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문화평의회와 종교간대화평의회는 최근 현대 세계와 문화 안에 깊숙하게 확산돼 있는 뉴에이지 현상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담은 문헌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물을 가진 분, 「뉴에이지(New Age)」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가톨릭신문은 이 문헌에 대한 해설과 요약을 게재한다.
“신앙에 대한 긴급한 도전”
현대문화 이끌 사목 프로그램 시급 / 교황, “고대 영지주의로의 회귀” 경고
한국 주교회의는 지난 2000년 3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뉴에이지 운동, 특히 선과 명상 등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다. 이에 앞서 1997년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는 「건강한 신앙 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을 발표해 「뉴에이지 운동과 건강이나 치병과 관련된 비술과 영술 운동」에 대해 지적했고 2001년 1월에는 서울대교구에서 「기 수련 문화에 대한 주의 환기」 공문을 발송했다. 이처럼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뉴에이지 운동은 여러 가지 형태로 확산돼 있다. 하지만 막상 신자들은 이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상태이다.
교황청에서 발표한 이번 문헌은 전세계적으로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뉴에이지 운동을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식별하고 평가할 수 있는 종합적인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문헌은 93쪽 분량에 상당히 깊이 있고 구체적인 분석과 평가를 싣고 있다. 뉴에이지가 발생하게 된 역사적, 사회문화적 배경, 그 특성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영성과 비교분석하고 있으며 말미에는 관련 문헌과 연구서 목록, 그리고 뉴에이지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문헌은 특히 하나의 영성운동으로서 뉴에이지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및 영성과 어떻게 차이를 보이며 어떤 영향을 그리스도교에 미칠 수 있는지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신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교황청 문화평의회 의장 폴 푸파드 추기경은 2월 3일 기자회견에서 『뉴에이지 현상은 다른 신흥종교운동들과 함께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가장 긴급한 도전 중 하나』라며 『깊은 위기에 빠진 문화, 그리고 그 위기에 대한 잘못된 응답』이라고 말했다.
추기경은 특히 이런 상황에 대해 무엇보다도 『명백하고 지혜롭게 그리스도교 교리를 제시해야 한다』며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뉴에이지를 탄생시킨 현대 문화를 지도할 사목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종교간대화평의회 의장인 마이클 피츠제랄드 대주교는 뉴에이지 현상에 긍정적인 요소도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볼 때 분명히 그리스도교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이번 문헌은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헌의 반포 배경
문헌은 간단한 전문에 이어 크게 9개 부분으로 나눠진다. 제1장에서는 성찰의 취지와 문헌 반포 배경에 대해 설명한다. 이 연구는 교황청 문화평의회, 종교간대화평의회를 비롯해 인류복음화성, 일치평의회 등 교황청 여러 부서의 실무 연구진들이 함께 작업을 한 결과이다. 이 성찰은 우선 뉴에이지 운동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어떻게 다른지를 일선 사목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문헌은 가톨릭 신자들이 뉴에이지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 가톨릭 교리와 영성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며 하나의 문화적 조류로서 뉴에이지를 알고 이해하도록 촉구한다. 물론 문헌은 뉴에이지에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 해답을 주지는 않으며 그것을 이해하고 참된 대화를 나누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점성가들은 제삼천년기의 시작은 예수 탄생 2000년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시대인 물고기자리의 시대에서 물병자리 시대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뉴에이지」란 현대 문화에 충격을 준 이 시점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 중의 하나이며 어떤 것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와 일치하는지 안하는지를 식별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에 이제 뉴에이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평가가 있어야 할 때임을 지적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확실성과 불확실성 사이를 헤매고 있다. 기존 종교나 정치 체제들은 더 이상 현대인들의 깊은 내적 열망에 해답을 주지 못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뉴에이지는 이처럼 기존의 제도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다.
문헌은 뉴에이지의 종교성이 어떤 면에서는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영적 갈망과 일치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계시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특히 「대안적」 접근이 자주 시도되고 피정센터, 신학교, 수도회 등에서조차 이러한 움직임이 발견된다. 고대나 동방 종교에 대한 책이나 수련 등이 붐을 이루기도 한다.
뉴에이지는 2~3세기의 영지주의와 자주 연관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뉴에이지를 가장한 고대 영지주의로의 회귀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뉴에이지의 발흥은 교회에 도전이다. 사람들은 종종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사람들의 깊은 내적 갈망에 대답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약 교회가 이러한 갈망에 귀를 막고 있을 때 사람들이 취할 태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더욱 깊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곳을 찾아 나설 것이다.
뉴에이지의 영성
문헌은 뉴에이지의 모든 요소를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그리스도교 교리와 영성에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뉴에이지는 이른바 「신흥 종교 운동」이 지칭하는 일반적 의미에서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고 사교(cult)나 종파(sect)로 분류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화들 안에 퍼져있고 음악, 영화, 세미나, 워크샵, 피정, 치유, 등등의 여러 활동과 사건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더 혼란스럽고 비공식적인 것이다.
뉴에이지는 단일한 운동이 아니라 유사한 접근을 하는 참여자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알 필요도 없고 만나는 일도 드물다. 하지만 이들은 상당히 일관성 있는 사고방식을 가진 것은 지적할 만하다. 뉴에이지적 요소를 지닌 많은 경향, 관행, 태도들은 현대의 주류 문화에 대한 어떤 유사한 반응을 한다는 점에서 「운동」이라는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뉴에이지 종교」라는 표현은 더 논란이 많으므로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그들 자신들도 조심스럽게 「종교」와 「영성」을 구분한다. 그들은 제도화된 종교가 자신들의 필요에 응답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부하며 그 때문에 「영성」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뉴에이지의 핵심 중 하나는 특정 종교의 시대가 끝났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들의 자기 이해와도 어긋나는 것이다. 하지만 비교(秘敎, esoteric)적인 종교성의 맥락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다.
뉴에이지가 급속히 확산된 이유
현대 소비사회 성향 맞춰 자연스럽게 전파.대중화
단순 ‘영적’ 차원 넘어 초자연적 특정 종교와 밀접히 관련돼
오늘날 뉴에이지는 서구 사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폭으로 확산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이처럼 뉴에이지가 사회와 문화 전반에 급속한 속도로 확산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문헌은 뉴에이지가 혹독하고 냉혹한 세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세상을 따뜻하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라고 분석한다. 경제적 불안, 정치적 불확실성, 그리고 기후 변화 등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는 사람들이 대안적인, 즉 우주와의 관계에 있어서 낙관적인 관계를 추구하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확산은 전체성과 행복의 추구라는 면에서 종종 영적인 수준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여기서 뉴에이지가 다양성이라는 시대적 특징을 바탕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형태와 수준에서 뉴에이지와 접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어떤 집단이나 운동에 「속한다」거나 뉴에이지의 바탕이 되는 원칙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배경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 채 특정한 치료법이나 수련에 참여하게 되며 단순히 우연하게 뉴에이지라는 이름이 붙은 상품들을 활용하는 소비자일 뿐이다. 예를 들어서 향기치료법을 사용하거나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대개 그것이 건강에 도움이 되고 편안한 생활을 하는데 주는 영향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따라서 뉴에이지의 주제들에 대해 깊이 파고들거나 이론적인 의미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소수일 뿐이다.
이런 경향은 오락과 레저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현대 소비사회의 성향과 딱 들어맞는다. 이러한 「운동(movement) 」은 시장의 법칙에 제대로 적응한 것이고 뉴에이지가 이처럼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은 그것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갖고 있는 매력적인 요소에도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어떤 문화에서는 뉴에이지가 시장 경제 원칙들을 종교적 현상에 창조적으로 적응시킨 상품의 형태를 띤다. 사람들의 영적인 요구로부터 이윤을 창출하는 방법이다. 현대 경제에서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뉴에이지는 세계적 현상이며 매스 미디어에 의한 정보 유통에 능숙하다.
현대 세계가 매스 미디어에 의해 창조됐다고 볼 때 뉴에이지의 「신봉자들」과 동조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개념과 견해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대중 문학과 매스컴에 의해 확산된다.
하지만 뉴에이지적인 사고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것이 우연한 일인지, 아니면 의도된 것인지를 증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는 매우 느슨한 형태의 「공동체(community)」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의한 사이버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뉴에이지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선택적인 의미에서 비인격적이 되거나 인간 관계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뉴에이지는 매우 느슨한 형태로 이뤄지는 일련의 신념, 치료법, 수련 방법으로서 광범위하게 대중화됐다. 이는 일관성 없이 선택적이거나 자의적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이는 「우뇌」 직관적 사고에 바탕을 둔 세계관 안에서 이뤄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뉴에이지적 사고방식의 기본적인 특성들을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뉴에이지의 많은 요소들이 특정 종교에 속한다기보다는 단순히 「영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특정한 동방 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 것이 많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뉴에이지를 조직적으로 전파하는 것에 대한 문제는 상당히 복잡한 주제이다. 일부 집단들은 뉴에이지에 대해 음모론에 바탕을 두고 비난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영향력으로 결정되는 동시적인 문화적 변화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단지 뉴에이지가 인류를 일치시킬 수 있는 우주적 종교가 발생하는데 필요한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 대안적인, 또는 초자연적인 특정 종교라는 목적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지닌 집단들과 공유하려 한다는 점만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바로 지구적 윤리(Global Ethic)를 계발하려는 노력들이다. 이러한 윤리적 틀은 현대 문화, 경제, 정치가 지닌 지구적 특성을 반영한다. 나아가서 환경 문제의 정치화는 명백하게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이나 「어머니 지구」(mother earth)의 전체 문제와 관련된다.
고대 종교 문화서 유래…‘신영성’이라 할 수 없어
뉴에이지는 ‘새로운 영성’?
뉴에이지는 종종 「신영성(newspiritualit y)」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그 사상 대부분이 고대 종교와 문화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은 「새로운 영성」이라 불리우는 것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뉴에이지에서 실제로 새로운 것은 서구 문화와 유대-그리스도교적 종교의 뿌리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은 실재 전체와의 내적 조화와 일치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모든 생명의 핵인 우주적 힘(force), 또는 에너지와의 깊은 연관성을 발견하고 그때 완성을 향해 나아가 자기의 삶과 세계와의 관계를 식별하며, 지속적인 진화 안에서의 새로운 창세기(New Ge nesis)를 맞이한다. 그 결과는 우주적 신비주의(cosmic misticism)이며 이는 역동적 에너지에 대한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우주적 에너지, 떨림(vibration), 빛, 신, 사랑, 초자아(supreme self) 등 이 모든 것은 하나이며 동일한 실재, 즉 모든 존재 안에 존재하는 일차적 원인(primal source)을 지칭한다. 이런 영성은 2가지 요소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인 것이다. 전자는 뉴에이지의 이교적이고 신지학적(theosophical)인 뿌리에서 유래하며, 이는 새로운 형태의 영지주의이다.
신성에 도달하는 것은 숨겨진 신비를 파악하는 것인데 이는 각 개인이 드러나 있는 것의 참된 이면, 시간을 초월하는 근원, 육화한(incarnate) 개인들을 넘어서는 우주적 신성을 모색하는 노력으로 가능하다. 이교적 영성은 『존재의 분열을 넘어선, 존재의 탐구이며 일종의 상실한 일치에 대한 향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교적 영성의 영지주의적 특성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역사를 부정하고 영성이 시간 또는 어떤 제도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자렛 예수는 신이 아니며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의 여러 역사적 현신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영성의 심리적 요소는 이교 문화와 심리학의 만남으로 이뤄진다. 뉴에이지는 개인적인 심리-영적 변모를 경험하는데 이는 종교적 경험과 유사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변모가 개인적인 위기나 오랜 영적 수련 후의 깊은 신비 체험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명상, 치료 또는 의식을 변화시키고 실재의 일치에 대한 내적 통찰력을 주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에서 온다고 말한다.
영적 나르시시즘(narcissism)
일부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뉴에이지 영성을 일종의 영적 나르시시즘 또는 가상의 신비(pseudo-mysticism)로 규정한다. 이런 비판이 데이빗 스펜글러(David Spangler)와 같은 주요한 옹호자에 의해 제기된 것은 흥미롭다.
그는 개인과 집단들이 모험과 권력에 대한 자신의 환상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며 이런 수준의 일차적 특징은 개인적 세계에 집착하고 그에 따라 세상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수준에서 뉴에이지는 낯설고 기괴한 존재, 지도자, 숙련자, 외계인 등에 의해 확산된다.
그는 이어 뉴에이지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나열해 지적하기도 한다. 즉 과거로부터의 소외, 자신만을 위한 집착, 전체와 일치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맹목과 분별없는 행동, 심리적 현상과 지혜의 혼동 등이다.
하지만 그는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기적, 비이성적 나르시시즘은 단지 일부에 국한된 것이며 뉴에이지의 긍정적인 요소는 변화의 모상, 성스러운 것의 육화이며 대부분은 매우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며 생명과 내적 성장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뉴에이지 상품들에 대한 비판은 미국의 예수회원인 데이빗 툴란에 의해 정리된다. 그는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내적 삶을 발견하고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지녔다고 하면서도 너무나 쉽게 개인주의에 빠지고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간주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의미에서 뉴에이지 영성은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기 부정을 포함하지 않는 한 불교적인 명상과도 다르다고 말한다.
신비적 일치의 꿈은 실제로는 단지 가상의 일치이며 이는 결국 인간을 더 외롭고 불만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최면술 등 신비 요법으로 인간이 구원자 역할 수행
뉴에이지의 종교성에서 개별적인 요소들을 전체적인 틀에서 분리해 평가할 수 없다. 그 영지주의적 요소로 인해 뉴에이지는 전체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일부 실용주의자들은 뉴에이지를 단지 마케팅 전략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며 따라서 뉴에이지 운동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들을 엄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다음은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의 신앙 요소들을 비교한 것들이다.
인격적 존재로서의 하느님
뉴에이지의 하느님(God)은 애매한 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매우 명확한 개념이다. 뉴에이지의 하느님은 비인격적인 에너지이며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거대한 의식(Great Consciousness)이다. 하느님은 세상 밖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안에 존재하며 만약 자기 자신 밖의 어떤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며 모든 삶의 원천이다.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기 위해 세상을 창조한,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을 지닌 인격적 존재이다. 하느님은 우주의 에너지가 아니라 세상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피조물과 나누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구원으로 이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분이다
뉴에이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현자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예수는 영원하고 비인격적인 우주적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이라며 예수는 유일한 그리스도로 간주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을 부정하거나 그리스도로서 예수가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한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서가 말하는 나자렛 예수, 마리아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성자, 참된 인간이며 참 하느님, 하느님 진리의 참된 계시,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로 고백한다.
인간은 우주적 존재인가?
뉴에이지의 수련 방법들은 인간이 신비적 상태를 자유자재로 만들려는 것이다. 즉 환생, 영육 분리, 최면술, 주문, 단식, 가사상태, 초월적 명상 등은 이런 상태를 조절하고 체험하려는 시도들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전체 우주와의 거룩한 일치이다. 참된 위험은 뉴에이지의 전체론적인 패러다임이다. 뉴에이지는 전체주의적 일치에 바탕을 둔 사고를 갖고 있으며 여기에 진정한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그 신비가 계시되며 성령의 은총을 통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참된 인간 존재가 된다.
구원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
뉴에이지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원죄를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 펠라기우스주의라고 할 수 있다. 뉴에이지에서 관건은 자기 완성, 자기 실현, 자기 구원이다. 자기 자신이 자기를 구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어떤 수련 기법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의해 이뤄진다. 원죄와 개인적 죄에 의해 영향 받는 인간의 상황은 오직 하느님의 행위에 의해서만 고쳐질 수 있다.
구원의 길은 단순히 스스로의 변혁이 아니라 자신의 죄, 우리 주위의 사회 안의 죄와 싸움으로써 얻는 죄로부터의 자유에서 발견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의 연대로 이끈다.
진리는 우리가 포용하는 것
뉴에이지에서 진리는 좋은 떨림, 우주적 조화, 일치와 무아의 경지에 대한 것으로 대개 일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이는 자기가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 자기의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종교와 윤리적인 문제를 평가하는 것도 명백하게 각자의 느낌과 경험에 따라 상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전체 삶을 그리스도에게 내어주고 그 가르침에 따르도록 요청받는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요구이다.
심리적 현상과 영성 혼동 신적인 자신의 능력 강조
고통은 악연이며 스스로 자초한 것‘죄’ 개념조차 없어
기도와 명상 :
자신에게, 아니면 하느님께?
심리학적 현상과 영성을 혼동함으로써 명상 기술이 기도와 혼동되곤 한다. 이런 기술이 기도의 훌륭한 준비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자기 영혼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기법들은 결국 신성에 도달하는, 또는 스스로 신이 되는 자신의 능력을 강조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잊는다면 결코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아니다. 자기 성찰, 혹은 우주적 에너지와의 융합을 주장하는 한 뉴에이지의 명상은 기도가 아니다. 이는 내적 성찰과 하느님과의 만남이라는 양방향적인 그리스도교 기도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는 단순히 인간적인 노력이 아니라, 회두, 즉 「자기」로부터 「당신」으로서의 하느님께로 비상하는 하나의 대화를 본질로 한다. 그리스도인은 골방에서 홀로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리스도와 일치해 있는 교회의 선익을 위해 성령 안에서 모든 성인들과 함께 기도를 바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죄
뉴에이지에서 「죄」라는 개념은 없다. 단지 불완전한 지식만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특수한 심리적-육체적 기술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이다. 뉴에이지는 무엇인가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고 무엇을 『해라』 또는 『하지 말아라』고 말한다.
그들은 내적 실재를 찾는데 있어서 수천가지의 길이 있고 자신의 지성과 감각이 이끄는데로 그 길을 찾아가라고 가르친다. 권위는 신으로부터 오지 않고 자기 안에 내재한다. 뉴에이지에서 가장 큰 문제는 개인적인 죄가 아니라 우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그것을 치유하는 길은 더욱더 존재 전체 안에 잠기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오직 신적 계시로써만 인간은 죄, 특히 원죄를 인식할 수 있다. 계시를 인식하지 못할 때 죄는 단지 진보에 있어서의 한 결함, 심리적 나약함, 실수, 또는 불충분한 사회 구조의 필연적인 결과 등으로 설명된다.
오직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 계획을 알 때에만 우리는 죄가 하느님이 피조물에게 부여한 자유의 남용임을 깨닫는다. 죄는 이성, 진리, 올바른 양심의 훼손이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 사랑의 실패이다.
고통과 죽음
뉴에이지는 고통을 스스로 자초한 것, 또는 악연, 또는 적어도 자기 능력 계발에 실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뉴에이지에서 환생은 영적 성장의 필요한 요소이며 영적 진화의 한 단계로 간주한다. 이러한 영적 진화라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시작됐고 우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된다.
하지만 우주적 일치와 환생은 인간이 하나의 개인을 독보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결코 조화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이런 이해는 책임과 자유를 훼손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구원이 왔을 뿐만 아니라 인간 고통 자체가 구원됐음을 안다.
구세주는 인간의 땅에서 인간을 위해 고통을 받았다. 우리는 구원을 성취한 이런 고통에 동참하도록 불리워졌다. 고통을 통해 구원을 가져온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을 구원의 차원으로 들어올렸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고통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세사적 고통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의 미래는?
뉴에이지는 우주적 법칙들을 통제하는 완전한 존재들을 통해 사람들을 불러모을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에서 그리스도교는 제거되거나 또는 세계 종교와 새로운 세계 질서에 앞날을 양보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항상 깨어있다. 그리스도교의 뉴에이지는 2000년 전에 바로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나자렛 예수이며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령은 사회와 역사와 민족, 문화와 종교들 안에서 개인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다. 우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유산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신학.영성 지식이 부족한 사람을 대상으로 잘못된 예배로 유혹
뉴에이지 전통들은 의식적으로 창조주와 피조물, 인간과 자연, 종교와 심리학, 주체와 객관적 현실 사이의 차이를 애매하게 한다. 그 이상적인 지향은 항상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었지만 뉴에이지 이론에서 문제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요소들을 조직적으로 혼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혼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뉴에이지가 혼합을 통해 번성했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항상 신앙을 정당화하고 하느님과 세계,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뉴에이지는 이성이 보편성이라는 장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비인간적이라며 거부한다.
널리 퍼진 뉴에이지적 사고 중의 하나는 자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력적이지만 환상이다. 인간이 자신의 실재를 창조한다는 개념의 가장 문제되는 결과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이다. 장애나 불치병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불행을 자초한 것이라는 결론이다.
죽음이나 사별은 하나의 도전이자 기회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서구적 형태의 윤회 사상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구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자신이 신이라는 뉴에이지의 사고는 여기에서 크게 문제시된다. 가톨릭 교육과 양성, 가르침에 있어서 인식론과 심리학에 대한 건전한 접근이 강화돼야 한다.
뉴에이지에 대한 사목 자료를 보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뉴에이지에서 몇 가지 긍정적인 요소들, 즉 인생의 새로운 의미에 대한 추구,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 이성적인 종교성을 넘어서려는 노력 등을 나름대로 평가하지만 반면, 그리스도교 신앙과 양립될 수 없는 요소들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지적한다.
즉, 교황은 뉴에이지가 계시에 대해 거의 주목하지 않고, 교리를 애매한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상대화시키며, 범신론적 신관을 제시하며, 우주에 대한 의무감으로 하느님과 인간 행위에 대한 인격적 책임을 대치함으로써 죄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전도시킨다는 점들을 지적했다.
실제적인 지침들
무엇보다 뉴에이지 운동이 모두 똑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분명히 하느님, 인간,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전망을 반영하거나 갈등을 빚는다. 가톨릭 교회는 매우 효과적인 사목적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즉 많은 수의 사목센터, 문화센터, 영성센터들이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자주 이러한 센터들이 오히려 뉴에이지를 교회 안에 퍼뜨리는 경우가 있다. 오용을 피하고 가톨릭의 풍요한 영성을 증진하기 위해서도 이는 수정돼야 한다.
일부 뉴에이지 그룹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사상과 활동을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려 한다. 이런 그룹들과의 만남은 매우 주의깊게 이뤄져야 한다. 이는 반드시 가톨릭 신앙과 영성에 해박하고 뉴에이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필요로 한다.
일부 뉴에이지 그룹들은 자기들의 모임을 「기도 모임」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초대받은 이들은 참된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해 잘 익히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들은 신학이나 영성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점차적으로 일종의 잘못된 예배로 유혹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의 참된 목적과 내용에 대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방의 지혜로부터 「차용」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신앙적 해악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초월적 명상의 경우 비록 종교적으로 중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을 힌두교 등 다른 종교로 이끄는 경우도 있다. 명상 방법을 배우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수련의 목적이나 내용 등은 분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것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풍요한 유산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위대한 수도회들은 명상과 영성의 강력한 전통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영성 수련 코스나 피정의 집 등을 통해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이미 이뤄지고 있지만 보다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 영적인 추구를 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은 그리스도교의 풍요로운 전통을 보여주고 뉴에이지를 식별하는데 도움이 된다.
– 가톨릭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