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묵주기도는 신비와 동화되는 길


26. 묵주기도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며 바로 그 신비의 본질과 동화되도록 도와 주는 적절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 방법은 반복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각 신비에서 열 번씩 반복되는 성모송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반복을 겉으로만 보면, 묵주기도를 무미건조하고 따분한 행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묵주기도를, 내용은 비슷하지만 그 느낌은 언제나 새로운 표현들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쏟아 붓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 기도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인간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비와 용서가 흘러 넘치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온갖 감정들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마음도 가지셨습니다. 복음서의 증거가 필요하다면, 부활하신 다음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나누신 감동적인 대화에서 이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 이렇게 물으시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요한 21,15-17 참조). 베드로의 사명에 매우 중요한 이 구절의 구체적인 의미는 제쳐두더라도, 누구나 이 세 번의 반복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반복 속에는 끈질긴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인간의 보편적 사랑의 경험에서 우러난 친숙한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이해하려면, 사랑의 고유한 심리적 역동성을 알아야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반복되는 성모송은 직접적으로는 성모님께 바치는 것이지만, 사랑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성모님과 함께 또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성모송의 반복은, 진정한 그리스도교 생활 “양식”인 그리스도와 더욱 완전히 동화되려는 의지를 키웁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러한 생활 양식을 열정적인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 1,21).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묵주기도는 우리가 성덕의 목표에 이를 때까지 이러한 동화를 도와 줍니다.


유효한 방법


27. 우리는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데에 어떠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에 놀라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인간적 본성과 생명의 박동을 존중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영성은 하느님과 강력하고 형언할 수 없는 일치를 이룸으로써 말하자면 모든 형상과 말과 행동이 필요 없게 되는 가장 숭고한 형태의 신비주의적 침묵에 익숙하면서도, 대개는 전 인격체가 육체와 정신과 대인 관계의 복잡한 실재와 연루됩니다.


이것은 전례에서 두드러집니다. 성사와 준성사들은 인간의 모든 차원을 이용하는 일련의 예식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전례적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동방 세계에서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34)라는 말을 중심으로 하는, 매우 독특한 그리스도 묵상 기도가 전통적으로 허파의 호흡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로도 확인됩니다. 이 기도는 끊임없는 간청을 북돋아 주며, 마치 숨결이시고 호흡이신 그리스도께서 삶의 ‘전부’가 되기를 바라는 열망에 육신의 건강을 결합시키는 것 같습니다.


개선의 여지


28. 저는 교황 교서 「새 천년기」에서 서방 세계는 지금 묵상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일고 있으며, 이는 흔히 다른 종교들에서도 중시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35)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형태의 기도에 끌리기도 합니다. 그러한 기도들은 긍정적이고 때로는 그리스도교 경험과 양립할 수 있는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지만, 흔히는 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들 가운데 크게 유행하고 있는 것은 정신 수양적이고 반복적이며 상징적인 방법들을 사용하여 높은 수준의 정신 집중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방법들입니다. 묵주기도는 이러한 광범한 신앙 현상 안에 놓여 있지만,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요구에 부합하는 그 나름의 특징들로 구별됩니다.


묵주기도는 진정한 관상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는 목표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그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수세기 동안 축적된 경험의 소산인 이 방법을 과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무수한 성인들의 경험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방법에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 교서에서 전체적인 신비의 순환을 새로 빛의 신비(mysteria lucis)로 보완하고 묵주기도의 방식에 관하여 몇 가지 제안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안들은, 묵주기도의 기존 구조를 존중하면서도, 신자들이 그 고유한 상징 속에서 일상 생활의 요구와 조화를 이루어 묵주기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묵주기도가 본래 의도하였던 영적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묵주가 한갓 부적이나 주술 도구로 여겨지게 되어 근본적으로 묵주기도의 의미와 역할을 왜곡할 위험이 있습니다.


신비의 선포


29. 각 신비를 낭독하고, 나아가 각 신비를 표현하는 적절한 표상을 사용하는 것은, 말하자면 줄거리를 전개시켜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신비를 낭독함으로써 우리의 상상력과 마음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특별한 사건이나 순간을 향하게 됩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영성에서,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영성 수련」에서 제안한 기도 방법은 물론 인간의 감각에 호소하는 여러 신심들과 성화상 공경은 시각적이고 상상적인 요소들을(장면 설정, compositio loci) 사용하며, 이는 마음을 특정한 신비에 집중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바로 강생의 논리 구조에 부합하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형상을 입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신적 신비들과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분의 육체적 실재를 통해서입니다.


이러한 구체성에 대한 요구는 묵주기도의 여러 신비들을 선포함으로써 더욱 잘 표현됩니다. 분명히 이러한 신비들은 복음을 대신할 수도 없고 그 내용을 속속들이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가 성서 봉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묵주기도는 성서 읽기를 전제로 하고 또 장려합니다. 묵주기도에서 관상하는 신비들은, 빛의 신비를 새로 추가하더라도, 그리스도 생애의 근본 요소들을 요약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신비들은 복음의 나머지 부분들에 대해서 더욱 폭넓은 묵상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특히 오랫동안 묵상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친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기


30. 성서적 토대를 제공하고 묵상에 깊이를 더하려면, 각 신비를 선포한 다음, 상황에 따라 길거나 짧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성서 봉독을 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어떠한 말도 영감을 받아 쓰여진 성서 말씀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귀 기울여 들으며, 우리는 그 말씀이 지금 “나를 위하여”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말씀은 묵주기도에서 사용하는 반복의 방법의 일부가 되어, 이미 잘 아는 어떤 것을 단순히 묵상하는 데에서 오는 지루함을 막아 줍니다. 이것은 알고 있는 것을 떠올리는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하는 문제입니다. 공동으로 장엄하게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는 이 말씀을 간략한 해설과 함께 적절히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침 묵


31. 말씀의 경청과 묵상은 침묵으로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신비를 낭독하고 말씀을 선포한 뒤에는 제시된 신비에 얼마 동안 관심을 집중한 다음에 소리 기도로 넘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침묵의 중요성을 발견하는 것은 관상과 묵상을 실천하는 비결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술과 대중 매체가 지배하는 사회의 한 가지 단점은 고요함을 얻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전례에서 침묵의 순간이 권고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도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인 다음, 잠시 머물러 특정 신비의 가르침에 마음을 모으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의 기도’


32.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신비에 집중한 다음에,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께 들어 높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신비 안에서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품안에 계시면서(요한 1,18 참조)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 갈라 4,6)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의 내밀한 친교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들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와 맺는 관계의 힘으로 우리를 당신의 형제자매로 삼으시고, 우리도 서로 형제자매가 되게 하시며, 당신의 영이시자 성부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성모송을 반복하며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묵상하는 토대로 놓인 주님의 기도는, 따로 바치더라도, 신비에 대한 묵상 전체가 교회의 경험이 되게 합니다.


열 번의 성모송


33. 묵주기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인 성모송은 또한 묵주기도를 탁월한 마리아의 기도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성모송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묵주기도의 마리아 성격이 그리스도 특성에 배치되지 않으며 실제로 이를 들어 높이고 고양시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모송의 전반부는 가브리엘 천사와 엘리사벳 성녀가 성모님께 드린 말씀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자렛의 동정녀 안에서 이루어진 신비를 흠숭하며 관상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말하자면 하늘과 땅의 경탄을 드러내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작품’, 곧 동정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서 이루어진 성자의 강생을 바라보시면서 느끼시는 경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고 기뻐하신 것을 생각한다면, 여기서도 “하느님께서 창조의 새벽에 당신 손으로 만드신 작품을 보시고 품으셨을 그러한 희열”36)이 되풀이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묵주기도에서 성모송을 반복하며 하느님의 경탄에 동참합니다. 우리는 기쁨과 놀라움 속에서 역사의 가장 위대한 기적을 깨닫습니다. 여기에서 성모님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라”(루카 1,48).


성모송의 가장 중요한 핵심, 이를테면 성모송의 축은 전반부를 마무리하는 ‘예수님’의 이름에 있습니다. 때때로 급하게 성모송을 외우다 보면 이를 놓치기 쉬우며, 성모송과 함께 관상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관계도 잊기 쉽습니다. 그러나 묵주기도를 의미 있고 효과 있게 바치는 표시는 바로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의 신비에 대한 강조입니다. 바오로 6세께서는 교황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상하고 있는 신비의 내용을 덧붙여 그 이름을 강조하는 일부 지역의 관습에 주목하셨습니다.37) 이는 특히 공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는 더욱 칭찬할 만한 관습입니다. 이러한 관습은 구세주의 삶의 여러 순간들을 향하고 있는,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힘차게 표현합니다. 그것은 신앙 고백인 동시에, 성모송의 반복에 내재된 그리스도의 신비에 동화되는 과정을 촉진함으로써 우리의 묵상을 받쳐 주는 도구입니다. 마치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시키신 것처럼,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인(사도 4,12 참조)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가 성모님의 이름과 함께 되풀이하여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동화의 여정이 됩니다.


성모송의 후반부에서 우리가 우리의 삶과 죽음의 순간을 성모님의 전구에 맡기며 드리는 간절한 호소는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와 맺으시는 독특한 관계, 곧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Theot쉓os)가 되게 하는 그 관계에서 힘을 얻습니다.


영광송


34.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송은 모든 그리스도인 관상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성령 안에서 성부께 이끌어 주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끝까지 가는 동안, 모든 찬미와 경배와 감사를 받으셔야 할 성삼위의 신비를 여러 번 만나게 됩니다. 묵주기도에서 관상의 정점인 영광송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는 영광송을 노래로 불러 모든 그리스도인 기도의 고유한 구조에 다가서는 것이 매우 바람직합니다.


성모송에서 성모송으로 이어가며 그리스도와 성모님께 대한 사랑으로 각 신비를 생생하게 깊이 묵상하는 그만큼, 각 단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형식적인 마무리가 아니라, 마치 우리 마음을 하늘 낙원으로 들어 올리고 어느 모로 타보르 산의 경험을 다시 체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미래 관상의 예고입니다.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루카 9,33).


짧은 마침 기도


35. 오늘날의 묵주기도에서는, 영광송 다음에 짧은 마침 기도가 이어집니다. 이 마침 기도는 지역 관습에 따라 다양합니다. 그러한 기도의 가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면서, 신비의 묵상이 고유한 열매를 맺도록 그 신비를 기도로 마무리한다면, 신비의 관상이 더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하여 묵주기도가 그리스도인 생활과 갖는 관계를 더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전례 기도 하나가 우리에게 묵주기도의 신비들을 묵상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것을 본받고 약속된 것을 얻을 수”38) 있도록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한 마무리 기도는 당연히 다양성을 지닐 수 있으며, 이미 그렇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묵주기도는 다양한 영성 전통과 여러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더 잘 적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절한 기도 형태를 사목적으로 충분히 식별하고, 가능하면 묵주기도에 특별히 봉헌된 장소와 순례지 등에서 실험적으로 사용한 다음에, 널리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 백성은 참된 영적 부요의 풍요로움에서 이득을 얻고 개인적 관상의 자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묵 주


36. 전통적으로 묵주기도에 쓰이는 도구는 묵주입니다. 지극히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보면, 묵주는 흔히 반복되는 성모송을 세기 위한 단순한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묵주는 관상의 실체를 더욱 충만하게 하는 상징성을 보여 주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묵주알들이 십자 고상에 모아진다는 것입니다. 십자 고상에서 기도의 순환이 시작되고 끝납니다. 신앙인들의 삶과 기도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며, 그분을 지향합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이릅니다.


기도의 진행을 표시하며 세는 도구인 묵주는 그리스도인 관상과 완덕의 끝없는 길을 가리킵니다. 바르톨로 롱고 복자는 묵주를 하느님과 우리를 묶어 주는 ‘사슬’로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사슬, 참으로 아름다운 사슬입니다.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를 묶어 주는 결합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종”(루카 1,38)이신 성모님과, 또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종”(필리 2,7)이 되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하는 “효성”의 사슬입니다.


묵주의 상징을 우리의 상호 관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모두 하나 되게 하는 친교와 우애의 유대로 펼쳐 가는 것이 좋습니다.


시작과 끝맺음


37. 현재, 각 지역 교회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합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도록 일깨우는 의미에서, 시편 70[69]의 첫 구절 “하느님, 어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로 묵주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신앙 고백을 관상 여정을 시작하는 토대로 삼을 수 있도록 신경을 바치면서 묵주기도를 시작합니다. 이러한 관습들과, 이와 유사한 관습들이 관상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시킨다면 모두 똑같이 정당한 것입니다. 또한 묵주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시야를 넓혀 교회의 모든 요구를 끌어안을 수 있도록, 교황의 지향을 위한 기도로 끝맺습니다. 교회가,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묵주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대사를 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해 온 것은, 바로 묵주기도의 이러한 교회적 차원을 들어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끝맺을 때에 묵주기도는 참으로 어머니이시고 스승이시며 인도자이신 성모님께서 당신의 힘찬 전구로 신자들을 뒷받쳐 주시는 영적인 여정이 됩니다. 묵주기도를 드리며 성모님의 모성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 성모 찬송가(Salve Regina)나 성모 호칭 기도와 같은 뛰어난 기도문으로 동정 성모님을 찬미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성모님의 신비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내적 순례의 마침입니다.


요일 배분


38. 묵주기도는 날마다 전체를 다 바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묵주기도는 수많은 관상자들의 나날을 기도로 채워 주고, 시간이 많은 병자나 노인들에게 맡겨집니다. 그러나 분명히 많은 사람들은 한 주간의 어떤 순서에 따라 하루에 묵주기도의 일부밖에 바칠 수 없으며, 이는 빛의 신비가 새롭게 포함된다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이러한 요일 배분은, 전례가 전례 주년의 다양한 시기를 여러 색으로 채색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요일마다 영적인 ‘색깔’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공통적인 관습에서는,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환희의 신비’를,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고통의 신비’를, 수요일과 토요일과 주일에는 ‘영광의 신비’를 바칩니다. 그렇다면 ‘빛의 신비’는 어디에 들어가게 될까요? ‘영광의 신비’를 토요일과 주일에 모두 바치고 있으며, 토요일은 주요 전통에 따라 마리아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성모님의 현존이 특별히 드러나는 토요일로 ‘환희의 신비’에 대한 두 번째 묵상을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요일에 ‘빛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계획은 개인이나 공동체 기도의 합법적인 자유를 제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기도에서는 영적 사목적 요구는 물론, 적절한 적응이 요구될 수 있는 특별한 전례 거행을 고려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묵주기도를 언제나 관상의 길로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를 통하여, 전례에서 그러하듯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일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의 한 주간은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들을 거쳐 가는 하나의 과정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삶 안에서 시간과 역사의 주님으로 드러나십니다.


결 론



“우리를 하느님께 묶어 주는 아름다운 사슬인
복되신 성모님의 묵주기도”


39.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이러한 전통적인 기도의 풍요로움을 아주 잘 보여 줍니다. 묵주기도는 대중 신심의 단순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더욱 깊은 관상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도록 신학적 깊이도 갖추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려운 일들을 묵주기도, 특히 공동으로 바치는 묵주기도와 그 끊임없는 실천에 의탁하면서 이 기도의 특별한 효과를 늘 믿어 왔습니다. 때때로 그리스도교 자체가 위기에 놓인 것처럼 보일 때에도, 묵주기도의 힘에 의지하여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어 왔으며, 묵주기도의 성모님께서는 구원의 중개자로 찬미 받으셨습니다.


오늘 저는,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세계 평화와 모든 가정의 문제를 묵주기도의 힘에 기꺼이 의탁하고자 합니다.


평 화


40. 이 새 천년기를 시작하면서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도전들은, 갈등 상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하늘 높은 곳에서 오는 개입만이 더욱 밝은 미래를 희망하게 한다고 믿게 합니다.


묵주기도는 그 본질상 평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평화의 임금님이시며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신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평화의 비결을 알게 되고 이를 자기 삶의 목표로 삼습니다. 이는 또한 묵주기도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또한 묵주기도는 성모송을 조용히 반복하면서 묵상하는 특징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며, 부활하신 주님의 특별한 선물인 참된 평화를(요한 14,27; 20,21 참조)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받아들이고 체험하며 주변에 전파하게 합니다.


묵주기도는 또한 그 기도가 맺는 사랑의 열매 덕분에 평화의 기도입니다. 관상 기도인 묵주기도를 올바르게 바치면,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고 형제 자매들에게서, 특히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찾게 됩니다. 환희의 신비에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아기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어찌 생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수호하며 증진하려는 열망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며, 온 세상의 고통 받는 어린이들의 짐을 떠맡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빛의 신비에서 계시자이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어찌 일상 생활에서 그분의 ‘참행복’을 증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관상하면서, 어찌 고통에 짓눌리고 절망에 빠진 모든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스스로 ‘키레네의 시몬’처럼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늘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어찌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고 더욱 정의롭고 하느님의 계획에 더욱 맞갖은 곳으로 만들려는 열망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 마음을 모아 묵주기도를 바치는 동안 우리는 세계 평화의 일꾼이 됩니다. 묵주기도는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공동으로 바치는 그 특성으로,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고 하신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우리가 오늘날에도 평화를 위한 힘든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 줍니다. 묵주기도는 세상의 어려운 문제들에서 도망치게 하기보다는, 그 문제들을 책임감과 헌신적인 도량으로 직시하게 하며,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문제들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주고 모든 시대에 “모든 것을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인 사랑”(콜로 3,14)을 증언할 수 있는 굳은 의지를 줍니다.


가정, 부모들


41. 평화의 기도인 묵주기도는 또한 언제나 가정의 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입니다. 한때 그리스도인 가정들은 특별히 이 기도를 소중하게 여기며 가족들의 화합을 도모하였습니다. 이 귀중한 유산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묵주기도를 바치며, 가정을 위한 가정 기도의 실천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교황 교서 「새 천년기」에서 평신도들도 본당 공동체와 다양한 그리스도인 단체의 일상 생활에서 성무일도를 바치도록 장려하였습니다.39) 저는 이제 묵주기도에 대해서도 그렇게 권고하려고 합니다. 이 두 가지의 그리스도교 관상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상호 보완적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가정 사목 활동에 헌신하고 계시는 모든 분에게 묵주기도를 진심으로 권장하도록 요청합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정은 하나가 됩니다. 거룩한 묵주기도는 오랜 전통에서 가족을 하나로 묶어 주는 기도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족들 각자 한 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또 서로 돌아보고 대화하며 함께 느끼고 서로 용서해 주며 하느님의 성령으로 새로워진 사랑의 계약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발전된 나라들에서 이 시대의 가정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의사 소통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이기가 어려워지고, 어쩌다 한 자리에 모여도 텔레비전만 보고 맙니다. 가정에서 묵주기도를 다시 바치기 시작하면, 구원을 가져다 주는 여러 모습들, 곧 구세주와 성모님의 모습으로 일상의 삶을 채울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는 가정은 어느 모로 나자렛 성가정의 모습을 재현합니다. 예수님을 한가운데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가족들의 형편과 계획을 그분의 보살핌에 맡겨 드리며, 그분에게서 희망을 길어 올리고 앞으로 남은 여정을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자녀들


42. 자녀들의 성장 과정을 이 묵주기도에 의탁하는 것도 즐겁고 풍요로운 일입니다. 묵주기도 또한 잉태에서부터 죽음 그리고 부활과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생애를 따르는 여정이 아닙니까?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들의 삶을 따라가기가 점점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기술 발전과 대중 매체, 세계화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에서 모든 것이 급속히 돌아가고, 세대 간의 문화 격차가 날로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다양한 메시지들과 예측할 수 없는 경험들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삶에 빠르게 침투하며, 부모들은 자녀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을 매우 걱정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부모들은 자녀들이 마약의 유혹, 무절제한 향락주의의 손짓, 폭력의 유혹, 온갖 형태의 의미 상실과 절망으로 잘못될 때에 몹시 낙담하기도 합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더 나아가 자녀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어린 시절부터 날마다 가정 ‘기도 시간’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은, 물론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절대 과소 평가할 수 없는 영적인 도움이 됩니다. 묵주기도가 오늘날의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는 아마도 묵주기도를 바치는 방법이 빈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묵주기도의 기본 틀을 해치지 않으면서, ─ 가정 안에서든 단체에서든 ─ 청소년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을 적절하게 활용한다면 그들이 묵주기도를 바치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왜 시도해 보면 안 됩니까?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세계청년대회에서처럼 긍정적이고 열정적이며 창조적인 청소년 사목 방법을 활용한다면 매우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지혜롭게 제시해 주면 저는 청소년들이 이를 자기네 기도로 삼고 젊은이다운 열정으로 열심히 바쳐 다시 한 번 어른들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묵주기도는 다시 찾아야 할 보화


4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토록 쉽고도 풍요로운 이 묵주기도는 참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다시 찾아야 할 드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올해에 그렇게 합시다. 교황 교서 「새 천년기」에서 이미 밝힌 방향을 확인하는 도구로서 묵주기도를 다시 찾읍시다. 많은 개별 교회들은 이 교서에 따라 사목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이를 실천해 나갈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형제 주교들과 사제들과 부제들에게, 그리고 여러 직무를 맡고 있는 사목 종사자 여러분에게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각자가 묵주기도의 아름다움을 몸소 체험하고 묵주기도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십시오.


또한 신학자 여러분에게도 기대를 겁니다. 하느님 말씀에 뿌리를 박고 그리스도교 백성의 산 체험에 관심을 기울이는 치밀하고도 지혜로운 토론을 통하여, 신자들이 이 전통적인 기도의 성경적 토대와 영적 부요, 그리고 사목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 주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모님의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관상하도록 특별하게 부름 받은 남녀 봉헌 생활자들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온갖 생활 신분의 모든 형제자매들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인 가정, 병자와 노인, 젊은이 여러분에게 기대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손에 다시 묵주를 드십시오. 성경에 비추어, 또 거룩한 전례와 부합되고 일상 생활에 어울리는 묵주기도를 다시 찾으십시오.


아무쪼록 저의 이러한 호소를 흘려듣지 마십시오! 저의 교황직 25년으로 들어서며, 저는 그러한 마음으로 묵주기도의 사도인 바르톨로 롱고 복자가 성모님께 지어 바친 빛나는 순례 성당의 성모상 앞에 엎드려 이 교서를 동정 성모님의 지혜로우신 손길에 맡겨 드립니다. 저는 바르톨로 롱고 복자의 저 유명한 ‘거룩한 묵주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의 감동적인 말씀을 기꺼이 제 말씀으로 삼아 이 교서를 마치고자 합니다. “복되신 성모님의 묵주는 저희를 하느님께 묶어 주는 아름다운 사슬이며, 저희를 천사들과 결합시켜 주는 사랑의 끈입니다. 묵주기도는 지옥의 공격을 물리치는 구원의 보루이며 모든 난파선이 찾는 안전한 항구입니다. 저희는 묵주기도를 결코 멈추지 않겠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묵주는 저희에게 위안이 될 것입니다. 삶을 마치며 묵주에다 마지막 입맞춤을 할 것입니다. 묵주의 모후이신 성모님, 저희는 마지막 순간까지 감미로우신 성모님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죄인들의 피난처, 슬퍼하는 이들의 위로자이신 성모님, 오늘 또 영원토록 하늘 땅 어디에서나 찬미 받으소서.”



바티칸에서
교황 재위 제25년 첫날
2002년 10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