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현대 사회 안에서 고립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다른 종교들 및 현대의 무신론적인 세계와의 대화를 하려는 시도를 유발(誘發)시켰다.

    
  교회는 다른 종교들을 밝게 비추어 주려는 노력해야 한다

   대화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교회가 더 이상 무신론적인 오류들 및 그리스도의 빛을 받지 못하고 있는 종교들을 배격하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배격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명들 중의 하나이며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다른 종교들 안에 존재하는 모든 진실된 요소들을 발견하며, 다른 종교들에 인내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며, 그리스도의 빛이 그들 종교에 침투해들어갈 수 있는 방도들을 연구하기를 갈망한다.  교회는 또한 무신론이라는 심각한 병폐의 원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무신론자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우기를 추구한다.  

   대화는 진리의 양보를 동반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대화란 상대방을 진지하게 대하며 존경과 사랑으로써 접근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 손쉽게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도로 상대방의 의견들에 맞추기 위하여 하느님의 계시 내용을 변경해야 함을 절대로 의미하지 않는다.  대화란 다른 종교에 속해 있는 이 또는 무신론자가 그의 본래의 입장을 변경함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하여 교회의 필수적인 가르침의 티끌만큼이라도 변경하거나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에큐메니즘 운동은 교리의 양보를 초래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꼭 같은 말이 에큐메니즘에도 적용된다.  에큐메니즘 자체는 그 뜻이 올바로 이해된다면 위대하고 아름다운 개념이다.  그러나 교리가 양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허용하거나 암시하는 것이라면 위험한 구호에 불과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왜곡된 에큐메니즘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한다: “거짓 평화주의(false irenicism)보다 더 에큐메니즘으로부터 먼 것은 없다.  거짓 평화주의는 가톨릭 교리의 순수성을 위태롭게 하며 그 교리의 진정하고도 명확한 의미를 모호하게 한다” (Decree on Ecumenism, Unitatis Redintegratio, 제2장, 11부).  
   그리하여, 대화에 참여할 때 우리는 우리가 다른 이들의 오류들에 감염되지 않도록 극히 주의해야 한다.  불행스럽게도, 이러한 감염을 우리는 현 시대의 지적인 풍조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는 진보적인 가톨릭 신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의 행동은 내가 여러 해 전에 한 예수회 신부로부터 받았던 편지를 상기시켜준다.  그 편지에서 그는 어느 동료 신부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그 동료 신부는 반 유태인 운동에 관하여 양보를 함으로써 국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젊은 이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이 친구 신부는 성 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충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울라,'(로마 12:15)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들과 함께 어리석어라.'”

   진리를 버리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많은 진보적인 가톨릭들은 성 교회만이 하느님의 계시의 충만함을 위탁받아있다는 사실을 포기함으로써 자신들이 겸손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진리와는 전혀 거리가 먼, 자신들의 신앙의 결핍, 불안감,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구, 및 열등감 등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상대주의자 또는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 진리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기를 삼가는 것 등은 분명히 교만의 발로일 뿐이다.  분명한 자연적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겸손의 표시이다.  하물며 절대적인 하느님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맡기는 것은 진정한 겸손의 핵심이다.  

   진정한 에큐메니즘은 먼저 깊은 가톨릭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가톨릭 신자가 세상과의 진정하고도 결실맺는 대화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무릎꿇고 자신을 맡기며, 그분께서 계시해주시고 거룩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들로써 설명되어 있는 하느님의 진리에 불굴의 충성을 지닐 것을 필수적인 전제로 한다.  이러한 절대적인 신앙과 헌신이 없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교회를 대표하여 대화를 하기에 부적합하며, 그 일에 부르심을 받아있지도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어떤 무신론자들과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회칙 Ecclesiam Suam에서 대화의 상대가 가톨릭 진리에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서 다른 종류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함을 언급하였다.  분명히, 상대방이 에큐메니즘의 맥락에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무신론자인지를 우선적으로 분별해야 할 것이다.  “무신론”이라고 하는 단어의 애매성에 대해서, 그리고 여러 다른 종류의 무신론들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여기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한 특별한 종류의 무신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상세히 다루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가톨릭 신자들과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러운 일이다.  여기에서 “진정한” 대화가 강조되는 이유는 최근에 가톨릭 신자들과 공산주의자들 간의 대화가 (특히 유럽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신자들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이 이론적인 확신에 불과하다면 그런 신념을 가진 이들과의 대화는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에서와 같이 무신론이 투쟁적인 성격을 띠며, 고도로 조직화된 당의 운동으로 발전되어 있을 때에는, 특히 단어들을 선전의 무기로써 사용하고 있는 당에 속해 있을 경우에는, 대화를 위한 공동의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대화에 참여하는 한 쪽이 그 대화를 정치적 투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에는 순수한 토론의 가능성이 없다.  특히 공산당의 당원이거나 공산 정부를 대표하는 이들과의 경우가 그러하다.  공산주의자와의 대화는 오직 그가 비록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공산 정부를 대표하지 않으며 공산당의 당원이 아닐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공적으로 진지하고 솔직하게 대화에 임하겠다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대화의 순수성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가 유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의 진정한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점에 대하여 더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호한 언어를 사용하는 대화는 결실을 가져오지 못한다

   진보적인 가톨릭들 사이에 인기가 있는 일부 신학자들은 단어들을 애매하게 사용하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미래”라고 하는 단어에 대해서 그렇다.  어떤 때에는 그 단어가 “영원”을 의미하기도 하며, 또 어떤 때에는 “역사적 미래” 즉, 인간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다음에 오게 될 세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원과 역사적 미래는 완전히 다른 현실들을 의미하며, “미래”라는 단어를 그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애매모호함에 빠지게 됨을 뜻한다.  데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가 인간의 목적을 자연주의적이며 진화론적으로 해석한 것이 분명히 그러한 혼란을 초래하는 데에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영원은 개인에게 관한 것이다

   영원은 개인적인 인격체에 관한 사항이다.  그것은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이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그리고 또한 사도 신경 마지막 부분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경험되는 바를 초월해있으며, 오직 우리에게 계시되어 있는 내용이다.      

   역사적인 미래는 인류 전체에 관한 것이다

   반면, 역사적인 미래는 전혀 내세(來世)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 인격체에 대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개인의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에 관한 것이며, 다음 세대들에 관한 것이다.  물론 개인 마다에 지상에서의 자연적인 미래가 있다, 즉 “내일”이라는 미래이다.  그것은 시간의 차원을 말한다.  우리의 삶은 미래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또한 이는 우리가 경험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현실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인 개인의 미래는 진화주의와 진보주의가 말하는 역사적인 미래와는 분명히 다르다.  예를 들어, 지상에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기다리는 역사적인 미래는 한 개인의 일생에 국한되어 있는 개념이 아니다.

   영원과 역사적인 미래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역사적인 미래는 자연적이며 경험될 수 있는 세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역사적 미래에 대한 많은 것들을 확률의 의거하여 예측할 수 있다.  물론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미래가 전개될는지는 미리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미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지 않으며, 시간 안에서 구체적으로 펼쳐져 나가는 것이다.
   영원과 역사적인 미래는 너무나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두 가지가 “미래”라고 하는 하나의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를 “절대적인 미래”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를 “절대적이 아닌 미래”라고 부르는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모호함과 오류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미래”라는 단어를 역사적인 현실을 의미할 때에만 사용하는 것일 것이다.

   공산주의와 성서는 다른 의미의 “미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맑스주의자들과 종교적인 문제들을 토론하는 데에는 언어의 남용과 그로 인한 신자들의 혼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좋은 예가 1966년 9월에 헤런힘제(Herrenchiemsee)에서 있었던 대화였다.  즉 제이 비 메츠(J. B. Metz)교수와 칼 라너(Karl Rahner) 예수회 신부는 복음이 무엇보다도 미래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 단어는 오직 인간의 영원한 삶, 즉 향주덕(向主德) 중 희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어서 맑스주의도 또한 미래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맑스주의에서 미래란 오직 역사적이며 지상에서의 미래를 가리킬 뿐이다. 복음서에서는 “절대적인 미래”를 다루고 있다라고 설명하더라도 영원을 의미하는 미래와 역사적으로 앞으로 다가올 일이라는 의미로서의 미래와의 큰 차이는 제대로 분별되지 않는다.
   여기에서의 모호성은 단순한 오류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영원이라든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개념은 단순히 망상이나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단지 앞으로 인류에게 닥쳐올 일들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미래가 아니며, 인류 전체의 미래이다.
   더군다나, 복음서가 이런 종류의 미래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틀린 말이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주로 개인 인격체의 성화와 영원한 구원에 관한 것이다.  복음서에서 역사적인 미래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이 세상의 마지막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하는 종말론적인 맥락에서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이러한 종말론적인 미래가 거론된 것도 영원이라는 개념과 분리될 수는 없다.  만일 영원이 없고, 영원한 생명, 천국, 지옥이 없다면, 그것은 모든 의미를 잃게 된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하느님의 왕국의 성장에 대하여 말할 떄 (예를 들면 겨자씨가 자라는 비유 등에서처럼), 그것은 역사적인 미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강조는 하느님의 왕국에 집중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신비체, 그리고 구원되고 성화되어야 할 모든 영혼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복음서 및 성 바오로의 서간들에서 앞으로 악한 시대들이 올 것이며, 거짓 그리스도들이 출현할 것이며, 신자들이 시험과 박해를 받을 것이며, 많은 이들이 배교할 것이라는 경고들은 교회의 영적인 생명에 관한 것이지 역사의 흐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 미래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은 복음서의 절대적으로 인격체적인 성격과는 전혀 거리가 먼 전체주의적인 접근 방식이다.  복음서 안에서는 모든 개인의 인격체가 궁극적이며 진지하게 다루어져 있다.  교회의 교리가 가르치는 진정한 공동체란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공동체, 즉 전투하는 교회, 단련받는 교회, 그리고 영광 속에 들어간 교회의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며, 그 공동체 안에서 개인 인격체가 충만히 이해되고 전적으로 인정되고 있다라는 사실이 현대에 와서 너무나 자주 망각되고 있다.  개인을 전체의 한 부분으로 보는 집단주의와 교회에서 말하는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대화를 하려는 열성으로 인하여 맑스주의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미래에 대하여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잘못된 발언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인본주의”라는 용어가 모호한 뜻으로 쓰여지고 있다

   인본주의라는 용어를 모호하게 사용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보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이들이 있다.  인본주의라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의 뜻이 있다.  자연적인 인본주의, 예를 들면, 희랍적 이상으로서의 인본주의 또는 괴테의 인본주의도 있다.  그리고 크리스챤적인 인본주의와 자연적인 인본주의가 구분된다라는 말도 할 수 있다.  마리뗑(Martain)이 그리스도교는 완전한 인본주의이다라고 했을 때, 그는 이교도적인 인본주의의 이상이 불완전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앙리 드 루박 신부가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드라마”에서 취급하고 있는 무신론적 인본주의도 있다.  또 니체가 말하는 초인간의 이상을 인본주의도 있고, 포이에르바흐(Feuerbach)의 이상 또한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 또는 공산주의적 인본주의라는 말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인본주의와 서로 맞지 않는다

   먼저, 공산주의 신조에 내포되어있는 유물론은 인본주의의 이상과 부합되지 않는다.  인간이 그를 구성하고 있는 어떤 물질에 불과하다면, 인본주의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모호해질 것이다.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특성들은 모든 인본주의를 위해서 필수적이다.  인본주의적인 이상은 지적이며 윤리적인 가치들 및 그 발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유물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러한 가치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전체주의적인 본성, 즉 개인의 가치를 집단을 위한 유용성에 의해서만 측정하려는 사상은 인본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을 철저하고도 한결같이 비인격화함에 있어서 공산주의를 능가하는 사상은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 하에서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그의 모든 권리를 박탈 당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노골적인 유물론을 표방하는 반면, 국가 사회주의 즉 나치즘은 생물학적인 유물론, 즉 인종 차별주의를 들고 나온다.  이 역시 인본주의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처럼, 그것은 가공할 반 인본주의이며, 인간의 비인격화를 신봉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사회주의를 인본주의라고 규정짓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는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적인 인본주의에 대하여 말하는 데에는 주저하지 않고 있다.  사실은 두 가지 사상이 다 진정한 인본주의에 대하여 철저하게 적대적이다.  
   그리스도교와 공산주의가 인본주의에 대하여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대화의 기초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와 공산주의를 두 가지 종류의 인본주의라고 간주하는 것, 그리고는 어느 쪽이 더 인간의 필요들을 더 잘 충족시켜줌으로써 더 성공적일 것인가는 미래가 밝혀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화의 본성과 인본주의의 본성을 극도로 왜곡시키는 것이다.  사실을 이렇게 잘못 제시하는 것은 대화에로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공산주의 사이의 차이점들을 과소평가하는 위험하고도 안이한 생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공산주의자들과 대화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칼 라너 신부가 왜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도교와 공산주의의 두 진영이 인본주의적인 이상의 달성을 위하여 공존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가 공산주의의 본질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도교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크리스챤들이 인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공산주의 사상 안에서는 설 자리가 없으며, 그들의 계획을 달성하는 데에 장애물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이 단어들을 애매모호하게 사용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을 도와줄 뿐이며,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혼란을 조성할 뿐이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권장했던 그런 대화가 아니다.  

– 출처: 교황과 교회의 교도권 인터넷 카페
– 저자: 디트리히 폰 힐데브란트 교수(1889-1977)

  히틀러는 그를 두려워하였으며,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20세기의 교회 박사”라고 불렀다.  60여년 간 철학자, 영적인 저자, 나치즘에 항거하는 운동가로 활약했던 디트리히 폰 힐데브란트는 철학과 종교와 정치 그룹들을 지도하였으며, 전 유럽과 북남미를 다니면서 강연하였다.  그리고 30여권의 책들과 수많은 논문들을 출판하였다.  그의 영향은 널리 미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폰 힐데브란트는 인간에 관계되는 전반적인 분야들에서의 심오하고도 독창적인 사색가였지만, 그는 기발한 공론들과 복잡한 이론들은 본능적으로 피하였다.  오히려 그는 쉽사리 잘못 이해되고 자주 당연한 것으로 방관되는 인간 존재의 평범한 국면들의 본성과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본 힐데브란트의 철학의 대부분은 인간 인격체에 관한 것이며, 인간의 내적 도덕성과 정서 생활에 관한 것이며, 인간과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것이다.  

  폰 힐데브란트는 나치주의가 세계에 미칠 가공할 해악들을 예언하였다.  그는 또 공산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악들을 일찌감치 폭로하였다.  그리고 1960년 후반에 들어와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들에 대한 왜곡이 교회에 초래하게 될 무질서와 혼동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그가 예언을 할 당시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역사는 거듭하여 폰 힐데브란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는 30여권의 책과 수많은 논문들을 남김으로써 현대 사상들의 저변에 깔려있는 세속주의의 해독성을 불굴의 의지로 분석하고 설명하였다.  그는 공격적인 세속주의가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가장하여 인류가 지금까지 대면했던 중에서 가장 가공할 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설명해준다.

  “양떼 가운데 늑대가 들어와 있을 때 고함을 쳐서 늑대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애덕의 행위가 된다.” – 성 프란시스 드 살레즈, 신심 생활의 입문, 제3부, 2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