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는 어느 정도 자주 할 것인가?
  할 수 있으면 자주 할수록 좋다. 성인들이 우리에게 모범을 주셨으니, 그들은 어떻게 보면 너무 정도를 지나치지 않았나 할 만큼 자주 고해했다. 예를 들면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자신의 일과표에, “하루 걸러 고해할 것. 적어도 이틀 걸러 할 것”이라고 썼다. 성 빈첸시오 드 폴은 일주일에 두 번 고해했다. 성 필립보 네리는 하루 걸러 고해했고, 자기 회원들에게도 이와 같이 하라고 권하였다. 성 빈첸시오 페레르, 성 가롤로 보로메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 루이스 벨드란드, 성 안드레아 아베리노, 그 밖의 많은 성인들은 매일 고해했다.
  혹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너무 정도에 넘치는 일이라고 할는지 모르며, 어떤 사람은 재미로, 또는 소심해서 자주 고해하는 것이 아닌가 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저 성인들은 모두 분발심이 풍부한 이들로서 소심한 분들이 아니요, 양심의 순백함을 높이 보존하기 위해, 또는 이 고해성사가 베푸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이처럼 자주 고해한 것이다.
  보르도 마우리시오의 성 레오날드는 날마다 고해하는 좋은 습관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일과표에 “가장 완전한 순백함을 갖고 제대에 오르기 위해, 또한 무슨 선물보다 많은 성총을 증가시킬 수 있는 고해를 날마다 두 번씩 할 것이다”라고 썼다.

  식욕은 먹음으로써 생기는 것과 같이 고해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이 영적 주림과 목마름을 느끼는 사람은 다행이도다! 반대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즉 고해하기를 게을리하는 사람은 굶어 죽기 쉽다.
  앞에서 이야기한 성인들은 자신만을 위해 이 신성한 약을 자주 복용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도 자주 권했으며, 어떤 희생이 필요할지라도 관대한 마음으로 약사(藥師) 역할을 했다. 성 필립보 네리는 강론할 때 항상 말하기를 “만일 나의 한쪽 손과 발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려 할 때, 고해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즉시 이 세상에 돌아와서 고해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성 암브로시오는 자기 신자들에게 말하기를, “만일 고해하고 싶을 때는 내가 잠자리에 들었을지라도 문을 두드려 깨우라”고 하셨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어떤 불쌍한 노인의 고해를 받기 위해 예정했던 여행을 중단한 일이 있었다. 복자 세바스티아노 발프레, 복자 요셉 가파소, 성 돈 보스코 등 많은 성인 사제들이 병원에서나 감옥에서 밤을 새워가며 고해를 받은 일이 있다.
  이러한 성인들이 한 일을 보면 고해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잘 증명하고도 남는다. 저분들은 고해성사로써 마을과 나라와 온누리를 부패한 악습에서 바로잡을 수 있었다. 열심한 사제인가 아닌가는 고해성사에 대한 태도와 사고방식에 의해 알 수 있다.

  “나는 고해를 할수록 나빠지고 결점이 점점 더 많아진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그 결점은 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고해성사는 그대를 비춰주어 습관을 통회하게 하고, 그것을 빼어버리도록 싸우게 하고, 그것을 고치도록 하기 위해 모든 결점을 똑똑히 가르쳐줄 것이다.
  저 유순하신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이 말씀하시기를, “죄를 용서받는 것은 우리 양심의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또하나의 태양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할 수 있는 대로 자주 고해성사를 받아야 할 것인데 그 정도를 알려면 이러한 표준을 좇음이 좋을 듯하다.
  신자다운 최소한의 삶을 위해서는 대죄를 범한 때만 고해해도 좋다. 왜냐하면 대죄가 있으면 영혼이 죽고 마는 것이니까. 그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고해해야 한다.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고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 한도를 말하는 것이므로 할 수 있으면 더 자주 하는 것이 좋다. 확실한 신자생활을 하여 완덕으로 나아가고 성인의 길을 걷고 싶어한다면 이 고해성사를 게을리해서는 희망이 없다.
  참으로 열심한 영혼, 하느님과 일치하고 싶어하는 영혼에 대해서는 매주 한 번씩은 고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고해성사가 치료약이 될 뿐 아니라 강장제인 까닭이다. 강장제는 효력이 끊이지 않기 위해 시간을 정해놓고 먹어야 한다.
  하느님과 일치한 생활을 하는 것을 신학자들은 신비생활(神秘生活)이라고 한다. 아르스의 본당 신부이던 성 비안네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즉, “신비생활이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속에 잠기는 사랑의 목욕이다. 영혼은 이 보혈 속에 잠겨 아주 빠지고 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영혼에게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입 맞추고 어루만지는 것과 같이 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이야말로 행복한 영혼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혼일수록 매주 한 번씩 고해할 필요가 있다. 결코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신비생활의 양식이 곧 고해성사이기 때문이다.

  혹시 어떤 사람은 매주 한 번뿐 아니라 성인들과 같이 훨씬 더 자주 고해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할는지 모르겠다. 물론 사제라면 성인들의 권면과 모범을 따르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사제는 매일 미사를 집전하고 예수님의 성체 성혈을 분배하는 자이므로 그 보혈의 무궁한 선물을 잘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신자는 대죄가 없는 한 매주 한 번씩 고해하는 것이 제일 좋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 매주 한 번 이상 고해를 하다가 완덕의 길로, 성인의 길로 매진하기보다는 도리어 세심(細心)에 빠져 이기적인 영혼으로 미끄러지기 쉬운 경향을 특히 여성들과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주의할 것이다. 이는 오랜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사실이다.
  그래서 매주 한 번 고해하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적 고해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우리들 중에는 영적 고해법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이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신령성체가 있음과 같이 영적 고백이 있다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고해성사 받기를 원하는 완전한 통회가 대죄를 용서받는 힘을 가졌거늘 하물며 소죄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완전한 통회로써 매주 한 번뿐 아니라 매일이라도 영적 고해를 하면 할 때마다 영적인 유익함을 얻을 것이다.

  고해는 어느 때, 하기 괴로운 일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해의 결과는 항상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천진난만과 정결과 본분을 충실히 다하는 모든 덕행을 얻게 되고, 진실로 신자다운 생활 속에서 마음의 참된 평화와 참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은 실로 잦은 고해의 결과다. 고해 사제의 구원의 손을 통해 우리 위에 항상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이 주어지며, 교육면에 있어서도 고해가 힘찬 방법이 되노니, 만일 고해하기를 게을리 하면 나쁜 결과가 많이 생길 것이다. 성 필립보 네리와 성 돈 보스코는 “대죄가 있을 때는 그대로 자지 말라”고 우리들에게 권했다.

  영국의 어떤 대신이 성 돈 보스코의 교육 방법을 듣기 위해 토리노에 있는 살레시오의 학교를 방문했다. 성인은 친절하게 그를 맞아 친히 학교로 안내했다. 대신은 어느 방이든지 완전히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감탄할 뿐이었다. 그런데 15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오직 두 사람의 신학생의 감독 아래 매우 정숙하고 착실하게 공부하는 것을 보고 더욱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성인을 보고,
  “신부님, 이것은 참으로 상쾌한 광경이올시다. 이와 같이 완전한 규율과 침착을 지키게 하는 비법이 무엇인지 좀 알려주십시오. 소원입니다. 좀 가르쳐주십시오. 영국에 돌아가서 소개하겠습니다.”
  “각하, 죄송합니다만 저의 비법은 당신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것은 가톨릭만이 가진 비결입니다. 각하는 개신교 신자가 아닙니까? 저의 비법이란 것은 매주에 한 번씩 학생들에게 고해를 하게 한 것뿐입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저희에겐 그런 방법이 없습니다. 이 방법 말고 달리 보충할 방법은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이 비법 외에는 매를 때리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신부님! 당신의 의견은 종교냐, 매냐 그 말씀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종교냐, 매냐, 그것입니다.”
  “네, 잘 알았습니다. 종교냐? 매냐? 런던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알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대신은 떠났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변호사이며, 시인이었던 안젤로 보르페리오가, 늙었지만 충실했던 하녀가 죽었기 때문에 고향에서 다른 하녀 한 명을 데려왔다. 2,3일이 지나서 그 하녀가 울면서 주인에게 말하기를 “주인님,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여기에 있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왜 그러는가?”
  “주인님은 성당에 잘 안가시는 분이니까 제게도 주일 미사에 참석할 시간이나 고해할 시간을 주시지 않을 것같이 생각됩니다.”
  “아니, 누가 너에게 그런 소리를 하더냐?”
  “모두들 그렇게 말합니다. 이웃 사람들이나 집에 오는 손님들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것은 네가 잘못 알았다. 너는 매일 아침 미사에 가도 좋고, 매주 고해하러 가도 좋다. 나는 고해성사를 잘 안받는 사람은 나쁜 짓을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신앙에 별로 열성이 없는 사람도 고해성사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믿고, 자기 아랫사람에게 권하기까지 한다. 정작 그들 자신은 고해를 잘 하지 않는 까닭은 고해에게 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요, 또한 자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고해는 요술 방망이요, 신기한 효력을 가진 묘방인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고해를 하면 지금까지 즐겨 빠져온 악욕을 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을 생각하고 고해의 묘한 효과를 찬미하면서도 자신은 실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마치 병원에서 퇴원하기가 싫어서 속히 병이 낫기를 원치 않는 사람과 같다. 그런데 병원에서 퇴원하기 싫어서 병 낫기를 원치 않는 문제야 그다지 중대하지 않지만, 고해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고약한 죽음과 영원한 멸망의 위험성이 내포된 중대한 문제가 붙어 있으니 어찌 한단 말인가!
  많은 사람이 신자다운 생활을 시작하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시작하기만 하면 다음에도 늘 계속해야 할 테니 그것을 괴롭게 여겨 처음부터 아예 시작도 않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불쌍한 사람들은 이 세상을 저희들의 낙원으로 알고 살다가 몇 해 후에 빈손으로 하느님 앞에 나가게 된다. 이런 영혼은 빈손일 뿐 아니라 많은 죄와 양심의 가책이라는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라는 선고를 받게 될 때 비로소 후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