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고싸의 어느 길, 이름하여 칼레 델 밀라그로라는 길에 ‘필라의 사랑의 성모’ 대성당이 있는데 그곳에 성모 마리아님의 기적에 관한, 아주 특별히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콘 형식으로 표현되었고 또 교회에 의해 아주 세밀하게 여러 각도로 조사된 문건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절단된 다리에 관한 기적이야기로, 하느님께 마리아님의 전구로 천사의 손에 의해 수 년 후 절단된 다리가 새로이 생겨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확실한 증거도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기적은 우리 신앙에 한층 더 도움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미구엘 유안 펠리어라는 사람은 성모님의 기적에 의해 새로운 신체를 받아 새 삶을 사는 선택된 행운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업니다.
때는 1636년, 열 일곱 미구엘 유안 펠리어는 부모와 고향을 떠나 카스텔론 텔 라 플란타(발렌치아)로 떠났는데 그곳에 사는 야이메 포라세오 아저씨에게로 가서 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1637년 중반쯤 그는 짐을 가득 실은 마차에 오른쪽 다리가 깔리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 즉시 그를 카스텔론 텔 라 플란타의 병원으로 옮겼지만, 다리의 통증이 극심하기도 했고, 상태가 악화되었기 때문에 사라고싸의 병원으로 옮겨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좋아지지 않아 1637년 10월 말쯤 결국은 다리를 절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담당 의사인 의학교수 디에고 밀라루엘로는 더 이상 어떤 좋은 방법이 없기에 절단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다리를 절단하는 일은 그 교수의 수석 조수인 유안 노렌조 카레이아 의사가 맡게 되었고 절단 된 다리는 여러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병원의 뜰에 묻혀졌습니다. 불쌍하게도 몇 달 후에 미구엘 유안은 목발을 짚고 병원을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여야만 하는 그는 살아가기 위한 어떤 다른 방법이 없어 사라고싸에 그대로 머물기로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날마다 ‘필라의 사랑의 성모님’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성모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불 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가기 위한 구걸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금방 ‘필라의 사랑의 성모님의 절름발이 거지’라 불리워졌습니다. 아침마다 기적의 성모님 곁에서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그곳에서 타고있는 영원한 등불(성체등)에서 기름을 찍어 다리상처에 바르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불쌍하게 생각한 도밍고 마틴이라는 선량한 사람에 의해 밤에는 그 집에서 쉴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그 곳을 방문한 고향의 두 분 신부님과 고향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름발이 미구엘에게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당부하며 갈 수 있도록 당나귀까지 빌려주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향하여 가는 도중에도 자신의 고통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기도를 하면서 플르엔타스데 에보로, 크빈토를 지나 삼바 데 칼란도로 갔습니다. 때는 1640년이었습니다. 친지들은 그를 기쁘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들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불쌍한 절름발이는 날마다 구걸을 나갔다가 구걸한 양식을 들고 저녁때 들어왔습니다. 그가 구걸을 나가는 주된 목적은 언제나 ‘필라의 성모님’을 찾기 위한 것이어서 그 성모상을 찾기 위해 몇 시간씩이나 고향 근처 주위 성당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 해 3월 26일 그는 구걸을 하며 하루종일 헤맨 후 아주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10시쯤 녹초가 된 그는 목발을 곁에 두고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엉성한 침대에(병사를 위한 막사 침대)누웠습니다. 저녁기도를 바치고 마리아께 특별한 자신만의 기도를 올리고 난 후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완전히 지쳐 누워있는 불쌍한 아들 생각에 잠 못 이루다가 아들에게 덮어준 남편의 외투가 혹시 떨어져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덮어주기 위해 아들 침대로 갔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이 덮고 있는 남편 외투 아래서 두 개의 다리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무척이나 놀라고 겁에 질려 그녀는 남편을 불렀습니다. 어떤 군인 하나가 이불 속에 숨어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부인을 진정시키며 덮여져 있는 외투를 제쳤습니다.
그리고는 깊이 잠든 아들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잠들었던 미구엘이 잘려나간 다리가 온전한 상태로 다시 불어있다는 것을 인식하기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필요했을 정도였습니다.
부모님의 여러 가지 질문에 아들은 다만 저녁때 다리의 치료를 위해 성모님께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을 뿐이었다고, 그 다음에는 잠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밤중에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 환상중에 그는 사라고싸의 ‘필라의 사랑의 성모님’의 은총의 경당에 자기가 있었노라고, 그리고 영원한 등(성체 등)에 있는 기름을 절단된 다리에 발랐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기적적인 사실을 조사하고 기록한 페트루스 뉴라트는 추가해서 기록하기를 : “미구엘 아버지는 즉시 소리쳤습니다. 오 나의 아들 – 하느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려야겠구나- 성모님께서 너에게 다시 선물을 주셨구나…”)
이 엄청난 기적은 즉시 입과 입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을 보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아직 조금씩은 절룩거리는 미구엘 유안 펠리어는 순례 행진 형태로 하느님과 마리아님께 감사드리기 위해 성당으로 갔습니다.
새 다리에서는 예전에 입었던 상처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완전한 걸음걸이는 차츰차츰 돌아왔습니다. 조사위원들은 의사들과 함께 병원 뜰에 묻은 다리를 파보았는데 있어야 할 다리의 뼈가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파묻었던 바로 그 다리가 다시 미구엘에게 가 붙었던 것입니다. 절단된 다리가 3년 동안이나 땅 속에 묻혔었는데도 말입니다. 미구엘의 다리를 절단했던 의사와 그 자리에 있었던 간호사들은 미구엘에게 다시 생겨난 다리에서 절단하기 전에 다리에 있었던 흉터나 상처의 흔적들을 분명히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24명이나 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이 기적의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아파올라자 주교는 교회에서 조사를 1641년 4월까지 실시했으며 관계된 모든 의사들도 이에 관해 일치된 의견서를 제출했고 사라고사의 주교는 모든 것을 확인한 뒤 1641년 4윌 27일 기적의 진실됨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습니다. 레츠 추기경과 의사 로저는 이를 확인하였고 이에 관한 전반직인 원본 문서들은 사라고싸에 있으며 사본들은 고향인 칼란다의 교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적적인 사실들은 24개의 그림으로 표현되어, 즉 무덤에서 꺼낸 다리를 들고있는 천사의 모습이라든지 어떻게 다시 다리에 붙게 되었는지 등등으로, 또 다른 그림은 필립 4세 왕이 미구엘 유안 펠리어를 마드리드에 있는 왕궁에 초대해서 성 안에 있는 모는 귀족과 귀부인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치유된 다리를 조심스레 바라보는 것이며 절단되었던 그 자리에 입을 맞추는 그림들입니다.
이것은 세 가지 기적으로 분류되었습니다.
– 첫 번째는 절단된 다리가 썩지 않았다는 것.
– 두 번째는 그 다리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
– 세 번째는 다시 접착된 다리는 바로 본래의 다리였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님께서는 폭넓게 누구든 관계없이 모든 방면으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 남양성모성지의 ‘성모님의 동산'(154호); 성모 마리아의 발현 웹싸이트