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티없는 성심은 너의 피난처가 될 것이며, 너희를 하느님께로 이끌러가는 길이 될 것이다.”
(1917.6.13. 파티마 성모님)

  인류 역사 속에는 그리고 모든 개인의 삶의 역사 속에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분명한 계획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을 얻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은 마리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을 주시는 것이다. 이천 년 역사의 그리스도교는, 주님께서 우리가 당신 어머니를 언제나 인식하고 사랑하며 본받고 당신 어머니께 귀 기울이고 영광 드리기를 원하신다고 증언한다. 주님의 어머니는 당신의 찬미가인 마니피캇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형식 중의 하나를 고찰할 때, 우리는 그것이 바로 마리아께 봉헌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3세기부터 전해져오는 가장 오래된 마리아의 기도인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Sub tuum praesidium)’는 마리아께 의탁하는 백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세월 동안 이와 유사하게 마리아게 봉헌한 예들이 더 많이 나타난다. 17세기에 이르러 마리아께 봉헌하는 일은 전국적으로 행해졌으며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성인에게서 더욱 심화된 명확한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뒤이어 파티마의 성모 발현은 봉헌의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이때부터 개인적.집단적 봉헌이 셀 수 없이 많아진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2년,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였고,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날 때 이 봉헌을 갱신하고, 노나리아를 방문하여 이렇게 천명하였다. “마리아 신심이 없으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자신을 가르켜 ‘Totus Tuus(온전히 당신의 것)’, 즉 자신이 완전히 마리아께 속해있음을 이 세상에 보여 준 사람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였다. 그는 방문한 모든 나라를 마리아께 봉헌하고 나아가 세상을 봉헌했다.

봉헌의 삶

  마리아께 봉헌하기는 쉽다. 그러나 봉헌의 삶을 사는 것은 어렵다. 마리아께 봉헌하는 것은 의미하는 바와 책임이 많은 복합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형식에 있지 않고 삶의 전반적인 쇄신, 새로운 길, 다시 말해 복음의 참된 길을 걷기 시작하는 데 있다. ‘하나의 길’.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증명하듯이, 초대 교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이 ‘길’이란 단어로 표현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리아께 봉헌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끊임없는 심화를, 마리아께 봉헌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요구하는 이유를, 사람들이 해마다 이를 반복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루도비코 성인은 한 달간 준비할 것을 권한다. 33일간의 기초적인 가르침과 기도는 그 실행을 쉽게 한다.

  예수님은 마리아께 의탁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 드리는 봉헌의 여러가지 면과 그 의미를 생각해보자.

  1) 마리아께 봉헌한 사람들은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인식하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받아들였던 것과 똑같이, 하느님 뜻에 따르려는 열린 정신으로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만 되시것이 아니다. 그녀는 ‘주님의 종’ 이고,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고 깊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께 봉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2) 봉헌을 통해 괄목할만한 결과를 얻는다. 마리아께 봉헌하는 것은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를 모범으로 삼고, 주님을 향항 그녀의 충실함 속에서 그녀를 따르는 것이다. “누가 나의 어머니인가?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자다.” 또한 마리아는 이런 말로 우리를 격려한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것이 성서가 전하는 그녀의 마지막 말, 소위 그녀의 약속이다.루도비코 성인은 마리아께 봉헌하는 것은 그리스도적 삶의 책임을 갱신하는 것으로, 이것은 그녀가 한 그 말 속에 나타나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곧 세례 때의 선서를 갱신하는 것이다.

  3) 또 하나의 중요한 면은 십자가 상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우리에게 어머니로서 주신 것이다. 마리아께 봉헌하는 것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이 새로운 모성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우리 삶 안에 그녀를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모든 행위, 모든 생각을 ‘마리아와 함께, 마리아를 위해, 마리아 안에서’ 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참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4) 마리아를 받아들이는 데서 좀 더 큰 확신이 생겨난다. 즉 마리아의 활동은 그녀가 하늘나라에 감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서 계속되어,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도록 하며 그들을 구원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마리아께 봉헌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섬김의 왕권과 마찬가지로 마리아가 여왕으로서 지배하는 것이 아느라 섬기러 왔다는 점에 근거한다. 또 봉헌은 모든 은총의 보편적 중재자인 그녀의 힘에 의지한다. 따라서 마리아께 봉헌하는 것은 영적인 은총과 더불어 세속적인 은총을 위해서 도움과 보호를 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생각하시니까. 그것이 마리아 공경이 어려운 시기에도 개인과 민족들의 봉헌으로 더 활성화되는 이유다. 우리는 지금 큰 변혁의 전야에 있지 않은가?

사랑의 모후여, 예수님께서 ‘계명’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참된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서 승리하도록, 그로써 사람들이 줄 수 없는 부활의 열매인 참된 평화를 우리가 받을 수 있도록 회심의 수단, 기도의 수단인 봉헌을 축복하소서!

– 가브리엘 아모스 신부
– 마리아 133호 (2005년 9~10월)
– medjugorj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