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카리타스,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의 사랑 실천

삼위일체 사랑의 표현인 교회의 사랑

  19.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을 보면 삼위일체를 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11) 앞의 성찰에서, 우리는 창에 찔리신 분(요한 19,37;즈카 12,10 참조)을 바라보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요한 3,16 참조)외아들을 보내시어 인간을 구원하게 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계획을 알수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의 이야기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요한 19,30). 그것은 부활하신 다음에 성령을 보내 주시리라는 예고였습니다(요한 20,22 참조). 이것은 성령의 분출을 통하여 믿는 이들의 마음에서 흘러 나올 ‘생수의 강들’(요한 7,38-39 참조)에 대한 약속을 실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신자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시키며, 몸을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요한 13,1-13 참조)무엇보다도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기까지(요한 13,1;15,13 참조)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처럼 형제들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는 내적인 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성자를 통하여 인류를 한 가족이 되게 하시려는 성부의 사랑을 세상 앞에서 증언할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이십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 활동은 역사상 흔히 영웅적인 방식으로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인간의 복음화를 추구하며, 인간의 다양한 삶과 인간 활동 분야에서 인간의 진보를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교회가 물질적 요구를 포함한 인간의 요구와 고통에 끊임없이 부응하려는 봉사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제가 이 회칙의 제2부에서 숙고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봉사입니다.

교회의 본분인 사랑

  20.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박은 이웃 사랑은 무엇보다도 신자 개개인의 본분이지만, 또한 온 교회 공동체의 본분입니다. 이는 지역 공동체에서 개별 교회, 보편 교회 전체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차원에서 그러합니다. 교회는 공동체로서 사랑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공동으로 하는 체계적인 봉사가 되려면 조직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본분에 대한 인식은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4-45). 루카는 이러한 말씀으로 교회에 관한 일종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충실성과 ‘친교(koinonia)’, ‘빵을 떼어 나눔’과 ‘기도’(사도 2, 42 참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친교’의 요소는 본래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곧 신자들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들 가운데에서는 부유한 이나 가난한 이나 더 이상 구별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사도 4,32-37도 참조).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이러한 철저한 물질적 친교는 사실상 지속될 수 없었지만, 그 근본 핵심은 보존되었습니다. 곧 신자 공동체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품위 있는 삶에 필요한 것을 거절당하는 어떠한 빈곤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21. 교회의 이러한 근본 원칙을 신천으로 옮길 방법들을 찾는 어려운 과정에서, 부제직의 기원이 되는 일곱 봉사자를 뽑은 것(사도 6,5-6 참조)은 결정적인 발전이었습니다. 실제로, 초기 교회에서는 과부들에게 날마다 배급을 주는 일과 관련하여 히브리계 사람들과 그리스계 사람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기도(성찬례와 전례)’와 ‘말씀 봉사’에 전념하도록 세워진 사도들이 ‘식탁 봉사’까지 하기에는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사도들은 주요 임무만 자기들이 맡기로 하고 교회에 필요한 다른 일들은 일곱 봉사자들에게 위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봉사자들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배급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사도 6,1-6 참조)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해야 했던 사회 봉사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영적인 봉사였습니다. 그들의 봉사는 교회의 본질적인 책임, 곧 체계화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참으로 영적인 직무였습니다. 이 일곱 봉사자 집단을 세움으로써 공동으로 질서 있게 수행하는 이웃 사랑의 봉사인 ‘부제직(diaconia)’이 교회의 기본 구조 안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22. 세월이 흐르고 교회가 더 널리 퍼져 나가면서 사랑의 실천은 성사 집전과 말씀 선포와 더불어 교회의 본질적인 영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과부와 고아, 죄수, 병자들과 온갖 궁핍 속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성사 집전과 복음 선포만큼 교회에 본질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성사와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없듯이 사랑의 실천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유스티노 순교자(†165년경)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일 거행에 관하여 말하면서, 성찬례와 관련지어 사랑의 활동을 언급합니다. 곧,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힘닿는 대로 각자 바라는 대로 봉헌을 하면, 주교는 이 봉헌을 고아와 과부, 병자, 그리고 죄수와 이방인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에 씁니다. 12) 위대한 그리스도교 저술가인 테르툴리아누스(†220년 이후)는 온갖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이 이교인들을 얼마나 감동시켰는지 이야기합니다. 13) 또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117년경)은 로마 교회를 “사랑(agape)의 수좌”14)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인이 이러한 정의로 어떤 의미에서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자선 활동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23. 여기에서 교회 안의 사랑의 봉사와 관련된 초기의 법적 구조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4세기 중반 무렵 이집트의 각 수도원에는 모든 구호 활동, 이를 테면 사랑의 봉사를 전담하는 기구인 ‘디아코니아’가 발전하였습니다. 6세기에 이르러 이 기구는 완전한 법적 지위를 갖춘 단체로 발전되어, 국가 당국도 국민들에게 배급하는 곡물의 일부를 이곳에 맡겼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각 수도원뿐만 아니라 개별 교구도 자체의 ‘디아코니아’를 갖추게 되었고, 이 기구는 동방과 서방으로 발전되어 나갔습니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604년)는 나폴리의 ‘디아코니아’를 언급하고 있으며, 로마에서는 7~8세기부터 ‘디아코니아’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자선 활동은 로마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당연히 교회의 본질적인 부분이었으며, 그 토대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칙입니다. 라우렌시오 부제(†258년)의 경우가 이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라우렌시오의 비극적인 순교 이야기는 암브로시오 성인(†397년)에게 전해졌는데, 그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성인의 참모습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의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책임자로서 라우렌시오는 교황과 라우렌시오의 동료 부제들이 체포된 다음, 교회의 재산을 모아 국가 당국에 넘기도록 얼마간의 시간을 허락받습니다. 그는 나누어 줄 수 있는 재산은 무엇이든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의 진정한 보화로 제시하였습니다. 15)이 이야기의 역사적 신빙성이 어떠하든, 라우렌시오는 교회의 사랑을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로 언제나 교회의 기억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24. 초세기 교회가 조직적인 사랑의 실천을 얼마나 중시하였는지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363년)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율리아누스는 여섯 살 때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다른 가족들이 황궁의 근위병들에게 암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겠지만, 이 잔학 행위를 스스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확실히 믿지 못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황제가 되자마자 율리아누스는 고대 로마 종교인 이교를 복구시키기로 하고, 이를 개혁하여 제국의 추진력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계획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는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증진하도록 관구장과 사제의 교계를 세웠습니다. 그는 한 서간에서, 16) 그리스도교에서 감명을 받은 유일한 측면은 교회의 사랑 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이교에도 교회의 사랑 실천을 위한 체계와 나란히 그에 비길 만한 그 나름의 활동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에 따르면, ‘갈릴래아 사람들’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본받고 나아가 능가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처럼 황제는 사랑 실천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의 결정적인 특징이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25. 그러므로 우리의 성찰에서 두 가지 근본적인 사실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가) 교회의 가장 깊은 본질은 하느님 말씀의 선포(kerygmamartyria), 성사 거행(leitourgia), 그리고 사랑의 섬김(diakonia)이라는 교회의 삼중 임무로 드러납니다. 이 임무들은 서로를 전제로 하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교회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도 되는 일종의 복지 활동이 아니라 교회 본질의 한 부분이며, 교회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데에 필수적인 표현입니다. 17)

 나) 교회는 온 세상에 퍼져 있는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이 가족 안에서는 필수품이 없어 고통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카리타스-아가페는 교회의 울타리 밖으로 확대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연히’ 마주치는(루카 10,31 참조) 가난한 모든 사람을 향한 보편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기준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보편적 사랑의 계명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면서, 교회의 가족 안에서 어떤 구성원도 가난으로 고통받지 않게 하여야 할 구체적인 의무도 지니고 있습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가르침은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좋은 일을 합시다”(6,10).

정의와 사랑

  26. 19세기 이래 교회의 사랑 활동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일어났고, 곧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활동이 아니라 정의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특수한 주장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사랑의 활동- 자선(eleemosynae)-이 실제로 부자들이 정의를 위하여 일할 의무를 회피하고 양심의 짐을 더는 수단이 되어, 그들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개별적인 자선 활동을 통하여 현상(status quo)유지에 기여하는 대신,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이룩하여 모든 사람이 세상 재화 가운데 자신의 몫을 받고 더 이상 자선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도 어떤 진리가 없지는 않지만, 오류 또한 많습니다. 정의의 추구가 국가의 근본 규범이 되어야 하며, 정의로운 사회 질서는 보조성의 원칙에 따라 공동체의 재화에서 각 개인의 몫을 보장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사실 입니다. 이는 국가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교회의 사회 교리가 언제나 강조해 온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집단의 정의로운 질서 문제는 19세기 들어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새로운 차원을 띠게 되었습니다. 근대 산업의 발전은 낡은 사회 구조를 붕괴시켰으며, 임금 노동자 계층의 성장은 사회 조직을 급격히 변화시켰습니다.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권력의 새로운 원천이 된 자본과 생산 수단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노동 계층의 권리를 억압하고 노동자들의 반발을 낳게 되었습니다.

  27. 교회의 지도자들이 정의로운 사회 구조의 문제에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성을 매우 더디게 깨달았던 사실을 인정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마인츠의 케텔러 주교(†1877년)와 같은 몇몇 선구자들이 있었으며, 점점 더 많은 집단과 단체, 연맹과 연합, 그리고 특히 빈곤과 질병의 퇴치, 더 나은 교육을 위하여 19세기에 설립된 새로운 수도회들이 구체적인 요구들을 충족시켰습니다. 교황 교도권의 개입으로 1891년에 발표된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movarum)를 들 수 있습니다. 그 뒤를 이어 1931년에는 비오 11세가 회칙 ‘사십주년’(Quadragesimo anno)을 , 1961년에는 교황 요한 23세 복자가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her et Magistra)을 발표하였으며, 바오로 6세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ssio, 1967년)과 교황 교서 ‘팔십주년’(Octogesima adveniens, 1971년)에서 당시에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심각했던 사회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저의 위대한 선임자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우리에게 사회 회칙 삼부작을 남겨 주셨습니다.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 1982년)과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oi socialis, 1987년), 마지막으로 ‘백주년’(Centesimus annus, 1991년)입니다. 새로운 상황과 문제들에 직면하여 가톨릭 사회 교리는 점진적으로 발전하였으며, 교황청 정의 평화평의회에서 2004년 펴낸 ‘간추린 사회 교리’(Comperdium sociale Ecclesiae doctrinae)안에 포괄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 혁명과 그 준비를 사회 문제의 만병통치약으로 보았습니다. 혁명과 그에 따른 생산 수단의 집단화는 즉시 더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사라졌습니다. 특히 경제의 세계화를 비롯한 오늘날의 복합적인 상황에서, 교회의 사회 교리는 교회의 영역 밖에서도 유효한 접근법을 제시하는 일련의 기본 지침이 되었습니다. 계속하여 발전해 가는 상황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인류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모든 이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맥락에서 이 지침들을 제시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8. 정의를 위한 투신과 사랑의 봉사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정의 내리려면 두 가지 근본적인 상황을 고려하여야 합니다.

  가) 국가와 사회의 정의로운 질서는 정치의 핵심 임무입니다. 아우구스티노가 말하였듯이, 정의에 따라 다스리지 않는 국가는 도적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의에서 멀어진 국가란 거대한 강도떼가 아니고 무엇인가(Remota itaque iustitia quid sunt regna nisi magna latrocinia)?” 18)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황제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합니다(마태 22,21 참조). 다시 말해, 교회와 국가의 구분 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표현대로, 현세 사물의 자율성19) 입니다. 국가는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되지만, 종교 자유를 보장하고 여러 종교인들의 화합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그 나름대로 그리스도 신앙의 사회적 표현으로서 고유한 독립성을 지니며, 국가가 인정하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그 신앙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이 두 영역은 서로 구분되지만 언제나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의는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 기준입니다. 정치는 공공 생활의 규칙을 제정하는 단순한 장치 이상의 것입니다. 정치의 기원과 목적은 정의 안에서 찾을 수 있으며, 정의는 본질상 윤리와 관련됩니다. 국가는 ‘어떻게 하면 지금 여기에서 정의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에 필연적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휠씬 더 근본적인 물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 문제는 실천 이성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성이 올바르게 작용하려면 끊임없는 정화를 거쳐야 합니다. 이성은 특수한 이해관계와 권력의 현혹으로 야기되는 어떤 윤리적 맹목의 위험에서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치와 신앙이 만납니다. 신앙은 그 고유한 본질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 곧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는 만남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또한 이성 자체를 정화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견지에서, 신앙은 이성을 그 맹점에서 해방시켜 그 자체로 더욱 완전해지도록 도와줍니다. 신앙은 이성이 더욱 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그 고유한 목적을 더욱 명확히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가톨릭 사회 교리는 바로 이러한 자리에 있습니다. 이는 국가에 대한 권력을 교회에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고유한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을 강요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목적은 단지 이성의 정화를 도와 정의로운 것을 지금 여기에서 인정하고 실현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회 교리는 이성과 자연법을 토대로, 곧 모든 인간 존재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을 토대로 삼아 논의합니다. 교회는 사회 교리에 정치적으로 힘을 부여하자는 것이 자신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교회는 정치 생활에서 양심을 형성하도록 돕고, 정의의 참된 요구에 대한 통찰력을 더욱 키우며, 그 요구가 개인의 이익과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도 정의에 따라 기꺼이 행동하도록 촉구하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정당한 몫을 받는 정의로운 사회 질서와 국가 질서의 건설은 모든 세대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가장 중대한 임무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임무로서 교회의 직접적인 책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인간의 가장 중대한 임무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성의 정화와 윤리 교육을 통하여 정의의 요구를 이해하고 정치 영역에서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자기 나름대로 이바지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는 가장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 정치 투쟁을 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됩니다. 교회는 국가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됩니다. 교회는 이성적인 토론의 길로 그러한 투쟁에 들어서야 하며, 그 정신적인 힘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그러한 힘이 없으면, 언제나 희생을 요구하는 정의는 구현될 수도 없고 진보할 수도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교회가 아닌 정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동선의 요구에 마음을 열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도록, 교회는 정의 증진을 위한 활동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나) 사랑ㅡ카리타스ㅡ은 언제나 필요하며, 가장 정의로운 사회에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의 봉사가 필요 없을 만큼 정의로운 국가 질서는 없습니다. 사랑을 제거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도 그렇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위로와 도움을 찾는 고통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외로움도 어디에나 있습니다. 구체적인 이웃 사랑의 형태를 통한 도움, 곧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상황도 어디에나 있습니다. 20) 모든 것을 제공해 주겠다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국가는 결국 고통받는 사람, 곧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심을 제공해 줄 수 없는 관료체제가 되고 말 것 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국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조성의 원칙에 따라 다양한 사회 세력의 활동을 관대하게 인정하고 지원하는 국가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활동으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러한 활기찬 세력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성령께서 불러 일으키시는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이 사랑은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흔히 물질적 지원보다 훨씬 더 필요한 도움으로 영혼을 돌보고 그 힘을 북돋아 줍니다. 결국, 정의로운 사회 구조가 사랑의 활동을 필요 없게 만들 것이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물질주의적인 인간과, 곧 사람이 ‘빵만으로’(마태 4,4; 신명8,3 참조)살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고유한 모든 속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29. 우리는 이제 교회 생활에서, 한편으로는 올바른 국가와 사회제도를 만들어야 할 임무와,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화된 사랑 실천의 관계를 더욱 저절하게 규명할 수 있습니다. 정의로운 체제의 구축은 교회의 직접적인 의무가 아니라 이성을 자율적으로 활용하는 정치계의 의무임이 드러났습니다. 교회는 이 일에서 간접적인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교회는 이성의 정화에 이바지하고 도덕적 힘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이러한 힘이 없으면, 정의로운 체제가 이루어 질 수도 없고 오래 지속될 수도 없습니다.

  다른 한편,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위하여 일할 직접적인 의무는 평신도들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국민으로서 평신도들은 개인 자격으로 공공 생활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경제, 사회, 입법, 행정, 문화 등 수없이 많은 여러 분야에서 조직적으로 제도적으로 공동선을 증진시켜야 하는”21) 참여 의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의 사명은 사회생활의 정당한 자율성을 존중하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신의 책임을 다하면서 다른 국민들과 협력하는 가운데 올바른 사회생활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22) 교회의 고유한 사랑 실천을 국가 활동과 혼동하여서는 안되지만, 평신도들의 삶 전체와 “사회적 사랑” 23)을 실천하는 그들의 정치 활동이 언제나 사랑에 젖어 들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입니다.
  또한, 교회의 사회 복지 기구들도 교회의 고유한 활동(opus proprium)을 합니다. 교회는 곁에서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책임을 지는 주체로서 교회의 본질에 부합하는 활동을 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조직화된 활동인 사랑의 실천에서 결코 면제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 각자의 사랑 실천이 불필요한 상황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정의만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며, 또 언제나 사랑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사회 환경에서 사랑의 봉사의 다양한 구조

  30. 인간에게 봉사하는 교회의 활동들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전에, 저는 여기에서 오늘날 세계에서 정의와 사랑을 위한 노력이 전반적으로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가) 오늘날 대중 매체는 우리 지구를 더욱 축소시키고 여러 민족과 문화들 사이의 거리를 급속하게 좁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함께함’은 때때로 오해와 긴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의 요구를 거의 즉각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상황과 어려움도 함께 나누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과학기술의 엄청난 진보에도, 물질적 정신적인 온갖 빈곤 때문에 세상에는 아직도 많은 고통이 있음을 우리는 날마다 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가난한 우리 이웃들을 돕자는 새로운 각오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더욱 편리해지고 인간들 사이의 거리가 어느 정도 극복되어 전세계 주민들이 한 가족처럼 된 현대에, 자선 사업과 활동은 …모든 사람과 온갖 빈곤에 다 미칠 수 있고 또 미쳐야 합니다.” 24)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화 과정의 긍정적이면서도 도전적인 한 가지 측면을 보는데, 우리는 가난한 형제자매들에게 인도주의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수단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음식과 의복을 분배하고 주택을 제공하며 보호를 해 주는 현대적이 체제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에 대한 관심은 국가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점차 전 세계로 그 영역을 넓혀 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바로 보았습니다. “이 시대의 징표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날로 커 가는, 막을 길 없는 모든 민족의 연대 의식입니다.”25) 국가 기관들과 인도주의 단체들 모두 연대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 기관들은 주로 세금 감면이나 보조금을 통하여, 인도주의 단체들은 막대한 자원을 활용하여 연대를 증진합니다. 그러므로 국가 사회가 보여주는 연대는 개인이 보여 주는 연대를 훨씬 능가합니다.

  나) 이러한 상황은 국가와 교회 기관들 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협력을 낳고 발전시켜 왔으며, 또 열매를 맺어 왔습니다. 교회 기관들은 그들의 투명한 운영과 충실한 사랑의 증언으로 국가 기관들에게 그리스도교 정신을 보여 줄 수 있으며, 상호 조정을 모색하여 사랑의 섬김의 효과를 상승시킵니다. 26) 사랑과 박애의 목적으로 수많은 단체들이 설립되어 왔으며, 이들은 시대의 사회와 정치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인도주의적 해결책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우리 시대에는 또한 다양한 봉사를 제공하는 책임을 맡은 여러 유형의 자원 봉사 활동이 성장하고 확산되고 있습니다. 27) 저는 여기에서 어느 모로든 자원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감사와 치하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광범위한 참여는 연대를 가르치고 물질적 도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기꺼이 내어 주도록 가르치는 인생의 학교가 됩니다. 예컨대 약물 사용 등에서 드러나는 죽음의 반(反)문화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잃겠다’(루카 17,33과 다른 구절들 참조)는 각오로 그 자체가 생명의 문화임을 보여 주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맞설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 안에도 새로운 형태의 자선 활동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다른 오래된 활동들도 새로운 생명과 활기를 얻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들을 통하여 복음화와 자선 활동이 서로 유익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저의 위대한 선임자이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28) 에서 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재확인 하고자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가톨릭 교회가 다른 교회와 공동체들의 사회 복지 기구들과 기꺼이 협력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근본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목적, 곧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음을 인정하고 그러한 존엄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참된 인도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하나되게 하소서’(Ut unum sint)는, 더 나은 세상을 이룩하고자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비천하며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권리와 요구를 존중”29) 하려는 노력으로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호소가 전 세계의 수많은 활동들을 통하여 폭넓은 공감을 얻게 되어 기쁘게 여깁니다.

교회의 사랑 실천의 고유한 형태

  31. 인간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단체들이 증가하는 것은 결국 창조주께서 인간의 본성 자체에 이웃 사랑의 계명을 새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세상에 그리스도교가 현존하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흔히 시대의 흐름 속에서 몹시 흐려진 이러한 명령을 끊임없이 되살리고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시도한 이교의 재건은 이러한 효과를 보여 주는 최초의 사례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경계를 넘어 퍼져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랑 실천이 그 모든 광채를 간직하며, 단순히 일반적인 사회 복지를 위한 기관 가운데 하나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교적이며 교회적인 사랑의 본질을 이루는 근본 요소들은 무엇이겠습니까?

  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은 무엇보다도 긴급한 요구와 특수한 상황에 무조건 응답하는 것입니다. 굶주린 이를 먹이고, 헐벗은 이를 입히며, 병자들을 돌보고 치유하며, 감옥에 갇힌 이들을 방문하는 것입니다.(교구, 국가, 국제 차원의) 카리타스 기구를 비롯한 교회의 사회 복지 기구들은 이러한 활동에 필요한 자원과 무엇보다도 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을 제공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합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섬기려면 우선 전문적인 역량을 갖추여야 합니다. 협력자들은 올바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양성되어야 하며, 지속적으로 돌보는 임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전문적인 역량이 일차적인 근본 요건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대하고 있으며, 인간에게는 언제나 적절한 전문적인 도움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인간애가 필요합니다. 인간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사회 복지 기구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시적인 요구만 충족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여, 그들이 풍부한 인간애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사실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가들에게는 전문적인 훈련뿐만 아니라 ‘마음의 양성(cordis fomatio)’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만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이웃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이른바 외부에서 강요되는 계명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 곧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 참조)의 귀결이 될 것입니다.

  나)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은 당파와 이념에서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의 실천은 세상을 이념적으로 변화시키는 수단이 아니며 세상의 전략에 일조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에게 언제나 필요한 사랑을 지금 여기에 현존하게 하는 한 방법입니다. 현대에는, 특히 19세기 이래로 다양한 진보 철학 사조들이 있어 왔으며, 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형태가 마르크스주의입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전략 가운데 하나가 궁핍화 이론입니다. 곧, 불의한 권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선 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불의한 제도를 적어도 어느 정도 견딜 만한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실제로는 그러한 제도에 기여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혁명 가능성을 더디게 하여,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투쟁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자선 활동은 현상 유지를 위한 수단이라는 공격을 받고 거부됩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비인간적인 철학입니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미래, 그 효과적인 실현이 지극히 의심스러운 미래의 ‘몰록(Moloch)’에게 희생되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인간답게 행동하기를 거부해서는 더욱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당파적인 전략과 원칙에서 벗어나, 기회가 닿는 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온전히 헌신하여 지금 직접 선행을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더나은 세상을 위하여 무언가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원칙이며 예수님의 원칙인 그리스도인의 원칙은 ‘보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사랑의 활동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보고 거기에 따라 알맞은 행동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공동체 행위로서 사랑을 실천할 때에는, 개인의 자발성에 더하여 계획과 전망, 다른 비슷한 기관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다) 사랑은 오늘날 개종 권유라고 하는 어떤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거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30) 그러나 이것은 이를테면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접어 두고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전인격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고통의 가장 깊은 원인은 바로 하느님의 부재입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결코 교회의 신앙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언임을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여야 할 때와 침묵하며 사랑만을 보여 주어야 할 때를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1요한 4,8참조)것을 알고, 우리가 오로지 사랑을 실천하는 바로 그때에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앞에서 제기한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그리스도인은 사랑에 대한 멸시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멸시라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하느님 없이 행동하려는 시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을 가장 잘 방어하는 길은 바로 사랑입니다. 교회의 사회 복지기구들의 책임은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의식을 강화시켜, 그들의 활동을 통하여ㅡ 또한 그들의 말과 침묵과 모범으로ㅡ 그들이 그리스도의 믿을 만한 증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 실천을 위한 책임자들

  32.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 자선 활동의 책임자들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앞의 성찰에서 이미 분명해졌듯이, 사랑의 봉사를 수행하는 다양한 교회 단체들의 참된 주체는 본당에서부터 개별 교회, 보편 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의 교회 자신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의 존경하는 선임자 바오로 6세께서는 가톨릭 교회가 추진하는 사회 복지 활동과 기구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조정하는 교황청 책임 기구로 사회복지평의회를 세우셨습니다. 주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 구조에 따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은 개별 교회 안에서 사도행전에 제시된 계획들(2,42-44 참조)을 수행하는 첫째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가족인 교회는 도움을 주고받는 곳인 동시에, 교회 밖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도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주교 서품 예식에서, 축성에 앞서 후보자는 주교 직무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드러내고 앞으로 주교직의 의무를 상기시켜 주는 몇 가지 물음에 대답하여야 합니다. 주교 후보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와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친절하고 자비로이 돌보겠다고 분명히 약속합니다. 31) ‘교회 법전’은 주교 직무에 관한 조항들에서 사랑의 실천을 주교 활동의 구체적인 한 분야로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사도직 활동들을 그 고유한 성격을 마땅히 존중하면서 조정할 주교의 책임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2) 그러나 최근에 발표된 주교들의 사목 임무를 위한 지침 ‘사도들의 후계자’(Apostolorum Successores)는 전체 교회와 각 교구의 주교에게 주어지는 책임인 사랑의 의무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으며, 33) 사랑의 실천은 교회의 행위이며, 말씀과 성사에 봉사하는 직무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교회 사명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34)

  33. 교회 안에서 사랑의 일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책임자들과 관련하여, 그들은 세상을 개선하려는 이념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며,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 참조)을 따라야 한다는 그 핵심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 그리스도의 사랑에 마음을 사로잡혀 이웃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성인이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5,14)라고 한 말씀이 그들의 활동에 영감을 주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기까지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음을 깨달아,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해서 살며, 또 그분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가 점점 더 그리스도에게서 흘러 나오는 사랑의 도구가 되고 표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가톨릭 사회 복지 기구에서 일하는 협력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전파될 수 있도록 교회와 함께, 따라서 주교와 함께 일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사랑 실천에 동참하여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모든 사람에게 기꺼이 선행을 하고자 합니다.

  34. 협력자들은 교회의 보편적 차원에 내적으로 열려 있어, 다양한 형태의 요구를 돌보는 다른 단체들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섬김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며 봉사하여야 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사랑의 찬가(1코린 13장 참조)에서 사랑은 언제나 단순한 활동 이상의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럽게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3절). 이 찬가가 모든 교회 봉사의 대헌장이 되어야 합니다. 이 찬가는 이 회칙에서 제가 말씀드린 사랑에 관한 모든 성찰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만나 커 가는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 보여 주지 않는다면 실천적 활동만으로는 언제나 부족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고통에 몸소 깊이 동참하는 것은 나 자신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나의 선물이 그들에게 굴욕이 되지 않게 하려면, 내가 가진 것뿐만 아니라 나 자신까지도 주어야 합니다. 내가 주는 선물 안에 나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35. 이러한 올바른 봉사는 도와주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 이웃이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봉사를 받는 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 곧 십자가를 선택하셨으며, 이러한 철저한 겸손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언제나 우리를 도우러 오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남을 돕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도움을 받는다고 깨달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공덕도 성과도 아닙니다. 이 임무는 은총입니다. 남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면 할 수록,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루카 17,10)라고 말하라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는 더욱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잘났거나 휠씬 뛰어나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셨기 때문에 봉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과도한 요구와 우리 자신의 한계 때문에 낙담할 수 있는 시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때에, 우리가 결국 주님 손에 들린 도구들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더 나은 세상을 이룩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지나친 자만을 버리게 해 줍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며, 그 나머지는 주님께 겸손하게 맡겨 드릴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만큼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힘을 다해 봉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힘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착한 종을 재촉하는 과업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36. 다른 사람들의 방대한 요구들 생각할 때, 한편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세상 다스림으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지금 하겠다고 하는 이념, 곧 모든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이념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결국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여겨 무기력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실제로는 파괴적인,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에 빠지지 않고, 또 이웃에 봉사하는 사랑을 가로막는 체념에 굴복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계속 가려면, 그리스도와 맺는 살아 있는 관계가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언제나 새로운 힘을 이끌어 내는 수단인 기도가 실질적으로 또 절실히 필요합니다. 상황이 절박하여 행동만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기도하는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심은 이웃의 가난과 비참을 퇴치하려는 노력을 약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캘커타의 데레사 복자의 모범은, 하느님께 기도하며 바치는 시간은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의 효과적인 봉사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봉사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1996년 사순 시기에 데레사 복자는 평신도 동료들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느님과 이러한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어떻게 맺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37. 사랑의 활동에 참여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증대하는 세속주의와 행동주의에 직면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여야 할 때입니다. 분명히,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다거나 하느님께서 예견하신 일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만나고자 하며,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에 성령의 위로와 함께 하느님의 현존을 간청합니다.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뜻에 의탁한다면 인간의 품위를 잃거나 광신과 테러의 교시에 희생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종교적인 정신은, 하느님께서 가난을 없애지 않으시고 당신 피조물에게 연민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비난하면서 인간이 감히 하느님을 판단하려 들지 않게 해줍니다. 사람들이 인간을 옹호하고자 하느님께 대든다면, 인간의 활동이 무력한 것으로 들어날 때 누구에게 의존할 수 있습니까?

  38. 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명백히 부당한 세상의 고통 앞에서 하느님께 불평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통 중에 울부짖었습니다. “아, 그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기만 하면 그분의 거처까지 찾아가련마는,…..그분께서 나에게 어떤 답변을 하시는지 알아듣고 그분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련마는, 그분께서는 그 큰 힘으로 나와 대결하시려나? ….그러니 그분 앞에서 내가 소스라치고 생각만 해도 그분을 무서워 할 수 밖에, 하느님께서는 내 마음을 여리게 만드시고 전능하신 분께서는 나를 소스라치게 하신 다네”(23,5.5-6.15-16).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태 27,46)하고 울부짖는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기도의 대화를 통하여 이러한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합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묵시 6,10)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의 고통에 신앙의 대답을 줍니다. “그대가 이해할 수 있다면, 하느님이 아니십니다(Si comprehendis, non est Deus).” 35) 우리의 외침은 하느님께 도전하거나, 하느님 안에서 잘못이나 약점이나 무관심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는 하느님께서 힘이 없으시거나 ‘잠이 들어’(1열왕 18,27 참조)계신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우리의 울부짖음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절대적 권능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가장 깊고 철저하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혼란스럽거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티토 3,4)를 믿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복잡하고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흔들림 없이 믿습니다.

  39.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함께 갑니다. 희망은 실패에 직면해서도 선한 일을 계속하는 인내의 덕과,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이고 어둠의 때에도 하느님을 믿는 겸손의 덕을 통하여 이루어 집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아드님을 내어 주셨음을 알려 주며,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참된 진리에 대한 승리에 찬 확신을 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내하지 못하고 의심 많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당신 손안에 두고 계시다는 희망, 묵시록 말미의 비극적인 표상이 가리키듯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마침내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승리하신다는 확실한 희망을 갖게 합니다.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심장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는 믿음이 사랑을 낳습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어둠에 싸인 세상을 언제나 밝혀 주고 우리에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빛, 유일한 빛입니다. 사랑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체험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의 빛이 세상에 들어올 수 있게 하십시오. 이것이 제가 이 회칙을 통하여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권고입니다.

결론

  40. 마지막으로, 모범적으로 사랑을 실천한 성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특별히, 군인이었다가 수도자가 되고 투르의 주교가 된 마르티노 성인(†367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개인적 증언의 가치를 보여 주는 표상과도 같습니다. 아미앵 성문 앞에서 마르티노는 자기 외투의 절반을 잘라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몸소 그 외투를 입은 모습으로 마르티노의 꿈에 나타나시어 복음 말씀의 영원한 유효성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너희가 내 형제들이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6.40). 36) 교회 역사에서 사랑을 증언한 다른 이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안토니오 아빠스 성인(†356년)으로 시작된 모든 수도원 운동은 언제나 이웃에 대한 큰 사랑의 봉사를 천명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대면’하면서, 이 수도자는 자신의 온 생애를 하느님은 물론 이웃에게 바쳐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성을 느낍니다. 이는 사람들을 맞아들이고 보호하며 돌보아 주는 이처럼 위대한 구조가 어떻게 수도원에서 탄생했는지 설명해 줍니다. 또한 인류의 발전과 그리스도교 교육을 위한 수많은 활동들을 펼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서, 처음에는 수도회와 탁발 수도회들이, 그리고 나중에는 교회의 역사에 걸쳐 여러 남녀 수도회들이 헌신하여 왔습니다. 몇 분의 이름만 들어 보더라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천주의 성 요한, 가밀로 데 렐리스, 비첸시오 드 폴, 루도비카 드 마릴락, 주세페 B.코톨렝고, 요한 보스코, 루이지 오리오네, 캘커타의 데레사와 같은 성인들이 선의의 사람을 위하여 사회적 사랑의 영원한 모범으로 우뚝서 있습니다. 이 성인들은 역사 안에서 참된 빛을 비추는 분들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41. 성인들 가운데에도 가장 탁월한 모범은 주님의 어머니이시며 모든 성덕의 거울이신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사촌 엘리사벳과 “석 달 가랑”(1,56)함께 지내시면서 출산이 가까워진 사촌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시어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합니다(Magnificat anima mea Dominum).” (루카 1, 46)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성모님께서는 일생의 모든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곧,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고 기도와 사랑을 통해서 만나는 하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세상이 좋아집니다. 성모님의 위대함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들어 높이시고자 한 사실에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겸손되이 그저 주님의 종이 되기를 바라실 뿐입니다(루카 1,38.48 참조).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려고 하기보다는 오로지 하느님의 계획에 온전히 당신을 맡김으로써 세상 구원에 이바지하리라는 것을 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희망의 여인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셨기 때문에, 천사의 방문을 받고 이러한 약속에 결정적인 봉사를 하시도록 부름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음의 여인이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믿으셨으니, 복되시나이다.”(루카 1,45 참조)하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성모님 영혼의 초상인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는 온전히 성경의 실, 하느님 말씀에서 자아낸 실로 짜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모님께서 하느님 말씀에 얼마나 익숙해 계신지, 그 말씀들을 얼마나 속속들이 알고 계신지가 드러납니다. 하느님 말씀이 그분의 말씀이 되며, 그분의 말씀은 하느님 말씀에서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생각이 얼마나 하느님 생각을 따르고, 성모님의 의지가 하느님의 뜻에 얼마나 일치되는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말슴에 온전히 젖어 계셨기 때문에 강생하신 말씀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여인이십니다. 어찌 그러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생각으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는 신앙인이시니, 성모님께서 사랑하는 여인이 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보이는 그분의 고요한 몸짓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시고 예수님께 알려 드리는 그분의 섬세함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드님께서 새로운 가정을 세워야 하신다는 것을 아시고, 어머니의 때는 예수님의 참된 때(요한 2,4;13,1 참조)인 십자가와 더불어 올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뒤로 물러나 계신 겸손함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달아날 때,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십니다(요한 19,25-27 참조). 나중에 오순절 때에는 이 제자들이 성모님 주변에 함께 모여 성령을 기다립니다(사도 1,14 참조).

  42. 성인들의 삶은 지상에서의 일생이 아니라 죽은 다음 하느님안에 살며 활동하는 것까지 다 관련됩니다. 성인들에게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은 인간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으로 인간에게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성모님에게서 이를 가장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서 당신 제자에게, 곧 요한과 그를 통하여 모든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라고 하신 말씀은 모든 세대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집니다.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모든 믿는 이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은 그들의 온갖 요구와 바람에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함께 모일 때에나 성모님의 어머니다운 자애와 동정녀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성모님의 자애로운 은총을 체험하고 언제나 그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무한한 사랑을 체험합니다. 모든 대륙과 문화에서 성모님께 바치는 감사의 증언들은 자기를 찾지 않고 오로지 자비를 베푸는 순수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또한 신자들의 신심은 그러한 사랑을 어떻게 가능한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직관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하느님과 이루는 가장 내밀한 일치를 통하여 영혼이 완전히 하느님으로 충만해질 때에 가능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의 샘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마신 이들이 다시 “생수의 강들이 흘러 나오는”(요한 7,38) 샘이 되게 합니다.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끊임없이 새로운 힘을 얻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성모님께 교회를, 교회의 사명을 그리고 사랑의 봉사를 맡겨 드립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어머니께서는 세상에 참된 빛을,
당신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주셨나이다.
어머니께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시어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선의 샘이 되셨나이다.
저희에게 예수님을 보여 주소서.
저희를 예수님께 인도해 주소서.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어
저희도 참된 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목마른 세상 한가운데에서
생명의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되게 하소서.

로마 성 베드로좌에서
교황 재위 제1년
2005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교황 베네딕토 1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