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은 묵주기도의 도시다.
   묵주기도의 모든 말씀의 배경은 로마가 아니라 이곳이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계시는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도 없었다.
   돌 하나를 기억하는 것도 예루살렘에서였다.
   예루살렘은 묵주기도의 현장이다.
   모든 묵주기도가 이 도시와 연관된다.

열쇠 구멍을 통해 복음의 장소를 보다

   묵주기도에 적합한 시간은 ‘언제 어디서나’다. 특히 곤경에 빠졌을 때 바로 그때가 묵주기도를 드릴 시간이다. 2002년 10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에서 ‘묵주기도의 해’를 선포했다. 햇살이 환히 비치던 오후였다. 그에게는 교황 즉위 희년을 축하하는 전 세계의 모든 잔치 중에서 이 때가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고 또 분명 가장 기쁜 일이었다. 그날 그는 더 이상의 청원기도를 드리지 않았다. 대신 묵주로 바치는 염경기도가 다시금 교회 안에서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그가 가져온 것은 단지 묵주기도의 구조가 결정적으로 완전히 새로워진 것이다. 묵주기도를 하는 동안 150번의 성모송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묵주기도는 모든 수도자들이 매일 기도하는 150장의 시편에 비유되어 수세기 전부터 “백성의 시편”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2002년 10월 이후, 묵주기도의 새로운 신비는 네 복음서를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원자폭탄과도 같은 큰 내적 도약이었다. 놀랍게도 우리는 새로운 신비가 첨가되고 일년도 되지 않아 왜 좀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묵주기도는 완성되고 완벽해 보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어머니의 눈으로 고찰하는 것은 천재적인 방법이라고 했으며, 예수님은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오래된 선조들의 기도는 하느님의 관점을 보기 위한 일종의 도구가 아닐까? 그렇다. 교황은 묵주기도를 “우리 삶의 구원을 위한 가장 적합한 도구”라고 말한다.

   소박한 묵주가 교황의 손안에서 세상을 바꿨다. 묵주기도는 교황의 힘과 기쁨의 비밀이다. 그 사실은 특히 지난 10월, 교황이 묵주기도의 해를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마리아 성지인 폼베이에서 마지막 여행을 마무리하며 성대하게 끝마쳤을 때 다시 한번 분명해졌다. 우리가 그 증인이다. 그는 오랜만에 아주 기쁘고 평안해 보였다. 우리 자리는 죄수들 옆이였다. 그들은 베드로의 후계자와 함께 새로운 네 번째 신비인 ‘빛의 신비’를 바치기 위해 이곳 마리아 대성당 앞에 모인 것이다.
   교황은 묵주기도의 세 가지 신비에 이제 반짝이는 요르단강을, 갈리래아의 푸른 들을, 산상설교의 광휘를, 다볼산의 빛을, 빛나는 시온산을 첨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은 ‘성체성사적 묵주기도’다. 그 신비는 요르단 강을 거치고,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가나의 혼인잔치를 거쳐 마침내 우리를 최후의 만찬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부터 깊이를 잴 수 없는 유일한 신비인 모든 감실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기도를 교황과 함께 바치기 위해, 빽빽이 들어찬 군중 속에서 연단 앞 오른쪽 귀빈석을 이 죄수복의 청년들이 차지했다. 그 옆에 나폴리에서 온 수녀들과 지역 합창단이 있었다. 마침내 교황이 휠체어를 타고 성모님의 이콘 앞에 나타나자 몇몇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목 놓아 울었다. 어떤 사람들은 문신이 그려진 팔을 높이 쳐들었다. 20m앞에서 병들고 연로한 교황이 어머니의 품안에 안긴 젖먹이처럼 그렇게도 마음속 깊이 기쁨에 넘쳐 웃고 있었다. 그는 묵주를 높이 쳐들고 군중들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삶에서 더 이상 이룰 것은 없어 보였다. ‘빛의 신비’는 그의 아름다운 유산이다. 모든 기도 중에서 가장 단순한 기도가 그의 영원한 유산이 되었다. 소비에트도, 소비에트가 붕괴한 것도 곧 사람들에게 아주 잊혀질 것이다. 오래전 몽고침략이 그랬던 것처럼, 지구의 반쪽을 지배하는 멍에로 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에서 교황이 차지했던 몫은 이제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묵주기도의 네 번째 신비는 앞으로 적어도 500년 동안은 수없이 많은 마음과 입술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묵주기도는 참으로 무엇인가?” 얼마 전 어느 글에서 교황은 이렇게 묻고 대답했다.  “그것은 복음의 요약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삶의 중요한 장면으로 우리를 끊입없이 들어가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묵주의 신비를 실제로 ‘숨쉬게’ 한다. 묵주기도는 관상의 왕도다. 그런 점에서 묵주기도는 마리아의 길이다. 누가 마리아 보다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사랑하겠는가?”

다른 방식의 세계관

   그것이 ‘복음의 요약’이라니? 그 풍부한 복음에서 겨우 20개의 장면만을 생각하는데도?
   나도 몇 년 전에 그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오펜바흐의 노사제 한 분이 뮌헨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 ‘당신 육신의 열매인 예수는 축복받으소서. 예수께서 오, 동정녀 당신께 하늘나라에서 관을 씌우셨나이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가?” 그러자 그저 웃기만 했다.
   “묵주기도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묵주기도는 묵상하는 것이다.” 묵주기도는 말 그대로, 또 다른 방식의 세계관이다. 그것은 고찰을 통해, 끊임없는 인지를 통해, 반복해서 바라봄을 통해 이해된다. 묵주기도의 모든 신비 안에서 우리는 구원사의 다섯 가지 장면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각기 다른 20개의 신비를 복음의 방을 들여다보는 열쇠 구멍처럼 상상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프리즘을 통해 보듯, 더욱이 교황의 말처럼 “예수님의 어머니의 눈으로”, 예수님 안에 계신 하느님의 참된 모습을 더욱더 잘 이해하게 된다. 열쇠 구멍을 통해 보는 것은 언제나 새롭다. 그것은 더 깊이 보게 한다. 있는 그대로 순수한 신학이 보인다. 그것은 신학자를 위한 신학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신학이다. 그것은 무성한 말로 이루어진 신학이 아니라, 기도로 둘러싸인 신학이다. 그것은 조각조각 해부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조각들을 하나로 조합하여 본다. 어떤 시대 정신도 어떤 이데올로기도 이러한 시각을 빼앗을 수 없다. 묵주기도는 전례 다음으로 “무릎꿇고 기도하는 신학”(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보조 수단이다. 신학은 이성의 전시가 아니다. 그것은 이성을 해방시킨다. 그런 이유로, 손가락은 아주 중요하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바치기 위해 손가락으로 묵주알을 규칙적으로 굴려 만들러진 장미 꽃다발. 그것은 시선과 이성을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 하는 일종의 점자 블럭의 역할을 한다. 숫자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 그냥 손가락에 완전히 맡겨도 괜찮다.

   묵주기도는 무릎을 꿇고 바칠 수도 있고 걸어가거나 서서 또는 버스나 기차 안에서 바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대한, 수난에 대한, 부활에 대한 그리고 이제 마찬가지로 3년의 공생활에 대한 언제나 새로운 시각으로. ‘고통의 신비’는 멜 깁슨이 만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보다 이미 수백 년 앞선 것이다.
   묵주기도의 모든 신비는 우리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거룩한 땅과 그리스도의 존재를 하나로 묶는다. 묵주기도는 하나의 작은 순례여행이다. 또한 모든 기도 중에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감미로운 기도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는 먼저, 자주, 무의식적으로 온전하게 바쳐질 때, 무엇보다 매일 반복적으로 바쳐질 때 꽃을 피운다. 그러면 그것은 온 삶을 변화시킨다.
   그렇다. 규칙적인 묵주기도는 삶을 변화시킨다. 천천히 또는 빨리 바쳐도 20분이면 충분하다. 그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고, 더 빨리 끝날 수도 있다. 성 비오 신부는 얼마나 빨리 묵주알을 돌렸던지 묵주알이 송어를 쏘아 맞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묵주기도를 다 바칠 수도, 반만 바칠 수도 있다. 그것은 규칙도 아니고 피정도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머무는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쉽고, 불안을 없애주고, 아주 단순하다

   전에는 사람들이 묵주기도를 바치다 잠들면 천사들이 대신 계속해서 바친다고 말했었다. 오늘날 달라야 할 이유가 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진맥진한 권투 선수가 로프에 매달리듯 묵주를 꼭 잡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하나의 새로운 구명조끼니까.
   묵주기도는 특별하고도 긴장된 정신 집중을 통해 얻어지는 그런 기도다. 그러나 묵주기도는 시간을 뺏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준다. 묵주기도는 안전과 자유를 주며 두려움을 없애준다. 또한 평정을 준다. 우리가 이 기도를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 이 기도가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 진정한 기도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손가락과 입술과 마음 깊은 곳에서 바치는 기도. 묵주는 행복이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는 묵주가 천벌을 받은 사람을 지하 세계에서 끌러올리는 사슬로 쓰인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묵주기도를 할 수 있다. 버스 안에서도, 택시 안에서도, 교통이 아무리 막혀도 묵주만 있으면 상관없다. 오로지 휴식과 평화를 위한 기회가 된다. 물론 묵주기도는 정신을 가다듬고 집중하게도 하지만, 잠이 오게 하고 피곤과 긴장이 풀리게도 한다. 묵주기도는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 마치 비가 메마른 땅에 스며들 듯 존재의 바닥을 적신다.
   묵주기도는 가볍게 한다. 묵주기도는 불안을 없앤다. 묵주기도는 아주 단순하다. 버스 안에서, 소란함 속에서, 고요함 속에서, 기쁠 때나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발밑에서 더욱 견고한 양탄자가 짜지듯, 규칙적인 반복 속에 우리의 삶을 짜 넣는 그런 기도다. 묵주기도는 화살기도가 아니다. 수도원 담 밖에서 그 기도는 기도하는 삶의 어머니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그런 이유로 묵주기도는 우리 삶과 죽음을 변화 시킨다.

   오늘 아침, 나의 형, 칼 요셉이 베를린에서 묵주를 손에 쥔 채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가 왔다. 6주전, 그는 어른이 된후 처음으로 묵주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놓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눈 앞에 형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형을 사랑하고 존경했었는지. 창밖으로 예루살렘의 별과 불빛을 본다. 그리고 이 모든 슬픔속에서도 묵주의 장미 꽃다발 안에 하나의 기쁨이, 죽음보다 더 강한 기쁨이 우리를 연결하고 있음을 알고, 느끼고, 경험한다.
      

– 파울 바데(디 벨트지 현 로마 특파원, 2002년까지 예루살렘 특파원)
– 마리아 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