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를 자주 하기 싫어하는 사람, 또는 조금도 고해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여러 가지 핑계와 구실을 들고 나선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내게는 고해할 죄가 없다고 한다. 도대체 이 말이 정말일까? 성령님은 “성인도 하루에 일곱 번 죄에 빠진다”고 기록하게 하셨다. 그리고 복음사가 요한도 말씀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죄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라고 했다. 자기에게 고해할 만한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을 못 보는 불쌍한 맹인이다. 이는 참으로 드문 일이겠지만 고백하기 싫어서 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정결한 사람은 조그마한 더러움도 참지 못하지만 정결하지 못한 사람은 커다란 얼룩이 있어서 진흙 투성이가 되어도 무관심하는 일이 많다.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고해할 의무가 있습니까? 저는 그래서 고해를 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범위로는 안 짓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아직 깨달음이 열리지 않은 아이들과 불행하게도 깨달음을 잃어버린 미치광이입니다.”

  나는 고해하러 갈 기분이 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마음이 괴롭고 불안한가? 걱정이 있어 그런가? 덮어놓고 가보는 것이 좋다. 사제는 그대의 기분을 잘 이해할 것이요, 사랑으로 그대를 도와줄 것이다. 사람이 성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성사가 사람을 위해 정해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할 만한 일을 하는 데 만족하게 여기신다. 선의를 가지고 고해 사제와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만 있으면 넉넉하다. 다른 것은 고해 사제가 도와줄 것이다.

  내게는 고해할 틈이 없고, 또 고해하기에는 여러 가지 불편이 있다.
  이런 말은 너무나 건방진 핑계일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안되는 것은 자기가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이익, 건강,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과 얼마만한 시간을 소비하는가? 영혼을 생각하는 것을, 썩어진 육신을 위하는 것만큼은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영혼을 위해 쓴 시간은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께서 꼭 갚아주실 것이다.
  게다가 고해 성사는 공짜이다.
  
  고해성사를 봐도 내게는 별로 신통한 것이 없고, 아무런 진보가 없다.
  그런 판단을 할 권리는 그대에게 없다. 게다가 그대의 추리와 사고방식은 틀렸다. 진보가 없다는 것은 자주 고해를 하지 않았거나, 혹시 어쩌다가 드물게 한 번 하거나 말거나 한 탓이겠지, 고해를 하지 않고 지나면 모르는 사이에 악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법이다.
  어차피 다시 넘어질 것이라고 여기면서 한번 넘어진 뒤 다시는 일어서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면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높이 올려 주실 것이다.

  하느님과 직접 통한다는 것이 내 신조이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 (전도서5,1)
  하느님이 그대에게 교회를 찾아가라고 말씀하신다면 굳이 하느님과 직접 상대하겠다고 우기지 말라. 그대의 죄는 교회에도 누를 끼친 것이다.

  나를 잘 아는 신부에게 고해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 꼭 아는 신부에게 가서 고해할 필요는 없다. 고해는 자유다. 그대를 모르는 신부들이 얼마든지 있다. 어느 신부를 찾아가든지 무서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솔직히 고백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다음 고해하기 위해 또 원래 고해 사제에게 가서 어떻게 말할까?
  그냥 고해할 뿐이다. 다른 신부에게 한 번 고해해서 사함을 받은 것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그대가 신뢰할 수 있는 고해 사제를 정해두고 항상 그 신부에게 고해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늘 고해받는 신부는 우리의 사정과 영혼상 여러 가지 경우를 잘 이해하여 적절한 지도와 편달을 해주시므로 우리 영혼은 차츰 완덕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정해둔 신부도 없고, 다른 신부에게도 가기 싫은 경우에는?
  만일 그대가 치명적 상처를 받았을 때나, 모르고 독약을 먹어 생명이 위험하였을 때 그대는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가장 가까운 의사를 찾아갈 것이 아닌가, 어디에 가고 없는 아는 의사를 기다릴 것인가? 영혼의 치명적 상처요,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독약인 죄를 즉시 빼어 버리려면 그대가 가고 싶지 않은 사제에게라도 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 고해 사제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사제는 그대를 천사가 아닌 인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대의 용기와 겸손과 정직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더 갖게 될 것이다. 신부가 무엇을 생각하든지, 그대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그만이 아닌가?

  고해를 해서 무엇하나? 고해를 할 필요가 무엇인가?
  하느님의 명령이니까, 그대에게 절대로 필요하니까, 고해만으로 죄가 사해지고, 고해만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으니까. 죄가 남아 있으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으니까.
  이 말을 비웃어도 좋고, 부정해도 좋다. 그러나 아무리 비웃고 부정한다 해도 ‘하느님’, ‘영원’, ‘영혼’, ‘지옥’, ‘하느님의 정의’, ‘심판’의 진리를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고해성사를 신용할 수 없다.
  한 번 고해성사를 잘 보면 단번에 신용할 것이다. 처음에는 신용하지 않다가 마침내 고해를 신용하게 된 사람 중에는 그대보다 유명한 사람, 위대한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나는 고해하는 방법을 모른다.
  바른 고해를 하고 싶다는 뜻만 있다면 이보다 더 쉬운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의사에게 당신 몸의 병을 이야기하듯 당신 영혼의 아픔을 고해 사제에게 말하면 넉넉하다. 어쨌든 고해소로 가보라.

  고해를 하면 사람들이 나를 위선자나 대죄인이라 부르지 않겠는가?
  그대는 허수아비인가? 용기는 어디에 두었는가? 세상 사람들이 자주 고해하면 남을 속이거나 업신여기거나, 도둑질, 살인, 사음 같은 죄악이 적어지고, 감옥이나 유치장이 줄어들 것이다. 누구든지 고해를 하면 정결과, 선행과, 근신이 더해져서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편안하게 살 수 있다. 세상의 문화와 문명은 건전하게 발전할 것이다.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고해할 용기가 없는 사람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고해하면 된다.

  나는 아무래도 죄를 떠날 수 없다.
  지옥의 영원한 고통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고 싶단 말인가? 한 때의 쾌락 때문에 하느님께 모욕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끝없이 괴롭게 하여 우시게 할 작정인가?

  나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
  죄를 지을 기회를 만들어주는 사람은 그대에게 큰 원수이며 저주받아 마땅할 존재인데, 관계를 끊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죽을 때에도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지 못할 것인가? 함께 무덤까지 들어갈 생각인가? 심판석에도, 지옥에도 데려갈 셈인가? 그 사람이 그대에게 불명예와 수치, 멸망의 원인이 될 줄을 모르는가?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말보다 끊기 싫다는 말이 적합하지 않은가?

  고해는 신부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그대는 그런걸 만들어낼 신부가 없다는 것을 잘 알리라. 되는 대로 한 말이겠지. 고해를 믿지 않으려고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해 본 것이 아닌가.

  이 많은 고해에 대한 핑계와 구실은 이성(理性)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마음과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악한 습관을 쫓아내고, 악한 욕심을 누르려면 지금까지 고해를 신용하지 않은 그대도 다른 신자들과 같이 고해 사제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고해를 해보자. 진정으로 그대에게 바라노니 고해를 바르게, 또한 자주 하여 착한 신자가 되라. 고해는 생명이요,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