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비가 올 것 같다. 베드로는 돌아온 아이네아스(그리이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 피난갈 때에 아버지를 업고 갔다고 해서 야베를 업고 가는 베드로를 아이네아스에 비교한 것이다.)같이 보인다. 아버지를 업고 가는 대신에 베드로의 겉옷으로 푹 둘러싼 어린 야베를 어깨에 올려놓고 있다. 야베의 작은 머리가 베드로의 반백의 머리 위에 나타난다. 베드로의 목에는 어린 아이의 팔이 감겨 있는데, 베드로는 습지를 철벅거리고 걸어가면서 웃고 있다.
“이런 꼴은 면할 수도 있었는데.” 하고 가리옷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와 땅에서 옷에 튀는 물로 인하여 신경질이 나서 투덜거린다.
“그야! 우리가 면할 수 있는 것이 많기도 하지요!” 하고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아름다운 유다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대답한다. 그 외눈이 두 눈 만큼이나 잘 보는 것 같다.
“그건 무슨 뜻이오?”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서 자연의 힘더러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비 몇 방울이나 물 몇 방울 튀는 것보다는 훨씬 더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건 맞는 말이오. 하지만 나는 옷을 제대로 입고 깨끗한 차림으로 시내에 들어가기를 좋아해요. 나는 친구들이 많은데, 그것도 높은 자리에 있는 친구들이란 말이오.”
“그러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날 놀리는 거요?’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는 옛날 선생이고 … 또 옛날 학생입니다. 나는 살기 시작한 때부터 배웁니다. 우선 근근히 생활하는 법을 배웠지요. 그리고는 인상을 관찰했고, 인생의 쓴 맛을 맛보았고, 쓸 데 없는 정의를 행했어요. 쓸 데 없는 정의란 하느님과 사회에 대항해서 ‘혼자’있는 사람의 정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가책으로 벌하시고, 사회는 사슬로 벌했습니다. 따라서 정의에 얻어맞은 것은 결국 나였지요. 마침내 이제는 ‘사는 것’을 배웠고,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이고 학생인 만큼 학과를 복습하는 것이 …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하지만 나는 사도요 ….”
“그리고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구요. 나도 그것은 압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감히 교훈을 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아시겠어요? 사람이 어떻게 될 수 있을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키프로스에서 성실하고 존경받는 교육자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살인자가 되고 도형수가 되었어요. 그러나 내가 복수를 하려고 칼을 쳐들었을 때, 그리고 쇠사슬을 끌고 다니며 세상을 미워할 때에 누가 와서 내가 성인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 그 말을 내게 한 사람의 이성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 보시다시피! 그러니 사도인 당신에게도 내가 좋은 충고를 줄 수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내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거지요. 성덕이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도 안합니다.”
“그 로마인이 당신을 디오게네스라고 부른 것은 제대로 부른 거요.”
“물론이지요.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인간을 찾았는데, 인간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보다 더 행복해서 여자가 있다고 믿은 곳에서 뱀을 얻어 만났고, 친구로 생각하던 사람에게서 간부를 찾아냈어요. 그러나 이 지식으로 인해서 미쳐 가지고 그렇게도 여러 해 동안 헤맨 끝에 나는 사람을, 성인을 찾아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지혜가 아닌 다른 지혜는 알지 못하오.”
“그렇다면 당신은 벌써 구원받을 만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식도 가지고 있어요. 아니 그보다도 하느님의 지혜를 가지고 있어요.”
“그건 같은 거지요.”
“천만에요! 그것은 해가 쨍쨍 나는 날과 비교한 안개낀 날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당신이 내게 교훈을 하겠다는 거요? 나는 그건 싫소.”
“내 말을 막지 마세요! 처음에 나는 아이들에게 말을 했지요. 아이들은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림자보고 말을 했지요. 그랬더니 그림자들이 나를 저주했어요. 그 다음에는 닭들에게 말을 했더니, 이놈들은 아이들과 그림자보다 나았어요. 이제는 아직 하느님과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 자신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것을 못하게 막으려고 합니까? 나는 눈이 하나밖에 없고, 내 인생은 아양으로 인해서 부수어졌고, 여러 해 전부터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내 생각만이라도 보람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허락해 주시오.”
“예수는 하느님이시오.”
“나도 압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당신보다 더 믿어요. 나는 선생님의 덕택으로 다시 살아났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선이시기는 해도 언제나 선생님, 즉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선생님께 감히 무람없이 굴지 못합니다. 내 영혼은 선생님께 말합니다. … 그러나 입술은 감히 말을 못해요. 영혼, 나는 선생님께서 내 영혼이 감사와 뉘우치는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에 있는 것을 느끼신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아, 사실이다. 나는 네 영혼을 느낀다.” 예수께서 이야기하는 데 끼여드신다. 유다는 창피해서 얼굴을 붉히고 엔도르의 사람은 기뻐서 얼굴이 빨개진다. “내가 네 영혼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네 영이 하는 일도 느낀다. 말 잘했다. 네가 내게 교육을 받으면 선생과 정신을 차리는 학생이었던 것이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말해라, 너 자신하고라도 말해라.”
“선생님, 얼마 오래 되지 않은 어느 날 자기의 나와 말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제게 말씀하셨는데요.” 하고 무례하게 말한다.
“사실이다. 그런 말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네 자신의 자아로 비방을 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비방을 하지 않는다. 묵상을 하는데 훌륭한 목적을 가지고 묵상한다. 그러니까 나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제가 틀린 것이로군요!” 유다는 공격적이다.
“아니다. 네 마음 속에 비가 와서 그렇다. 그러나 날이 항상 맑을 수는 없다. 농부들은 비를 바란다. 그러니까 비가 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사랑이다. 비도 사랑이다. 그러나 보아라, 아름다운 무지개가 아타로에서 라마 쪽으로 구부러져서 꽂혀 있다. 우리는 벌써 아타로를 지나왔다. 을씨년스러운 골짜기를 지나온 것이다. 여기는 모든 것이 잘 가꾸어졌고 구름을 흩어버리는 햇빛을 받아 아름답다. 라마에 가면 예루살렘까지는 36스타드가 남는다. 기베온 사람들이 소름끼치는 방탕을 일삼은 곳을 나타내는 그 야산을 지나면 우리는 예루살렘을 다시 보게 된다. 유다야, 육욕의 해는 무서운 것이다 ….”
유다는 대답하지 않고 화가 나서 물구덩이 속을 철벅거리며 멀어져 간다.
“아니 저 사람이 오늘 왜 저럽니까?” 하고 바르톨로메오가 묻는다.
“요나의 시몬이 듣지 못하게 입다물어라. 토론을 피하자. 그래서 … 시몬의 즐거움을 잡치지 말자. 저 사람은 아이하고 정말 행복하니까!”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그렇지만 그건 좋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 말을 하겠습니다.”
“그 사람은 젊다. 나타나엘아. 너도 젊은 때가 있었다 ….”
“예 … 그렇지만 … 선생님께 불경하게 굴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다.
베드로가 달려온다. “무슨 일이야? 누가 불경하게 굴어? 새 제자가?” 그러면서 엔도르의 요한을 바라다본다. 엔도르의 요한은 예수께서 사도를 나무라신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슬그머니 자리를 떠서 알패오의 야고보와 열성당원 시몬과 말을 하고 있다.
“천만에, 그 사람은 소녀처럼 공손해.”
“아! 그래! 그렇잖으면 … 엉! 그의 눈이 위험할 거야. 그럼 … 그럼 유다로구먼! …”
“시몬아 이거 봐라. 너는 네 아이나 보살피지 못하겠니? 너는 아이를 나한테서 빼앗아 가고, 그러면서 또 나타나엘과 내가 다정스럽게 이야기하는 데 끼여 들려고 한다. 너는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으냐?”
예수께서 하도 태연하게 미소짓고 계시기 때문에 베드로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바르톨로메오를 바라다본다. … 그러나 바르톨로메오는 매부리코가 있는 얼굴을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 베드로는 그의 의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예루살렘 도성이 나타나자 그에게 다른 모든 것을 잠시 잊게 한다. 이제는 도성이 바로 이웃에 있어, 그 모든 아름다운 언덕들과 올리브밭들과 집들, 그리고 특히 성전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이것을 보는 것이 항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감격과 자존심의 근원임에 틀림없다. 유다의 4월의 매우 뜨거운 해가 총독 도로의 돌들을 이내 닦아놓았다. 이제는 물구덩이를 보려면 찾아야 할 판이다. 사도들은 길가에서 의복을 가다듬고, 치켜올렸던 옷들을 내린다. 그들은 진흙투성이의 발을 맑은 개우물에 씻고 머리를 가다듬고 겉옷을 입는다. 예수께서도 그렇게 하신다. 나는 모든 사람이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본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중요한 일인 것이 틀림없다. 이 명절 때에 예루살렘의 성곽 앞에 나타나는 것은 군주 앞에 나타나는 것과도 같았다. 성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진짜’ 여왕이었다. 나는 총독 도로에서 군중들이 가지는 태도를 눈여겨볼 수 있는 올해에 이것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여러 가족들의 행렬이 정돈되어 여자들은 모두 함께 모이고, 남자들은 다른 집단을 이루며, 어린이들은 이 집단이나 저 집단으로 간다. 그러나 모두가 진지하면서도 동시에 차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낡은 겉옷을 개키고 배낭에서 새 겉옷을 꺼내기도 하고, 또는 샌들을 바꿔 신기도 한다. 그리고 걸음걸이도 벌써 장엄하고 엄숙해진다. 각 집단에는 리드하는 독창자가 있다. 그래서 찬가를, 다윗의 옛날 영광스러운 찬가들을 부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마치 하느님의 집을 보는 것으로 마음이 부드러워진 것같이 서로 더 다정스러운 눈으로 본다. 사람들은 당당한 성전 경배 한 가운데에 있는 진짜 지보(至寶)인 금으로 된 둥근 지붕이 얹혀진 거대한 입방체인 거룩한 집을 쳐다본다.
여기서는 사도들의 무리가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 맨 앞에는 예수와 베드로가 있고 그 가운데에 어린 아이가 있다. 그 뒤에 시몬과 가리옷 사람과 요한, 그 뒤에 안드레아가 있는데, 그는 엔도르의 요한을 자기와 제베대오의 야고보 사이에 들어오게 한다. 넷째 줄에는 주님의 사촌들이 마태오와 같이 있고, 끝에는 토마가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와 같이 온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테너의 떨리는 소리를 잘 드러나게 하는 힘차고 매우 아름다운 우아한 바리톤 목소리로 찬가를 시작하시고, 거기에 진짜 테너인 가리옷의 유다, 맑고 아직 앳된 목소리를 가진 요한, 예수의 사촌들의 두 바리톤 목소리, 그리고 어떻게나 낮은 바리톤인지 바리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토마의 목소리가 응답을 한다. 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다른 사람들은 집단의 명수(名手)들의 합창을 소리를 죽여 따라한다(시편 찬가들은 응송이라고 불리는 잘 알려진 시편 노래들이다.). 남자들의 굵은 목소리들 가운데 천사의 목소리 같은 어린 야베는 노래를 매우 잘한다. 아마시편 121편(공동번역 122편)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야훼의 집에 가자.’ 하기에 나는 몹시도 기뻤네.” 정말이지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침울하던 작은 얼굴이 기쁨으로 아주 환해졌다.
이제는 성곽이 아주 가까워졌다. 여기는 물고기 성문이다. 여기는 군중이 붐비는 거리이다.
첫 번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곧 성전으로 간다. 그리고는 평온, 게쎄마니의 평온, 저녁식사, 그리고 휴식이다.
예루살렘으로 오는 여행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