 주시고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행위의 절정입니다. 그것은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찔린 옆구리(요한 19.37 참조)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 회칙의 출발점으로 삼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사랑에 대한 우리의 정의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살아가고 사랑하여야 할 길을 찾아냅니다.
13.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바치는 이 행위가 영원히 현존하게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당신 자신, 곧 새로운 만나(요한 6,31-33 참조)인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심으로써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 하셨습니다. 고대 세계는 인간의 참된 음식, 곧 참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음식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지혜인 로고스임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로고스가 이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한 양식이 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행위에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우리는 강생하신 로고스를 단지 정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역동적인 행위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혼인에 대한 표상은 이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전에 그 혼인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하였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봉헌에 동참하고 그분의 몸과 피를 나눔으로써 하느님과 결합하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 낮춤에 토대를 둔 성사의 ‘신비’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작용하며, 인간의 모든 신비주의적 고양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높이 우리를 들어 높여 줍니다.
14.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차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곧 이 성사의 ‘신비’가 사회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사의 친교, 곧 영성체를 통하여 나는, 성체를 받아 모시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주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성인이 말하듯이,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모든 사람과 이루는 일치이기도 합니다. 나는 단지 자신을 위해서만 그리스도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거나 모든 사람과 일치를 이룰 때에만 그분께 속할 수 있습니다. 영성체는 내가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분을 지향하도록,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과 이루는 일치를 지향하도록 해 줍니다. 우리는 한 실존안에 완전히 결합된 ‘한 몸’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제 참으로 하나가 됩니다. 강생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두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어떻게 아가페가 성찬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에서 하느님 자신의 아가페가 몸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적이고 성사적인 토대를 명심할 때에만 우리는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로부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넘어가신 것, 또 이 핵심 계명을 신앙생활 전체의 바탕으로 삼으신 것은 단순히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또 성사 예식을 통한 신앙의 표현과 나란히 별도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예배의 관습(ethos)은 서로 얽혀 있는 단일한 실재입니다. 그 실재는 우리가 하느님의 아가페와 만남으로써 구체화합니다. 이때 예배와 윤리의 흔한 대립은 그대로 무너지고 맙니다. 성찬의 친교인 ‘예배’ 자체 안에는 사랑받는다는 사실과 그에 이어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 반대로, 아래에서 더 상세히 고찰 하겠지만, 사랑의 ‘계명’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단순한 요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먼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15. 이 원칙은 예수님의 위대한 비유들을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부자(루카 16,19-31 참조)는 저승에서, 궁핍하고 가난한 이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자기 형제들이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도움의 호소를 우리가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도록 도와주는 경종으로 삼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는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웃’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자기 동포와 이스라엘 땅에 정착한 외국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단일 국가나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긴밀한 공동체를 일컬었습니다. 이러한 제한이 이제 없어진 것입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나의 이웃인 것입니다. ‘이웃’의 개념은 이제 보편화되었지만, 구체적입니다. 이웃의 개념이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되었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며 커다란 의무를 지지 않는 사랑의 표현으로 격하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행동을 하도록 내게 요구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가까운 것과 먼 것의 관계를 언제나 새롭게 해석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위대한 비유(마태 25,31-46 참조)를 특별히 언급하여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사랑은 한 인간의 삶이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동일시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안에서 우리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16. 사랑의 본질과 성경의 신앙에서 사랑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고찰하였으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태도에 관하여 두 가지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보지 않고도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은 명령할 수 있는 것인가?”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하여, 이 질문들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하나는 그 누구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랑은 명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있거나 말거나 하는 하나의 감정이지, 의지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첫 번째 이의에 힘을 실어 주는 듯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그러나 이 구절의 전체 문맥은 그러한 사랑이 명백히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 주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너무나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가 이웃에게 폐쇄적이거나 이웃을 미워한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 됩니다. 요한 성인의 말씀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느님을 만가게 해 주는 길이며,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17. 실제로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히 보이지 않는 분은 아니십니다. 결코 다가갈 수 없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앞에서 인용한 요한의 첫째 서간(4,10 참조)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기”(1요한 4,9)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14,9 참조). 사실 하느님께서는 여러 방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에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의 마음을 얻고자 하십니다. 최후 만찬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위에서 심장에 찔리시기까지, 부활하신 뒤 나타나시기까지, 사도들의 활동을 통하여 태어나는 교회의 길을 인도하신 그 위대한 행위들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이후의 교회 역사에서도 계속 현존해 오셨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반영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사들을 통하여, 특히 성체성사를 통하여 언제나 새롭게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교회의 전례에서, 교회의 기도에서, 살아 있는 신자 공동체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의 현존을 인식하며,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그 현존을 깨닫는 법을 배웁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계속하여 먼저 사랑하십니다. 우리 또한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감정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알고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사랑 또한 우리 안에서 응답으로 꽃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을 차츰 발전시켜 나갈 때,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감정은 오고갑니다. 감정은 만나자 마자 일어나는 놀라운 불꽃일 수 있지만, 그것이 완전한 사랑은 아닙니다. 앞에서 우리는 에로스를 완전히 그 자체가 되게 하는, 말 그대로 사랑이 되게 하는 정화와 성숙의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성숙한 사랑은 인간의 모든 잠재력을 불러일으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온 존재와 관련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들을 만날 때, 사랑받고 있다는 체험에서 솟아나는 기쁨의 감정이 우리 안에서 일깨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은 또한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지성을 모두 요구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은 사랑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며, 우리의 의지가 그분의 의지에 순응함으로써 우리의 지성과 의지, 감정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의 행위 안에서 결합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으며 완성되지도 않습니다. 일생에 걸쳐 사랑은 변화하고, 성숙하며, 사랑 그 자체에 충실합니다. 같은 것을 바라고 같은 것을 싫어하는 것(Idem velle atque idem nolle) 9)이 옛사람들도 인정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비슷해지면, 의지와 사고의 공유에 이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는 사고와 감정의 일치 안에서 이러한 의지의 일치가 자라나, 우리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가 점점 더 일치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지가 내게는 더 이상 계명을 통해 외부에서 강요되는 낯선 의지가 아니라, 실재로 하느님께서 나 자신보다 더 깊이 내안에 현존하신다는 것10)을 깨달음으로써 내 자신의 의지가 됩니다. 그리하여 점점 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게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쁨이 되시는 것입니다.(시편 73[72],23-28 참조).
18.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방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하느님과 내밀한 만남을 가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러한 만남은 의지의 친교가 되어, 내 감정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나는 순전히 내 눈과 감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친구는 곧 나의 친구입니다. 다른 사람의 겉모습을 넘어서 나는 사랑과 관심의 행위를 보여 달라는 그의 내면의 열망을 깨닫습니다. 이를 어떤 정치적 필요로 받아들여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세워진 기관들을 통해서만 그에게 관심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게 될 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외적인 필요보다 휠씬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가 갈망하는 사랑의 눈길을 줄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요한의 첫째 서간이 힘주어 강조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의 필연적인 상호 작용이 드러납니다. 나의 삶에서 하느님과 그 어떤 관계도 갖지 않는 다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 이상의 것을 전혀 볼 수 없으며, 그에게서 결코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삶에서 오로지 ‘열심해지려고’, 또 ‘종교적 의무’를 다하려고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면, 나와 하느님 관계 또한 메말라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사랑이 없는 관계입니다. 기꺼이 내 이웃을 만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할 때에만 나는 하느님께도 마음을 쓸 수 있습니다. 내가 이웃에게 봉사할 때에만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시는지,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인들-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복자의 예를 생각해 봅시다.- 은 성체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 이웃 사랑의 힘을 끊임없이 길어 올렸으며, 거꾸로 그 만남은 이웃에 대한 봉사를 통하여 더욱 생생해지고 심오해졌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나뉠 수 없으며, 하나의 계명을 이룹니다. 그러나 둘 모두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외부의 ‘계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부에서 얻는 사랑의 체험에서 생겨납니다. 이 사랑은 본질상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통하여 자랍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기 때문에, 사랑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치의 과정을 통하여 사랑은 우리의 분열을 뛰어넘어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 바로 ‘우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코린 15,28)이 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