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베드로의 집 부엌이다. 생선과 고기, 치즈, 말랐거나 시든 과일, 꿀을 바른 푸아스(고급 밀가루로 만든 비스킷의 일종) 남은 것들이 담긴 접시들이 우리 토스카나 지방의 반죽통 같은 일종의 찬장에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식사가 푸짐했던 모양이다. 포도주 항아리들과 잔들이 아직 식탁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다.
베드로의 아내는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기적적인 일을 하였고 하루 종일 일하였다. 이제는 피곤은 하지만 만족하여 한 구석에 있으면서 남편이 하는 말과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다. 그 여자는 남편을 바라본다. 남편이 좀 까다롭기는 해도 그에게는 위대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전에는 배니 그물이니 물고기니 돈이니 하는 말만 하던 남편이 새로운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에는 마치 너무 강한 빛으로 눈이 부신 듯이 눈을 깜박인다. 베드로는 예수께 식사를 대접한 것이 기뻐서 그런지 나온 음식이 푸짐했기 때문에 기뻐서 그런지 오늘 저녁은 정말 영감이 떠올라서, 그에게서는 군중들에게 설교할 미래의 베드로의 모습이 나타난다.
동료가 어떤 비판을 하였기에 잘 짜여진 베드로의 이런 대답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당한 것과 같은 일을 당할 거야. 그들의 교만으로 그들의 이론이 무너져서 거기에 깔리고 말 거야.”
안드레아가 형에게 반론을 제기한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자비로우셔.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뉘우칠 시간의 여유를 주시려고 무너지는 것을 막으실 거야.”
“그런 생각 말아라. 그들은 그들의 교만을 완성하기 위해서 중상과 박해를 쓸 거다. 오! 나는 그걸 벌써 예감한다. 우리를 가증스러운 증인들처럼 흩어버리려고 우리를 박해할 것을. 그리고 그들이 진리를 음흉하게 공격하겠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벌을 주셔서 그들은 멸망할 거다.”
“우리가 저항할 힘이 있을까?” 하고 토마가 묻는다.
“바로 그거야. … 나는 그럴 힘이 없을 걸세. 그렇지만 나는 선생님을 믿어.” 이렇게 말하면서 베드로는 선생님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표정이 풍부한 얼굴을 가리시려는 것처럼 머리를 조금 기울이시고 서서 들으시며 잠자코 계시다.
“나는 하느님께서 우리 힘에 겨운 시련은 주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해.” 하고 마태오가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시련에 따라서 우리 힘을 더 세게 해주실 거야.” 하고 알패오의 야고보가 결론을 내린다.
“하느님께서는 벌써 그렇게 해주셔. 나는 부자고 권력이 있었어. 만일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을 위해 나를 보존하고자 하지 않으셨더라면, 나는 박해를 당하고 문둥병자가 되었을 때 실망해서 죽었을 거야. 나 자신에 대한 심한 증오를 품었을 거야. … 그런데 그러지를 않고 내 전적인 몰락 위에 전에는 도무지 가져본 적이 없는 새 보물이 내려왔어. ‘하느님이 계시다.’는 확신이라는 보물이었지. 전에는 … 하느님이 … 그래, 나는 믿는 사람이었고, 충실한 이스라엘 사람이었지. 하지만 그건 형식주의적인 믿음이었어. 그래서 하느님의 상이 항상 내 덕행에 미치지 못하는 것같이 생각되었었어. 내가 이 세상에서 아직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감히 하느님과 논쟁을 했었어. 시몬 베드로의 말이 옳아. 나도 내 에 대한 자기 칭찬과 만족으로 바벨탑을 쌓고 있었어. 모든 것이 내 위로 무너져 내리고, 저 모든 쓸 데 없는 인간적인 것의 무게에 짓눌린 벌레같이 되었을 때에야 나는 하느님과 논쟁을 하지 않고, 나 자신과, 분별없는 나 자신과 논쟁하게 되었고, 마침내 나 자신을 부수고 말았어. 그리고 지상에 사는 우리 존재 위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이라고 생각되는 그 길을 걸으면서 그렇게 하면 할수록 새로운 힘과 새로운 재물에 도달하게 되었네. 내가 혼자가 아니라, 인간과 악에게 쓰러진 사람을 하느님이 지켜 주신다는 확신 말일세.”
“자네 생각에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나? 자네가 ‘지상에 사는 우리 존재 위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이라 말한 그 분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인가?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고, 그것은 이단인 것같이 생각되네. 하느님은 우리가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아는 분이야. 다른 하느님은 안 계셔.” 하고 가리옷의 유다가 좀 엄하게 말한다.
“요한이 여기 있었으면, 나보다 더 낫게 말할 걸세. 그러나 나는 내가 아는 대로 말하는 걸세. 하느님은 우리가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아는 분이지, 그건 사실이야. 그러나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가? 어떻게?”
알패오의 유다가 펄쩍 뛴다. “우리는 별로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알지도 못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라고 우리에게 묘사한 예언자들은 그래도 그 분을 알고 있었지. 그렇지만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분파들이 거듭거듭 포개놓은 설명의 혼잡한 무더기를 통해서 약하게 세어나오는 희미한 개념을 가지고 있네 ….”
“분파라니? 아니 자넨 어떻게 말하는 거야? 우리는 분파는 없어. 우리는 율법의 아들들이야. 모두.” 가리옷 사람은 분개하여 공격적으로 말한다.
법률들의 아들이지. 율법의 아들이 아니야. 율법과 법률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이렇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의 아들들이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의 아들들은 아니란 말일세.” 하고 타대오가 대꾸한다.
“법률들은 율법에서 나왔어.” 하고 가리옷 사람이 말한다.
“병들은 우리 몸에서 생겨나네. 그렇지만 자네는 병들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 타대오가 대꾸한다.
“그렇지만 열성당원 시몬이 말하는 내재하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내게 알게 해주게.” 알패오의 유다의 지적에 대꾸할 수가 없는 가리옷 사람은 문제를 출발점으로 도로 가지고 가려고 해본다.
열성당원 시몬이 말한다. “우리 감각능력에는 어떤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어떤 용어가 필요하네. 우리 각자는, 내가 말하는 것은 믿는 우리 말일세, 우리 각자는 신앙의 힘으로 지극히 높으신 주님이시고 조물주이신 하늘에 계신 영원하신 하느님을 믿네. 그러나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이 꾸밈없고 더럽혀지지 않고 형체가 없어서 천사들에게나 알맞고 충분한 이 믿음 이상의 것이 필요하네. 천사들은 하느님과 더불어 신령한 성질을 나누어 가지고 있고 하느님을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하느님을 영적으로 보고 사랑하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만들어 가질 필요가 있어. 이 모습은 우리가 하느님의 절대적인 완전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하느님께 드리는 본질적인 특성들로 되어 있네. 영혼이 집중되면 집중될수록 하느님을 아는 데에서 정확성을 더 가지게 되네. ‘내제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말로 뜻하는 것이 이걸세. 나는 철학자가 아니야. 내 용어가 어쩌면 잘못 적용되었는지도 모르겠네. 그러나 요컨대 내게 있어서 내재하시는 하느님은 하느님에 대한 느낌, 우리 정신으로 하느님을 지각하는 것이고, 그 분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느끼고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새로운 평화를 주시는 실제적이 현존(現存)으로 느끼고 지각하는 것일세.”
“좋아, 자네는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느낌을 가지나? 믿음으로 느끼는 것과 내재(內在)로 느끼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나?” 하고 가리옷 사람이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묻는다.
“하느님은 안전이시네, 이 젊은이야.” 하고 베드로가 말한다. “내가 글자대로는 못 알아듣지만 그 정신은 이해하는 그 용어를 써 가면서 – 그리고 우리의 불행은 하느님의 말씀의 글자뜻을 알아들으면서 그 정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걸 잘 생각해 보게. – 시몬이 말하는 것같이 자네가 하느님께 대한 느낌을 가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무시무시한 위엄에 대한 개념을 가지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히 다정스러우신 아버지다운 감정에 대한 개념도 가지게 된다는 말일세. 그것은 온 세상이 자네를 옳지 않게 판단하고 단죄하더라도 자네는 자네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오직 한 분뿐이신 영원하신 그 분은 자네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네 죄를 사해 주시고 자네를 위로해 주신다는 느낌을 가진다는 말일세. 그것은 모든 세상 사람이 자네를 미워하더라도 자네는 온 세상보다도 더 큰 사랑이 자네 위에 있음을 깨닫는다는 느낌을 가진다는 뜻일세. 그것은 자네가 옥에 갇혀 있거나 사막에 외따로 격리되어 있어도 어떤 분이 자네에게 ‘네 아버지와 같이 되도록 거룩하여라.’ 하고 말한다는 것을 자네가 항상 느낀다는 말일세. 그것은 우리가 마침내 있는 그대로 지각하기에 이르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참된 사랑으로 인간적으로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고 노력하고 취하거나 버리거나 하면서 사랑으로 사랑에 보답하고, 자기의 행동으로 할 수 있는 대로 하느님을 모방한다는 말일세.”
“자넨 참 교만하구먼! 하느님을 모방하다니! 이것은 자네에게 허락되지 않아!” 하고 가리옷 사람이 판단을 내린다.
“이것은 교만이 아니야. 사랑은 우리를 순종으로 이끌어 가네. 하느님을 모방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하나의 순종의 형태 같아.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과 비슷하게 우리를 만드셨다고 말씀하시니까 말이야.” 하고 베드로가 대꾸한다.
“하느님이 우리를 만드셨어. 그렇지만 우리는 더 높이 올라가서는 안 돼.”
“아니, 이 사람아, 만일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네는 불행한 사람일세! 자네는 우리가 타락했다는 것과 하느님은 우리를 우리의 이런 지위로 도로 데려가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잊고 있구먼.”
예수께서 말씀을 하신다. “베드로와 유다와 너희 모두들, 그보다도 훨씬 더하다. 아담의 완전은 그를 그의 창조주와 점점 더 비슷한 모습이 되게 하였을 사랑의 덕택으로 더 커질 수 있었다. 죄의 흠이 없었더라면 아담은 하느님의 가장 깨끗한 거울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완전하여라.’ 하고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같이, 그러니까 하느님과 같이 말이다. 베드로도 썩 잘 말했고 시몬도 그렇다. 그들의 말을 기억하고 그것을 너희 영혼에 적용하기를 부탁한다.”
베드로의 아내는 남편이 이렇게 칭찬 듣는 것을 듣고 기뻐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하였다. 그 여자는 지극히 행복하여 조용히 그의 베일 뒤에서 울고 있다. 베드로는 어떻게나 얼굴이 새빨개졌던지 뇌졸중(腦卒中)을 일으킨 것 같다. 그는 한 동안 잠자코 있다가 말한다. “자 그럼, 상급을 주십시오. 오늘 아침의 비유 …”
다른 사도들도 베드로와 합류하여 말한다.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비유는 비교를 이해하게 하는 데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그 비유들이 비교 이상의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 그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그들에게는 내가 설명하는 것 이상의 것을 알아듣는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들에게 훨씬 더 많이 주어진 것은 내 사도들인 너희는 신비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는 은혜가 주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물어보라.’ 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너희는 모든 것을 바쳤다. 그래서 이번에는 너희들도 모든 것을 줄 수 있게 하려고 너희에게 모든 것이 주어진 것이다. 너희들은 애정, 시간, 이해관계, 자유, 목숨 따위 모두를 하느님께 바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그 갚음으로, 그리고 너희들이 너희들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줄 수 있게 하시려고 너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그래서 가진 사람은 더 풍성하게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분만 주었거나 도무지 주지 않았거나 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찬성하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비추어 주는 것만을 발견하게 하려는 것이고, 그들이 귀 기울여 들으면서 역시 찬성하겠다는 의지로 듣고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런 것을 본다! 즉 많은 사람이 내 말을 듣지만 하느님 편이 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들의 정신에는 착한 뜻이 없다. 그들에게는 이사야의 예언이 맞아들어간다. ‘너희들이 귀를 기울이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고, 눈을 뜨고 바라보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이 백성의 마음이 무관심하고 귀가 먹었고 눈이 감겨 있어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듣지도 못하고, 내가 그들을 고쳐 주도록 회개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너희들의 보는 눈과 너희들의 듣는 귀와 너희들의 착한 뜻 때문에 지극히 행복하다! 너희들에게 분명히 말한다마는 많은 예언자와 많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기를 갈망했지만 보지 못했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기를 갈망했지만 듣지 못했다. 그들은 말씀의 신비를 이해하려고 갈망하며 애태웠지만, 예언의 빛이 꺼지고 난 후에는 말들이 죽은 숯불과 같은 상태로 있었다. 그 말을 한 성인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다만 하느님만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의 빛이 신비를 비추는 그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 물러가면, 이해할 수 없게 하는 무능이 마치 미이라를 감은 붕대와 같이 받은 말씀의 훌륭한 진리를 꽉 둘러싼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아침 네게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내가 네게 준 것을 모두 도로 찾아낼 날이 올 것이다.’ 하고. 지금은 네가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다음에는 네 위에 빛이 올 것인데, 잠깐 동안만 머물려고 오지 않고, 영원한 영과 네 영을 깨질 수 없는 결합으로 맺으려고 올 것이니 이 결합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네 가르침은 그르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네게 대해서 그렇게 될 것과 같이, 네 후계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하느님을 유일한 빵으로 삼아 살아가면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는 비유의 정신을 들어라.
우리에게는 네 가지 밭이 있다. 기름진 밭, 가시나무가 어지럽게 자라는 밭, 돌이 많은 밭, 그리고 길이 여러 갈래로 나 있는 밭이 있고 또 우리에게는 또 네 가지 종류의 정신이 있다.
그들의 노력과 사도의 훌륭한 일도 준비가 된 성실한 사람들, 착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사도라고 하는 것은 ‘참다운’ 사도를 말하는 것이다. 개중에는 사도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이고, 정신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도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 사도들은 형성 중에 있는 정신에 대해서 새와 가시나무와 조약돌 자체들보다도 더 큰 손해를 입힌다. 그들의 비타협성, 그들의 서두름, 그들의 비난, 그들의 위협으로 하도 길을 헛갈리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히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부적당한 친절로 끊임없이 물을 주어 너무 무른 땅에서 씨를 썩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씩씩하지 못한 탓으로 그들이 돌보는 영혼들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진짜 사도들, 즉 하느님의 참다운 거울인 사도들만 검토하기로 하자. 그들은 그들의 주님과 같이 온정이 넘치고, 자비롭고 참을성 있으면서 동시에 강하다. 그래서 이들 사도와 그들 자신의 의지로 준비된 사람들은 돌과 가시나무가 없고 개밀과 가라지가 없는 기름진 밭과 비교할 수가 있다. 그들 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다른 어떤 말씀도 잘 자란다. 씨 하나에서 곡식포기 하나가 나오고 거기에서 이삭들이 나와 여기서는 100 퍼센트, 저기에서는 60 퍼센트, 또 저기에서는 30 퍼센트를 낸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느냐? 물로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성인이 될 것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모든 계급에 속한 사람과 모든 나라 사람이 다 있다. 그 중에는 이방인들도 있을 것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착한 뜻으로, 다만 그들의 착한 뜻으로 또는 그 착한 뜻과 그들을 내게 준비시켜 주는 어떤 사도나 어떤 제자의 착한 뜻으로 100 퍼센트를 낼 것이다.
가시덤불이 덮인 밭들은 태만으로 인해서 좋은 씨를 덮쳐 눌러 죽이는 개인적인 이해관계라는 가시덤불이 얼기설기 파고들게 내버려둔 밭들이다. 자기를 항상 항상 항상 살펴야 한다. ‘오! 이제는 내가 형성되고 씨가 뿌려졌으니 영원한 생명의 씨를 낼 것이라고 안심할 수 있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선과 악 사이의 싸움은 계속적이다. 너희들은 어떤 집안에 자리잡은 개미떼를 본 일이 있느냐? 그놈들이 화덕에 올라온다. 그러니까 주부는 거기에 음식을 남겨두지 않고 식탁에 올려놓는다. 개미들은 공기 냄새를 맡고 식탁을 공격한다. 여인은 음식을 찬장에 넣는다. 그러니까 개미들은 열쇠구멍으로 해서 들어간다. 여인은 음식을 천장에 달아맨다. 그러니까 개미들은 벽과 작은 들보를 거쳐 먼 길을 걸어 가서 끈을 타고 내려와 먹어치운다.여인은 개미들을 태우고 독을 쳐서 죽인다. 그리고는 그놈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하고 안심한다. 오! 그러나 감시하지 않으면 정말 깜짝 놀라게 된다! 방금 태어난 개미들이 나온다. 그래서 모든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은 늘 이렇다. 스스로 경계해서 나쁜 풀은 나오기가 무섭게 뽑아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시나무로 천장을 만들다시피해서 씨를 말려 죽인다. 현세적인 걱정과 재산의 기만 따위는 가시나무를 얼기설기 뒤얽히게 해서 하느님이 씨 뿌리신 싹을 덮어서 이삭을 만들지 못하게 막는다.
이제는 돌이 쫙 깔린 밭들을 보아라. 이스라엘에는 이런 밭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들은 내 사촌 유다가 아주 적절히 말한 것과 같이 ‘법률의 자식’들에 속하는 밭들이다. 거기에는 증언의 유일한 돌이 없고 율법의 돌이 없다. 있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적인 법률들의 돌무더기 뿐이다. 돌이 하도 많이 쌓여서 그 무게로 율법의 돌을 덮은 딱지를 만들었다. 이것은 씨가 도무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막는 돌무더기이다. 뿌리가 영양을 받지 못한다. 흙이 없으니 양액(養液)이 없다. 물은 밭고랑에 돌이 쫙 깔린 위에 괴어 있기 때문에 썩게 한다. 해는 밭고랑을 뜨겁게 해서 작은 풀들을 시들게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단순한 가르침을 복잡한 인간적인 가르침으로 바꾸어 놓은 사람들의 정신이다. 그들은 내 말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여도 기꺼이 받아 들인다. 그 즉석에서는 내 말이 그들을 흔들고 그들의 마음을 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 밭에서, 즉 영혼과 정신에서 그럴 듯한 말들을 늘어놓는 사람들의 모든 돌들을 치우기까지 땅을 파기 위하여 영웅적인 정신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씨가 뿌리를 내리고 든든한 포기가 생겨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보복을 무서워하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그렇지만 이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세도가들이 내게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하기만 하면 끝장이다. 불쌍한 씨는 영양분이 없어 시들 것이나 돌무더기 전체가 참 계명에 대체된 백 가지 천 가지 계명의 헛된 소리로 요란하게 흔들리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사람은 그가 받은 씨와 더불어 죽고 만다. … 이스라엘은 이런 사람 투성이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어떻게 인간의 권력의 길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지 이것으로 설명된다.
끝으로 길이 여러 갈래가 나고 먼지가 쌓인 벌거숭이 밭들이 있다. 이것은 세속적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과 이기주의자들의 밭이다. 그들의 안락이 그들의 법률이고, 향락이 그들의 목적이다. 피로하지 않고, 활동을 안하고, 웃고, 먹고 하는 것 … 세속의 정신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왕이다. 세속적 쾌락에 대한 취미의 먼지가 땅을 덮어서 땅이 불모가 된다. 주의산만(注意散慢)을 상징하는 새들이 생활을 더 쉽게 하려고 터놓은 수많은 길을 덮친다. 세속 즉 마귀의 정신이 모든 관능성과 모든 경솔함을 받아들이는 이 땅에 떨어진 씨란 씨는 모두 먹고 못 쓰게 만든다.
알아들었느냐? 또 질문할 다른 것이 있느냐? 없어? 그러면 내일 가파르나움으로 떠나기 위해 쉬러 갈 수 있겠다. 나는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또 한 군데 가야 할 데가 있다.”
“또 아리마태아로 지나갑니까?” 하고 가리옷 사람이 묻는다.
“그것은 확실치 않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런 시간에 누굴까?” 하고 베드로가 말하면서 문을 열러 가려고 일어난다.
그것은 엉망이 되어 가지고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나타나는 요한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완연하다.
“자네가 여길?” 하고 모두가 외친다.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나 거야?”
일어나신 예수께서는 다만 “어머니는 어디 계시냐?” 하고만 물으신다.
요한은 도움을 받기 위한 것처럼 팔을 내밀고 나아와 선생님 발 앞에 가서 무릎을 꿇으며 말한다. “어머님은 안녕하십니다. 그러나 저와 마찬가지로, 또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눈물에 젖어계십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우리 쪽에서 요르단강을 따라 오시지 말라고 부탁하십니다. 어머님은 이 때문에 저를 이리로 도로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 그것은 선생님의 육촌 요한이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 그러면서 요한은 운다. 그리고 거기 있는 사람들이 커다란 근심에 사로잡힌다.
예수께서는 얼굴이 매우 창백해지신다. 그러나 혼란에 빠지지는 않으신다. 다만 이렇게만 말씀하신다.
“일어나서 이야기하여라.”
“저는 어머님을 모시고 여자들과 같이 남쪽을 향해 갔습니다. 이사악과 티몬도 저희와 함께있었습니다. 여자 세 사람, 남자 세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님을 요한에게 모시고 가라고 하신 선생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아! 선생님은 그것이 마지막 하직 인사라는 것을 알고 계셨지요? … 그것이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되리라는 것을. 지난 며칠 동안의 뇌우 때문에 저희들은 몇 시간 동안을 지체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어머님을 다시는 못 뵙게 되는 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 저희가 도착한 것은 정오였었는데, 요한은 첫닭이 우는 꼭두새벽에 잡혀 갔었습니다 ….”
“아니, 어디로? 아니, 어떻게? 누가? 그의 동굴에서?” 모든 사람이 묻는다. 모두가 알고 싶어한다.
“요한은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를 배신하는 데 선생님의 이름을 썼습니다!”
“정말 추악한 짓이로구먼! 하지만 그게 누구였대?” 하고 모두가 부르짖는다.
그러니까 요한은 몸을 떨면서 공기조차도 들어서는 안 될 이 소름끼치는 말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제자 중 한 사람 …”
마음의 동요가 극도에 달한다. 어떤 사람들은 저주하고, 어떤 사람들은 울고, 또 어떤 사람들은 멍하니 조상(彫像)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다.
요한은 예수의 목에 매달리며 외친다. “선생님 때문에 무섭습니다! 선생님 때문에! 선생님 때문에! 성인들에게는 돈 때문에, 돈과 실력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보상의 유혹 때문에, … 사탄에 대한 굴복으로 팔리는 배신자들이 있습니다. 천 가지 만 가지 때문에! 오!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정말 비통합니다! 제 최초의 선생님! 저를 선생님께 주신 내 요한!”
“침착하여라! 지금 당장은 내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후에는요? 그렇지는 그 후에는요? 저는 저 자신을 보고 … 이 사람들을 봅니다. … 저는 모두가 겁이 납니다. 저 자신두요. 저희들 가운데 선생님의 배반자가 있을 것입니다 ….”
“아니 자네 미쳤나? 그러면 우리가 그자를 갈기갈기 찢어놓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나?” 하고 베드로가 외친다.
그리고 가리옷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정말 미쳤구먼! 나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내가 배신할 정도로 약해진 것을 깨달으면 스스로 목숨을 꾾을 거야. 그게 하느님을 죽이는 자가 되는 것보다 나아.”
예수께서는 요한의 포옹에서 빠져나오셔서 가리옷 사람을 마구 흔들면서 말씀하신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지 말아라! 네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으면 아무것도 너를 약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일이 있게 되면 울어야 하고 하느님을 죽이는 죄에 보태지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과의 살아 있는 유대를 끊는 사람이 약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식탁에 얹고 울고 있는 요한에게로 몸을 돌리시고 말씀하신다. “차근차근 말하여라. 나도 괴롭다. 그는 내 친척이었고 내 선구자였다.”
“저는 요한의 제자들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비탄에 잠기고 배신자에 대해 격노한 제자들 중의 일부분이오. 다른 제자들은 요한이 죽을 때 곁에 있으려고 옥으로 요한을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지 … 지난번에 도망할 수 있었어.” 하고 요한을 많이 사랑하는 열성당원이 그를 위로해 보려고 말한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죽을 거야.” 하고 요한이 대답한다.
“그렇다, 죽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아는 것과 같이 그도 알고 있다. 아무것도 이번에는 그를 구해내지 못할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가 헤로데의 손에서 살아 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은 안다.”
“예, 헤로데의 손에서요. 들으십시오. 요한은 우리도 갈릴래아에 돌아올 때에 지나온 에발산과 그리짐산 사이의 협곡쪽으로 갔답니다. ‘메시아가 원수들에게 습격을 받아 돌아가시게 됐습니다. 그 분이 선생님께 어떤 비밀을 말하기 위해 선생님을 보겠다고 하신답니다.’ 하고 배신자가 말했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래서 배신자와 다른 제자 몇 사람과 같이 떠났답니다. 골짜기 어두운 곳에 헤로데의 군사가 있다가 요한을 붙잡았답니다. 다른 제자들은 도망쳐서 헨논 근처에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했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있는 곳에 갔을 때는 방금 그들이 도착한 길이었답니다. 그리고 소름끼치는 일은 배반자가 우리 지방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 음모를 주도한 사람들이 가파르나움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요한을 찾아가서 선생님이 그들 집에 손님으로 가셨었고, 거기서 유다로 떠나셨다고 말했답니다. … 선생님이 아닌 다른 사람 때문이라면 요한이 피신처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
요한의 이야기에 죽음과 같은 침묵이 뒤따른다. 예수께서는 그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신 것 같다. 매우 검푸른 눈에는 눈물이 글썽한 것 같다. 예수께서는 머리를 기울이시고 아직 한 손을 요한의 어깨에 얹으신 채 거기 서 계신데, 손이 약간 떨려서 흔들린다. 아무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한다. 예수께서 침묵을 깨뜨리신다. “우리는 다른 길로 해서 유다로 간다. 그러나 내일 나는 할 수 있는 데로 일찍 가파르나움에 가야 한다. 너희들은 쉬어라. 나는 올리브밭에 올라가겠다. 나는 혼자 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다른 말씀은 더하지 않고 나가신다.
“분명히 울려고 가시는 거다.” 하고 알패오의 야고보가 중얼거린다.
“형, 우리도 따라가.” 하고 유다 타대오가 말한다.
“아니야. 우시게 내버려두게. 다만 살그머니 나가서 엿듣세. 나는 사방에 함정이 있지 않을까 걱정일세.” 하고 열성당원이 대답한다.
“그래, 가세. 우리 어부들은 호숫가로 가세. 그러면 누가 호수에서 오면 우리가 보게 될 거야. 자네들은 올리브나무들 사이에 가 있게. 선생님은 틀림없이 호두나무 가까이 늘 계시는 곳에 계실 거야. 새벽에 할 수 있는 대로 일찍 떠나도록 배를 준비하세. 저 교활한 자들! 어! 내가 뭐랬어! 이봐 젊은이? 그런데 … 어머님은 아주 안전하신가?”
“아! 그럼! 요한의 제자인 목자들까지도 어머니와 같이 갔어. 안드레아 … 우리는 이제 우리의 요한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어!”
“입 닥쳐! 입 닥치라구! 나는 이게 꼭 뻐꾸기 울음소리 같애. … 한 놈이 먼저 울면 다른 놈이 또 … 또 …”
“제발! 입들 닥쳐! 자네들이 또 선생님에 대한 불행 이야기를 하면, 우선 자네들 허리에 내 노의 맛을 보여줄 거야!” 하고 베드로가 몹시 화가 나서 소리친다. “자네들은” 하고 베드로는 이어 올리브나무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몽둥이들을 들고 있게. 굵은 나뭇가지들을 말이야. 장작 광에 있으니까 자네들의 무기를 들고서 흩어져 있게. 예수님을 해치려고 예수님 가까이에 오는 자는 누구든지 죽여버리는 거야.”
“제자들! 제자들! 새 제자들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해!” 하고 필립보가 외친다.
새 제자는 모욕을 당한다고 느끼고 말한다. “저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선생님께서 저를 택하시고 원하셨는데요.”
“당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의 사람들, 또 그들을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거요. 파멸은 거기서 올 거요, 틀림없소.”
그들은 나와서 흩어져 어떤 사람들은 배 안으로 들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야산의 올리브나무 가운데로 간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