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ROSARIUM VIRGINTS MARIAE

2002. 10. 16.

마리아의 묵주기도에 관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주교와 성직자와 신자 들에게 보내는
교황 교서

서 론


    1.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는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 아래 제이천년기에
차츰 그 모습을 갖추었으며 많은 성인들의 사랑을 받고 교도권이 권장해 온 기도입니다. 단순하지만 심오한 이 기도는
커다란 효과를 지닌 기도로서 이제 막 시작된 제삼천년기에도 성덕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그리스도
신앙의 영적인 여정에 잘 어울립니다. 그 신앙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본래의 힘을 조금도 잃지 않고, 하느님
영의 인도로 “깊은 데로 가서” 온 세상에 그리스도를 외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한 14,6) “인류
역사의 목적이시고 역사와 문명이 열망하는 초점”1)이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또
구원자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분명히 성모 신심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그 소박한 구조 속에 모든 복음 메시지의 핵심을 집약하고 있으므로 마치 복음의 요약과
같습니다.2) 묵주기도는 또한 당신 동정녀의 품에서 시작된 강생의 구원 활동을
두고 바치신 바로 성모님의 기도이며 성모님의 영원한 노래인 마니피캇을 반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묵주기도를
통하여 성모님의 학교에 앉아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그 크신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구세주
어머니의 손에서 받듯이, 믿는 신자는 묵주기도를 통하여 풍성한 은총을 얻기 때문입니다.

    교황들과 묵주기도

    2. 저의 많은 선임자들께서도 이 기도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황 레오 13세를 특별히 언급하여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1883년 9월 1일에
회칙 「최고 사도직」(Supremi Apostolatus Officio)을3)
발표하시고, 묵주기도가 사회악을 물리치는 효과적인 영적 무기라는 드높은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는 또한 성모님의
이 기도에 관한 다른 많은 발언들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묵주기도를 특히 장려하신 최근의
교황들 가운데에서 저는 교황 요한 23세 복자4)와 교황 바오로 6세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바오로 6세께서는 교황 권고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묵주기도의 복음적 특성과 그리스도 중심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저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묵주기도를 자주 바치도록 권장해 왔습니다. 묵주기도는
어릴 때부터 저의 영성 생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습니다. 최근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특히 칼바리아 순례지에서
이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저는 언제나 묵주기도를 바쳐 왔습니다. 저의 모든
근심을 묵주기도에 의탁하였으며, 그 안에서 저는 언제나 커다란 위안을 얻었습니다. 지금부터 24년 전인 1978년
10월 29일에, 제가 베드로 좌에 선출된 지 두 주도 채 안 되어 제 마음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묵주기도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놀라운 기도입니다! 그 단순함과 심오함은 참으로 놀랍습니다.`……`묵주기도는
어떤 의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의 마지막
장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 계시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묵상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송을 바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이 영혼의 눈앞으로 지나갑니다. 그 사건들이 환희와 고통과
영광의 신비의 요약 안에 모아지고, 우리는 이를테면 성모님의 마음을 통하여 바로 예수님과 생생하게 결합됩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교회와 온 인류의 삶을 이루는 모든 사건, 곧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이웃들, 특히 우리에게 가까운 이웃들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마음에 담고 묵주기도 한단 한단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묵주기도는 인생의 그러한 맥박을 드러냅니다.”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바로 이 말씀으로 저의 교황직 첫 해를 묵주기도의
일상 주기에 맞추었습니다. 오늘 저는 베드로 후계자의 직무 25년을 시작하면서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그 동안
저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합니다!(Magnificat
anima mea Dominum!) 저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의 말씀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며, 저의
베드로 직무를 성모님의 보호에 맡겨 드립니다. 모두 임의 것!(Totus Tuus!)

    묵주기도의 해: 2002년 10월 ─ 2003년 10월

    3. 이러한 까닭에, 저는 대희년 경축을 마치며 하느님 백성에게
“그리스도에게서 새롭게 출발”6)하도록 권고하였던 교황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의 묵상에 이어, 마치 그 교서에 성모님의 화관을 두르듯이, 묵주기도에 관한 묵상을
풀이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깁니다. 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과 일치하여 성모님의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권고하려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바로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권고에 더 큰 무게를 두고 또 앞서 말한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발표 120주년을
계기로 삼아, 저는 앞으로 한 해 동안 여러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묵주기도를 특별히 강조하고 장려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저는 올해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한 해를 묵주기도의 해로 선포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목 제안을 각 교회 공동체의 주도에 맡깁니다. 이는 개별 교회의
사목 계획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완성하고 공고히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제안이 즉각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라 믿습니다. 묵주기도가 그 충만한 의미를 되찾을 때 그리스도인 생활의 핵심에 이르게 됩니다. 묵주기도는
개인적 관상과 하느님 백성의 교육뿐 아니라 새로운 복음화를 위하여 날마다 영성 훈련의 풍부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 시대의 교회에 마련해 주신 “위대한 은총”이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 40주년(2002년
10월 11일)이라는 또 다른 기념일의 기쁨으로, 묵주기도를 강조하는 것이 더욱 기쁩니다.7)

    묵주기도에 대한 반대

    4.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제안은 시기 적절한 것이
분명합니다. 먼저, 묵주기도가 맞고 있는 일종의 위기에 시급히 대처하여야 합니다. 묵주기도는 오늘날의 역사적 신학적
상황에서 그 가치가 부당하게 평가 절하되어 젊은 세대에게 더 이상 가르쳐지지 않을 위험도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적절히 강조하였던 전례의 중심성은 필연적으로 묵주기도의 중요성을 축소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분명하게 밝히셨듯이, 묵주기도는 전례와 상충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전례를 뒷받침합니다.
묵주기도는 우리를 전례로 훌륭하게 이끌어 주는 동시에 전례를 충실하게 반영하므로, 전례에 내적으로 충만히 참여하게
하고 일상 생활에서 그 열매를 거두게 합니다.
    묵주기도가 그 분명한 마리아 성격 때문에 일치 운동과 어긋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분명히 묵주기도는 천주의 성모님께 대한 공경의 전망 안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공의회가 분명히 밝혔듯이 마리아 공경은 “어머니께서 존경을 받으실 때에 그 아드님께서`……`바르게 이해되시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게 하도록”8)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으로 이끄는
신심입니다. 묵주기도를 바르게 활성화시킨다면, 묵주기도는 교회 일치 운동에 분명히 도움이 되며, 결코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관상의 길

    5. 그러나 묵주기도 생활을 힘껏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가 교황 교서 「새 천년기」에서 참된 “성덕의 훈련”으로 제시하였던,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상하는 저 임무를 도와 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성덕의 훈련에는 “기도가 앞서는 그리스도인 정신이
필요합니다.”9) 새로운 영성의 요구가 현대 사회의 수많은 모순 속에서 흐려지기는
하지만, 다른 종교들의 영향 때문에도 영성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솟아오르고 있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참된 기도의 학교”10)가 되어야 합니다.
    묵주기도는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방 세계에서 생겨나 발전한 이 기도는 전형적인 묵상기도이며, 어느 정도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토양에서 피어난 ‘마음
기도’나 ‘예수님 기도’에 해당합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6. 지금의 역사적 상황이 묵주기도의 부흥에 커다란 효과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 평화의 은총을 간청하여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습니다. 선임 교황들과 저
자신이 묵주기도는 평화를 위한 기도라고 거듭거듭 밝혔습니다. 2001년 9월 11일의 저 가공할 재앙으로 시작되고
거의 날마다 세계 도처에서 새로운 폭력과 유혈 사태를 목격하는 이 천년기의 벽두에, 묵주기도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상하는 일에 몰입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셨기”(에페 2,14 참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평화 증진을 자신의
의무로 여기는 사람은 틀림없이 묵주기도를 명백한 의무로 알고 바치며,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땅, 아직도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나자렛 예수님의 땅인 성지의 평화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현대의 또 다른 위기와 관련해서도 투신과 기도가 요구됩니다. 바로 사회의 기초
단위인 가정의 위기입니다. 가정은 이념과 실제에서 날마다 점점 더 붕괴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이 때문에 우리
시대의 필수적 근본 제도인 가정의 미래는 물론 사회 전체의 운명이 위험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가정 사목이라는 폭넓은
영역에서 그리스도인 가정에 묵주기도를 되살린다면, 파멸로 치닫는 이 시대의 위기를 막아내는 데에 효과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7. 수많은 표징이 가리켜 주듯이, 오늘날에도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는
바로 이 묵주기도를 통하여 어머니로서 우리를 끝까지 돌보고자 하십니다. 구세주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를 가리키며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교회의 모든
자녀를 당신 어머니의 보호에 맡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께서 하느님 백성이 이러한 형태의 관상 기도를 권고하시는
당신의 목소리를 똑같이 깨닫게 하시고자 당신의 현존을 보여 주셨던 19세기와 20세기의 여러 사건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 교회 권위의 인정을 받은 루르드와 파티마의
발현을 그 이름을 들어 기억하고자 합니다.11) 이들 순례지에는 위안과 희망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증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8. 묵주기도 안에서 성덕에 이르는 참된 길을 찾은 수많은 성인들의
이름을 다 열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묵주기도에 관한 훌륭한 책을 쓴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드 몽포르
성인12)과,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고 최근에 제가 시성의 기쁨을 누렸던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는 특별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바르톨로 롱고 복자는 묵주기도의 참된 사도로서 특별한 은사를
지녔습니다. 그분 성덕의 길은 “묵주기도를 전파하는 사람은 누구든 구원을 받는다!”13)
하는 마음 속 깊이 깨달은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분은 기원 후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매몰되어
오랜 세기 뒤에 그 잿더미에서 고대 인류의 명암을 보여 주는 증거가 발굴되는 폼페이에, 그 전에 그리스도의 소식이
가닿지도 못한 이 고대 도시의 폐허 위에 거룩한 묵주기도의 성모님께 성전을 봉헌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깨달았습니다.
바르톨로 롱고는 평생의 모든 활동을 통하여, 특히 ‘15주간 토요 묵주기도’를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관상적인 묵주기도의 정신을 증진하였으며, ‘묵주기도의 교황’이신 레오 13세의 커다란 격려와 후원을 받았습니다.
 

제 1
장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태양처럼
빛나는 얼굴

    9. “그 때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다”(마태 17,2). 세 사도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구세주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변모 장면은 그리스도 관상의 한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켜, 그분 인성의 일상사와 고통스런 여정 안에서 그분의 신비를 깨닫고, 성부의 오른편에 앉으신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영원히 드러난 신적인 광채를 알아보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제자의 임무이며 따라서 우리
각자의 임무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생명의 신비를 받아들이도록 우리 자신을 열어,
늘 새롭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고 성령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바오로 성인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고린 3,18).

    관상의 모범이신 성모님

    10. 그리스도 관상에서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탁월한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성자의 얼굴은 특별히 성모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모님의 태중에서
자라시면서 인간적으로 그분과 닮은 외모를 물려받으셨는데, 이 닮음은 한층 더 돈독한 영적인 결합도 이끌어 냅니다.
그 누구도 성모님만큼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의 눈은 주님의 탄생 예고를
받아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에 이미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몇 달 뒤에 성모님께서는
그분의 현존을 느끼시고 그분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으시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히시며”(루가 2,7) 성모님께서는 당신 육신의 눈으로 아드님의 얼굴을 바라보실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언제나 흠숭과 경탄에 가득 찬 성모님의 눈길은 예수님을 떠난 적이
결코 없습니다. 때로는, 잃어버린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시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루가 2,48)고
하셨을 때처럼 물어 보는 눈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처럼(요한 2,5 참조)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고 더욱이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깨닫고 그 뜻을 내다볼 수 있는 꿰뚫어 보는 눈길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 그 눈길은 특히 십자가 아래에서처럼 슬픔의 눈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어느 모로 산고를 겪는
어머니의 눈길이었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외아드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드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를 진정한 새 아들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9,26-27 참조). 그리고 부활절 새벽에는 부활의 기쁨에
빛나는 눈길이었을 것이고, 마침내 오순절에는 성령을 넘치도록 받아 불타는 눈길이었을 것입니다(사도 1,14 참조).

    성모님의 기억

    11.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사시며, 그분의
말씀은 무엇이든 소중히 간직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가 2,19;
2,51 참조). 성모님의 마음에 새겨진 예수님의 기억은 모든 일에서 언제나 성모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당신 아드님
곁에서 보내신 삶의 여러 순간들을 묵상하게 하였습니다. 그 기억들은 어느 모로 성모님께서 지상에 사시는 동안 몸소
끊임없이 바치셨던 ‘묵주기도’를 이루었습니다.
    지금도 천상 예루살렘의 기쁜 노래들 가운데 성모님께서 감사와 찬미를 드리시는
연유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연유들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지금도 순례하는 교회에 어머니로서 관심을 가지시며,
교회 안에서 복음 선포자로서 당신의 선포 여정을 계속해 나가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신자들에게 당신 아드님의 ‘신비’를
끊임없이 보여 주시며, 그 신비의 관상으로 그 모든 구원의 힘이 발휘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의 기억과 또 그 눈길과 일치하게 됩니다.

    관상 기도인 묵주기도

    12. 바로 성모님의 체험에서 시작된 묵주기도는 더 없이 훌륭한
관상 기도입니다. 이러한 관상의 차원이 없으면 묵주기도는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를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관상이 없는 묵주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아져 기도문만을 반복하는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줄 안다.’(마태 6,7)고 하신 예수님의 권고를 거스르게 될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본질상 고요한
운율과 생각을 할 수 있는 느릿한 속도로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 가장 가까이 계셨던 성모님의 마음과 눈길로
기도하는 사람이 주님 생애의 신비를 더 쉽게 묵상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그 신비의 헤아릴 길 없는 부요가 드러나게
됩니다.”14)
    묵주기도가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관상 기도라는 그 고유한 본질을 더 잘 드러내
주는 몇몇 측면들을 밝히자면, 교황 바오로 6세의 이 드높은 생각을 잠시 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13. 성모님의 관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기억(zakar)이라는 말을 성서적 의미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기억은 하느님께서 구원 역사 안에서 이루신
일들을 현존하게 합니다. 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점에 이르는 구원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건들은 ‘어제’의
일만이 아니라 구원의 ‘오늘’입니다. 이러한 시간의 충만은 특히 거룩한 전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수세기
전에 이룩하신 일들은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은총의 선물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러한 사건들에 대한 다른 모든 신앙적 접근에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신앙과
사랑으로 그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경축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삶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로 우리에게 얻어
주신 은총에 자신을 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확인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사제 직무의 수행이며
공적 예배 행위인 거룩한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 나오는
원천”15)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하는 한편, 영성 생활은 “오로지 거룩한 전례의
참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은 공동으로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또한 자기 골방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여야 하며(마태 6,6 참조), 더욱이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한다(1데살 5,17 참조).”16)는 것 또한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 고유한 특성으로 묵주기도는 “끊임없이” 바치는 수많은 기도의 정점에 자리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위인 전례가
모든 것에 앞서 구원을 가져다 주는 행위라면,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묵주기도는 구원에 도움이 되는
관상입니다. 묵주기도는 구세주의 삶의 신비들에 잠겨, 그분께서 하신 일과 전례가 재현하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
우리 삶에 동화시켜 줍니다.

    성모님께 그리스도를 배우기

    14.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뛰어난 스승이시며, 계시하시는 분이시자
계시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가르치신 것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보다 더 좋은 스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 편에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충만한 진리로
이끄시는 내적 스승이십니다(요한 14,26; 15,26; 16,13 참조). 그러나 피조물 가운데에서 성모님보다
그리스도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며, 그리스도의 신비를 깊이 깨닫도록 우리를 더 잘 이끌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번째 기적을 이루신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라고 하인들에게 이르실 때에 분명히 스승의 모습으로 드러나십니다(요한 2,5
참조). 또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제자들과 함께 성령을 기다리시며 최초의 사도 파견에서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셨을 때에도 스승의 역할을 하셨다고 마음으로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 한단 한단을 성모님과
함께 건너가는 것은 성모님의 “학교”에서 그리스도를 읽고 그분의 신비를 깨닫고 그분의 복음을 배우는 것과 거의
같습니다.
    성모님께서 친히 학교를 여시고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풍부히 얻어 주시며 그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스승으로서 “신앙의 나그넷길”17)에서 모범으로 가르치신다고
여길 때에, 이 성모님의 학교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자의 신비를 하나하나 바라보며, 당신께서
주님 탄생 예고 때 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는 질문을 하고 언제나 신앙의 순종으로 대답을
하라고 권유하십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닮기

    15. 그리스도인 영성은 자기 스승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어야 하는
제자의 본분을 그 고유한 본질적 특성으로 삼고 있습니다(로마 8,29; 필립 3,10.12 참조). 세례 때에
넘치게 받은 성령으로 신자들은 그리스도이신 포도나무에 가지처럼 접붙여지며(요한 15,5 참조)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가 됩니다(1고린 12,12; 로마 12,5 참조). 그러나 이러한 처음의 결합에는 언제나 그분을 닮아 가는
동화의 여정이 응답을 하여야 합니다. 곧 제자의 삶이 갈수록 더욱더 그리스도의 “논리”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5). 사도의 말씀대로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야”(로마 13,14; 갈라 3,27 참조) 합니다.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묵주기도의 영적 여정에서,
그리스도께 동화되려는 이 목표는 이른바 “우정”의 길을 통하여 추구됩니다. 이 길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삶으로 들어가, 그분의 감각으로 “숨쉬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르톨로 롱고 복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치
두 친구가 자주 함께 만나면 흔히 그 습관이 서로 동화되듯이, 참으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친밀하게 살고 동정녀와
함께 묵주기도의 신비들을 묵상하며 영성체를 통하여 하나의 삶을 이룬다면, 비천한 우리도 그분들을 닮을 수 있고,
그 탁월한 모범으로 겸허하고 가난하며 드러나지 않고 인내하는 완덕의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18)
    묵주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동화되어 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맨 먼저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에 우리 자신을 의탁합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가장 뛰어나고 유일무이한
지체”19)로서 교회에 속하시지만 또한 동시에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신비체에 끊임없이 자녀들을 “낳아” 주시기에 그렇습니다. 이는 자녀들에게 성령께서 끊임없이 내리시기를
간청하는 당신의 기도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교회 모성의 완전한 표상이십니다.
    묵주기도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나자렛의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적 성장을 보살피시느라
여념이 없으신 성모님 곁으로 우리를 데려다 줍니다. 이렇게 하여 성모님께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형성”되실(갈라
4,19 참조) 때까지 예수님께 기울였던 것과 같은 관심으로 이제 우리를 가르치시고 교육하십니다. 성모님의 이러한
역할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역할에 근거를 두고 있고 그 역할에 철저히 종속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를
절대로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힘을 보여 줍니다.”20)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밝힌 이 훌륭한 원칙을 저도 제 자신의 삶에서 강렬하게 체험하였고 이는 “모두 임의 것”(Totus
Tuus)이라는 말씀을 제 주교 문장의 바탕으로 삼은 까닭이었습니다.21) 물론
이 말씀은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드 몽포르 성인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동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성모님께서 하시는 역할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완덕은 예수 그리스도께 동화되고
결합되며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완전한 형태의 신심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 동화되고 결합되어 우리를
그분께 더욱 완전하게 봉헌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께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으신 분이므로,
모든 신심 가운데에서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우리 영혼을 우리 주님께 바쳐 주님과 동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 영혼을 봉헌하면 할수록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께 영혼을 봉헌하는 것입니다.”22)
예수님과 성모님의 생애가 묵주기도에서만큼 깊이 결합되어 있는 곳도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께 기도하기

    16.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마태 7,7) 하고 말씀하시며 확신을 가지고 끈기 있게 하느님께
매달리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힘의 근원은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중개이자(1요한
2,1 참조) 하느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해 주시는”(로마 8,26-27 참조) 성령의 활동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며”(로마 8,26 참조), 때로는 “잘못 구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불러일으키시는 기도를 뒷받침하시며
당신의 자애로운 전구를 통하여 개입하십니다. “성모님의 기도는 교회의 기도를 떠받쳐 줍니다.”23)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기도의 길이시라면, 그리스도의 가장 뚜렷한 모상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
주십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의 활동에 유일하게 협력하신 사실을 토대로,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에서 드러난 그분의
위격에 초점을 맞춰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께 바치는 기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24)
복음 말씀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요한 2,3)고 하시며 다른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알려 주시는 장면에서 성모님의 전구의 힘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묵상이며 간청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께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어머니의
전구가 당신 아드님의 마음에서 모든 것을 얻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바르톨로 롱고 복자가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Supplicatio ad Virginem)에서 사용한 표현대로, 물론 이 말은 올바르게 이해하여야
할 필요가 있지만, 성모님께서는 “은총으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25) 이는 복음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 백성의 경험 안에서 더욱 확고해진 확신입니다. 뛰어난 시인 단테는 베르나르도 성인의 말씀을
빌려 이를 훌륭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너무나 위대하고 힘있는 여인이여, 누구나 은총을 바라지만 당신께 달아들지
않는 자는 날개 없이 날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26) 우리가 묵주기도를
하면서 성령의 여인(루가 1,35 참조) 마리아께 간청을 드릴 때에, 성모님께서는 당신께 은총을 가득히 주셨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청하시며, 또 당신 몸에서 태어나신 아드님 앞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여
주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17. 묵주기도는 또한 선포와 탐구의 길로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여러 차원의 그리스도인 체험에 끊임없이 제시합니다. 그 특징은 기도와 관상으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에 그리스도인
자신을 결합시켜 줍니다. 묵주기도는, 특히 본당과 순례지에서 이루어지는 공동 거행에서, 효과적인 묵상에 필요한
모든 요소와 결합될 때, 교리교육의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사목자들은 이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묵주기도의
성모님께서도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 선포 활동을 하십니다. 묵주기도의 역사는 특히 이단의 확산으로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던 시기에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묵주기도를 어떻게 이용하였는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를 앞서 간 사람들의 신앙과 똑같은 신앙으로 우리도 다시 한 번 묵주기도에 의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묵주기도는 그 모든 힘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으며, 지금도 훌륭한 모든 복음 전파자들이 활용해 온 사목
도구로서 커다란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2장 그리스도의 신비 – 성모님의 신비

    묵주기도는
‘복음의 요약’

    18.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유일한 길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기”(마태 11,27) 때문입니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니 너는 복이 있다.”(마태 16,17) 하고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 베드로가 분명하게
꿰뚫어보게 된 근거를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높은 곳에서 오는 계시입니다. 그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주의 깊게 귀 기울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침묵과 기도의 체험만이 그 신비에 대한 진실하고 성실하고
일관된 지식이 무르익고 발전할 수 있는 적합한 배경이 됩니다.”27)
    묵주기도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관상하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기도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를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셨습니다. “묵주기도는 강생의 신비와 인간 구원에 중심을 둔
복음적인 기도로서 명백히 그리스도를 향한 기도입니다. 묵주기도의 고유한 특징인 성모송의 연속적인 반복은 그리스도께
대한 끊임없는 찬미입니다. 천사의 인사와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루가 1,42)고 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의 인사는 궁극적으로 모두 그리스도께 드리는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저는, 성모송의 반복은 신비에
대한 관상을 엮어 주는 씨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각각의 성모송에서 가리키는 그리스도께서는 차례로 선포되는
신비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로 또 동정녀의 아들로 제시되는 바로 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28)

    적절한 보완

    19. 그리스도 생애의 수많은 신비들 가운데 일부만이 교회 권위의
승인을 받아 폭넓은 신심 관행으로 바치는 묵주기도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지금까지 바쳐 온 묵주기도의
형식이며, 이는 시편의 총수에 상응하는 150이라는 숫자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묵주기도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본질을 증진하도록 그리스도의 세례와
수난 사이의 공생활의 신비들을 보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기며, 이를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에 맡깁니다. 이 신비들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시이신 그리스도의 중요한 측면들을 관상합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로 선언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을 알리시고 당신의 활동을 통하여 이를 증언하시며
그에 따르는 요구를 선포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요한 9,5)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공생활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신비는 바로 빛의 신비입니다.
    따라서 묵주기도가 더욱 완전한 ‘복음의 요약’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강생과 드러나지
않은 생활(환희의 신비)을 묵상한 다음, 그리스도의 수난의 고통과(고통의 신비) 부활의 승리(영광의 신비)를 묵상하기
전에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 특별히 중요한 몇몇 순간들(빛의 신비)을 묵상하여야 합니다. 묵주기도의 전통적인 형태의
본질적 측면을 훼손하지 않고 이러한 새로운 신비를 추가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환희와 빛과 고통과 영광의
심연인 그리스도의 깊은 마음에 이르는 참된 길인 묵주기도에 새로운 열성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입니다.

    환희의 신비

    20. ‘환희의 신비’인 첫 꿰미는 참으로 강생 사건에서 빛나는
기쁨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는 주님의 탄생 예고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여기서 가브리엘 천사가 나자렛의 동정녀께
드리는 인사인 “마리아님, 기뻐하소서.”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라는 권고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구원 역사 전체,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 역사 전체가 이 소식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면(에페 1,10 참조), 온 세상은 어떤 면에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사랑으로 성모님을 바라보시고 그분을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신 성모님의 순종 안에 온 인류가 담겨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과 만나시는 장면도 환희입니다. 성모님의 목소리와 그분의 태중에
계시던 그리스도의 존재는 요한을 “기뻐 뛰놀게”(루가 1,44 참조) 하였습니다. 하느님이신 구세주 아기의 탄생을
천사들이 노래하며 목자들에게 “큰 기쁨”(루가 2,10)이 될 소식을 알리는 베들레헴의 광경도 환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지막 두 신비는, 이러한 환희의 분위기를 간직하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비극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바치심은 아드님을 봉헌하는 기쁨과 나이 든 시므온의 환희를 표현하는 한편,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시고 성모님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는
예언을(루가 2,34-35 참조) 담고 있습니다. 열두 살의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성전에서 찾은 사건도 기쁨과
비극이 뒤섞여 있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께서는 학자들의 말을 듣기도 하시고 질문도 하시면서 실질적으로는 이미 ‘가르치시는’
분으로서 당신의 신적 지혜를 드러내십니다. 성부의 일에 완전히 봉헌되신 성자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계시는 가장
가까운 인간 관계도 하느님 나라의 절대적인 요구와 부딪히게 되는 복음의 근본적인 특성을 선포합니다. 성모님과 요셉은
두렵고 걱정이 되어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루가 2,50).
    ‘환희’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지닌 궁극적인 이유와 그
심오한 의미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는 강생의 신비가 지닌 구체적인 사실성을 바라보며, 구원을 위한 고통의
신비를 어렴풋이 내다보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비결을 깨닫도록 이끄시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 무엇보다도 “기쁜 소식(evangelion)”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이시며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가르침이 바로 그 기쁜 소식의 핵심입니다.

    빛의 신비

    21. 우리의 관상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나자렛 생활에서 공생활로
옮겨가면서, 특별히 ‘빛의 신비’라고 부를 수 있는 신비들로 우리를 이끕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는 빛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요한 8,12)이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공생활 동안에 특별히 드러납니다. 저는 이 기간의 그리스도 생애에서 다섯 가지 중요한 순간들,
곧 “빛의 신비”를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제시하고자 하며,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믿습니다.
1.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 2.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당신을 드러내심, 3. 회개의 촉구와
결부된 하느님 나라의 선포, 4. 예수님의 변모, 그리고 마지막으로 5. 파스카 신비의 성사적 표명인 성체성사의
제정입니다.
    이 신비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느님 나라의 계시입니다. 요르단 강에서
받으신 세례는 무엇보다도 빛의 신비입니다. 여기에서, 죄를 모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죄 있는” 분이 되신(2고린
5,21 참조) 그리스도께서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실 때, 하늘이 열리고 그분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선언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한편(마태 3,17과 다른 복음서들의 병행 구절),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려오시어
그분께 영원한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가나에서 행하신 첫 기적이 빛의 신비입니다(요한 2,1-12 참조). 첫 신자인
성모님의 전구로, 그리스도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고 제자들의 마음을 신앙으로 열어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선포 자체가 빛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알리시고 회개를 촉구하시며(마르 1,15)
겸손한 믿음으로 당신께 다가오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마르 2,3-13; 루가 7,47-48 참조).
이렇게 시작하신 자비 활동을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당신 교회에 맡기신 고해성사를 통하여(요한 20,22-23 참조)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하여 수행하십니다. 가장 뛰어난 빛의 신비는, 전통적으로 다볼 산에서 있었다고 여겨지는 저
변모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고, 하느님께서는 놀란 제자들에게 “그의 말을 들어라.”(루가
9,35와 다른 복음서들의 병행 구절) 하시며 성령으로 변모된 삶과 부활의 기쁨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의 고통을 겪을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마지막 빛의 신비는 성체성사의 제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음식으로 내어 주시며, 인류 구원을 위하여 이제 곧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실 “극진한”(요한 13,1) 인간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이러한 신비들에서, 가나의 기적을 제외하면, 성모님의 모습은 그늘에 가려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에 성모님께서 이따금 함께하셨음을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마르 3,31-5;
요한 2,12 참조), 성체성사가 제정될 때에 다락방에 함께 계셨다는 암시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나에서 성모님께서
해내신 역할은 어느 모로 그리스도의 여정 내내 함께 하였습니다.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직접 선포하시고 세례자 요한이 되풀이하였던 그 계시가 가나에서 성모님의 입으로 드러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신 이 계시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 당부하시는 어머니의 위대한 권고가
되었습니다. 이 권고는 공생활 동안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적들을 이끌어 내며, 마치 성모님을 바탕에 그린 것처럼
‘빛의 신비’ 전체의 밑그림을 이룹니다.

    고통의 신비

    22.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고통의 신비에 큰 중요성을 둡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심은, 특히 사순 시기의 십자가의 길 기도는 수난의 각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어 왔는데, 이는 수난이
사랑의 계시의 절정이며 우리 구원의 원천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묵주기도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몇몇 순간들을
선택하여, 신자들에게 이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다시 체험하도록 초대합니다. 묵상의 순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 앞에서 깊은 번민의 순간을 겪으시는 게쎄마니에서 시작됩니다. 연약한 육신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온갖 유혹에 직면하시지만 인간의 모든 죄에 맞서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와 다른 복음서들의 병행 구절). 이러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에덴 동산에서 우리의 첫 조상들이 보여 주었던 ‘거역’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에 충실함으로써
치르는 대가는 뒤이은 신비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매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며,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주님께서는 극도의 고통 속으로 내던져지십니다. “보라, 이 사람을!”
    이러한 비참한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만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의미도 드러납니다.
“보라, 이 사람을!” 인간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필립 2,8)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의미와 기원과 완성을 찾아야 합니다. 고통의 신비는 신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다시 생생하게 체험하고, 십자가 아래 성모님 곁에 서서, 성모님과 함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알고, 생명을 주는 그 모든 힘을 깨닫도록 이끌어 줍니다.

    영광의 신비

    23. “교회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의 모습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신 분이십니다!”29)
묵주기도는 언제나 신앙의 이러한 인식을 표명해 왔으며, 신자들에게 수난의 어둠을 넘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이유를 다시 찾고(1고린 15,14
참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었던 사람들, 곧 사도들, 막달라 여자 마리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기쁨만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되신 당신 아드님의 새 생명을 그분만큼이나 강렬하게 체험하셨을 성모님의 기쁨도 다시 체험합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중에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도 그와 똑같은 영광을 받으셨을 것이며,
유일한 특권으로, 죽은 이들의 부활 때에 모든 의인을 위하여 마련된 운명을 앞서 누리셨을 것입니다. 영광의 신비
마지막 단에서 보듯이, 마침내 천사들과 성인들의 모후로서 빛나는 영광의 관을 쓰신 성모님께서는 교회가 종말에 누리게
될 지위를 미리 보여 주시고 성취하십니다.
    묵주기도는, 아드님과 어머니의 영광이 나란히 펼쳐지는 한가운데에, 세 번째 영광의
신비인 성령 강림을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이 신비는 교회의 모습을 성모님과 함께 모여 있는 가족, 성령을 가득히
받아 활기가 넘치고 복음화 자세를 갖춘 가족으로 제시합니다. 이 신비의 관상은 반드시, 다른 영광의 신비들에 대한
관상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교회 한가운데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 성령 강림 사건이 그 생명의 위대한
“표상”이 되는 그러한 삶을 언제나 더욱 생생하게 의식하도록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신비는 신자들이 역사
안에서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지향하는 궁극 목적에 대한 희망을 더욱 키워 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러한 희망은 신자들에게 그들의 모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쁜 소식”을 용감하게 증언하도록 재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비들’에서 ‘신비’로: 성모님의 길

    24. 거룩한 묵주기도에서 하는 이러한 묵상의 순환이 모든 주제를
다 다루지는 않지만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일깨워, 사람들의 영혼이 그리스도를 앎에 맛들이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 맛은 복음이라는 순수한 원천에서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은, 복음사가들이
말하듯이, 온갖 지식을 초월한 신비로(에페 3,19 참조) 빛납니다. 그것은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서, 그분
안에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골로 2,9).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크게 강조하며 이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님 생애의 모든 것은 그분 신비의 표징이다.”30)
제삼천년기의 교회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는” 일은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인 그리스도를 완전한 이해력을 가지고 깨달을”(골로 2,2-3 참조)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바오로의 편지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러한 진심어린 기도를 합니다.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3,17-19).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되는 방법이나 그 “비결”을 가르쳐 주는 묵주기도는 이러한
목적에 이바지합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성모님의 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가지고 말없이 주의
깊게 귀 기울이신 나자렛의 동정녀께서 보여 주신 모범적인 방법입니다. 성모 신심은 또한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깨닫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어느 모로 성모님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그 신비가 성모님과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을 때에도 그러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성모송에
담긴 가브리엘 천사와 엘리사벳 성녀의 말씀을 우리 것으로 삼아, 우리는 성모님 안에서, 성모님의 품과 마음 안에서
“태중의 복되신 아드님”을(루가 1,42 참조) 찾도록 재촉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 인간의 신비

    25. 제가 1978년에 묵주기도를 가장 좋아하는 기도라고 증언하면서
밝혔던 생각으로 되돌아가고자 합니다. 저는 그 때, “단순한 묵주기도는 인생의 맥박을 드러낸다.”31)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By |2003년 4월 1일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